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의 향기 ♣>/♧ 문화와 예술 ♧

正祖御眞

화엄행 2009. 4. 2. 10:06

 

 

 

 

 




국왕의 초상화인 어진(御眞)에서 '진(眞)'이란 터럭하나, 곰보자국
하나라도 완전하게 표현하려 했던 우리 초상
화의 성격을 읽어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초상화는 정확성에 그 초점을 맞추었던 것이다.
또한 인물의 모습뿐만
아니라 그 사람만의 특징이나 성격을 정확
히 파악하여 화면에 담아야 했기 때문에,
'정신을 옮긴다'는 뜻으로
'전신(傳神)'이라는 개념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22세(1773년)의 세손시절에 영조의 명에 의해 초상화 1벌을 그렸
으나 자신이 보
기에 참된 모습이 없다고 판단하여 없애게 하였었다,
정조가 국왕으로 등극한 이후 처음으로 어진을 그린 해는
1781년(정조 5년) 가을로 주관화사를 한종유로 하고,
동참화사로 신윤복의 부친이었던 신한평김홍도로 임명
하였다.
총감독은 영조의 어진을 그렸던 표암 강세황으로 하여금 하게 하였으니 당대 최고의 화가들이 모두 모
인 것이다.


이들 역시 처음 국왕의 용안을 그리는 것이라 정조의 위엄에 눌려
제대로 그림을 그리지 못하였다.
이들은 오랫
동안 습작을 한 후 국왕의 일반적인 어진인 익선관과 곤룡포를 입은 모습으로 정조를 그렸다.
이 어진은 규장각
주합루에 봉안되었으며 주관화사인 한종유가
용안(얼굴)을 그리고 김홍도는 곤룡포를 그린 것으로 '승정원일
'는
기록하고 있다.
정조는 영조가 생전에 10년마다 한번씩 어진을 그린 것을 따라서 자신도 10년마다 한번씩
어진을 그리기로 계획했다.

 

그래서 1791년(정조 15)에 주관화사를 이명기로 하고 김홍도
동참화사로 하여 원류관에 강사포 차림의 어진
으로 그렸다.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가 이명기였기 때문에 그를 용안을 그리는 주관화사로 한 것이었다.
이 어진
역시 규장각 주합루에 봉안하게 하였다.
이때 융복과 전립의 어진을 한 본 더 만들게 지시하였다.
이 어진이 바
로 훗날 화령전에 봉안된 어진이었다.
정조는 1792년(정조16) 1월 29일에 융복과 전립을 쓴 어진을
현륭원 재
실 어목헌에 봉안하게 하고,
어목헌을 어진봉안각이라 명하게 하였다.

 

하지만 이것이 정조 어진의 마지막이었다.
10년마다 그리기로 계획한 해는 바로 1801년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정조가 그렇게 빨리 돌아가지 않으셨으면 이듬해 한번 더 어진을 그렸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조선 제22대 임금이었던 정조(재위 1776 ~ 1800)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던 건물이다.
23대
임금 순조는 아버지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본받기 위하여
순조 1년 (1801)에 수원부의 행궁 옆에 건물을 짓고
화령전이라 하였다.


정조는 자신의 어진을 1792년 1월에 현륭원 재실 어목헌(御牧軒)
에 봉안하게 하고 5월에 어목헌을 어진봉안각
(御眞奉安閣)이라 명
하게 하였다.
이처럼 정조의 어진이 현륭원에 봉안되어 있다가 1800년 6월 28일 정조가 갑
자기 돌아가시자 한달 여만인 7월 27일 조정에서 이 곳의 어진에 대한 처리가 논의 되었다.
결론은 정조가 화성
유수부(수원)에 대한 특별한 사랑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화성행궁 인근에 어진봉안전을 따로 설치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먼저 화성행궁 유여택에 어진을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현륭원의 어진봉안각에 있던 어진이 12월 6일에 화성행궁으로 오게 되었다.
유여택에 모신 어진의 표제(標題)를,
'정종 문성 무열 성인 장효대왕
의 춘추 40세 때 어진으로 즉위한 지 15년 되는 신해년 가
을에 그렸다.
'正宗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 春秋四十歲
眞 卽 十五年
辛亥秋 圖寫'
는 28자의 표제로 받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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