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華嚴經 懸談 ♣>/大方廣佛華嚴經疏鈔懸談

大方廣佛華嚴經疏演義鈔 卷第四 / [4]

화엄행 2009. 3. 27. 03:16

2006/11/11 오후 2:37

 

         大方廣佛華嚴經疏演義鈔    卷第四

             
淸凉山 大華嚴寺沙門 澄觀述


 第三에 扶昔大義者는 謂晉譯微言♣(1)이 幽旨包博

하고 玄義全盛하니 賢首方周라 故로 講得五雲凝空

하고 六種震地♣(2)하니라  

 而刊定記主는 師承이 在玆하야♣(3) 雖入先生之門

이나 不曉亡羊之路하야 徒過善友之舍라 猶迷衣內

之珠♣(4)
로다 故로 大義屢乖♣(5)하고 微言♣(6)將隱

이라 破五敎而立四敎♣(7)雜以邪宗♣(8)하야 使權

實不分♣(9)
하니 漸頓安辨이리요 析十玄之妙旨하야

分成兩重하니♣(10)
徒益繁多요 別無異轍이로다


  第三에 '扶昔大義'라는 것은 晉譯 『화엄경』에서
 
번역한 微言의 幽旨가 포괄적이면서도 넓고, 현묘

한 뜻이 온전히 치성하니, 賢首가 비로소 두루하였

다. 그러므로 강의함에 오색의 구름이 허공에 엉기

고, 六種으로 땅이 진동함을 감득하였다. 그러나

『刊定記』의 主가 賢首法師를 스승으로 모셨지만,

비록 선생의 문하에 들어갔으나 亡羊의 길을 밝히

지 못하고 헛되이 善友의 집을 지나쳐 버림이 마치

옷 속의 보배구슬을 모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大

義는 더욱 어긋나고, 微言은 장차 숨으려고 한다.

五敎를 파하고 四敎를 세우자 삿된 宗旨가 뒤섞어

權敎와 實敎를 불분명하게 하였으니, 어찌 漸과 頓

이 밝혀지겠는가? 十玄의 오묘한 뜻을 쪼개 나누어

이중으로 만드니, 헛되이 번다함만 더할 뿐이요 다

른 자취는 따로 없다.


♣(1) 晉譯微言 ; 晉代에 번역한 60권 『華嚴經』을 말함.

♣(2)
六種震地 ; 80권『華嚴經』이 번역되자 則天皇帝의 요청에 의하여 賢首가 新經을 강의하여 '華藏世界가 六種으로 震動하였다'는 구절에 이르자 五色 구름이 일고 강당과 사원이 육종으로 진동하였다고 한다.
 六種震動은 1.動 2.起 3.湧 4.震 5.吼 6.擊 이라 함.

♣(3)
師承이 在玆하야 ; 『刊定記』를 지은 혜원이 賢首의 법통을 이어 받은 사람이기는 하지만, 스승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했음을 말함.

♣(4)
衣內之珠 ; 『法華經』권4 「五百弟子授記品」에 나오는 비유이다. 즉 친구가 값을 따질 수 없는 보배구슬을 옷속에 넣어 준 줄도 모르고 이곳저곳으로 구걸하며 다녔다는 이야기.

♣(5)
大義屢乖 ; 『孝經』序에 ""슬프다! 夫子께서 돌아가시자 微言이 끊어졌으며, 異端이 일어나니 大義에 어긋난다."라는 말을 빌려 썼으나, '大義'의 뜻은 다르다.

♣(6)
微言 ; 聖人의 말씀을 微言이라 하는데, 즉 성인의 말씀은 微妙하고 玄妙하여 중생이 알기 어려우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7)
破五敎而立四敎 ; 賢首 法藏은 여래가 말씀하신 法이 깊고 얕음이 같지 않으므로, 이에 뜻을 잡아서 五敎를 세웠으니, 『華嚴經』만이 법계의 원융한 성품에 칭합하므로 一乘圓敎라고 교판하고, 나머지 經들은 小乘敎 * 始敎 * 終敎 * 頓敎라 하여 五敎를 세웠다. 그러나 혜원 법사는 현수의 오교를 파하고, 1.迷眞異執敎. 2.眞一分半敎 3.眞一分滿敎 4.眞具分滿敎의 四敎를 세웠음을 말한다.
 

♣(8)
雜以邪宗 ; 圓敎와 終敎를 第四의 眞具分滿敎로 삼고, 始敎를 第三의 眞一分滿敎로 삼고, 小乘敎는 第二의 眞一分半敎로 삼는다. 頓敎는 세우지 않으며, 또한 第一의 迷眞異執敎를 더하여 異敎에 해당시켰으므로 잡된 종지로 뒤섞였다고 한다. <會玄記>

♣(9)
使權實不分 ; 혜원의 四敎 중에서 第三은 權이고, 第四는 實이나 모두 滿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權과 實을 불분명하게 하였다'고 한 것이다.

♣(10)
析十玄之妙旨하야 分成兩重하니 ; 혜원이 二種十玄을 세웠으니, 이른바 德相과 業相의 二門을 세웠음을 말한다.


 使德相으로 而無相入相作하니 卽用之體가 不成이요 德相으로 不通染門하니 交轍之旨가 寧就아 出玄門之所以는 但就如明하야 却令相用二門으로 無由成異하고 以緣起相由之玄旨로 同理性融通之一門하야 遂令法界大緣起之法門으로 一多交徹而微隱하니 如斯等類가 其途實繁이로다
 非是重古輕今이요 不欲欺誣亡歿이니라 今申上古之義에 新疏?뺤옄多하니 有同刊定之文이나 皆是古義일새 今同用耳로다

 
德相으로 하여금 相入하고 相作함이 없게 하니, 用에 卽한 體가 이루어지지 않으며, 德相으로 하여금 染門에 통하지 않게 하니, 交轍의 뜻을 어찌 성취하리요? 玄門을 내는 까닭은 다만 眞如에 나가서만 밝히어 도리어 相과 用의 二門으로 하여금 다름이 이루어지는 因由를 없애 버렸고, 緣起가 서로 말미암는 玄妙한 뜻으로 理性이 圓融하게 通하는 一門과 같게 하여 마침내 법계의 大緣起의 法門으로 하여금 一과 多가 交轍하되 隱微하게 하였으니, 이와 같은 등의 種類가 그 길이 실로 번다하다. 
 옛(賢首) 것을 존중하고 지금(혜원) 것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니요, 돌아 가신 분(亡沒)을 속이려 함도 아니다. 이제 上古의 뜻을 폄에 새로운 疎가 도리어 많으니, 『刊定記』의 글과 같은 것이 있으나 모두 옛 뜻이니, 이제 한가지로 사용할 뿐이로다.



 第四에 截浮詞者는 且文華도 尙猶?뺤옄理어니 繁言이 豈不亂心가 科文이 過碎하야 已雜塵飛요 重疊經句에 但盈紙墨이라 等閒會於梵語는 無益經文이요 次第數於經文은 更無理觀이라 如煙鬱於火하며 雲?뺤옄長空이어늘 今竝裁而削之하니 若長風捲霧로다
 然이나 經多十句라 若過半已上은 難者則具釋之하노니 難則曲盡而非繁이요 易則略陳而不闕이니라 若五六句已下는 難者則摘句而釋之하고 易則不釋하며 若文義全易者인댄 大科而已요 若文易義難者는 總相收束하며 文難義易者는 但細消文하고 若文義俱難者는 出意而後釋하야 使質而不野하며 簡而必詣하노니 是本心也니라

  第四에 '截浮詞'라는 것은 우선 문체의 화려함도 오히려 이치를 가리는데 번다한 말이 어찌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겠는가? 科文이 지나치게 나누어져서 이미 티끌에 섞이어 흩날림이요, 經의 句節을 重疊함은 다만 紙墨만 채울 뿐이다. 한가롭게 梵語를 회통함은 經文에 이익이 없고, 차례로 經文을 세는 것은 다시 이치로 觀함이 없다. 마치 연기가 불을 막고 구름이 長空을 가리는 것과 같거늘 이제 아울러 그것을 자르고 깍으니, 마치 長風이 안개를 걷어냄과 같다.
 그러나 經에는 十句가 많으니, 만약 과반 이상이 어려운 것이면 그것을 갖추어 해석하였다. 어려우면 자세히 설명하되 번거롭지 않고, 쉬우면 간략히 설명하되 빠뜨린 것이 아니다.
 만약 五·六句 이하는 어려운 것이면 句를 지적하여 그것을 해석하고 쉬우면 해석하지 않는다. 만약 글과 뜻이 전부 쉬운 것이면 크게 科目만 할 뿐이다. 만약 글이 쉬우나 뜻이 어려운 것이면 總相으로 거두어들여서 묶고, 글이 어렵고 뜻이 쉬운 것은 다만 자세히 글을 해석하였고 , 만약 글과 뜻이 다 어려운 것이면 뜻을 나타내고 나서 뒤에 해석하여 질박하면서도 촌스럽지 않게 하여 간결하나 반드시 이르게 하니, 이것이 本心이다.



 第五에 善自他宗者는 謂昔人의 所引經論과 及破他義에 無問性相하고 多不窮始末하야 輒引輒破하며 或多用法相하나 而復盡呼爲權하며 引權釋實에 又不分通局하야 疑誤後學하며 或以昔正爲非하며 或復以權爲實이어니와 今亦反此하야 若破若引에 先示彼宗하야 使性相無虧하야 盡其意態하며 後申此理하야 對決分明하야 使學者로 不滯迹迷宗하야 謬非古義하고 亦無勞周覽하야 更復旁求로다

  第五에 '善自他宗'이라는 것은 '옛 사람이 經과 論을 인용하여 他義를 타파함에 性과 相을 묻지 않고, 흔히 始와 末을 궁구하지 아니하고 문득 인용하거나 문득 타파하였다. 혹은 흔히 法相을 사용하나 다시 다 權이라 부르며, 權敎를 인용하여  實을 해석함에 또 通함과 局執됨을 나누지 아니하여 후학들이 疑惑하고 誤解하게 하였다. 혹은 과거의 올바른 것으로써 그른 것을 삼았으며, 혹은 다시 權으로써 實을 삼았다. 지금은 또한 이와는 반대로 타파하거나 인용함에 먼저 저쪽의 宗旨를 보여서 性과 相으로 하여금 이지러짐이 없게하여 그 意와 態(모습)를 다하게 하고, 뒤에는  이쪽의 이치를 펴서 대결을 분명하게 하여 배우는 자로 하여금 자취에 걸리고 宗旨에 미혹하여 옛 뜻을 그르다고 잘못 알게 하지 않으며, 또한 두루 열람하여 다시 곁가지에서 구하는 수고로움이 없게 하였다.



 第六에 辨析今古者는 謂探玄本記는 但釋晉經이라 大旨雖同이나 在言有異하니 但引彼疏에 須觀所釋이니 如發心品에 晉經은 云 以是發心으로 卽得佛故라하며 唐經은 云 以是發心으로 當得佛故라하니 卽과 當이 旣別이어니 豈得引昔之卽하야 釋今之當이리오 觸類皆爾니라
 然이나 昔人이 十行已前은 多依賢首의 新修略疏하고 廻向已下는 竝用探玄하고 三地已下는 多唯錄古하니 二經小異에 舛互相參이라 文亦非一이라

 
第六에 '辨析今古'라는 것은 『探玄記』의 本記는 다만 晉經 譯本만을 해석하였기에, 大旨는 비록 같으나 말에 있어서 차이가 있으니, 다만 그 疏를 인용함에 모름지기 해석한 바를 살펴보아야 한다. 「發心品」을 견주어보면 晉經 譯本에 이르기를 "이 發心으로 곧 부처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으며, 唐譯 經本에는 이르기를 "이 發心으로 마땅히 부처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卽'과 '當'이 이미 다르니, 어찌 과거의 '卽'을 인용하여 현재의 '當'을 해석할 수 있겠는가? 부딪치는 일들이 모두 그러하다.
 그러나 옛 사람이 十行 이전은 흔히 賢首의 『新修略疏』를 의지하고, 「廻向品」 이하는 『探玄記』를 함께 사용하고, 三地 이하는 흔히 옛 것을 기록하기만 하였으니, 두 經本이 조금 달라 서로 어긋나며 서로 뒤섞였다. 글 또한 하나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