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의 향기 ♣>/♧ 문화와 예술 ♧

朝鮮 3大 書藝家 및 秋史體

화엄행 2009. 4. 2.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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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 3大 書藝家 및 秋史體

 



 

안평대군의 행서

’를 보통 사람들은 ‘어렵다’고 한다. 이는
자주 접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글씨가 무턱대로 어려운 것만도 아니고 그렇다고 쉬운 것도 아니다. 글씨가 처음부터 어떤 고유한 틀을 가지고 있지 않았듯이 글씨를 처음 보고 감상할 때 그저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면 된다. 어떤 것이든 처음부터 제대로 알아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진(晋)나라 때 왕희지(王羲之)에 이르러 여러 글씨체가 완성되고, 당(唐)나라에서는 이 진나라 때 글씨를 기본으로 그 이전의 글씨를 아울러 각 개인의 독특한 서체를 만들어 썼다.

이들이 그 유명한 구양순(歐陽詢), 우세남(虞世南), 저수량, 안진경(顔眞卿) 등이다. 이때 이들에 의해 해서(楷書)의 틀이 완성되면서 이 글씨가 그 후의 모든 글씨의 근간을 이루었고 이를 토대로 새로운 글씨의 서풍이 발전했다.

여기에 소개하는 첫번째 글씨는 조선시대 3대 서예가를 꼽을 때 첫째를 차지하는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의 글씨다.

이 글씨는 원나라 때 최고의 서예가이자 시서화(詩書畵)를 같이 잘해 일세를 풍미한 송설(松雪) 조맹부의 글씨를 기본틀로 한 글씨로, 보통 송설체라 부른다. 이 송설체는 조선초부터 임진왜란 당시까지 약 200여 년간 글씨의 근간을 이루고 발전해왔다. 이 서체의 특징은 부드러우면서 힘차고 아름답고 화려하면서도 잘 정돈된 느낌을 준다.


한석봉의 해서체

안평대군의 이 글씨는 이 특징을 거의 그대로 지니고 있으면서도 더더욱 탁 트이고 날렵한 자태를 보인다.

두번째 글씨는 석봉(石峯) 한호(韓護)의 글씨다. 석봉은 여러 문헌에 많은 글들이 전해지나 그의 진면목을 보기란 쉽지 않다. 그의 진면목은 해서의 사자관체 글씨이기 때문이다. 사자관체는 외교문서와 관공문서를 쓸 때 규격에 맞게 방정하고 고르게 써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중국 청(淸)나라에서 과거를 볼 때 과시의 글씨를 중요시하여 오(烏:짙은 먹으로 씀), 광(光:빛이 나야함), 방(方:규격에 맞게 써야함)을 중시한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석봉은 이전에 유행하던 송설체에다 그 위로 진의 왕희지 글씨를 받아들여 나름의 독특한 서풍을 이루었다. 이것을 석봉체라 한다. 이 글씨를 자세히 보라. 방정한 느낌이 들면서도 앞의 안평대군 글씨보다는 장중한 모습이 보인다.


원교 이광사의 행서체[칠언고시]

또 조금 둔해 보이기도 하고 탁 트인 느낌이 없다. 이 글씨가 조선후기의 관공서에서 쓰는 모든 문서의 기본 글씨가 되었다. 사자관체라든가 또는 관각체라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한석봉 이후 왕희지 및 그 이전의 글씨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는 새로운 서예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옥동(玉洞) 이서, 백하(白下) 윤순(尹淳) 등으로 이어져서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에 이르러서 어느 정도 기틀을 마련한다. 그 대표적인 주자가 백하의 제자인 이광사인데 이 세번째 글씨가 바로 그의 글씨다.

삐뚤하며 울퉁불퉁하고 쭉쭉 바로 내리기도 하고 사선으로 내려 긋기도 하고 마치 미친듯한 사람이 마구 써갈긴 것 같지만 힘이 들어가 보이고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글씨는 추사체가 나올 때까지는 한석봉체와는 달리 조선 후기 글씨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제는 추사체 얘기로 끝을 맺을까 한다. 추사체는 그 이전에 난무했던 여러 서체의 모든 장점을 취하고 거기에 그동안의 공부가 한데 어울려 이루어낸 독창적인 글씨체다.

추사체의 장점은 모든 글씨체, 즉 전서·예서·해서·초서 등 모두를 한데 섞어 쓰면서도 어색함이 없고 힘이 느껴지며 한 자 한 자 뜯어보면 뭔지 모르게 멋있게 보인다. 이 글씨를 처음 보면 사람들은 무엇이 그리 좋아 ‘추사체, 추사체’ 하는지 잘 모를 것이다. 이 경지를 알려면 많은 좋은 글씨를 봐두어야만 한다. 이런 것이 추사체의 특징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