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華嚴經 懸談 ♣>/大方廣佛華嚴經疏鈔懸談

大方廣佛華嚴經疏演義鈔 卷第八 / [3] <卷第八 終 - 敎起因緣 終>

화엄행 2010. 3. 10. 06:20

大方廣佛華嚴經疏演義鈔    卷第八

淸凉山 大華嚴寺沙門 澄觀述

 

 

 

  ⑧ 依德本


第八 依德本者 川有珠而不枯하고 山有玉而增潤하나니 內無德本이면 外豈能談이리오이나 唯約說者 前人此法故니라

 

第八에 德本을 의지한다는 것은 냇물에 구슬이 있으면 마르지 아니하고 산에 玉이 있으면 더욱 윤택하나니, 안으로 德本이 없으면 밖으로 어찌 능히 말하리오? 그러나 오직 설하는 자만을 잡음으니, 前은 사람이요 여기서는 法이기 때문이다.



第八依德本 文三이니 標大意 畧有二類下 正顯示若感者下 揀疑濫이라

初中疏 川有珠下二句 次內無下이요 後然唯約說者下 揀定이라 劉子호대 山抱玉而草木 潤焉이요 川貯珠而岸不枯焉이요 口納滋味而百節 肥焉이요 心受典誥而五性♣(1) 通焉이라하니라 (南藏 幷無劉子云下三十七字)


第八에 ‘依德本’은 文에 三이 있으니, 初는 大意를 표함이요,  다음 ‘畧有二類’ 아래는는 바로 나타내 보임이다. 後에 ‘若感者’ 아래는 疑濫(의심되고 잘못됨)을 가려냄이다.

初중 疏에 ‘川有珠’ 아래 二句는 비유요, 다음 ‘內無’ 아래는 合이고, 뒤의 ‘然唯約說者’ 아래는 간별하여 결정함이다.

劉子가 이르길, “산이 玉을 품고 있어야 초목이 윤택하고, 냇물에 구슬이 잘 갈무리되어 있어야 언덕이 마르지 않음이요,  입으로 滋味(좋은 맛)를 받아들여서 百 마디가 살찌며, 마음이 典誥(聖人의 말씀)를 받아들여서 五性이 통한다”고 하였다. (南藏에는 아울러 ‘劉子云’ 아래 37글자가 없다.)


♣(1) 五性 ; 儒家에서 말하는 仁, 義, 禮, 智, 信의 五常을 의미한다.




略有二類하니 一者 智慧 最爲首故 十方諸佛 告金剛幢言하사대 及由汝智慧淸淨故라 하시고 告金剛藏言하사대 亦是汝勝智力故라 하시니라 二者 餘行願力故 十方諸佛 告普賢言하사대 亦以汝修一切諸行願力故라 하시고 十方諸佛 告法慧言하사대 及汝所修諸善根力으로 令汝入是三昧하야 而演說法이라 하시니라


간략히 두 種類가 있다. 一은 지혜가 가장 으뜸이 되기 때문이니, 시방제불이 금강당보살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너의 지혜가 청정함을 말미암았기 때문이다.”고 하시고,  금강장 보살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또한 너의 殊勝한 智力 때문이다.”고 하시었다.

二는 나머지 行願力이기 때문이니, 시방제불이 보현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또한 네가 닦은 일체 모든 행원력때문이니라.”고 하시고, 시방제불이 법혜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네가 닦은 모든 선근력으로 너로 하여금 삼매에 들어가서 법을 연설하게 하느니라.”고 하시었다.


畧有二類下 正顯示也


다음에 ‘畧有二類’ 아래는 바로 나타내 보임이다.

 


若感者 善根 若化主 行願 皆屬說因이니라


 感得하는 자의 善根과 敎化하는 主體의 行願은 모두 설하는 因에 속한다.


 

若感者下 疑濫이라

 

後에 ‘若感者’ 아래는 疑濫(의심스러운 것과 남용됨)을 가려냄이다.




  ⑨ 依請者


第九 依請人者 若約慈悲深厚인댄 亦有無問自談이요 若約敬法重人인댄 要須誠請後說이니라 初心 識昧하야 未解諮求일새 上智 慈悲 騰疑啓請이니라


第九에 청하는 사람에 의지한다는 것은 만약 자비가 깊고 두터움을 잡는다면, 또한 묻지 않아도 스스로 말씀이 있다. 만약 법을 공경하고 사람을 귀중하게 여김을 잡는다면, 요컨대 모름지기 정성스럽게 청한 연후에 연설하신다.  初心(처음 信心을 낸 사람)識이 昧하야(아는 것이 없어서) 諮問을 구할 줄 모르나니, 上智가 자비로 의심을 일으켜서 열어주시길 請한다.



第九依請者 文二이니 擧無顯有


第九에 ‘依請’이라는 것은 文에 둘이 있으니, 先은 無를 들어서 有를 나타냄이다.



然有二類하니 一者 言請이요 二者 念請이니 諸會有無 現相品 當辨호리라


그러나 두 種類가 있으니, 一은 말로 청함이요, 二는 생각으로 청함이니, 諸會의 있고 없는 것은 「如來現相品」에서 밝힐 것이다.



然有二下 別示請儀

後에 ‘然有二’ 아래는 따로 請하는 威儀를 보임이다.




  ⑩ 依加者


第十 依能加者 夫聖無常應이라 應於克誠하시나니

 

第十에 능히 加被하는 분에 의지한다는 것은 대저 聖人은 항상 應하지 않으시고, 지극한 정성에 응하시나니,



第十依能加 亦二 總明大意 然若佛下 別釋所以

今初 立理 指陳이라 前中 借尙書意 彼云호대 民罔常懷 懷于有仁이요 鬼神 無常享이라 享于克誠이라 하니라


第十에 ‘依能加’도 또한 둘이 있으니, 先은 총히 大意를 밝힘이고, 後에 ‘然若佛’ 아래는 따로 까닭을 해석함이다.

이제 初니, 先은 이치를 세움이고, 다음은 지적하여 陳述함이다. 前 가운데에 『尙書』의 뜻을 빌렸으니, 그것에 이르길,  “백성은 항상 품은 마음은 없지만 仁이 있음을 생각하고, 귀신은 항상 歆饗하지는 않지만 지극한 정성에 흠향한다”고 하였다.

 


心冥至極할새 故得佛加니라


마음이 지극함에 冥合하는 까닭으로 부처님의 加被를 얻나니라.



心冥至極下 指陳也 以入定契理일새 故得佛加耳 下文中 以三昧力으로 感十方諸佛現前等이라 하니라


‘心冥至極’ 아래는 지적하여 陳述함이다. 定에 들어감으로써  이치에 契合하니, 부처님의 가피를 얻게 된다. 그러므로 아래의 글 중에서 ‘三昧力으로써 시방제불이 앞에 나타나심을 感得한다…’라 하였다.




이나 若佛自說인댄 則不侯加♣(2) 如第七會 因人♣(3)有說일새 要假上加 其第八會 行依法修 不異前故 畧無有加 二九 不入이라 故無有加 餘皆具有니라


그러나 만약 부처님께서 스스로 설하실진댄 가피를 기다리지 않고 저 第七會에는 사람을 因하야 설함이 있을새 종요로히 위의 가피를 가자함이요 그 第八會는 行이 法을 의지하여 닦음이라. 전과 다르지 않는 연고로 간략히하여 가피가 없고 二와 九는 정에 들어가지 않았음이라. 그러므로 가피가 없고 나머지는 다 갖추어 있나니라.


♣(2) 若不自說 則不侯加 ; 「阿僧祗品」과 「如來隨好光明功德品」은 다 부처님이 스스로 말씀하셨으므로 반드시 부처님의 가피를 요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가피에 의지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3) 因人 ; 果地가 아닌 因地의 修行人을 뜻함.




別釋中 總彰有無 所以加者下 出加所以 若爾僧祗隨好下 釋通妨難이요 加有下 就類彰別이라


別釋 주에 四가 있으니, 一은 총히 有無를 드러냄이요, 二에  ‘所以加者’ 아래는 가피를 내는 까닭이고, 三에 ‘若爾僧祗隨好’ 아래는 妨害와 詰難을 해석하여 통하게 함이요, 四에 ‘加有’ 아래는 種類에 나아가 따로 드러냄이다.


 


所以加者


가피한 까닭은


二中이요이라


二中에 先은 따져 물임이고, 後는 해석함이다.


 


欲顯諸佛同加 卽同說故 一說 一切說故 亦顯果海 無言故 因相 可說故니라


제불이 동등하게 가피하심은 곧 同等하게 說하심을 나타내고자 하기 때문이며, 一說이 일체의 설임을 나타내고자 하기 때문이며, 또한 果海는 말하지 못함을 나타내고자 하기 때문이며, 因의 相은 설명할 수 있음을 나타내고자 하기 때문이다.



釋有三意하니 言欲顯諸佛同加 卽同說故者 卽第一意 若佛自說인댄 不可言加 則但名自說耳어니와 今由同加하야 皆與智勸說하니 卽顯同說也니라

一說一切說故者 第二意也顯通方之法♣(4)이요顯圓融之敎이나 一經中 總具四句어늘 今但擧一 以順同加義故니라


해석에 세 가지 뜻이 있으니, ‘欲顯諸佛同加 卽同說故’라 말한 것은 즉 第一意이다. 만약 부처님께서 스스로 설하신다면 가피를 말할 수 없으니, 곧 다만 ‘自說’이라 이름할 뿐이다. 이제 同等하게 加被하심으로하여 모두가 지혜를 주시고 설하시기를 勸請하니, 곧 동등하게 설하심을 나타낸 것이다.

‘一說一切說故’라는 것은 第二意다. 위는 通方의 법을 나타냄이고, 여기서는 圓融한 가르침을 나타냄이다. 그러나 一經 중에  총히 四句를 갖추었으나 지금 다만 하나만을 드는 것은 동등하게 加皮하시는 뜻에 隨順하기 때문이다.

 


♣(4) 顯通方之法 ; 이미 此方의 설이 十方의 제불이 동등하게 가피하셨으니, 곧 동등하게 설하심이기 때문에 ‘通方의 法’이라고 하였다.




言四句者 一者 一說 是一說이니 如僧祗等이요 一說 一切說이니 如向所明이요 一切說 是一說이니 如一切處文殊 同徧法界하야 同聲說偈하야 顯法無異故 四者 一切說 是一切說이니 如十方來證 皆自敍云호대 我等諸佛 亦如是說이라 하니라 餘三 不順同加일새 故疏不明耳니라


‘四句’라 말한 것은 一은 一說이 一說이니, 「阿僧祗品」등과 같다. 二는 一說이 一切說이니, 예전에 밝힌 바와 같고, 三은 一切說이 一說이니, 一切處의 문수가 법계에 한가지로 두루 하여 같은 소리로 게송을 설하여 법에 다름이 없음을 나타냄과 같은 것이다. 四는 一切說이 一切說이니, 十方에서 오시어 증명함에 다 스스로 敍述하여 이르길, “우리들 제불도 또한 이와 같이 설하느니라.”고 함과 같다. 나머지 三은 동등하게 가피함을 따르지 않으니, 그러므로 疏에서 밝히지 않았다.

 


亦顯果海下 第三意也表果海 菩薩 表因故 十地經호대 此處難宣示 我今說少分이라 하고 論經 云一分이라 하고 釋云호대 果分 不可說일새 但說因分이나 因分於果 爲一分耳라 하니라

 

‘亦顯果海’ 아래는 第三意니, 佛은 果海를 표하고 보살은 因을 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十地經』에 이르기를, “이 곳에서는 宣示하기 어렵나니, 내가 이제 조금만 설하리라.”고 하였다.  『十地經論』에는 “一分이라.”고 하시니, 논에 해석하여 이르길, “果分은 설할 수 없으므로 다만 因分만을 설하나, 因分은  果에서 한 부분이 될 뿐이다.”라고 하였다.



若爾인댄 僧祗隨好 應非一切


만약 그렇다면 「아승지품」과 「여래수호공덕품」은 응당 일체가 아니니,



若爾僧祗下 釋通妨難이라 於中이니 設難이요 釋難이요 遮難이니 今初也


‘疏에 若爾僧祗’ 아래는 三에 해석하여 방해와 힐난을 통하게 함이다. 그 중에 三이 있으니, 初는 힐난을 시설함이요, 二는 힐난을 해석함이요, 三은 힐난함을 막음이다. 지금은 初이다.




表微細難知故 超出因果故니라


미세하여 알기 어려움을 表하기 때문이며, 因果를 超出하기 때문이다.



疏表微細下釋難也 畧擧二意하야 對前三意

言微細難知者 對前同說 及一切說이니 前菩薩說 以受加故 表佛同說이어니와 今以僧祗數量 重重微細 唯佛能知 隨好光明功德 一好一光 能破地獄하며 三重頓圓일새 故亦難知 唯佛能了일새 故佛自說이니라


疏에 ‘表微細’ 아래는 二에 힐난을 해석함이니, 간략히 두 가지 뜻을 들어서 앞의 세 가지 뜻에 대함이다.

‘微細難知’라고 말한 것은 앞의 ‘同說’과 ‘一切說’에 대한 것이다. 앞의 보살의 說은 가피를 받음으로써 佛과 同說임을 표했으나 지금 「아승지품」과 「여래수량품」은 거듭거듭 미세하므로 오직 부처님만이 능히 알 수 있다. 「여래수호광명공덕품」은 一好 一光이 능히 지옥을 파괴하며 三重으로 몰록 원만하니, 그러므로 또한 알기 어렵다. 오직 부처님만이 능히 了達하시니,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스스로 설하신다.



言超出因果故者 對前果海不可說也 前難中 意云호대 若以菩薩表因인댄 今佛自說 應可表果可說이라 할새今答云호대 對果說因인댄 言因可說이거니와 因無果外之因하야 沒同果海故 因亦(어려울 )이니 如鳥跡同空 跡亦叵說이니라 因旣非因인댄 果亦非果 欲拂前因果之相일새 故佛自說이니라

 

‘超出因果故’라고 말한 것은 앞의 ‘果海는 말할 수 없음’을 대한 것이다. 앞에 힐난한 뜻 가운데에 이르길, “만약 보살로써 因을 表한다면 이제 부처님이 스스로 說하심도 응당 果를 말할 수 있음을 표할수 있겠다.”고 하니, 그러므로 이제 답하여 이르길, “果에 대하여 因을 설한다면 因은 설할 수 있다고 말하겠지만, 因은 果 밖의 因이 아니기에 없어져서 果海와 같아지기 때문에 因도 또한 설하기 어렵다. 마치 새의 자취가 허공과 같아서 자취도 또한 설하기 어려운 것과 같다. 因이 이미 因이 아니라면 果도 또한 果가 아니다. 앞의 因果의 相을 떨쳐버리고자 하기에 그러므로 ‘佛自說’이다”고 하였다.




이나 施設 不同하니 不應一准이니라


그러나 시설함이 같지 아니하니, 응당 하나에 準해서는 아니된다. 



然施設等者 遮難也

恐有難言호대 若今佛說 卽表微細인댄 餘應是麤 此言超出인댄 前應繫著이라할새 故此遮云호대 聖敎施設 千差萬別이라 各取一表하니 不應剋定이니라 受加 表於同說이나 亦非麤非著이요 佛說 表細顯超 亦不碍於同說이니 約表小異 大旨全同이어든 何不亡言 觸途生滯 故云不應一准이니라


‘然施設’ 等이라 한 것은 三에 詰難을 막음이다.

어떤 이가 힐난하여 말하길, “만약 이제 부처님께서 說하심이  곧 미세함을 표한다면 나머지는 응당 麤이고, 여기서 ‘超出(벗어났다)’고 말한다면 前은 응당 繫著함(얽매여짐, 즉 어떤 상태에 고착된 것을 의미한다.)이다”라고 할까 염려된다. 그리하여 이를 막아서 이르길, “聖人이 가르침을 施設함이 천차만별이나 각기 하나를 취하여 表하니, 응당 단정적으로 정하지 말아야 한다. 가피를 받는 것은 同說로 표하였으나 또한 麤도 아니며 著도 아니다. 부처님이 說하심은 微細를 표하고 超出하였음을 나타냈으나,  또한 同說에 걸리지도 않는다. 表한 것을 잡으면 조금 다르지만 큰 뜻은 온전히 같으니, 어찌 말함이 없이 닿는 길마다 막히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이르기를, ‘不應一準’이라 하였다.




加有二種하니 一者 顯加具於三業이요 二者 冥加 但與智令說이니라


加被에 二種이 있으니, 一은 顯加니 三業을 갖추었고, 二는 冥加이니 다만 지혜를 주어 설하게 함이다.



加有二種下 第四 就類彰別이라 於中 顯別이요 指文이라

前中 顯加 具於三業者 口業 勸說以益辨이요 意業 冥加以益智 身業 摩頂以增威니라이나 意與智 雖則是冥이나 以與身語同時此二顯彰하니 以少從多故 三皆稱顯이요 冥唯與智 故有不同이니라


‘加有二種’아래는 第四에 ‘就類彰別(종류에 나아가 따로 밝힘)’이다.  前 중에 둘이 있으니, 先은 따로 나타냄이요, 後는 文을 가리킴이다.

前 중에 ‘顯加 具於三業’이라는 것은 口業은 설하기를 권하여 辨才를 더해주고, 意業은 그윽히 가피하여 지혜를 더해 주고,  身業은 摩頂으로 위엄을 증장시켜준다. 그러나 意와 智가 비록 冥加이지만 몸과 더불어 언어는 동시라서 이 둘에 顯加♣(5) 가 나타난다. 적은 것으로써 많은 것을 따르기 때문에 셋을 모두 顯加라 일컫고, 冥加♣(6) 는 오로지 지혜에만 주어지기에 그러므로 같지 않음이 있다.


♣(5)(6) 冥加와 顯加 ; 冥加는 외부로 표출되지도 않고 마음으로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부처님이나 보살의 가피가 있는 것이라면, 顯加는 외부로 드러난 실제 상황이나 중생 자신의 육신으로도 알 수 있는 가피를 의미한다.

 



普光法界 無顯有冥하고 餘皆具二하니 顯必有冥故니라 餘至下明호리라


보광명전과 법계도량에는 顯加는 없고 冥加가 있으며, 나머지는 모두 둘을 갖추었다. 顯加에는 반드시 冥加가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아래에 이르러 밝히리라.



普光法界等者 指文也 普光 攝三會 謂二七八也 法界 卽是第九 故此四會 幷唯有冥이니라 由二七兩會 不入定故 故無顯加로되 而文殊師利 普賢菩薩 皆言承佛神力이라 하니 故是冥加니라

第八會 普賢 雖入三昧 無有加分이요 但有作用發起일새 故無顯加 亦言承佛神力이라 할새 故有冥加니라

法界品 如來 自入三昧하시니 不可有加니라 第七普賢 第二文殊 有說無定이라 故闕顯加 皆承佛力하야 能說能證이라 故有冥加니라


‘普光法界’ 등이라는 것은 後에 文을 가리킴이다. 普光明殿은 三會를 섭수하니, 二會와 七會와 八會이다. 法界道場은 곧 第九會이니, 그러므로 이 四會가 아울러 오직 冥加만 있다. 二會와 七會의 두 會에서는 定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顯加가 없다. 그러나 문수사리와 보현보살은 다 부처님의 神力을 받들어서 말한다고 하니, 그러므로 冥加이다.

第八會는 보현이 비록 삼매에 들어갔으나 加被의 부분이 없다. 다만 發起하는 작용만 있기에, 그러므로 顯加는 없고 또한 佛神力을 받들었다고 말하니, 그러므로 冥加는 있다.

(第九會)「入法界品」은 여래께서 스스로 삼매에 들어가셨으니,  가피가 있을 수 없다. 第七會의 보현보살과 第二會의 문수보살은 說함이 있으나 定이 없으니, 그러므로 顯加가 빠졌다. 모두  부처님의 신력을 받들어서 능히 설하고 능히 증득하니, 그러므로 冥加는 있다.



言餘皆具二者 卽餘五會

顯必有冥者 釋具所以 冥卽未必有顯이나 顯卽必有於冥이니 以如來 有力有慈하사 常冥加故니라 未定緣闕이라 不容有顯일새 故唯有冥이요 顯加之時 冥常不捨하며 又有意加일새 故言必有니라

言餘至下明者 謂冥顯加相 有多義門하니 隨文具顯也니라


‘餘皆具二’라 말한 것은 곧 나머지 五會이다.

‘顯必有冥’이라는 것은 해석에 이유를 갖추었으니, 冥에는 곧 반드시 顯이 있지 않지만 顯에는 곧 반드시 冥이 있다. 여래께서는 힘이 있고 자비가 있어서 항상 그윽하게 가피하시기 때문이다. 아직 定의 緣이 빠져있으니 顯加가 있음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직 冥加만이 있다. 顯加의 때에는 冥加를 항상 버리지 아니하며, 또 意加가 있으니, 그러므로 ‘必有’라고 말했다.

‘餘至下明’이라고 말한 것은 冥과 顯으로 加被하는 모양에 多義門이 있으니, 文을 따라서 갖추어서 나타냄을 일컫는다.



敎起因緣하다

 

敎起因緣을 마침이로다.

 

結前十因十緣也

前의 十因․十緣을 맺음이라.


<敎起因緣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