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의 향기 ♣>/♧ 문화와 예술 ♧

虞世南 558∼638

화엄행 2009. 4. 2. 14:36

우세남 (虞世南 558∼638)

 


虞世南《汝南公主墓志》

중국싸이트  http://www.artist.org.cn/artist/4/200509/23831.html

요약

중국 당나라 문인. 자는 백시. 웨저우 위야오현 출신.

설명

중국 당(唐)나라 문인. 자는 백시(伯施). 웨저우 위야오현[越州餘姚縣(월주여요현)] 출신.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옥편(玉篇)》의 저자인 고야왕(顧野王)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며 시문(詩文)에뛰어났다. 남조의 진(陳), 이어서 수(隋)나라의 양제(煬帝)를 섬긴 뒤 당나라로 돌아왔다. 남조 말기의 승려 지영(智永) 밑에서 왕희지(王羲之)의 서법(書法)을 공부하고 재능을 발휘하여 구양순(歐陽詢)·저수량(楮遂良)과 함께 초당(初唐)의 3대가로 불렸고, 계속 승진하여 나중에는 융싱현공[永興縣公(영흥현공)]으로 임명되었다. 태종(太宗)은 그를 덕행(德行)·충직(忠直)·박학(博學)·문사(文辭)·서한(書翰)의 5절(五絶)이 있다고 하며 높이 칭찬하였다. 필적(筆蹟)으로는 <공자묘당비(孔子廟堂碑)> <여남공묘지명(汝南公墓誌銘)> <적시첩(積時帖)> 등이 알려져 있다.


우세남(虞世南)558 - 638

중국 당나라의 서예가. 자는 백시(伯施)이고, 여요출신이다. 6조(六朝)의 진(陳) 때부터 서와 학재로 알려지기 시작하여 수의 양제를 받들었으나 그리 중용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당의 태종의 신임을 받아 홍문관 학사 비서감을 거쳐, 638년에는 은청광록 대부가 되었다. 왕희지의 서법을 익혀, 구양순 저수량과 함께 당초의 3대가로 일컬어지며, 이왕(二王)과 지영을 배워 원융(圓融 )하고 질박한 필치를 이루었다. 특히 해서의 제1인자로 알려져 있다. 태종은 우세남에게 서(書)를 배웠는데, <세남에게 5절( 五絶)이 있는데, 그 첫째는 덕행(德行), 둘째는 충직(忠直), 세째는 박학(博學), 네째는 문사(文詞), 다섯째는 서한(書翰)이다 > 라고 절찬하였다고 한다. <<공자묘당비>>가 그의 필적으로 가장 유명한데, 행서로는 <<여남공주묘지고 >> 가 있다. 또 시에서도 당시의 궁정시단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으며, 시문집 <<우비감집>>을 남겼다.
저술로 <<북당서초>> 160권이 있다.
구양순(歐陽詢)557 - 641
중국 당나라 초기의 서예가. 자는 신본(信本)이고, 담주임상 사람이다.
진(陳)나라의 광주자사였던 아버지 흘이 반역자로 처형된데다가, 태어나기를 키가 작고 얼굴이 못생겨서 남의 업신여김을 받 는 등, 어릴 적부터 불행한 환경을 참고 견디며 자랐다. 그러나, 머리는 유난히 총명하여 널리 경사(經史)를 익혔으며, 수양제를 섬게 태상박사가 되었다. 그 후 당나라의 고종이 즉위한 후에는 급사중(給事中)으로 발탁되었고, 태자솔경령 홍문관학사를 거쳐 발해남으로 봉해졌다. 그의 서명(書名)은 멀리 고려에까지 알려졌으며, 이왕(二王), 즉 왕희지 왕헌지 부자의 글씨를 배웠다고 하는데, 현존하는 <<황보탄비>> <<구성궁예천명>> <<황도사비>> 등의 비와 <<사사 첩>> <<초서천자문>>을 보면, 오히려 북위파의 골격을 지니고 있어, 가지런한 형태 속에 정신내용을 포화상태 에까지 담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의 글씨는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해법(楷法)의 극칙(極則)>이라 하며 칭송하고 있다. 그의 아들 통(通)도 아버지 못지 않은 서예가로서 유명하다.
구양순체는 구양순의 서체로서, 자획과 결구가 함께 방정(方正)하고 근엄하여 한 자 한 자를 쓰는 데에 순간이라도 정신적 이 완을 불허하는 율법적인 특색을 가진다.
구양순은 왕희지체를 배웠지만 험경(險勁)한 필력이 왕희지보다 나아서 자신의 독창적인 서체를 창안했다. 구양순의 서적은 비 서(碑書)와 서첩으로 전해지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말부터 고려 초까지 왕희지체가 무색할 정도로 구양순체가 유명하였다.

출처 : Tong - khs1144님의 기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