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馮承素(627 ~ 649)의 《王羲之 蘭亭集序》 摹本 횡권 전체

화엄행 2009. 4. 2. 14:38

2007/12/29 오후 8:15 | 기타 관련자료 모음

王羲之蘭亭集序(馮承素摹本) 횡권 전체


중국싸이트 설명
http://www.dpm.org.cn/big5/phoweb/Relicpage/2/R895.htm

馮承素(627 ~ 649)

慕名而至香港藝術館欣賞國寶,那知售票處人頭湧湧,清明上河圖專館參觀時間每小時發售....結果是一干人等決定跑去飲杯茶、食個飽。

酒酣飯飽後,老邦跑回頭再看,專館是沒望了,但因為有博物館全年通行証,還可以大模斯樣不費一分一毫去看其他國寶。

國寶中有書有畫,自問對國畫毫無認識,細看是美,卻說不出所之然。反而書法真的令人看得痴醉,如顏真卿的真跡,確看得出那股氣勢。下期展覽會有蘇軾、黃庭堅及米芾之書法,實不容錯過。

今期老邦至愛莫過於唐朝馮承素的「行書摹蘭亭序帖卷」。馮承素是奉唐太宗之命用鬼斧神工之筆觸去摹王羲之的蘭亭序帖卷,真是影印一樣。原作是王羲之最巔峰的作品之一,惜真跡已成為唐太宗的陪葬品,所以此版本更為珍貴了。

小插曲-當老邦在欣賞行書摹蘭亭序帖卷時,有對老夫婦也在看,老婦看了兩眼即批評說:「字大字細唔整齊,又塗黑了一些字,墨色又深又淺,都唔明有什麼好睇!」”啤”一聲之餘,老邦一樣唔明她為什麼在此處存在,只希望她盡快消失!

자료출처 http://hk.myblog.yahoo.com/jw!hhNimEGXCRiNcrHpj8BrEl_xHJ.j/article?mid=220


丧乱帖(行草)晋 王羲之



奉橘帖(行书)晋 王羲之


  

虞世南                                                         虞世南《汝南公主墓志》



楮遂良 - 雁塔聖教序


次辩才韻诗帖(行书)宋 苏轼



난정서에 얽힌 이야기

 

분방하나 높은 기품을 담고 있는 난정서의 우아한 행서체 서법은 꾸밈이 없으면서 자연의 유창한 묘를 간직하고 있다 해서 당시는 물론 후대에 이르기까지 천하의 법서제일(法書第一), 또는 고금제일의 일품이라고 칭송을 받고 있다. 왕희지 자신도 이 작품을 아껴 애장하고 있다가 죽으면서 자손에게 물려 주었다. 자손들이 가보로 삼아서 대대로 간직해 오다가 7대손인 지영(智永)선사에게로 전해졌다. 지영 선사는 수나라 말경 회계의 영흔사에서 백 살 가까운 나이에 입적했으므로 줄잡아 250년 동안 왕씨 집안의 가보로 이어져 온 셈이다.


 

지영 선사는 여러 가지 서체에 능하며 특히 초서에 뛰어나 글씨를 쓰기 시작한 지 30년에 진초천자문(眞草千字文)을 써서 이로써 이름을 이룬 당대의 명필가였다. 승려로서 속가에 후사가 없는 지영 선사는 입적할 때, 제자인 변재(辯才)선사에게 난정서를 아무도 모르게 넘겨주었다. 변재 선사 또한 남방의 귀족 출신으로 글씨와 그림의 대가였다. 그러므로 스승의 기대에 어그러짐이 없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변재 선사는 절간의 대들보에 남모르게 홈을 파고 난정서를 깊숙이 감추었다. 그런데 난정서를 집요하게 찾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천하를 쥐고 호령하는 당태종 황제였다. 태종은 당나라 초기의 4대 명필 중 한 사람인 저수량(篩遂良)과 우세남(虞世南)에게서 글씨를 배워 가히 명필이라 할 필적을 남긴 인물이다.


 

왕희지의 글씨와 깊은 관계를 지닌 스승 두 사람에게서 글씨를 배운 태종은 자연히 왕희지의 글씨를 흠모하게 되었다. 왕희지의 전기를 태종 스스로 지은 것을 보아도 태종이 얼마나 왕희지와 그의 글씨를 흠모했는지를 알 수 있다. 태종은 그 전기에서그 점과 선의 아름다움, 전체의 오묘함, 노을이 자욱한 듯,이슬이 맺힌 듯, 끊어진 듯하다가 이어지고 ,봉황이 날고 용이 서린 듯, 기운듯 하나 어느새 바른 자세로 돌아온다. 손에 들고 완상하면 시간 가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보면 그칠 줄을 모른다. 흠모하는 마음을 좇아 손이 스스로 따라 가는 것은 이 사람(왕희지)을 두고는 없다. 그 밖의 구구한 무리는 말할 것이 못 된다.”고 절찬을 아끼지 않았다.


 

태종은 왕희지의 작품이면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가리지 않고 모두 수집을 하기로 하였다. 천하의 사람들이 왕희지의 작품이라고 하는 것을 헌상하였고 저수량이 그것들을 감정하였다. 그 결과 상당 수의 위작이 섞여 있었지만, 황제의 힘으로 수집하는 것이니 천하에 남아 있는 왕희지의 유작은 모두 망라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2,290점이 수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직 한 점이 보이지 않았다. 바로 난정서였다. 태종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난정서를 찾으라고 신하들에게 명했다. 신하들이 눈에 불을 켜고 난정서를 소장했을 만한 왕희지의 후손은 물론 , 난정집에 시를 쓴 명사들의 후손까지 샅샅이 추적했으나 일말의 단서도 잡지 못했다.


 

안달이 난 태종이 우세남을 불러, “그대는 왕희지의 서법을 잘 아느니만큼 난정서를 소장할 만한 사람을 알 것 아닌가.”라고 꾸중 섞인 불만을 토로했다. 우세남은 스승인 지영 선사의 성품으로 보아서 제자인 변재 선사에게 전했을 가능성이 있으리라 짐작은 하면서도 스승을 배반할 수 없어서 그 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나 황제의 꾸중을 듣고 보니 황제를 속이는 것은 대역이라 입을 닫고 있을 수가 없게 되었다. 우세남은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리면서 변재 선사가 소장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태종은 쾌재를 불렀다. 태종은 지체하지 않고 변재 선사를 회계의 영흔사로부터 장안의 황궁으로 불러 올렸다. 태종은 장안의 황궁으로 불러 온 변재 선사를 며칠 동안 극진히 대접했다. 그런 뒤에 이런 저런 한담을 하는 자리에서 자기의 속마음은 감추고 넌지시 난정서로 이야기를 가져 갔다. 난정서의 행방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떠보는 태종에게 변재 선사는,“옛날 소승이 은사이신 지영 선사를 모시고 있을 때는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은사스님께서 입적하신 뒤에는 전란(수나라 말에서 당나라 초기의 10여 년 간의 전란을 말함)으로 온통 세상이 뒤엎어지고 혼란해서 어디로 갔는지 행방을 모르고 있습니다.”할 뿐, 태종은 기대하는 대답을 전혀 듣지 못했다.


 

태종은 황제가 원하면 목숨이라도여기 있습니다하고 내 놓을 것을, 연막을 치는 것이 얄미웠다. 그러나 황제의 체면에 마음 속을 내어 보일 수도 없고 무작정 내 놓으라고 힘으로 강요할 수도 없어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며칠을 더 변재 선사의 심중을 더듬다가 지친 태종은 변재 선사를 영흔사로 돌려 보내고 말았다. 그러나 미련을 버릴 수가 없어 여러 경로를 통해서 다시 알아 본 결과, 변재 선사가 숨기고 있으리라는 심증이 더욱 확실했다. 그래서 태종은 변재 선사를 황궁으로 다시 불렀다. 두 번 세 번을 불러서 물어도 대답은 한결같이모른다는 것이었다.


 

태종은 드디어 역정을 내고 말았다. 황제를 속이는 것은 죽음인데도 황제의 역정 앞에서 변재 선사는 미동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태종은 황제의 힘으로도 하는 수 없어 변재 선사를 돌려 보냈다. 그리고 신하들 앞에서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이 난정서인데 저 늙은 화상은 똑같은 소리만 중얼거리니 배알이 뒤틀린단 말씀이야. 무슨 좋은 수가 없겠는가.”하였다.

 

이때, 명안을 낸 사람이 지모(智謀)에 뛰어난 재상 방현령(房玄齡)이었다.

감찰어사(監察御使)중에 소익(蕭翼)이란 자가 있습니다. ()나라 원제(元帝)의 증손이 되는 자입니다. 이 자는 발이 마당발입니다. 일을 처리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닙니다. 입 또한 걸어서 만담가를 뺨칩니다. 취미는 다양해서 글씨와 그림은 물론 여러 가지 예능에 대해서 상당한 안목을 가지고 있는 자입니다.이 자를 부려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태종은 즉석에서 소익을 불러 오라 명했다. 불려 온 소익은 자초지종을 듣고 나서,

 

공무를 띤 칙사로 가는 것은 싫습니다. 어디까지나 저의 사적인 일로 맡겨 주십시오. 그리고 이왕〔二王. 왕희지 아들(獻之)도 글씨의 명가여서 예부터 이 부자를 二王이라 불렀다〕의 글씨를 두세 점 빌려 주셨으면 합니다.”라고 조건을 달았다.

 

태종은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난정서만 손에 들어 온다면 이왕의 글씨 두세 점과 바꿔도 좋다는 생각이었다.

소익은 허름한 차림으로 혼자서 잠행을 해서 회계에 도착했다. 저녁 무렵영흔사를 찾아 간 소익은 이곳 저곳 벽화와 주련을 돌아 보면서 절 안을 기웃거리다가 변재 선사의 방장(方丈)으로 갔다. 소익은 먼저 정중한 인사를 건넨 다음,

 

저는 북쪽에서 온 사람입니다. 좀이 쓸지 않는 화선지를 팔고 다니면서 절을 찾아 참배하는 사람입니다.”

변재 선사는 좀이 쓸지 않는 화선지에도 관심이 있었으나 절을 참배하고 다니는 것이 기특해서 이것 저것 말을 시켜 보니 씨가 먹혔다. 집안으로 들어오라 해서 바둑을 두고 주사위를 놀고 투호(投壺)를 하고 거문고를 타는데 못하는 것이 없다. 그래서 이번에는 학문에 관해서 이야기를 꺼냈더니 소익의 지식이 넓고 깊어 변재 선사의 마음에 들었다. 두 사람은 곡차를 마시고 시를 지으면서 밤을 새웠다. 이런 저런 일이 몇 번 거듭되는 사이에 두 사람은 이내 의기투합하는 사이가 되었다.


 

어느 날 , 소익이 양나라 원제의 그림을 한폭 가져와서 보여 주었다. 변재 선사는 거듭거듭 그림을 칭찬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서화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 받게 되었다. 소익이

저는 어려서부터 이왕(二王)의 진서(眞書)를 좋아해서 지금도 두어 점 가지고 있습니다.”하였다.

 태종에게서 빌려 온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변재 선사는 기뻐하면서

그럼 내일 가져와서 보여 주시겠는가?”했다.

다음 날 , 소익이 가져 와서 보여 주자 변재 선사는 첫 눈에

 “오, 이것은 진품이야. 그러나 썩 잘 된 작품은 아니로다. 이 미납(迷衲)도 한 점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야말로 대단한 것이지.”

익은 조급해지는 마음을 누르고 어떤 작품입니까?”하고 물으니 드디어

난정서다.”

라는 대답이 나왔다.

소익은 일부러 웃으면서,

 

설마하니,그 오랜 전쟁의 난리통에 난정서의 진적이 남아 있다는 말씀입니까. 반드시 모사품일 것입니다.”

 

이에 변재 선사는 정색을 하고

 

무슨 말씀을... 지영 선사께서 입적하시기 직전에 나에게 맡기신 터라 틀림이 없지. 무엇하면 내일 보여 주겠네.”

 

다음 날 소익이 오자 변재 선사는 대들보 위에서 난정서를 꺼내 보여주었다. 소익은 찬찬히 들여다 보다가 먹이 튄 흠집을 찾아서 가리키며

 

 “여기를 보십시오. 역시 가짜가 틀림없습니다.”했다.

변재 선사는 진품이라 주장하고 소익은 가짜라고 되받아 치는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결론이 나지 않은 채 소익이 돌아 간 뒤, 가짜라고 주장하는 소익이 훔쳐 가리라고는 생각을 못한 변재 선사는 난정서를 탁자 위에 그대로 두고 외출을 했다. 그 틈을 노린 소익이 되돌아 와 탁자 위의 난정서를 들고 한달음에 가까운 관아로 달려 갔다.


 

난정서를 받아 든 태종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태종은 소익의 벼슬을 원외랑(員外朗)으로 승진시켰다. 그리고 그것으로는 모자라 장원과 저택, 훌륭한 안장을 감춘 명마 두 필, 값비싼 주옥이 가득 박힌 금병과 은병,역시 주옥이 박힌 마노 찻잔을 하사하였다. 도둑질을 한 감찰어사에게 파격적인 포상을 한 태종은 변재 선사를 비웃었다.

 

괘씸한 늙은이, 굴러 온 복을 제 발로 걷어차버린 석두 주제에 감히 짐을 속이다니.”

천하만민이 황제의 권력에 줄을 대지 못해서 안달을 하는데 황제가 난정서를 구하는 절호의 기회를 버린 어리석음을 석두라고 비웃은 것이었다. 그리고 태종은 황제를 속인 죄는 죽음이지만 그 비웃음으로 노기를 달랬다. 죽음은 면했으나 정작 딱하게 된 사람은 변재 선사였다. 돌아와서 난정서를 도둑맞은 것을 안 변재 선사는 그 자리에 졸도하고 말았다. 목숨 다음으로 소중한 난정서를 농락을 당한 끝에 도둑 맞았으니 팔십 평생의 삶이 한 순간에 허물어진 것이다.


 

깨어난 변재 선사는 그 날로 곡기를 끊었다. 그리고 벽을 향하고 앉아서 밤낮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열흘이 되는 날 , 선사는 입적했다. 이 소식을 들은 태종은 미안했던지 비단 3천 필과 쌀3천 석을 보냈다. 영흔사에서는 이것으로 웅장하고 아름다운 3층탑을 세웠다. 태종은 난정서를 소익에게서 받자 저수량에게 임모본(臨模本)을 만들게 하고 이 임모본을 바탕으로 조모(趙模)와 풍승소(馮承素 )로 하여금 여러 벌을 모사하게 하여 신하들에게 하사하였다. 지금 세상에 남아 있는 난정서는 이 모사본들이다.

임종을 앞둔 태종은 황태자 이치(고종)를 불렀다.

 

"나는 너에게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주고 가지만 하나만은 물려주고 싶지 않다. 내가 바라는 것은 난정서 하나뿐이다. 황천으로 가는 길에 가지고 가고 싶다"  

 

이렇게 해서 정작 난정서 진적은 당 태종이 죽어서 관에 넣어 가지고 감으로써 이승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그것을 역사는 순장(殉葬)이라고 기록했다.

 

-모셔온 글을 꾸며 보았습니다, 운학 박경동)-
http://blog.daum.net/woon-hak01/10580886

乱帖(行草)晋 王羲之

 


王羲之蘭亭集序(馮承素摹本)1


王羲之蘭亭集序(馮承素摹本)2


王羲之蘭亭集序(馮承素摹本)3


王羲之蘭亭集序(馮承素摹本)4


王羲之蘭亭集序(馮承素摹本)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