月田 張遇聖 화백
1912년 충북 충주 출생.
이열모(성균관대학교 교수)
우리 미술의 특성을 요약하면 담박한 운치라 하겠다. 이 특성은 유구한 세월을 두고 형성되어진 우리 민족의 정서이고 문화 그 자체이기도 하다. 우리의 예술이 동방삼국 중에서도 더 청운박질(淸韻朴質)한 것은 우리의 미의식이 그만큼 소박한 자연주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런 특성은 아무리 서구의 역동적인 미술양식과 박진한 표현수단이 우리를 엄습한다손 치더라도 우리의 체질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그대로 존속될 것이다. 담박과 운치는 우리의 숙명이라고 해도 좋을 우리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마치 조선백자나 분청사기가 우리 선조들의 숨결인 것처럼 말이다. 시대가 변하여도 지니고 가야할 가치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의 미적가치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볼 때 담박과 운치말고는 달리 떠오르지 않는다. 그만큼 여기에는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우리만의 아취가 담겨있는 것이다. 요즈음 흔히 내세우는 세계주의나 국제화가 예술에 있어 혼혈아적 무국적성의 지향이 아닌 다음에는 도리 없이 우리의 고유성을 들고 나아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고, 그렇게 볼 때 우리는 알게 모르게 경시해 왔던 우리의 전통예술에서 해답을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랫동안 우리는 일본의 식민정책과 해방후의 서구문명에 떠밀려 전통이라는 말만 나와도 무조건 외면한 것이 사실이다. 그 결과 우리의 문화는 한국성이라는 점에서 퇴영적이거나 왜곡된 전통이 판을 치는 꼴이 되었다.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월전선생이 80여평생을 두고 추구해온 작업은 바로 이 전통속에 담겨 있는 우리의 예술적 가치를 추출하여 오늘의 조형방식으로 재창조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미술가들이 전후이래 범람하는 외래사조에 매몰되어 자아상실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때 선생은 고고하게 지조를 지키면서 동양화 본연의 영역에서 화도를 닦아 왔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선생은 과거에 안주하거나 고루한 인습을 고집하지 않고 늘 참신하고 창조적인 작품세계를 펼쳐왔음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선생의 회화철학은 무엇일까를 생각할 때 나는 문득 회사후소(繪事後素)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 말의 뜻은 그림 그리기에 앞서 마음 바탕이 먼저 제대로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가에서 나온 이 말을 내가 처음 들은 것은 대학 2학년 때 월전 선생의 동양미술사 강의에서 였다고 기억된다. 그 당시엔 별로 대수롭지 않게 듣고 넘겼는데 40여년이 흐르는 동안 뜻은 점점 깊고 넓게 인식되어 진다. 뿐만 아니라 오늘과 같은 시대일수록 마음에 새길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후소(後素)에서의 素(소)자를 놓고 선생은 여러 가지로 해석한 기억이 난다. '희다'고 하는 뜻으로 볼 때 바탕이 순수하여 잡스러운 것으로부터 해방된 상태를 말하고, 공과 통하므로 아무욕심이 없고 티없이 맑은 청정한 상태 그러면서도 사물의 본질, 즉 '참'을 깊숙이 간직한 초연한 세계 이러한 자세가 갖추어진 연후에 비로소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것이다. 욕심이나 가식으로부터 마음을 비운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 우리네 범부에게는 지극히 감내하기 어려운 요구가 아닐 수 없다. 세속에 묻혀 살다보면 나도 모르게 자신이 탁류 속에 떠내려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현대라는 이 문명이 누구하나를 그냥 놓아두지를 않는다. 공동집단사회가 발달하면서 모두가 연계성을 갖고 타락의 공방자가 되고 만 것이다. 후소정신은 알고 보면 옛날 사대부들이 내세웠던 선비정신이기도 하다. 이 선비정신이 회화속에 용해될 때 격조 높은 문인화가 탄생하였고 당시 직업화가들로서는 범접못 할 고아하고 생동감 넘치는 남화의 세계를 창조하였다는 것을 안다. 또한 이것이 동양화로 하여금 쟁이나 얼치기들의 재주부림에서 벗어나 참다운 예술로 승화케 한 원동력의 구실을 한 것이다. 소박하면서도 우아하고 안으로 삭이면서 조금도 허세를 부리지 않는 도인(道人)다운 모습, 허명(虛名)이나 이재(利財)를 탐하지 않고 지조를 하늘 같이 하는 선비정신, 이 담백하기 이를 데 없는 명경지수(明鏡止水)의 경지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선생은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보여 주었으나 내게는 손이 미치지 않는 아련함 세계가 아닐 수 없다. 이 수도승 같은 고행의 길을 옛 선배들은 천명으로 알고 화도에 뛰어 들었기 때문에 현실을 극복하고 역사에 남을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고 본다. 월전선생이 우리에게 들려준 또 하나의 말씀은 도가의 무위사상이었다. 이것은 회사후소와 함께 동양 미술의 사상적 근간이 되는 것이겠는데, 인위적으로 식상해 있는 오늘의 문화를 벗어나서 자연으로 돌아가 자유자재 하는 마음으로 우주를 넘나드는 신선과 같은 광대무변의 세계인 것이다. 진리를 터득함에 있어 변증법적인 영역을 빌리지 않고 직관을 통해 다다르는 선과도 같은 세계, 이것이 바로 동양화 특히 문인화가 지향하는 기운생동(氣韻生動)이라고 할 수 있다. 변증법은 원래가 합리주의를 생리로 하는 서구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다. 무위사상은 이런 것보다는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인간본성을 무엇보다도 귀중히 여기는 해탈경(解脫境)이다. 아무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천의무봉의 벌거숭이 그 자체인 것이다. 이와 같은 높은 차원의 정신세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그것은 한낱 조악한 객기로 변질되기 쉽다. 더러들 회화의 기본을 무시한 채 아무렇게나 붓을 휘둘러 난잡하고 치졸하기 짝이 없이 그려 놓고 천진이라거나 호쾌 운운하는 예가 그것이다. 대개의 경우 이런 작가들은 매스컴과 결탁하여 더 패기 있고 혁신적인 작가로 군림하게 되고 대중은 그 그럴싸한 위장에 현혹되어 우롱당하게 마련이다. 이렇게 되면 애초의 무위사상은 오간데 없고 오히려 그 반대로 세속으로 치닫게 된다. 제작에 열중하기보다는 처세에 더 매달리게 되고 알찬 내용보다 허장성세로 이름내기에 더 급급하게 되어 순수하게 세상을 관조한다거나 예술의 참뜻을 음미하기는 어렵게 된다. 아무래도 예술가는 고독해야 한다. 세속을 멀리하다 보면 도리 없이 외로워지게 마련이다. 홀로 생각하고 고민하는 일없이 창작의 산고를 겪어 낸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독한 마음으로 고독 속에 묻힐 때 새로운 생명을 잉태할 수 있다. 예술은 종교와 마찬가지로 삶의 내적 실재를 다루는 것이지 형식을 다루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동양화는 서양화에 비해 더 내면적이다. 존재를 본질 보다 앞세우려는 실존주의와 달리 우리는 본질 그 자체를 중히 여긴다. 그렇게 때문에 동양화는 궁극적으로 정신주의의 특성을 지니게 된다. 월전선생은 그의 작품을 통해서도 후소정신과 무위사상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선생의 작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은연중 선비정신이 그윽이 배어 나옴을 알게 된다. 거기엔 한 점의 허세나 억지가 없는 잔잔한 운율의 번짐이 있을 따름이다. 안으로 농축된 깊은 사유가 조심스럽게 살포시 그것도 매우 간결하게 표출되고 있다. 선생의 작품은 화제와 관계없이 문인화적인 세계를 펼치고 있다. 선생이 즐겨 그리는 학이나 백로의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인물이나 정물 또는 산수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이나 그러하다. 거기엔 풍진 세상 저쪽에 있는 초연한 세계가 있다. 예로부터 학과 백로는 고고한 선비들의 기품과 곧잘 결부시켜서 해석되어 왔다. 선생이 학을 그린 소재성에서 오는 관념상의 의미보다는 선생 특유의 조형방식, 즉 간결하고 응축된 선으로 대상의 본질적 형태를 창출해 내고 그 주변에 긴밀한 조화를 이루는 여백을 설정함으로써 최대한의 여운을 유추해내는 화면처리에서 얻어지는 상념의 세계인 것이다. 이 고독한 인간상을 은유적으로 시사하는 학 그림뿐만 아니라 월전회화의 모든 영역에는 깊은 명상에서 얻어지는 선의 정적이 확산되고 있음을 느낀다. 지금 생각하면 선생은 예술가로서의 생이지지자(生而知之者)가 아닌가 한다. 아무런 현대 교육을 받은 바 없는 분이면서도 동양화가 빠지기 쉬운 고루함이나 진부함을 일찌감치 극복하고 전진적이고 현대적인 새로운 동양화를 개척해 낼 수 있다는 것은 천부적인 능력 아니고는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동양화의 현대화라는 과제를 놓고 더러는 서구의 조형방식이나 개념을 직접 모방하거나 변조하는 형식으로 해결하려는 시행착오를 범한데 반해 선생은 전통의 진수를 추출하여 더 본질화 함으로써 현대 미학이 지향하는 이른바 순수화와 직설화에 도달한 것이다. 선생은 해방이후 우리 한국화단에 참신한 바람을 불러일으킨 선구자이기도 한다. 작가로서 뿐만 아니라 교육자로서도 크게 성공하여 지금 그 이 기라성 같은 많은 제자들이 옛날의 가르침에 힘입어 한국화단의 중진으로 활동하고있고 각기 독창적인 세계를 개척해 나가고 있다. 이와 같은 교육자적 천성 때문에 선생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사지를 털어 법인체 미술관을 만들어 후학들의 연구의 장으로 내어놓았다. 또한 미술상을 제정하여 유망한 작가에게 창작의욕을 북돋우는 일과 정규강좌를 개설하여 중견작가들에게 올바른 동양정신이 무엇인가를 일깨우는 일 등을 통해 잊혀져가는 우리의 소중한 정신유산을 계승, 발전시키는 일에 남다른 집념을 보여주고 있다. 아직도 우리는 우리 후학들보다 더 정력적으로 제작과 교육에 전념하는 노화백의 모습에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1930 귀로
1935 조춘
1943 화실 1953 충무공 이순신 영정 1954 성모자
1968 노묘
1973 해바라기
1973 천죽
1974 집현전 학사도
1976 비상
1976 푸른 들녁
1978 매
1978 고향의 5월 1978 노송 1979 파도
1979 견우화
1979 水仙
1979 무지개 1979 소나기
1979 潮音 (조음)
1979 雲海 (운해) 1979 야매도
1980 백운홍수 1980 용문
1981 금붕어
1981 仲秋 (중추)
1982 八輻屛 (팔복병) 1983 寒涯 (한애)
1984 군학
1984 초해
1984 연꽃 1985 심청 1985 기독 부활상
1985 춘경
1987 가을
1987 귀관
1988 권금성에서
1988 수선 1987 추경
1992 학
1993 백로
1993 날저무는 평원
1993 날저무는 평원 1993 난 1992 낙엽 1993 운해 1993 백두산 천지 1993 단절 1993 갯벌 1994 곡예하는 침팬지 1994 오원대취도
1994 홍매
1994 바다
1994 추경
1994 남산과 북악 1994 폭포
1994 산과 달
1994 산
1995 산
1995 매 1994 산과 달
1996 가을 밤
김유신장군좌상-1977.
자화상-19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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