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方廣佛華嚴經疏演義鈔 卷第八
唐 淸凉山 大華嚴寺沙門 澄觀述
2. 緣十義
1) 引例總明
2) 開章別釋
④ 依三昧
第四에 依三昧者는 夫動靜이 唯物이니 聖豈然乎아 示軌後徒하야 明將有說인댄 必須靜鑑前理하며 受諸佛加하며 從定起而發言이라야 言必眞當이니 言必眞當故로 受者之心이 自然篤矣니라
第四에 三昧를 의지한다는 것은 대저 動하고 靜함이 오직 物(중생)일 뿐이니, 聖人이 어찌 그러하겠는가? 뒤따르는 무리에게 법칙(軌範)을 보여서 장차 설할 것이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면 반드시 모름지기 앞의 이치를 고요히 비추어 보고 諸佛의 가피를 받아 定으로부터 일어나 말을 해야만 그 말이 반드시 진실하고 합당할 것이다. 말이 반드시 진실하고 합당한 까닭에 받는 자의 마음이 자연히 돈독해진다.
第四依三昧는 疏文分二호니 先은 立理正明이요 後는 對文略釋이라 今初에 有二하니 先은 別顯이요 後는 結成이라
第四에 ‘依三昧’는 疏文을 둘로 나누리니, 先은 이치를 세워 바로 밝힘이요, 後는 글에 대하여 간략히 해석함이다. 이제 初에 둘이 있으니, 先은 따로 나타냄이고 後는 結成함이다.
初中에 下十住疏에 明入定意가 總有六義하니♣(1) 一은 此三昧가 是法體故니 卽十地論意니라 二는 非證이면 不說故니 若不證而說이면 則是生滅心行으로 說實相法이니라 三은 顯法非思量境故니 明要亡心이라야 方契上義니 前約顯實이요 此約遮過니라 然上三義가 後後로 釋於前前이니 大同小異하니라 四는 觀機審法故니 要須藥病相當하야사 方可說故니라 五는 爲受佛加故니 上四는 內因이요 此一은 外緣이니 因緣和合하야사 方能說故니라 六은 成軌儀故니 卽一向爲生이라 上五는 自利요 此一은 利他니라 今疏에 含具하니 初之二句는 總相立理니 非唯入定爲物이라 出定亦然이니 宜見出者면 則出하고 宜見入者면 便入일새 故云唯物이요 聖無定亂일새 故云聖豈然乎니라 故로 淨名에 云호대 不定不亂이라 하니라
初(別顯)중에 아래 十住疏에서 定에서 들어가는 뜻이 총히 六義가 있음을 밝혔다.
一은 이 三昧가 法體이기 때문이니, 곧 『十地論』의 뜻이다.
二는 증득하지 않으면 설하지 못하기 때문이니, 만약 증득하지 못하고 설한다면 즉 生滅하는 心行으로 實相法을 설함이다.
三은 법은 사량할 경계가 아님을 나타내기 때문이니, 요컨대 마음이 없어져야 비로소 上義에 계합함을 밝힘이니, 앞(一과 二의 義)은 實을 나타냄을 잡은 것이고, 여기서는 잘못을 막는 것을 잡음이다. 그러나 위의 세 뜻이 後後로 前前을 해석함이니 대동소이하다.
四는 機를 觀하고 法을 살피기 때문이니, 반드시 모름지기 藥과 病이 서로 合當해야 비로소 說할 수 있기 때문이다.
五는 부처님의 가피를 받기 때문이다. 위의 四는 內因이요 이 一은(이 다섯번째는) 外緣이니, 인연이 화합하여야 비로소 설할 수 있기 때문이다.
六은 軌儀를 이루기 때문이니, 곧 한결같이 중생을 위함이다. 위의 五는 自利이고, 여기의 一은 利他이다. 이제 疏에 포함하여 갖추었으니, 처음의 二句는 總相으로 이치를 세움이다. 오직 入定해야만 物(중생)을 위할 뿐만 아니라 出定해서도 또한 그러하나니, 出定을 보임이 마땅하면 出定하시고 入定을 보임이 마땅하면 문득 入定하신다. 그러므로 ‘唯物(오로지 중생일 뿐이다)’이라 말하였다. 聖人은 定과 亂이 없기에, 그러므로 ‘聖豈然乎’라 말하였다. 그러므로 『淨名經』에 이르길, “定도 아니요 亂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1)十住疏에 明入定意가 總有六義하니 ; 六義는 다음과 같다. ① 法體故 ② 非證不說故 ③ 顯此法非思量故 ④ 觀機審法故 ⑤ 爲受佛加故 ⑥ 成軌儀故
○ 示軌後徒下는 別顯入意也니 此卽第六意니라 明將有說인댄 必須靜鑑前理者는 含前四意니 靜者는 離思量也요 靜鑒者는 證法體也요 靜鑒前理者는 觀機審法也니 前字兼機故라 佛加는 可知니라 從定起而發言下는 明非證不說이니 亦總顯前六之勝用也니라
○‘示軌後徒’아래는 따로 入意(入定하는 의미)를 나타냄이니, 이것은 곧 第六意이다. ‘明將有說 必須淨鑒前理’라는 것은 앞의 四意를 包含한다. ‘靜’이라는 것은 思量을 떠남이고, ‘靜鑑(고요히 비춰본다)’이라는 것은 法體를 證得함이다. ‘精鑒前理’라는 것은 機를 觀하고 法을 살피는 것이니, 前이라는 글자가 機를 겸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加被를 알 수 있다. ‘從定起而發言’아래는 증득하지 않고서는 설하지 못함을 밝힌 것이니, 또한 총히 前六의 殊勝한 用을 나타냄이다.
故於諸會에 多明入定하야 爲說經緣하니
그러므로 여러 會에서 흔히 定에 들어감이 經을 설하는 緣이 됨을 밝혔으니,
故於諸會下는 總結成也라 九會說經에 八은 入三昧요 第二는 不入일새 故名爲多니라 第一會는 普賢이 入毘盧遮那如來藏身三昧요 第三會는 法慧菩薩이 入菩薩無量方便三昧요 第四會는 功德林菩薩이 入菩薩善思惟三昧요 第五會는 金剛幢菩薩이 入智光三昧요 第六會는 金剛藏菩薩이 入菩薩智慧光明三昧요 第七會는 如來가 自住刹那際三昧요 第八會는 普賢菩薩이 入佛華嚴三昧요 第九會는 如來- 自入師子頻申三昧니라 二에 不入者는 未入位故니라 有云호대 蓋文漏耳니 說世間法에도 尙須入定이어든 況十信耶아 하니 若約所表인댄 前義無失이니라
‘故於諸會’아래는 총히 결성함이다. 九會의 경을 설함에(『화엄경』을 9회에 걸쳐 설한 것을 의미함.) 八會는 삼매에 들어가고 第二會는 들어가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多(흔히)’라고 이름 하였다.
第一會는 보현보살이 비로자나여래장신삼매에 들어감이요, 第三會에는 법혜보살이 보살무량방편삼매에 들어감이요, 第四會는 공덕림보살이 보살선사유삼매에 들어감이요, 第五會는 금강당보살이 지광삼매에 들어감이요, 第六會는 금강장보살이 보살지혜광명삼매에 들어감이요, 第七會는 여래께서 스스로 찰나제삼매에 머무시고, 第八會는 보현보살이 불화엄삼매에 들어감이요, 第九會는 여래께서 스스로 사자빈신삼매에 들어가셨다. ‘二에 不入’이라는 것은 位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떤 이가 이르기를. “아마도 글에서 누락됐을 뿐이니, 世間法을 설함에도 오히려 모름지기 定에 들어가야 하거늘 하물며 十信이겠는가?”라고 하니, 만약 表한 바를 잡는다면 앞의 뜻을 잃음이 없다.
有不入者는 至文當說호리라 其所入定은 皆盡法源이라 業用難思니라
不入(入定하지 않음)이 있는 것은 文에 이르러 마땅히 설하리라. 그 들어간 定은 모두 法源을 다하니, 業用을 생각하기 어렵다.
有不入者下는 第二에 對文略釋이니 不入之義는 已如向設이니라 其所入下는 顯勝超劣이니 寄位가 優劣하며 所入이 不同이나 人法俱勝故로 一一三昧가 皆盡法源底니 非如入初禪時에 不入二三等故며 以盡法源故로 並感諸佛의 三業加等이니라
‘有不入者’아래는 第二에 글에 대하여 간략히 해석한 것이다. ‘不入’의 뜻은 이미 지난번에 설명한 것과 같다. ‘其所入’아래는 殊勝한 것이 劣等한 것을 초월함을 나타낸 것이니, 位에 의지함이 優劣하며 들어간 바가 같지 않으나 人과 法이 다 수승한 까닭에 낱낱 삼매가 다 法源의 根底를 다하니, 初禪에 들어간 때에 二禪과 三禪 等에 들어가지 못한 것과는 같지 않기 때문이다. 法源을 다했기 때문에 아울러 모든 부처님의 三業으로 加被함 등을 感得한다.
⑤ 依現相
第五에 依現相者는 謂法性이 寂寥하야 雖無諸相이나 無相之相이 不礙繁興이니라
第五에 現相에 의지한다는 것은 法性이 寂寥하여 비록 모든 상이 없으나 無相의 相이 번거롭게 일어남에 걸리지 않음이다.
第五依現相은 疏文分四호리니 一은 總明大意요 二는 顯相不同이요 三은 別明放光이요 四는 料揀同異라
今初는 應有四句니 一者는 隨相이요 二者는 無相이요 三者는 無相이 不礙相이요 四者는 相卽無相이니 法性寂寥는 卽第二句요 無相之相은 卽三四句요 下別明中에 有初一句이니 故應莫執無相하야 以斥諸相也라
故로 下經에 云호대 如來非以相爲體라 但是無相寂滅法이나 身相威儀悉具足하야 世間隨樂皆得見이라 하며 十地에 云호대 佛住甚深眞法性하사 寂滅無相同虛空이나 而於第一實義中에 示現種種所行事니라 所作利益衆生事가 皆依法性而得有하니 相與無相無差別하야 入於究竟皆無相等이라 함이 卽其義也니라
第五에 依現相이라는 것은 疏文을 四로 나누리니, 一은 총히 大意를 밝힘이요, 二는 相이 같지 않음을 나타냄이요, 三은 따로 放光을 밝힘이요, 四는 同과 異를 가려냄이다.
이제 初에는 응당 四句가 있으니, 一은 相을 따름이요, 二는 相 없음이요, 三은 相 없음이 相에 걸리지 않음이요, 四는 相이 곧 無相이다. 法性이 寂寥함은 곧 第二句요, 無相之相은 즉 三句와 四句요, 아래 따로 밝힌 중에 初의 一句가 있다. 그러므로 응당 無相에 집착하여 모든 相을 물리치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下經에 이르길,
“여래는 相으로써 體를 삼지 않나니,
다만 無相의 寂滅法이나
身相에 威儀를 다 갖추시어
세간에서 樂을 따라 다 보게 된다네.”
라고 하며, 十地에서 이르길,
“부처님께선 깊고 깊은 眞法性에 머무사
寂滅하고 相이 없어 허공과 같지만
第一의 진실한 뜻 가운데에
가지가지 행하신 일을 보이시네.
중생을 이롭게 지으신 일들
다 法性에 의지하여 有를 얻으니
相과 無相이 차별이 없어
究竟에 들어감은 다 無相이라네…“
라고 함이 곧 그 뜻이다.
起敎多端이라 相非一准이니 或放光動刹하며 或花雨香雲이 皆爲發起니라
교를 일으킴이 多端하여 相이 하나에만 準하지 아니하니(또는“相이 한결같이 고르지 아니하니”라고도 해석해 볼 수 있다.), 혹 광명을 놓거나 국토를 움직이며, 혹 꽃비와 香雲이 다 (敎를)發하여 일으킴이 된다.
起敎多端下는 第二에 顯相不同也라 由所起敎가 異故로 能起相이 殊니 如說法華엔 以放光動地雨花로 爲相이요 將說涅槃에 以聲光徧告로 爲相이요 如說般若엔 以散金花로 爲相이어니와 今經엔 具有諸相하니 華嚴世界가 六種震動하며 雨於花雲香雲蓋雲鬘雲瓔珞雲等이 皆其相也니라
‘起敎多端’아래는 第二에 相이 같지 않음을 나타냄이다. 일으킨바 가르침이 다름으로 말미암아 能起相(능히 일으키는 상)이 다르니, 『法華經』을 설함에는 광명을 놓고 땅이 진동하며 꽃비 내림으로써 相을 삼으시고, 장차 涅槃을 설하시려 함에 소리와 빛으로 두루 告함으로써 相을 삼았으며, 般若를 설함에는 金花를 뿌림으로써 相을 삼으셨다. 이제 『華嚴經』에서는 모든 상이 갖춰져 있으니, 華藏世界가 여섯 가지로 진동하며 花雲․香雲․蓋雲․鬘雲․瓔珞雲 등을 비같이 내림이 다 그 相이다.
故로 諸會之內에 將欲說法인댄 多先放光하시니 通表智光으로 以被物故니라 然有二種하니 一은 不壞次第光이니 隨位增微故요 二는 圓通無礙光이니 隨一一光하야 皆結通故니라 隨處放異일새 總有十光하니 各有所表이니 至文當知니라
그러므로 諸會의 안에서 장차 법을 설하고자 하면 흔히 먼저 放光을 하시니, 통히 智光을 表함으로 物(중생)에게 加被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二種이 있다. 一은 次第(차례)를 무너뜨리지 않는 光이니, 位에 따라 많거나 적기 때문이다.
二는 圓通하여 걸림이 없는 光이니, 낱낱 光을 따라서 다 結通하기 때문이다. 處에 따라 방광이 다르나니 총히 十光이 있으니, 각각 표하는 바가 있다. 文에 이르면 알게 되리라.
故諸會下는 第三에 別明放光이라 於中에 文三이니 初는 總明이요 次는 然有下는 別顯이요 後는 隨處放異下는 重釋隨相이라
言十光者는 第一會는 放於二光하니 謂現相品에 初는 於如來衆齒之間에 放種種光이요 二는 亦於此品에 放眉間光이라 第二會는 放足輪光이요 第三會는 足指放光이요 第四會는 足上放光이요 第五會는 膝輪放光이요 第六會는 亦眉間放光이요 第七會는 初不放光하고 而出現品에 放二種光하니 謂放眉間光하야 加於妙德하고 放口光하야 加於普賢이라 第八會는 總不放光이요 第九會는 亦放眉間白毫光明하니 初와 七은 各二요 八은 不放故로 九會에 有十이니라
‘故諸會’아래는 第三에 따로 방광을 밝힘이다. 그 중에 글이 三이 있으니, 初는 총히 밝힘이고, 다음에 ‘然有’아래는 따로 나타냄이고, 후에 ‘隨處放異’아래는 거듭하여 상에 따라 해석함이다.
‘十光’이라 말한 것은 第一會는 두 번 光을 놓으니, 「現相品」에 初에서는 여래의 여러 치아사이에서 가지가지 광명을 놓으시고, 두 번째는 또한 이 品(「現相品」)에서 미간에서 放光하신다. 第二會에는 발바닥의 輪相에서 光을 놓으시고, 第三會에는 발가락에서 방광하신다. 第四會는 발등에서 방광하시고, 第五會는 무릎에서 방광을 하시며, 第六會는 또한 미간에서 방광을 하시고, 第七會는 처음에는 방광하지 않으시나 「出現品」에선 二種의 방광을 하시니, 말하자면 미간의 광명을 놓아 묘덕보살을 가피하시고, 입으로 光明을 놓아 보현보살을 가피하신다. 第八會는 총히 방광하지 않으시고, 第九會는 또한 미간의 백호로 광명을 놓으시니, 初會와 七會은 각각 두 번이고, 八會는 방광하지 아니하신 까닭에 九회에 열 번(열 번의 방광)이 있다.
言各有所表者는 初面門衆齒放者는 表敎道遐舒가 金口所流며 從佛口生이 是眞佛子故니 以是光初故로 於總處♣(2)에 放也니라 又表咀嚼法味하야 滋法身故等이니라 眉間放者는 通表一乘中正之道니라
足輪은 最下라 表信四義니 一은 自下而上에 信最初故요 二는 最卑微故요 三은 爲行本故요 四는 信該果海하야 已滿足故니라
足指는 安住故요 足上은 依行故요 膝輪은 屈伸하야 可廻向故니라
十地眉間은 表所證十如가 具足中道故요 出現眉間은 表出現中道가 不住生死涅槃二邊故요
口放은 表佛口生이 眞長子故요
第八會不放은 行依解發이라 依解光故며 或略無故니라
第九會眉間은 表證窮法界之中道故니라 廣如下疏일새 故云至文當知니라
‘各有所表’라고 말한 것은 初會에 面門(입)의 여러 치아에서 放光하는 것은 敎道가 멀리 펴짐이 金口에서 흘러나온 것임을 나타내며, 부처님 입으로부터 생긴 것이 참다운 불자이기 때문이다. 이 光이 처음인 까닭에 總處에 놓는다. 또 法味를 잘 맛보아 表하여 법신을 자라나게 하기 때문 등이다. ‘眉間放’이라는 것은 통히 一乘의 中正한 道를 표함이다.
足輪(발바닥의 輪相)은 最下라. 信을 표함에 四義가 있다. 一은 아래로부터 위로 오름에 信이 최초이기 때문이고, 二는 가장 낮고 미세기 때문이며, 三은 행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요, 四는 信이 果海를 該括하여 이미 만족하기 때문이다.
足指(발가락)는 편안히 머물기 때문이요, 足上(발등)은 행에 의지하기 때문이며, 膝輪(무릎)은 굽히고 펴면서 廻向할 수 있기 때문이다.
十地眉間은 증득한 바 十如가 中道를 구족하였음을 표하기 때문이요, 미간에서 출현함은 中道를 출현함이 生死와 涅槃의 二邊에 머물지 않음을 표하기 때문이다.
口光(입으로 방광함)은 부처님 입에서 참된 長子를 생함을 표하기 때문이다.
第八會에 방광하지 아니한 것은 行이 解에 의지하여 發하니, 解光에 의지하기 때문이며, 혹 생략하여 없기 때문이다.
第九會에 미간은 法界의 中道를 窮究하여 證得하였음을 표하기 때문이다. 자세히는 아래의 疏와 같으니, 그러므로 말하기를 “글에 이르면 알게 되리라”고 하였다.
♣(2) 總處 ; 總處라는 것은 즉 입을 의미한다. 입은 법을 설하는 처소가 되며, 일체의 法門은 다 이곳에서 연설되어지기 때문이다.
其動地等은 多在說後하니 則但是慶聞이라 如十地中엔 雖是慶前이나 義兼起後니 則是敎緣이니라
그 땅이 진동한다는 등은 흔히 說한 뒤에 있으니, 즉 다만 들음을 기뻐함이다. 十地같은 중에서는 비록 前을 기뻐한 것이나 뜻은 겸하여 後를 일으키니, 곧 敎의 緣이다.
其動地等下는 第四에 料揀同異라 慶前起後는 二義不同일새 故取起後하고 不取慶前이라 言如十地等者는 九地初에 云호대 說此菩薩八地時에 如來現大神通力하사 震動十方諸國土가 無量億數難思議等이라하니 旣牒八地라 明是慶前이요 讚竟에 便請九地라 故로 義兼起後니라
‘其動地等’아래는 第四에 같음과 다름을 料揀함(헤아려 가려냄)이다.‘慶前起後’는 두 뜻이 같지 않으니, 그러므로 起後를 취하고 慶前을 취하지 아니하였다.‘如十地’라 말한 것 등은 九地의 初에 이르길,
“이 보살의 八地를 설할 때에
여래께서 대신통력을 나투사
시방의 모든 국토를 진동하시니
無量億數라 思議하기 어렵네…”
라고 하였다. 이미 八地를 牒釋하였으니, 앞을 기뻐함을 밝히이고, 찬탄하여 마치고 나서 바로 九地를 청함이다. 그러므로‘義兼起後(뜻으로는 뒤를 일으킴을 겸한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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