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의 향기 ♣>/♧ 문화와 예술 ♧

鵝 池 ☞ 換 鵝 經 ☞ 換 鵝 亭

화엄행 2009. 4. 2. 09:59

鵝 池 ☞ 換 鵝  經 ☞ 換 鵝 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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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천 번이나 붓을 빨았을까?

[오마이뉴스 조영님 기자]
왕희지의 서법을 칭송한 국내외의 유명한 서법가들의 석각이 즐비하다.
ⓒ2007 조영님
6월 15일. 오전 6시 30분에 연대대학 기숙사를 나와서 택시를 타고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임기시로 향하는 버스는 8시에 출발했다. 버스 안내양에게 몇 시간이 걸리느냐고 물어보니 '7시간 30분'이 걸린다고 하였다. 연대에서 임기까지 거리로는 460km가량 된다고 하였는데 7시간이 넘게 걸릴 줄은 몰랐다.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그렇다고 내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차 안에서 아들과 함께 카드놀이 하다가, 또 간식거리로 싸 가지고 간 과자와 음료수를 먹다가, 또 깜빡 졸다가, 다시 깨어서 책을 보다가, 다시 창 밖을 보았다. 이렇게 하기를 서너 차례 하고 나니까 '임기시'에 도착하였다. 오후 3시 40분이었다. 늘 하던 대로 버스터미널에서 임기시 지도를 하나 사 들고 우리들의 첫 번째 목적지인 '왕희지고거(王羲之故居)'로 향했다.

'시는 이태백이요, 글씨는 왕희지라'라는 말이 있듯이, 왕희지는 서법에 있어서 가히 동양에서 최고라고 칭할 만한 인물이다. 왕희지(王羲之 303~361)는 낭야(琅琊)군 사람이다. 낭야군은 지금의 임기시가 되는 곳이다. 왕희지는 우군장군(右軍將軍), 회계내사(會稽內史)라는 벼슬을 지냈기 때문에 '왕우군(王右軍)' 혹은 '왕회계(王會稽)'라고 불리기도 한다.

왕희지는 해서, 행서, 초서 등 모든 서체에 능통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후대인들은 왕희지를 두고 '서성(書聖)'이라고 칭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대표적인 작품 중에 '난정서(蘭亭序)'가 있다.

우리가 찾은 이곳은 바로 왕희지가 유년 시절을 보냈던 곳이라고 한다. 연초록의 버드나무가 실처럼 늘어져 연못가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고, 곳곳에 기암괴석이 있어 길손의 눈길을 끌었다. 이곳의 풍광은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우리는 먼저 '묵화헌(墨華軒)'을 지나갔다. 이곳에는 국내외의 유명한 서법가들의 서법 석각(石刻) 80여 개가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대개 왕희지의 글씨에 대하여 칭찬하는 표현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 중에는 한국의 서법가인 '김인규(金仁奎)'씨의 작품도 있었다. 문화 해설가가 몇몇의 중국인들을 데리고 설명을 하다가 나를 보고 '김인규'라는 사람을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서법에 대하여 문외한인지라 이 분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어서 조금 미안하였다. 이 분이 쓴 글은 '행주좌와연화대 처처무비극락원(行住坐臥蓮華臺 處處無非極樂園)'이라는 것이었다. 즉 '연화대에서 행주좌와(行住坐臥)하노라니 곳곳이 모두 극락원이로다'라는 뜻이다.

묵화헌을 다 보고나서 다리 하나를 건넜다. 아주 조그마한 다리지만 이 다리에도 사연이 있다. 다리의 양 쪽에는 임기시가 낳은 일곱 명의 유명한 효자에 대한 고사가 적혀 있었다.

이를테면, 병이 든 계모가 잉어를 잡수시고 싶어 하자 효성이 지극했던 왕상(王祥)이 잉어를 얻기 위해 한겨울 꽁꽁 언 얼음 위에 누웠는데, 왕상의 지극한 효성에 감동하여 잉어가 얼음 속에서 뛰어나왔다고 하는 고사가 적혀 있다. 왕상은 효자의 대명사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위의 왕상은 바로 왕희지의 백증조부가 된다고 한다.

왕희지가 벼루를 씻은 '세연지'

▲ 버드나무가 우거져 운치를 더하고 있는 ‘곡교(曲橋)’. 다리에는 옛날 효자에 대한 기록을 볼 수 있다.
ⓒ2007 조영님
다리를 지나면 '낭야서원(琅琊書院)'이 보인다. 명나라 때에 처음 건축되었다고 하는 이곳에서는 왕희지의 '난정서(蘭亭書)', '낭야첩(琅琊帖)' 등과 같은 유명한 글을 볼 수 있다. 물론 진품은 아니다. 서원 앞에는 책을 펴서 말렸다고 하는 '쇄서대(曬書台)'라고 하는 비가 있다. 여러 차례의 전란을 거쳐 폐허가 된 것을 기록에 근거하여 1991년에 다시 중건한 것이라고 한다.

서책은 그 재질이 종이이다 보니 오랫동안 폐쇄된 공간에 보관하게 되면 좀이 슬거나 습기가 차서 눅눅해지기가 쉽다. 그래서 책을 오래도록 잘 보관하기 위해 책을 햇볕에 쏘이는 일을 하였는데 이것을 '쇄서(曬書)', 혹은 '포서(曝書)'라고 한다. 대개 7월 7일경에 많이 하였다.

▲ 낭야서원 앞의 ‘쇄서대(曬書台)’. 이곳에서 왕씨 집안사람들이 책을 펴서 햇볕에 말렸다고 한다.
ⓒ2007 조영님
쇄서대 앞에는 어린 시절 왕희지가 글씨 연습을 하고 벼루를 씻었다고 하는 '세연지(洗硯池)'라는 연못이 있다. 세연지 앞의 아담하고 작은 누각에는 '세연지(洗硯池)', '진왕우군세연지(晉王右君洗硯池)'라고 쓰여진 두 개의 비석이 있다.

연못의 물빛이 검다. 사람들은 왕희지가 어린 시절 벼루를 씻고 붓을 빨았던 곳이라서 지금까지도 물빛이 검다고 말한다. 정말 그럴까?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평범한 한 사람에 불과했던 왕희지라는 이름 석 자에 '서성(書聖)'이라는 칭호가 붙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먹을 갈았을까?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을 공들여 붓을 놀렸을까? 또 세연지에서 몇 번 아니 몇 천 번이나 붓을 빨았을까? 당대는 물론 후세 사람들로부터 '성(聖)'으로 불리게 된 저력이야말로 연못의 검은빛이 반증해 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왕희지가 벼루를 씻었다고 하는 ‘세연지’. 세연지의 물빛이 검다고는 하지만 물에 비친 버드나무는 완연히 초록 그대로이다.
ⓒ2007 조영님
쇄서대 뒤편의 '낭야수성(琅琊首聖)'은 왕희지를 모셔둔 곳이다. 왕희지가 붓을 들고 의자에 앉아 있다. 분향대가 있지만 분향을 강요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왕희지와 관련된 책자와 '난정서'가 쓰여진 부채를 판매하는 여직원이 있었다. 우리가 한국 사람이고, 두 사람이 여행을 한다고 하니까 무척 신기한 모양이었는지 여러 사람이 우리를 보면서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이곳에서 한학에 조예가 있으시고 옛 것에 관심이 많은 시어머니를 위해 '난정서'가 쓰여진 부채를 선물로 하나 샀다. 353년 3월 3일에 회계산 산음에서 당대의 뛰어난 시인이었던 사안(謝安)·지둔(支遁) 등 42인이 모여서 제사를 올리고 구곡(九曲)의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술 한 잔에 시 한 수씩을 지었는데, 이 때 지은 시를 모아 시집을 만들었다. 이 시집의 서문을 왕희지가 썼는데 이것이 바로 고금의 명필이 된 '난정서'이다. 그러나 당태종이 죽으면서 난정서도 함께 묻혔기 때문에 오늘날 전하는 것은 모두 모본이라고 한다.

부채의 뒷면에는 많은 시인들이 모여 구곡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시어머니는 소싯적 아버님과 친구 분들이 사랑방에 모여 한시 짓는 것을 자주 보았고 옆에서 시중을 들은 경험이 있어서 왠만한 사람은 알아듣지도 못하는 한시나 어려운 구절도 척척 외우시곤 하신다. 그러니 난정서가 그려진 부채를 틀림없이 맘에 들어 하실 것 같다.

천천히 이곳저곳을 거닐자니 이곳이 점점 마음에 들었다. 이제 막 제 빛을 띤 초록의 윤기있는 나무며 잔디, 붉은 단풍과 곳곳의 기암괴석이 잘 정돈된 조경도 그렇지만 일단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다는 것이 맘에 든다. 비교적 규모가 크지 않으니 아기자기한 맛이 있고 작위적으로 조성해 놓았다는 느낌이 덜 들었다. 이곳은 조용하고 아늑하고, 정신을 집중하여 글씨를 쓰기에 더없이 적당하고 아름다운 곳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어디선가 거위가 꽥꽥 소리 지르는 것이 들렸다. 그곳은 '아지(鵝池)'라는 곳이었다. 연못가에 서너 마리의 거위들이 뒤뚱거리면서 먹이를 쪼아 먹고 있었다. 왕희지는 특이하게도 거위를 몹시 좋아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 왕희지는 거위를 몹시 좋아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 연못의 이름도 ‘아지(鵝池)’이다.
ⓒ2007 조영님
하루는 어느 도사(道士)의 집에 거위가 많다는 말을 듣고 왕희지가 그 집에 가서 거위를 갖고 싶다고 하자 도사는 '도덕경을 써 주면 거위를 주겠다'고 하였다. 사실 도사는 평소 저명한 왕희지의 글씨를 소장하고 싶었는데 기회가 주어지자 않자, 왕희지가 거위 애호가라는 이야기를 듣고 일부러 거위가 많다고 소문을 낸 것이었다.

그래서 왕희지는 도덕경을 그 자리에서 써 주고 거위를 둥지 째 가지고 왔다고 한다. 그 때문에 왕희지의 글씨를 '거위와 바꾼 글씨'라고 하거나, 도덕경을 '환아경(換鵝經)'이라고도 한다.
이런 고사의 영향으로 옛날 우리나라 선비들도 시를 짓고 노닐던 정자의 이름에 '환아정(換鵝亭)'이라는 이름을 곧잘 쓰곤 하였다.


▲ 보조선사의 '대웅보전'. 저녁 예불을 드리고 있었다.
ⓒ2007 조영님
왕희지가 거주하였던 이곳에는 왕희지와 관련된 볼거리 외에도 '보조선사(普照禪寺)'라는 큰 규모의 사찰이 있다. 이 사찰은 낭야 왕씨의 고택이었는데 왕씨 일가가 남쪽으로 이주하면서 불사로 만들었다고 한다. 당나라 때에는 '개원선사(開元禪寺)'라고 불렸다가 후에 지금의 이름으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오후 5시가 지나서 사찰을 둘러보았는데 마침 저녁 예불을 드리던 중이었는지 스님 두 분과 신도들이 불경을 읽고 있었다. 간단히 삼배를 하는데 스님이 자꾸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이 사찰 외에도 갑오전쟁 때의 영웅이라고 하는 좌보귀(左寶貴)를 모셔둔 '좌공사(左公祠)'가 있다.

이곳을 둘러보고 있자니 몇 해 전 붓글씨를 배운다고 큰 맘 먹고 붓이며 벼루를 장만했지만 결국 시간에 쫒겨 두어 달 쓰다가 그만 둔 '붓'을 다시 잡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가 생겼다. 사는 것이 좀 안정적이고 시간이 주어지면 진득하니 앉아서 '묵향(墨香)'을 맡을 그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조영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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