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華嚴經 懸談 ♣>/大方廣佛華嚴經疏鈔懸談

大方廣佛華嚴經疏演義鈔 卷第五 / [3]

화엄행 2009. 3. 27. 03:30

2007/06/26 오후 4:27

 

        大方廣佛華嚴經疏演義鈔    卷第五

             唐
淸凉山 大華嚴寺沙門 澄觀述



六에 彰地位者는 爲顯菩薩이 修行佛因이니

一道至果나 有階差故니라

  六에 ‘지위를 밝힌다’는 것은 보살이 佛因을 수행함을 나타내기 위함이니, 一道로 果에 이르나 階位의 差異가 있기 때문이다.
 



六彰地位者는 疏文에 二니 初는 總彰大意요 後는 開章別釋이라 前中에 二니 先은 順明來意라

  六에 ‘彰地位’라는 것은 疏文에 둘이 있다. 初는 총히 大意를 드러냄이요, 後는 章을 열어 따로 해석함이다. 前 중에 둘이 있으니, 先은 順으로 오신 뜻을 밝힘이다.



 

夫聖人之大寶曰位니 若無此位면 行無成故니



  대저 성인의 大寶를 位라 말하니, 만약 이 位가 없으면 行을 이룸이 없기 때문이다.



後에 夫聖人下는 立理反成이라 聖人之大寶曰位者는 卽周易下繫에 云호대 天地之大德曰生이요 聖人之大寶曰位라하야늘 注에 云호대 夫無用則無所寶요 有用則有所寶也라 無用而常足者가 莫大乎道요 有用而弘道者가 莫大乎位니 故로 云호대 聖人之大寶曰位也라하니라 言若無此位면 行無成者는 卽反成須位也니라

  後에 ‘夫聖人’아래는 이치를 세워 반대를 이룸이다. ‘聖人의 大寶를 位라 한다’는 것은 곧 『周易』下繫에 이르길, “天地의 大德을 生이라 하고, 聖人의 大寶를 位라 한다” 고 하였다. 注에 이르길, “대저 쓰임이 없으면 보배로운 바가 없고, 쓰임이 있으면 보배로운 바가 있다. 쓰임이 없으나 항상 족한 것은 道보다 큰 것이 없고, 쓰임이 있으면서 도를 넓히는 것은 位보다 큰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聖人의 大寶를 位라 한다’고 하였다. ‘만약 이 位가 없으면 行을 이룸이 없다’고 말한 것은 곧 반대로 반드시 位를 필요로 함을 이룬 것이다. 



 

此亦二種이니 一은 行布門이니 立位差別故요

  이것도 또한 두 종류가 있다. 一은 行布門이니, 位의 차별을 세운 때문이다.


此亦二種下는 二에 開章別釋也라 於中에 三이니 一은 正釋이요 二는 會融이요 三은 引證이라
初中에 先釋行布라 言行布者는 行列分布에 階降淺深이니 如第二會에 明信하고 三에 明住하고 四에 明行하고 五에 明向하고 六에 明地하고 七에 明等妙하니 前非是後요 後非是前일새 故言行布니라


  ‘此亦二種’아래는 二에 章을 열어 따로 해석함이다. 그 중에 三이 있으니, 一은 바로 해석함이요, 二는 회통하여 융합함이고, 三은 인용하여 증면함이다.
  처음 가운데 먼저는 行布(항포)를 해석함이다. ‘行布’라 말한 것은 階降(오르고 내림)과 淺深(얕고 깊음)을 行列(항렬)하고 分布함이니, 第二會에 十信을 밝히고, 三會에  十住를 밝히고, 四會에 十行을 밝히고, 五會에는 十廻向을 밝히고, 六會에 十地를 밝히고, 七會에 等覺과 妙覺을 밝힌 것과 같다. 前은 後가 아니며 後는 前이 아닌 까닭에 行布(항포)라고 말하였다.



 

二는 圓融門이니 一位가 攝一切位故며 一一

位滿이면 卽至佛故니

 
二는 圓融門이니,  位가 곧 一切 位를 섭수하기 때문이며, 낱낱 位가 차면 곧 佛에 이르기 때문이다.



後는 釋圓融이니 言圓融者는 圓滿融通이라 疏釋有二하니 初는 正釋이요 二는 引證이라
前中에 自有二義하니 一者는 疏에 云호대 一位卽攝一切位故者는 此는 總辨相攝이니 謂四十二位之中에 隨擧一位하야 卽攝一切니 如初發心住가 卽攝餘九住와 及行向地等이니라
二者는 疏에 云호대 一一位滿에 卽至佛故者는 此는 別明五位互攝이니 如初住가 攝於初行初廻向初地요 第二住가 攝第二行과 第二廻向과 第二地等이요 第十住滿이 則攝十行滿과 十向滿과 十地滿이니 第十住滿을 稱灌頂位요 第十地滿도 亦灌頂成佛이며 十行에 智度圓이요 十地에 智度滿이라 海幢比丘가 頂으로 出諸佛說法하니 灌頂住後에 卽明佛者가 卽其事也니라 前은 唯約理行圓融이요 此는 兼明行證相似니라

  후는 ‘圓融’을 해석함이니, 원융이라 말한 것은 원만하게 융통함이다. 疏를 해석함에 二가 있다. 처음은 바로 해석함이요 二는 引用하여 證明함이다.
  전 가운데에 저절로 두 뜻이 있다. 一은 疏에 이르길, “一位가 곧 一切位를 섭수한다”고 한 것은 총히 서로 섭수함을 밝힘이다. 四十二位 가운데에 一位 든 것을 따라서 곧 일체를 섭수함이니, 初發心住가 곧 나머지 九住와 十行*十回向*十地 등을 섭수함과 같다.
 二는 疏에 이르길, “낱낱 位가 차면 곧 佛에 이르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은 따로 五位가 서로 섭수함을 밝힘이니, 初住가 初行*初廻向*初地를 섭수하고, 第二住가 第二行*第二廻向*第二地 등을 섭수하고, 第十住滿이 곧 第十行滿과 十廻向滿과 十地滿을 섭수함과 같다. 第十住滿을 灌頂位라 칭하고 第十地滿도 또한 灌頂으로 성불하며, 十行의 智度가 원만하고 십지에 智度가 원만하다. 海幢比丘가 정수리에서 모든 부처님의 설법을 내니, 灌頂住 후에 곧 부처를 밝힌 것이 곧 그러한 일이다. 앞에서는 오직 理行이 圓融함을 잡았으나, 여기서는 行과 證이 相似함을 밝혔다.



 

初地에 云호대 一地之中에 具攝一切諸地功德

과 信該果海와 初發心時에 便成正覺等이라

 
初地에 이르길, “一地 가운데에 일체 諸地의 공덕을 갖추어 섭수한다”고 함과 “信이 果海를 해괄함과 초발심시에 문득 正覺 이룬다...”는 등을 갖추어 섭수 하였다.



初地云下는 二에 引證也라 文有三節하니 一에 云호대 一地之中에 具攝一切諸地功德者는 此는 約當位之中에 自一攝十也니 以一例諸라 位位皆然이니라 上은 正引文이라

  ‘初地云’아래는 二에 인용하여 증명함이다. 文에 三節이 있다. 一은 ‘一地 가운데 一切諸地功德을 갖추어 섭수했다’고 한 것은 當位 가운데에 一地로부터 十地을 섭수함을 잡은 것이다. 一로써 모든 位의 例를 듦이니, 位와 位마다 다 그러하다. 위는 바로 인용한 글이다.



○ 二에 云호대 信該果海者는 此는 明五位互攝이니 如賢首品中에 乃至應受灌頂하야 而昇位等이니라 此는 卽義引爲證이라

 ○ 二에 ‘信이 果海를 해괄한다’라고 한 것은 五位가 서로 섭수함을 밝힘이니, 「賢首品」 가운데와 내지 ‘응당 灌頂을 받아서 位에 오른다’는 등과 같다. 이것은 곧 뜻으로 인용하여 증명함이다.



○ 三에 初發心時에 便成正覺者는 正明以初攝後니 通於二義라 若住滿成佛인댄 卽是當位에 以初攝後요 若究竟成佛인댄 卽異位相望하야 以初攝後니 如四十二字門에 初阿가 具後茶也니라 上來에 總有三義하니 一은 擧一하야 總攝五十二位요 二는 擧一位하야 攝五位요 三은 擧初攝後니라 復應有以後攝初와 初後攝中과 中攝初後와 一攝一切와 一切攝一과 一攝一과 一切攝一切니 如理思之니라
上에 云호대 初發心時에 便成正覺은 卽是正引經文이니 梵行品에 云호대 若諸菩薩이 能與如是觀行相應하야 於諸法中에 不生二解하면 一切佛法이 疾得現前하야 初發心時에 卽得阿多羅三三菩提하야 知一切法이 卽心自性하며 成就慧身호대 不由他悟라하니 今略引耳니라


  ○ 三에 ‘初發心時에 문득 정각을 이룬다’라고 한 것은 바로 初로써 後를 섭수함을 밝힘이니, 두 뜻에 통한다. 만약 住가 원만하여(十住滿이 되어) 成佛한다면 곧 當位에서 初로써 後를 섭수함이요, 만약 究竟에야 成佛한다면 곧 다른 位들을 서로 바라보고 初로써 後를 섭수함이니, 四十二字門에 처음 阿字가 후의 茶字를 갖춤과 같다.♣(1) 상래에 총히 세 뜻이 있으니 一은 하나를 들어 총히 五十二位♣(2)를 섭함이요 二는 一位를 들어 五位를 섭함이요 三은 초를 들어 후를 섭함이라. 다시 응당히 후로써 초를 섭함과 초후가 중간을 섭함과 중간에 초후를 섭함과 하나로써 일체를 섭함과 일체로 일을 섭함과 一로 一을 섭함과 일체로 일체를 섭함이 있나니 이치와 같음을 생각할지니라.
  위에서 이르대 初發心時에 문득 정각을 이룬다 함은 곧 바로 경문을 이끎이니 범행품에 이르대 “만약 모든 보살이 능히 이와같은 관행으로 더불어 상응하여 제법 가운데에 두가지 解를 내지 않으면 일체불법이 빨리 앞에 나타나서 초발심시에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서 일체법이 곧 마음의 자성인 줄 알아 慧身을 성취하되 他의 깨달음을 말미암지 않는다” 하니 이제 간략히 인용했을 뿐이라.

♣(1) 如四十二字門에 初阿가 具後茶也니라 ; 梵字42字에 대하여 『般若經』 無相皆空의 이치를 觀하는 것을 표시한 것인데,「入法界品」에서 선재동자가 45번째로 만난 衆藝覺동자의 법문으로 증명함이다. 중예각동자가 증득한 법문은 菩薩解脫門으로 善知衆藝法門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화엄경』「입법계품」에는 다음 같은 순서로 되어 있어 위에서 인용한 순서와는 같지 않다. 즉 1.아(阿) 2.다(多) 3.파(波) 4.차(者) 5.나(那) 6.라(邏) 7.다() 8.바(婆) 9.다(茶) 10.사(沙) 11.바(縛) 12.타() 13.야(也) 14.슈타(瑟) 15.카(迦) 16.사(娑) 17.마() 18.가(伽) 19.타(他) 20.사(社) 21.스바(鎖) 22.다() 23.사(奢) 24.카() 25.크사(叉) 26.스타(娑多) 27.즈나(壞) 28.르타(曷多) 29.바(婆) 30.차(車) 31.스마(娑) 32.흐바(訶婆) 33.트사(差) 34.가(伽) 35.타() 36.나(拏) 37.파(婆頗) 38.스카(娑迦) 39.이사(也娑) 40.스차(室者) 41.타() 42.라(陀)이다. 그러나 唐나라 때 不空이 번역한 『大方廣佛華嚴經入法界品42字觀門』에는 ‘阿’자로 시작하여 ‘타(茶)’자로 끝난다.

♣(2) 五十二位 ; 보살수행의 차제로서 보살의 단계를 52단계로 나눈 것이다. 즉 十信 * 十住 * 十行 * 十回向 * 十地 * 等覺 * 妙覺의 52위를 말한다. 앞의 51위는 수행의 因이고 뒤의 1위는 수행의 果이다.


 

然이나 此二無하니 以行布는 是敎相施設이요

圓融은 是理性德用이라

  그러나 이 두가지가 걸림이 없나니, 行布門은 敎相을 시설한 것이고, 圓融門은 理性의 德用이다.



然此二無碍下는 二에 會融也라 於中에 二니 初는 辨定其相이요 二는 正明會融이라 前中에 有二對하니 行布圓融은 以敎對理하고 以相對性이라 下正圓融이니 但融性相이니라
初對는 謂約能詮敎道인댄 則行布不同이요 約所詮之理인댄 則圓融無碍니라
第二對는 就所詮中하야 約相則深淺不同이요 約性則融通無二라  言德用者는 卽德相業用也라

  ‘然此二無’아래는 二에 會通하여 圓融함이다. 그 중에 둘이 있으니, 初는 그 相을 변별하여 정함이요, 二는 會通하여 圓融함을 바로 밝힘이다.
  전(辨定其相) 가운데 二對가 있나니, 항포(行布)와 圓融은 敎로써 이치를 對하고 相으로써 性을 對함이다. 아래는 바로 圓融門이다. 다만 性과 相을 원융할 뿐이다.
  初對는 能詮의 敎道를 잡으면 行布가 같지 않고 所詮의 이치를 잡는다면 원융하여 걸림이 없음을 말한다.
  第二對는 所詮 가운데 나아가서 相을 잡으면 깊고 얕음이 같지 아니하고, 性을 잡으면 융통하여 둘이 없다. ‘德用’이라 말한 것은 곧 德相과 業用이다.
 



相是卽性之相故로 行布가 不圓融이요 性是卽

相之性故로 圓融이 不行布니 圓融이 不行布

故로 一爲無量이요 行布가 不圓融故로 無量

爲一이며 無量爲一故로 融通隱隱이요 一爲無

量故로 涉入重重이니라

  相은 性에 즉한 相인 까닭으로 行布가 圓融에 걸리지 아니하고, 性은 相에 즉한 性인 까닭에 圓融이 行布에 걸림이 없나니, 원융이 항포에 걸리지 않기 때문에 一이 無量이 되고, 行布가 원융에 걸리지 않기 때문에 無量이 一이 되며, 무량이 일이 되기 때문에 融通함이 隱隱하고, 일이 무량이 되기 때문에  涉入함이 重重하다.



相是卽性之相故下는 二에 正明會融이라 文有三番하니 第一番은 直明無碍요 第二番은 更互相成이니 謂無量은 本是約相行布요 圓融은 本是一理平等이니 今圓融이 旣不碍行布라 故成無量之德이니라 下句는 反此니 可知로다 第三番은 從無量爲一故라

融通隱隱下는 明相成而不失本相이니 無量이 爲一故로 融通而不失本相이라 故로 隱隱然似有요 一爲無量故로 重重不失一相이라 故能涉入이니라


  ‘相是卽性之相故’아래는 二에 會通하여 圓融함을 바로 밝힘이다. 文에 三番이 있다. 第一番은 무애함을 바로 밝힘이요, 第二番은 다시 서로가 서로를 이루게 함이니, 無量은 본래 相이 行布임을 잡았고 圓融은 본래 一理가 평등함을 말한다. 이제 원융이 이미 항포에 걸리지 않으니, 그러므로 무량의 德을 이룬다. 下句는 이와 반대이니, 알 수 있다. 第三番은 무량으로부터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融通隱隱’아래는 서로가 서로를 이루게 하나 본래의 모습을 잃지 않음을 밝힘이다.무량이 하나가 되기 때문에 융통하나 본래의 상을 잃지 않는다. 그러므로 은은하여 그렇게 있는 듯하며, 하나가 무량이 되기 때문에 重重하지만 한 가지 모습(一相)을 잃지 않는다. 그러므로 능히 涉入한다.



 

故로 世親이 以六相圓融하시니 上下之文에

非一이니라

  그러므로 세친보살게서 六相으로써 圓融하시니, 상하의 文에 하나가 아니다.



故로 世親下는 第三引證이라 此는 引論證이니 卽總과 同과 成과 別과 異와 壞라 由此故로 得擧一全收하나니 至下廣明호리라
次에 云호대 上下之文에 非一者는 雙引經疏니 若望經則唯是下文이어니와 若望疏文인댄 通指一經上下耳니라

  ‘故世親’아래는 第三에 인용하여 증명함이다. 이는 論을 인용하여 증명함이니, 곧 總相*同相*成相*別相*異相*壞相이다. 이를 말미암은 까닭에 하나를 들면 전부를 거두어 들일 수 있으니, 아래에 이르면 자세히 밝히리라.
  다음에 이르길, “‘上下의 文이 하나가 아니다’라는 것은 쌍으로 經과 疏를 인용함이다. 만약 經을 바라보면 오직 아래의 글이지만, 疏文을 바라보면 통틀어 一經의 上下를 가리킬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