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의 향기 ♣>/♧ 문화와 예술 ♧

소흥(紹興)‘산음도’(山陰道) 난정(蘭亭)의 ‘아지’(鵝池)

화엄행 2009. 4. 2.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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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흥(紹興)‘산음도’(山陰道) 난정(蘭亭)의 ‘아지’(鵝池)

22 한시와 함께하는 중국기행
난정맑은 여울과 긴대나무가 어우러진곳
   
중국에 가기 전에 가고 싶은 곳이 몇 군데 있었는데, 난정(蘭亭)이 그 가운데 하나였다. 난정은 상해에서 남쪽으로 멀지 않은 절강성 소흥(紹興)시에 있었다. 소흥은 몇 가지 점에서 잘 알려진 도시이다. 춘추시대 월왕 구천(句踐)이 쓸개를 맛보았던 (臥薪嘗膽) 월(越)나라의 수도였고, 중국의 문호 노신(魯迅), 당대 시인 하지장(賀知章), 근대 지식인 채원배(蔡元培)의 고향이기도 하다. 또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303-361)가 여기에서 태어났고 활동하였다. 처음 소흥에 갔을 때는 일정에 쫓겼지만, 두 번째 소흥에 갔을 때는 일주일간 도시를 자세히 둘러볼 수 있었다. 인구 30만의 작은 도시이지만 중국의 어느 곳보다 문화적 색채가 강하였고 운치가 있었다. 점심이 되면 모든 노선버스의 중심에 있는 함형주점 (咸亨酒店)에 가서 중국 8대 명주(名酒)의 하나인 소흥주(紹興酒)를 한 사발씩 들이키곤 했다. 나는 본디 술은 잘 못하지만 이상하게도 소흥주만은 입에 맞았다. 소흥에 가면 꼭 찾아보고 싶은 곳이 있었
 
는데 곧‘산음도’(山陰道)였다. ‘산음 가는 길’로『세설신어』에 짤막한 기록이 있다. 산음은 곧 산음현(山陰縣)으로 지금의 난정이었다.
왕헌지(王獻之, 344~388)가 말하였다. “산음도(山陰道)를 따라 걸어가면 산과 강이 서로를 비치고 어울려 사람이 차마 다 볼 겨를이 없을 지경이외다. 만일 늦가을에 간다면 그 풍경은 특히나 잊기 어려우리라.”
(王子敬曰: “從山陰道上行, 山川自相映發, 使人應接不暇. 若秋冬之際, 尤難爲懷.”)
한 번 보면 가슴이 미어질 듯 잊기 어려운 풍경이란 어떤 것일까. “산과 강이 서로를 비치고 어울려 사람이 차마 다 볼 겨를이 없을 지경”이라는 말은 역대로 수많은 사람들이 인용하며 강남 산수를 표현하는 전형적인 문구가 되었다. 나는 인구에 회자한 현장을 보고 싶었다. 그곳에서 나 역시 한가하게 산과 강 사이를 거닐고 싶었다. 더구나 왕헌지는 왕희지의 아들이지 않는가.
     
     
소흥에 내려 여러 사람에게 물었지만 아무도‘산음도’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도시의 서남에 감호(鑑湖)를 끼고 있는 사당에 들렀는데 그곳에‘산음도’라는 현판이 있었다. 산음도는 꼭 정해진 길이 있는 게 아니라 소흥시에서 산음현까지 10여 킬로미터의 길을 산음도라고 함을 알았다.
난정(蘭亭)에 가려면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서남으로 30분 정도 가면 된다. 그러나 난정 가는 ‘산음도’는 그리 특별한 풍경이 없었다. 하긴 벌써 1천 6백 년 전의 일이지 않는가. 강산이 변해도 한참 변한 모양이다.
난정이 잘 알려진 것은 물론 왕희지의「난정집 서문」(蘭亭序)이라는 글씨 때문이다. 왕희지는 동진(東晉)의 명문 귀족이자 서예 가문에서 태어나 어렸을 대부터 선배의 지도를 받으며 자랐다. 특히 친척인 유명한 서예의 대가 위부인(衛夫人)으로부터 서예를 공부하였다. 나중에 여러 대가들의 장점을 섭취하여 아름답고 유장한 자신의 필법을 완성하였다. 사람들은 그의 필체를“하늘에 흐르는 구름 같고, 놀라뛰어오르는 용같
 
다”고 찬탄하였다. 때는 353년(永和9년) 3월 3일 날씨가 화창한 봄날에 여기에서 친구인 손통(孫統), 손작(孫綽), 사안(謝安) 등 41인과 연회를 벌이고 각기 시를 지었으며, 왕희지가 서(序)를 짓고 썼는데 이것이 유명한 ‘천하제일행서’(天下第一行書)인「난정집 서문」이다. 이후 난정의 명성은 더욱 배가되어 서예의 성지이자 강남의 유명한 정원이 되었다.
지금의 건축과 정원은 명대 말기(1548)에 중건했다. 안에는 아지(鵝池), 소난정(小蘭亭), 유상곡수(流觴曲水), 유상정(流觴亭), 어비정(御碑亭), 왕우군사(王右軍祠) 등의 건물이 있었다.
아지(鵝池) 못가의 석비에는‘아지’(鵝池)가 새겨져 있는데 여기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전한다. 왕희지는 거위를 좋아했기에 사람들은 이를 기념하여 난정에 아지(鵝池)를 만들었다. 왕희지가 소흥에서 벼슬하고 있을 때 어느 날감흥이 일어‘아지’(鵝池)란 글자를 쓰고 있었다.

이때 마침 황제의 성지가 도착하였으므로 왕희지는 어쩔 수 없이 붓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고 성지를 받아야 했다. 그의 아들 왕헌지(王獻之)는 그것도 모르고 이어서‘지’(池)자를 썼다. ‘ 아’자(鵝)는 말랐지만‘지’(池)자는 살찐 것으로 좋은 대비가 이루어진 이 비석을 사람들은‘부자비’(父子碑)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야사이다. 조금 더 걸어가면‘소난정’(小蘭亭)이 나오는데 강희제(康熙帝)가 이곳에 왔을 때 쓴‘난정’이란 글씨가 비각 안에 세워져 있다. 문화대혁명때 홍위병들이 깨뜨린 것을 다시 맞춘지라 지금도 그 흔적이 뚜렷하다. 조금 더 걸어가면 유상곡수(流觴曲水)가 나오는데 왕희지가 여러 사람들과 수계(修?) 때 잔을 물에 띄우고 술을 마시며 시를 짓던 곳이다. 수계란 음력 3월 상순에 물가에서 액막이를 위해 지낸 제사를 말한다. 이때 사람들은 봄날의 화창함 속에 모처럼의 여유를 즐겼다. 당시 문벌 사족의 명사인 왕희지(王羲之)를 좌장으로 하여 모두 41명의 청류(淸流)들이 참가하였다. 『세설신어』에는 당시 26명이 물가에서 시를 지었고, 15명이 시를 짓지 못해 벌주로 3잔씩 마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시는 두 편쓴 사람도 많아 현재 모두 36수가 전해진다. 왕희지와 손작이 서문을 썼는데, 특히 왕희지의「난정집 서문」(蘭亭集序)은 널리 알려졌다. 글씨도 글씨이지만 글의 내용도 인상적이다.
특히 산수 자연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인식을 잘 표현

 
해내어 명문의 반열에 오른다. 그 첫머리는 다음과 같다. 영화 9년(373년), 계축년 음력 삼월 초 회계 산음의 난정에 모였으니, 곧 계제를 지내기 위해서이라. 명사들이 모두 오고 노소(老少)가 함께 모였다. 이곳은 높은 산과 솟은 봉우리, 무성한 숲과 긴 대나무가 있고, 또 맑은 물과 빠른 여울이 있어, 자연이 서로 어우러진 곳이다. 물을 끌어 잔을 띄우는 곡수(曲水)를 만들고 사람들이 그 물가에 늘어앉았으니, 비록 성대한 음악은 없어도 술 한 잔에 시 한 수를 읊으니, 마음속의 감정을 마음껏 드러내기 실로 족했다. 이날은 날씨가 화창하고 기운이 맑으며, 바람이 온화하고 시원하였다. 고개를 들어 우주의 거대함을 바라보고 고개 숙여 만물의 번성함을 살피며 눈과 마음이 가는대로 보고 들어, 그 즐거움이 곡진하였으니 진실로 기쁘기 한이 없었다.아름다운 풍광 앞에서 우리는 왜 기뻐하는가. 그리고 왜 우주와 만물을 한꺼번에 바라보게 되는가.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의 전체를 삽시간에 조망하게 되는가. 아름다움이 단순히 눈의 즐거움에 그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의식을 활짝 깨워 인생과 우주를 한꺼번에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리라. 그러므로 아름다움이란 감성은 곧잘 인식과 통찰이라는 지성과 함께 온다. 당시 난정의 모임에 참가한 유온(庾蘊)의 시에도 그러한 인식이 있다.

여기에는 자연에 대한 희열과 친화는 물론, 유한한 개체가 물같이 흘러가는 세월을 아쉬워하며 영원을 갈구하는 바램이 깃들어 있다. 유한과 무한에 대한 갈등은 대자연을 만나 비로소 위로받으며 자신을 직관하는 힘을 얻는다. 개인의 감정과 기질은 자연 속에 침투되고 승화되며, 영원을 추구하나 얻지 못하는 마음은 자연으로부터 위로받는 듯하다. 이로부터 5백년 후 중당의 문인 류종원(柳宗元)은“아름다움은 스스로 아름답다고 할 수 없는 탓에 사람을 통해 그 아름다움이 드러난다. 난정이 왕희지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맑은 여울과 긴 대나무가 한갓 빈산의 잡초 속에 묻혔을 것이다!”(夫美不自美, 因人而彰. 蘭亭也, 不遭右軍, 則淸湍修竹, 蕪沒空山矣!)라고 하였다.
자연에 쏟아진 사람의 마음과 정신은 자연과 혼연일체가 되어, 산수는 이제 정감을 가진 객체로 나타나게 된다.
 
산수가 하나의 물질적인 대상이 아니라 영혼을 가진 대상으로, 사람과 산수는 마음이 통하는 노래를 함께 부르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어비정(御碑亭) 안에 건륭제가 모사(摹寫)한「난정집 서문」(蘭亭集序)을 읽기도 하였고, 어떤 사람은 왕우군사(王右軍祠)에 역대 명필들이 모사한 글씨들을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대자연을 향해 자신의 철학적 사유를 감성적으로 표현한 그의 문장에 자꾸 마음이 갔다. 유상곡수의 흘러가는 물에 천 년의 시간이 걸려 있었고, 봄이 되어 푸르러지는 연잎들 위로 화창한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