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의 향기 ♣>/♧ 문화와 예술 ♧

한국서예사특별전 23 표암 강세황전

화엄행 2009. 4. 2. 09:55

한국서예사특별전 23 표암 강세황전

안휘준(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 문화재위원)

 
Focus 한국서예사특별전 23 표암 강세황전
 

표암 豹菴 강세황 姜世晃 展의 의의

가슴에는 두 산의 동굴을 가득 메울 고서들을 간직하고
필력은 다섯 곳의 큰 산을 흔들 수 있구나
세상 사람이 어찌 알겠는가? 나 혼자서 낙으로 삼는다네






조선후기의 미술사나 문화사에서 표암 강세황(1713-1791)이 차지하는 비중은 너무나 크다. 주지되어 있듯이 그는 회화, 서예, 문장, 화평, 제자 양성 등 다방면에 걸쳐서 남다른 경지를 이루고 기여하였다. 특히 18세기의 회화와 서예에 있어서 그를 빼놓고는 제대로 된 역사를 서술할 수가 없다.
그는 회화에서 초상화, 풍속인물화, 산수인물화, 사의寫意산수화, 진경산수화, 화조화, 정물화, 괴석화, 사군자화 등 실로 다양한 주제의 그림을 그렸다. 특히 문인 출신의 남종화가였던 그가 자화상이기는 하지만 주로 화원 등 직업 화가의 영역이었던 초상화와 풍속인물화를 그린 점, 사의산수화만이 아니라 진경산수화도 그린 점, 남종화법을 위주로 하면서 서양화법도 수용했던 점, 김홍도를 위시한 중인 출신 화가의 작품에도 종종 화평을 가했던 점, 자하紫霞 신위(申緯, 1769-1845)와 단원 김홍도와 같은 우수한 제자를 배출한 점 등은 그의 진취적 성향 및 미술인으로서의 위업을 잘 말해준다.
서예에 있어서도 그는 왕희지, 왕헌지, 미불, 조맹부 등의 서체를 소화하여 독자적이고 독특한 경지를 형성하였다. 특히 그가 즐겨 쓴 행서는 물 흐르듯 유려하고 세련된 모습이면서도 짜임새가 뛰어나 일견 그의 작품임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자연스러우면서도 아름다워, 보는 이의 마음을 편하게 한다. 그의 글씨에는 억지나 허세, 의도된 개석의 표출 등이 없다. 그래서 보는 이에게 언제나 그만의 서체로 조용하면서도 분명하게 다가선다.

강세황은 이처럼 조선후기의 서화와 관련하여 누구보다도 중요한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종합적으로 조망하는 제대로 된 전시회가 이제껏 열리지 못했던 것은 아쉬운 일이 였다. 강세황이 1995년 1월의 <이달의 문화 인물>로 선정되었을 때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렸던 간단한 전시회가 유일한 선례라 하겠다. 그나마 도록조차 발간되지 않아 현재로서 참고의 여지조차 없다. 다만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1979년에 발간된 『표암유고豹菴遺稿』와 변영섭 교수가 펴낸 『표암강세황회화연구豹菴姜世晃繪畵硏究』 등의 저술이 나와 있어 강세황의 생애와 예술을 이해하는데 참고가 되고 있을 뿐이다.



이번에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에서 개최되는 「표암 강세황전」은 앞에서 언급한 저간의 상황을 감안할 때 여간 중요한 일이 아니다. 이번 전시의 의의는 여러 가지 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우선, 전시작품이 190여 건 200여 점에 달하는 종합적 성격을 띤 전시회라는 점이 주목된다. 강세황의 각 종 그림과 글씨를 비롯하여 관련된 온갖 자료들이 출품되어 그의 생애, 학문과 사상, 회화와 서예, 교유관계 등을 다각적인 측면에서 종합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동안 깊이 사장되어 있던 미공개 작품과 자료들이 대중에게 알려진 작품과 함께 대거 출품되어 보다 풍부한 감상과 귀중한 연구자료를 제공해 준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괄목할 만 하다. 이러한 신출의 작품과 자료 덕택에 강세황 서화의 형성과 변천을 보다 구체적으로 규명하는 일이 상당 부분 가능해졌다.
20대부터 70대에 이르는 기간에 제작된 그의 서화 작품들은 20대의 미숙한 단계에서 출발 3, 40대와 5,60대에 이르러선 연륜이 쌓여 서화 양면에서 차차 자기화, 원숙화 과정을 거쳤음이 잘 드러낸다. 대표적 서·화가의 성장과 변모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다.
강세황 화풍의 연원이 다양하다는 점은 이미 알려져 있는 바이나 이번 전시에서는 그것이 재확인되며 보다 주목할 만 한 점들이 있다. 그가 그림을 스스로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서 미불, 원말사대가-황공망黃公望, 오진吳鎭, 예찬倪瓚, 왕몽王蒙, 동기창董其昌 등의 남종화가들의 화풍을 참조하였음은 이미 확인된 사실이나 그밖에 초년에 청대 석도石濤의 화풍을 모방했던 점은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강세황의 초년의 호인 산향재山響齋의 관서款署가 쓰여 있는 이 작품은 간결하고 깔끔한 화풍에 석도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다. 우리나라 후대의 화가들이 석도의 화풍을 많이 따르게 된 연유가 강세황으로부터 비롯되었을 가능성도 유추해 볼 수 있다.
강세황은 원말사대가들 중에서도 황공망과 예찬의 화풍을 많이 참고한 것이 분명하나 그 중에서도 황공망의 영향이 컸음이 분명하다. 이점은 그가 성호 이익의 요청을 받아 만 38세 때인 1751년에 그린 <도산도陶山圖>나 두증痘症을 앓던 손자를 위해 약즙으로 그린 1782년 작품인 <약즙산수도藥汁山水圖>가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로 대표되는 황공망의 화풍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사실에서 쉽게 확인된다. 특히 <도산도>는 강세황이 도산에 직접 가보지 않고 이전의 여러 작품들을 참고하여 그린 점을 감안하면 종래의 안견파安堅派화풍이나 절파계浙派系화풍, 혹은 그 절충화풍을 새로운 남종화풍으로 변화시킨 것이 분명한데 이때 황공망화풍을 택하여 그린 것은 그만큼 화풍을 중시하였음을 말해 준다. 중국의 대표적 화가들과 함께 그가 『고씨화보顧氏畵譜』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 『십죽재화보十竹齋畵譜』 등의 중국 화보를 널리 참고하였음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개자원화전』에 실린 명대 오파吳派 심주沈周의 그림을 모방한 <벽오청서도碧梧淸暑圖>가 그 단적인 예이다. 그러나 그가 만 77세까지도 여전히 『십죽재화보』 등의 화보에 관심을 보인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강세황이 이처럼 중국의 대가와 화보에 관심을 가지고 참고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나 그가 우리나라의 창강蒼江 조속(趙涑,1595-1668),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1668-1715),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9-1759) 등의 선배화가들에 유념하였던 점은 새롭게 느껴진다. 초년기 강세황의 묵매도나 화조화 등에 조선 중기의 영향이 감지되는 것은 조속을 비롯한 중기 화가들을 숙지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조선중기의 화풍을 계승하여 후기로 이으면서 자신의 세계를 형성했던 윤두서의 그림을 강세황이 모방했던 점 또한 새로운 사실이다. 강세황의 <춘강연우도春江烟雨圖>가 이를 밝혀 준다. 아마도 강세황의 30대 작품일 것으로 판단되는 이 그림의 오른편 상단에 “春江烟雨 倣恭齋”라고 적혀 있어서 이슬비 내리는 봄날의 강변 모습을 윤두서의 화풍을 모방하여 그렸음을 알 수 있다. 구도를 보면 윤두서의 <평사낙안도平沙落雁圖>가 연상된다(김원용·안휘준 『한국 미술의 역사』 시공사 2003 p.483 도30 참조). 윤두서를 통한 남종화법의 영향도 감지된다. 이 <춘강연우도>에 보면 강세황이 윤두서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윤두서나 강세황이 전형적인 문인 출신의 화가로서 자화상과 풍속화를 그린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 점도 더 이상 우연의 일로만 치부할 수 없게 되었다.
강세황이 정선의 <피금정도披襟亭圖>와 <어한도魚閑圖>에 부친 찬문도 크게 주목된다. 이 찬문에서 강세황이 “謙翁之畵 當爲吾東第一 卷中所畵亦皆得意 翁今老矣...(겸옹의 그림은 마땅히 우리나라 제일이다. 두루마리 안에 그려진 것들도 역시 모두 특외작이다. 옹은 이제 늙었다...”라고 적은 것을 보면 강세황이 정선의 그림을 우리나라 제일로 꼽았으며 또 정선을 잘 알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문인 출신의 강세황이 직업 화가였던 정선을 이처럼 높이 평가하였던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뛰어난 서화가와 화평가로서 강세황의 열린 마음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사의산수화만이 아니라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을 위시한 진경산수화도 주저 없이 그렸던 소이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강세황과 윤두서 및 정선의 관계는 조선후기의 회화를 좀 더 새롭게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 준다.





강세황의 초상화와 관련된 자료들도 관심을 끈다. 그의 자화상은 이미 학계에 잘 알려져 있으나 이번에 새로 소개되는 이명기(李命基, 1756-?) 필筆이 그린 71세의 강세황 초상화와 이 초상화의 제작과정을 소상하게 밝힌 강세황의 셋째 아들 관(人+寬)의 『계추기사癸秋記事』는 특급의 자료라 하겠다. 이 초상화는 이명기가 28세 때인 1783년에 그린 그의 전형적인 작품으로 조선후기 초상화의 높은 격조와 한국적 특징을 잘 드러낸다. 그런데 이 초상화 이상으로 주목을 끄는 것은 『계추기사』다. 이 문적에 우리나라 초상화의 제작과 관련된 중요한 내용들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강세황이 1756년 음력 4월부터 마음에 차는 초상화를 얻기 위하여 스스로 그려 보기로 하고 화원을 시켜 그리기도 했으나 미흡한 채로 있다가 기사耆社에 참여한 1783년 5월 정조의 전교로 이명기에게 그려 받게 된 경위, 이명기가 초상화로 ‘독보일세獨步一世하여 문무경상文武卿相들이 모두 그에게 초상화를 구했다’는 사실, 이명기가 병자(丙子, 1756)년에 태어나 당시 28세였다는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하여 이명기의 생년이 1756년임이 처음으로 밝혀지게 되었고 그가 이미 20대에 최고의 초상화가로서 궁宮 내외에 이름을 날리고 있었음이 분명해지게 되었다.
이밖에 초상화의 제작에 필요한 비단(초 )을 병장屛匠인 김복기金福起에게서 열냥에 사들였고, 초상화의 제작은 1783년 7월 18일에 시작했는데 이때 강세황은 서울의 회현동에 있었으며, 19일에 묵초소본墨草小本이 이루어지고 20일에는 묵초대본墨草大本이 완성되었으며 21일에는 묵초대본 위에 초를 대고 23일에는 착색을 시작하여 27일 끝냈음이 밝혀져 있다. 이렇게 하여 이명기가 대본, 소본, 부본까지 모두 마친 것은 열흘 뒤인 28일이며 이때 그가 받은 수고비가 열냥이었다. 그림이 완성된 28일 저녁부터 표장이 시작되었고 이 때의 장수(匠手, 표구사)는 어영청禦營廳의 책공인 이득신李得新인데 이는 판서인 홍수보洪秀輔가 보내준 것이고, 배접에 필요한 각종 종이들은 승지인 신대승申大升의 집으로부터 얻었으며, 향호(香糊, 풀)는 판서인 정창성鄭昌聖의 집에서 구하였는데 장자障子가 완성된 것은 29일이었으며, 청백릉靑白綾·석환錫環·향목축香木軸·선익지蟬翼紙와 장수가 모두 왔는데 공임까지 열냥이었다. 30일 새벽에 보褓가 완성되었는데 경비는 3냥이 들었고 8월초 5일에는 초상화들을 넣을 궤자(櫃子,상자)가 완성되었는데 비용을 4냥으로 장수는 용호영龍虎營의 소목장小木匠이었다.
이처럼 초상화와 그것을 넣을 상자의 제작에 이르는 19일간의 전 과정을 날짜별로 진행 상황을 밝히고 화가, 표구사, 목공, 협찬자들의 이름과 노임 및 소요 경비, 필요한 재료의 확보상황까지 구체적으로 적은 개인 기록은 지극히 희귀한 사례로서 앞으로의 초상화 연구를 위해서는 물론 미술사의 사회·경제사적 고찰을 위해서도 더 없이 귀한 자료가 될 것이다.
강세황의 자화상 이외에 <연객허필상烟客許 像>도 간과할 수 없다. 조선후기의 주요 문인화가 중의 한 사람이자 강세황의 제일 친한 친구였던 허필의 모습을 엿볼 수 있고 강세황의 인물화의 또 다른 양상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에는 강세황의 관서와 도인, “烟客像 男 書”라는 강세황의 막내아들 강빈姜 의 글이 보인다. 배경의 절벽과 그것에서 뻗은 나무가 이룬 공간에 허필로 믿어지는 인물이 무릎을 반쯤 세운 채 앉아 있다. 포치법布置法으로 보면 영락없이 조선중기의 소경산수인물화의 전통을 따랐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배경의 절벽과 나무의 표현 및 인물의 의습선은 강세황의 화풍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중기적인 포치법은 강세황이 앞 시대의 화풍을 잘 습득하고 있었음을 밝혀 준다. 인물이 입고 있는 옷도 중기의 신수인물화의 전통을 연상시킨다. 인물의 편안한 자세, 큰 눈과 긴 수염이 두드러져 보이는 얼굴과 시상에 잠긴 듯한 표정 등은 문인으로서 허필의 모습일 가능성이 짙어 보인다.



이밖에도 화조, 화훼, 사군자, 괴석 등 실로 다양한 주제의 그림도 보는 이의 관심을 끈다. 이것과 관련지어 볼 때 미불, 조맹부 등의 중국 화가들의 이름이 자찬에 보이고 조선중기 묵매화의 전통이 매화 그림에 엿보인다. 강세황이 일찍부터 득명하고 인기가 있었음은 그가 1747년(만 34세)에 그린 <맨드라미와 여치>에 적힌 자찬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世之求余畵者多矣 或山水 或花卉草 或樓閣器物 雖隨求而應 세상에는 내 그림을 구하는 사람들이 많다. 혹은 산수, 혹은 화훼초충, 혹은 누각이나 기물 등 요구하는 대로 응한다”는 내용을 보면 그가 사람들의 요청에 따라 다양한 주제의 그림을 그렸고 그 그림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미 30대에 인기 있는 화가로서 입지를 확고하게 세웠음이 분명하다.
강세황은 화가로서만이 아니라 화평에 있어서도 거의 독보적인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정선, 심사정, 강희언, 김홍도를 비롯한 많은 화가들의 작품에 화평을 남긴 것이 이를 잘 말해 준다. 이번 전시회를 통해서도 이 점이 거듭 확인된다. 이처럼 강세황은 다방면에 걸쳐 혁혁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라 하겠다. 이번에 출품된 다양하고 풍부한 자료들은 강세황의 학문과 사상, 서화의 연원과 변화양상, 후대에 미친 영향 등을 구체적으로 밝히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글 : 안휘준(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 문화재위원)

자료출처 ☞ http://blog.daum.net/tjsghdbsgh/475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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