<♣ 華嚴經 懸談 ♣>/大方廣佛華嚴經疏鈔懸談

大方廣佛華嚴經疏演義鈔 卷第七 / [5] <卷第七 終>

화엄행 2009. 9. 12. 21:22

大方廣佛華嚴經疏演義鈔  卷第七

淸凉山 大華嚴寺沙門 澄觀述

 


 

   (마) 會釋餘敎

 

    ㄱ) 別會 - ㉠ 會起信唯識文 


是知하라 或說報身 在色究竟 約攝報說이요

 이로써 알라. 혹 報身이 色究竟天에 있다고 설한 것은 報身을 섭수함을 잡아 설한 것이요,

 


是知等者 第五 會釋餘敎也 文中이니 別會 總非 揀濫이라 今初 略會五文이니 會起信唯識等文이라

 

 ‘是知’ 等이라는 것은 第五에 나머지 가르침을 會通하여 解釋함이다. 文 중에 셋이 있으니, 처음은 따로 會通함이고, 二는 총히 그르다 함이요, 三은 잘못된 것을 가림이다(揀濫). 이제 初는 간략히 다섯 가지 글을 모음이니, 一은 『起信論』과 『唯識論』등의 글을 會通함이다.

 

 

起信論호대 又是菩薩 功德成滿하야 於色究竟處 示一切世間最高大身하나니 謂以一念相應慧 無明頓盡 名一切種智 自然而有不思議業하야 能現十方하야 利益衆生이라 하니라 藏和尙疏 引地論釋云호대 地論호대 一者 現報利益이니 受佛位也 二者 後報利益이니 摩醯首羅智處生故니라 하고

 

 『起信論』에 이르길, “또 이 보살의 공덕이 成滿하야 색구경처에 일체세간의 최고대신을 시현하나니 말하자면 一念相應慧로 무명이 몰록 다함을 一切種智라 이름하니 자연히 부사의업이 있어서 능히 시방에 나타내어 중생을 이익하게 한다” 하니 法藏和尙의 疏에 地論을 인용하여 해석해 이르대 “고로 지론에 이르대 一은 現報利益이니 佛位를 받음이요 二는 後報利益이니 摩醯首羅智處에 生하는 연고라” 하니라.

 


自問云호대 何故 他受用報身 在此天耶 一義 云以寄報十王하야 顯別十地하나니 然第十地寄當此天王일새 卽於彼身 示成菩提 故在彼天이니 餘義 如別說이라 하고 天宮抄 釋餘義云云호대 卽四智圓滿이니 唯識 卽實報成佛이오 此示高大身 卽他受用이라 하니라

 

(法藏和尙이) 스스로 물어 이르기를 “무슨 까닭에 他受用報身이 이 하늘에 있는가? 一義는 果報를 十王에 의지함으로써 다로 十地를 나탐냄을 말한다. 그러나 第十地가 의지함은 天王에 합당하니, 곧 그 몸에 菩提를 이룸을 보인다. 그러므로 저 天에 있으니, 나머지 뜻은 따로 설함과 같다”고 하고, 天宮抄에는 나머지 뜻을 해석하여 云云하되 “二는 곧 四智가 원만함이니, 唯識에서는 즉 實報가 佛을 이루나 여기에서 高大身을 보임은 곧 他受用身이다.”라고 하였다.  

 


唯識에는 爲引二乘하야 令知菩提樹下 非是報身일새 且指彼爲實報也니라 疏今亦據二文之意 及十地經文하야 通之일새 故云호대 約攝報說이니라

 

    유식에서는 二乘을 인도하기 위하여 菩提樹 아래에 계신 분이 報身이 아님을 알게 함이니, 우선 그 분을 가리켜 實報가 된다고 하였다. 疏에서는 이제 또한 두 글의 뜻과 十地經文에 의거하여 통하게 하니, 그러므로 이르길 ‘報身을 섭수함을 잡아 설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 通涅槃央崛


或說報身 在餘淨土 約引攝說이요

  或은 報身이 나머지 淨土에 있다고 설함은 인도하여 攝受함을 잡아 설함이다.

 


或說報身等者 卽第二 通涅槃央崛等經也 涅槃二十四 高貴德王菩薩品 明十功德中 第四功德末 高貴德王 難云호대 若有菩薩 修大涅槃 悉作如是十事功德인댄 如來 何故 唯作九事하고 不修淨土잇고할새 佛答具修라 하시고 末云호대 善男子 西方으로 去此娑婆世界호대 度三十二恒河沙等諸佛國土하야 彼有世界하니 名曰無勝이라 彼土 何故 名曰無勝 其土所有嚴麗之事가  悉皆平等하야 無有差別 猶如西方極樂世界하며 亦如東方滿月世界일새니라 我於彼土 出現於世 爲化衆生故 於此界閻浮提中 現轉法輪이니라 非但我身 獨於此中 現轉法輪이라 一切諸佛 亦於此中 而轉法輪이니 以是義故 諸佛世尊 非不修行如是十事니라 善男子 慈氏菩薩 以誓願故 當來之世 令此世界 淸淨莊嚴이니 以是義故 一切諸佛 所有世界 無不嚴淨하니라

 

  ‘或說報身’ 等이라는 것은 곧 第二에 『涅槃經』과 『央崛經』등의 經을 통함이다. 『涅槃經』二十四에「 高貴德王菩薩品」에 열 가지 공덕을 밝힌 중에서 第四의 功德 끝에 고귀덕왕이 물어 말하기를, “만일 어떤 보살이 대열반을 닦음에 모두 이와 같은 十事功德을 짓는다면 여래는 무슨 까닭으로 오직 九事만을 짓고 淨土를 닦지 않으십니까?”라고 하니, 부처님이 답하시기를 “갖추어 닦느니라.”고 하시고, 끝에 이르시기를 “선남자야, 西方으로 이 사바세계를 가되 삼십이 항하사와 같은 여러 불국토를 건너서 거기에 세계가 있으니, 이름을 無勝이라 하나니라. 그 땅은 무슨 까닭으로 이름을 無勝이라 하는가?  그 땅에 있는 莊嚴하고 華麗한 일들은 모두 다 평등하여 차별이 없는 것이 마치 서방 극락세계와 같으며, 또한 동방만월세계와 같나니라. 내가 그 땅에서 세상에 출현하나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 이 세계인 염부제에서 法輪을 굴림을 나타내느니라. 단지 나의 몸만이 오직 이 가운데에서 법륜을 굴림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일체 제불께서도 또한 이 가운데에서 법륜을 굴리시나니, 이러한 뜻 때문에 諸佛世尊께서 이와 같은 열 가지 일을  수행하지 않음이 없나니라. 선남자야, 자씨보살이 서원한 까닭으로 오는 세상에 이 세계로 하여금 청정하고 장엄하게 하나니, 이러한 뜻 때문에 일체제불의 계시는 바 세계를  嚴淨하게 하시지 않음이 없느니라.”고 하였다.

 


釋曰호대 旣言爲化衆生하야 居此閻浮하니 無勝國土 是我嚴淨인댄 明指報身 在餘淨土로다

言央崛經者經文 稍廣하니 今略義引호리라 謂佛 答央崛云하사대 我住無生際 而汝不覺知等이니라 央崛 難云호대 若住無生際인댄 何以生於此土니잇고 佛答云하사대 東方 有佛하니 汝往問之하라 當爲汝說하리라 央崛 文殊 同往問佛한대 彼佛 答言하사대 彼釋迦者 卽是我身이라 하시니 大意明餘淨土中佛 是證無生際者 今生娑婆 是化現耳니라 故言在餘淨土 而疏言約引攝說者 不言嚴淨華藏 及周法界帝網之刹하며 不言此身 周滿法界하고 而言在於東方等이니 明是隨宜引攝娑婆雜惡衆生하야 令修淨土之行耳니라

 

 해석해 말하면 이미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이 염부제에 거주하나니, 無勝國土가 나의 嚴淨이니라’고 말하였다면 報身이 나머지 정토에 있음을 분명하게 가리킴이다.  

 『央崛經』이라 말한 것은 경의 글이 조금 넓으니, 이제 간략히 뜻으로 인용하리라. 부처님이 앙굴마라에게 답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無生際에 머물지만 네가 깨달아 알지 못하느니라…”고 하였다.

 앙굴마라가 묻기를 “만일 無生際에 머무신다면 어찌 이 땅에 나셨습니까?”라고 하니,  부처님께서 답하여 이르시길, “동방에 부처님이 계시니 네가 가서 묻거라. 마땅히 너를 위하여 말씀하시리라.”고 하셨다.

 앙굴마라가 문수와 함께 가서 부처님께 물으니, 그 부처님께서 답하여 말씀하시길, “저  석가는 곧 나의 몸이니라”고 하시었다.

 大意는 나머지 정토 중의 부처님은 無生際를 증득하신 분이며, 이제 사바에 태어나신  분은 化現일 뿐임을 밝힘이다. 그러므로 ‘나머지 淨土에 계신다’라고 말하였다.

 疏에 ‘이끌어 섭수함을 잡아 설한 것이다’라고 말한 것은 華藏世界를 嚴淨함과 법계에 두루한 帝網의 刹을 말하지 않으며, 이 몸이 법계에 두루 圓滿함을 말하지 않고 동방에 있다는 등으로 말하였나니, 편의에 따라 娑婆의 雜惡衆生을 이끌어 섭수하여 淨土의 行을 닦게 한 것임을 밝혔을 뿐이다.

 



    通梵網


或說舍那 坐千葉華 攝二地說이요

  或 “盧舍那佛께서 천 개의 연꽃잎에 앉아 계신다”고 설함은 二地를 섭수하여 설한 것이다.

 


或說舍那下 第三 通梵網等經이니 彼云호대 我今盧舍那 方坐蓮花臺하야 周帀千華上 復現千釋迦하니 一華 百億國이요 一國 一釋迦等者 卽以蓮華臺上으로 爲本源盧舍那 千葉釋迦 復是大化 一釋迦更有百億 方爲小化者인댄 亦不言其身 充滿一切世間이니라 普賢蓮華 有不可說葉하야 量周法界하고 十地菩薩之華 尙量等百萬三千大千世界어든 況如來耶 明知하라 亦是他受用身 攝二地耳로다

 

  ‘或說舍那’아래는 第三에 『梵網經』등의 경을 회통함이다. 저 經에 이르길, “내가 이제 노사나가 바야흐로 연화대에 앉아서 천 개의 꽃잎이 빙 둘러선 위에서 다시 천 분의 釋迦를 나투니, 한 꽃잎에 百億國이요 一國에 一釋迦이시다…”라고 한것은 곧 蓮華臺上으로 本源인 盧舍那가 되고, 千葉의 釋迦는 다시 大化身이다. 한 분의 석가가 다시 백억 분이나 계시기에 비로소 小化가 되는 것이라면, 또한 그 몸이 일체 세간에 충만함을 말한 것은 아니다. 보현의 연화도 이루 설명할 수 없는 꽃잎이 있어서 그 양이 법계에 두루하고, 십지보살의 꽃도 오히려 量이 백만삼천대천세계와 동등하거늘 하물며 여래이겠는가? 분명히 알라. 또한 他受用身이 二地를 섭수 했을 뿐이다.

 


以二地 戒度圓滿일새 故爲說戒니라 以初地 化百佛刹이라 則有百葉之華 二地 化千佛刹이라 華有千葉이요 若至三地인댄 應見萬葉이요 四地 億葉이요 五地 千億이요 六地 百千億이요 七地 百千億那由他 八地 百千萬三千大千世界微塵數 九地 百千萬億阿僧祗國土微塵數 十地 十不可說百千億那由他佛刹微塵數니라 據上十地인댄 百萬三千 尙猶略說이니 故知하라 非顯眞極之身이로다

 

  二地에 戒度(戒 婆羅蜜)가 원만하니, 그러므로 戒를 설하게 된다. 初地에선 백불찰을 로 敎化하니, 곧 百葉의 연꽃이 있고, 二地에선 천불찰로 敎化이하니, 그러므로 꽃에 千葉이 있다. 만약 三地에 이르면 응당 萬葉을 보고, 四地는 億葉이요, 五地는 千億이요, 六地는 백천억이요, 七地는 백천억나유타요, 八地는 백천만삼천대천세계미진수요, 九地는 백천만억아승지국토미진수요, 十地는 십불가설백천억나유타불찰미진수이다. 위의 十地에  의거한다면 백만삼천도 오히려 간략히 설한 것과 같나니, 그러므로 알라. 眞極의 몸을 나타냄이 아니로다.

 

 


   通他受用身

 

或說登地方見 約勝機說이요

  혹 地에 올라야 비로소 본다고 설한 것은 수승한 機를 잡아 설한 것이다.

 


或說登地下 第四 通他受用身이니 登地之機 爲勝機耳니라 別約二地 通約十地

  ‘或說登地’아래는 第四에 他受用身을 통하게 함이니, 地에 오른 機라야 수승한 機가 되는 것이다. 앞에서는 따로 二地를 잡았었고, 지금은 통틀어 十地를 잡음이라.

 



    ㉤ 通三身


或分三異 從體相用說이니

 혹 三으로 다르게 나눈 것은 體․相․用을 따라 설한 것이다. 

 


或分三異下 第五 通三身也 若直說者인댄 法身 約體 報身 約相이요 化身 約用이라이나 起信立義分호대 所言義者 則有三種하니 一者 體大 謂一切法 眞如平等하야 不增減故 二者 相大 謂如來藏 具足無量性功德故 三者 用大 能生一切世間出世間善因果故라 하니

藏和尙 釋相大하야 호대 二種藏中 唯取不空如來藏이며 用大者 謂隨染業幻自然大用이니 報化二身 麤細之用이라 令諸衆生으로 始成世善하고 終成出世善也라 하시니라

釋曰依此解者인댄 以不空之藏으로 修成方顯 爲眞報故 用大中報 他受用故 顯勝名報니라

 

  ‘或分三異’아래는 第五에 三身을 통하게 함이다. 만약 바로 설명한다면 法身은 體를 잡은 것이고, 報身은 相을 잡은 것이며, 化身은 用을 잡은 것이다. 그러나 『起信論』 「立義分」에 이르길, “이른바 義라는 것은 三種이 있으니, 一은 體大니 일체법이 眞如平等하여 증감이 없기 때문이고, 二는 相大니 말하자면 여래장이 무량한 功德性을 구족하였기 때문이다. 三은 用大니 능히 일체 세간과 출세간에 좋은 因果를 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藏和尙이 相大를 해석하여 이르길, “二種의 藏 가운데에 오직 不空如來藏만을 취한 것이며, 用大는 染業을 따라 幻인 自然大用을 말한 것이니, 報身과 化身인 二身의 거칠고 세밀한 作用이다.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처음엔 세상의 善을 이루게 하고, 마침내 出世間의 善을 이루게 함이다.”라고 하였다.

해석해 말한건대, 이러한 解釋에 의지하면 不空如來藏으로 닦아 이루어져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 眞報가 되기 때문이요, 用大 가운데의 報身은 타수용이기 때문이니, 수승함을 나타냄을 報身이라 이름 하였다.

 

 


   ㄴ. 總非


俱非此經眞實之義로다

  모두 이 경의 진실한 뜻은 아니로다.

 


俱非等者 第二總非也 以十身圓融으로 爲實義故

  ‘俱非’ 等이라는 것은 第二에 總히 그르다 한 것이니, ‘十身圓融’으로써 참된 뜻을 삼기 때문이다.

 



    ㄷ. 揀濫


設分三十 不同이라도 亦權實對說이니 若不融前義 亦失經宗이니라

 설사 三과 十으로 나눈 것이 같지 않더라도 또한 權과 實을 대하여 설한 것이니,  만약 앞의 뜻을 융합하지 못한다면 또한 經의 宗旨를 잃는 것이다.

 


設分三十等者 第三揀濫也 云何揀耶 麤相約敎而說인댄 三身爲權이요 十身爲實이어니와 若不知三身 卽是十身이면 爲不融前이니 權外立實이라 故失經宗이니라

 

  ‘設分三十’ 等이라는 것은 第三에 揀濫(잘못을 가려냄)이다. 어떻게 가려내는가? 麤相(거친 相)으로 敎를 잡아 설한다면, 三身이 權(방편)이 되고 十身은 實(實際)이 된다. 만약 三身이 곧 十身인 줄 알지 못한다면 前(三身)을 융합하지 못함이니, 權 밖에 實을 세운 것이다. 그러므로 經의 宗旨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大方廣佛華嚴經疏演義 卷第七 /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