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華嚴經 懸談 ♣>/大方廣佛華嚴經疏鈔懸談

大方廣佛華嚴經疏演義鈔 卷第二 / [7]

화엄행 2009. 3. 27. 02:43

2006/05/17 오후 5:53

 

        大方廣佛華嚴經疏演義鈔   卷第二

             
淸凉山 大華嚴寺沙門 澄觀述



皆交徹者는 約宗以明인댄 唯識等宗은 不得

交徹이어니와 今就華嚴하야는 則前諸義가 皆得

交徹이니 以具前卽一心等義故라


"아울러 모두 交徹"이라고 말하는 것은 宗을 잡아서

밝히면 唯識等의 宗은 交徹을 얻지 못하나 이제 화

엄에 나아가면 앞의 모든 뜻이 다 교철을 얻나니,

前은 즉 一心 등의 뜻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如約遍計爲妄者인댄 情有卽是理無일새 妄徹眞

也요 理無가 卽是情有일새 眞徹妄也니라

若染分依他爲妄者인댄 緣生無性일새 妄徹眞也

요 無性緣成일새 眞徹妄也니라


만약 遍界가 妄이 됨을 잡을 것 같으면 情有가 곧

理無이니 妄이 眞에 통철함이요, 理無가 곧 情有이

니 眞이 妄을 통철함이다.

만약 染分依他가 妄이 된다면 緣으로 생한것은 性

이 없으니 妄이 眞에 통철함이요, 無性이 緣을 이루

니 眞이 妄을 통철함이다.



若約生死涅槃說者인댄 生死가 卽涅槃일새 妄徹

眞也요 涅槃이 卽生死일새 眞徹妄也니라 故로

中論에 云生死之實際가 卽是涅槃際요 涅槃之實

際가 卽是生死際라 如是二際者는 無毫釐差別이

라하니 卽交徹也니라

此經에 云有說生死요 無諍說涅槃이나 生死及

涅槃을 二俱不可得이라하니 亦俱空俱有가 交徹

義也니라


만약 生死와 涅槃을 잡아서 설한다면 생사가 곧 열

반이니 妄이 眞에 통철하고, 열반이 곧 생사이니 眞

이 妄을 통철한다. 그러므로 『中論』에 이르길,

"生死의 實際가 곧 이 涅槃際이고 涅槃의 實際가 곧

이 生死際이다. 이와 같이 二際라는 것은 털끝만큼

의 차별도 없다"라고 하니, 곧 交徹함이다.

이 經에서 이르길 "煩惱(諍)가 있으면 生死를 설하

고 煩惱가 없으면 열반을 설하나, 생사와 열반은 둘

다 얻을수 없다"고 하니 또한 俱空과 俱有가 서로

통철하는 뜻이다.



 
 若依三論의 以妄爲俗諦하고 以眞爲眞諦하야

言交徹者인댄 卽俗而眞이며 卽眞而俗故라 故로

影公이 云 然統其要歸則會通二諦니 以眞諦故로

無有요 俗諦故로 無無라 眞故로 無有則雖無而

有요 俗故로 無無則雖有而無라 雖有而無則不累

於有요 雖無而有則不滯於無라하며 乃至云寂此

諸邊일새 故名中道라하시니 卽眞妄交徹也니라

眞故로 無有則雖無而有니 則眞徹妄也요 俗故로

無無則雖有而無니 則妄徹眞也니 餘可思準이니




만약 「三論」에 의지하여 妄으로써 俗諦를 삼고

眞으로써 眞諦로 삼아서 '交徹'을 말한다면, 俗에

卽한 眞이며 眞에 卽한 俗인 까닭이다. 그러므로 

影公이 이르길, "그러나 그 要歸를 통괄하면 二諦를

會通하니, 眞諦인 까닭으로 無有이고 俗諦인 까닭

으로 無無이다. 眞인 까닭으로 無有라면 비록 無이

나 有이고, 俗인 까닭으로 無無라면 비록 有이나 無

이다. 비록 有이나 無라면 有에 매이지 않고, 비록

無이나 有라면 무에 막히지 않는다."라고 하며, 내

지 "이러한 모든 邊을 고요하게 하는 까닭으로 中道

라 이름한다"라고 하니, 즉 眞과 妄이 交徹하는 것

이다. "眞인 까닭으로 無有라면 비록 無이나 有

다."라는 것은 곧 진이 망을 통철하는 것이다. "俗

인 까닭으로 無無라면 비록 有이나 無다"라는 것은

곧 妄이 眞을 통철함이다. 나머지는 생각하여 준할

수 있다.


影公이 云 ; 影公은 『會解記』에서 일컫는 曇影法師로, 什公

(구마라십)의 弟子八哲의 한 사람이고, 여기서 인용된 것은 그가

지은 「中論序」이다.


 


若約隨俗說인댄 眞妄本虛니 居然交徹이요 眞妄

皆眞則本末一味니 居然交徹이요 若觸物皆中인

댄 居然交徹이니라

問이라 眞妄相乖가 其猶水火어늘 何得交徹고

答이라 此有多義하니 一은 眞妄二法이 同一心

故니 以一貫之일새 故得交徹이니라 故로 起信

論에 云 依一心法하야 有二種門하니 一은 心眞

如門이요 二는 心生滅門이라 然此二門이 皆各

總攝一切法盡이니 以此二門이 不相捨離故라하

니 故로 云 不離一心일새 故得交徹이니라


만약 俗을 따라 설함을 잡는다면 眞과 妄이 본래 비

었으니 居然히 交徹하고, 眞과 妄이 다 眞이라면

本과 末이 一味니 居然히 교철한다. 만약 촉하는 物

마다 모두 中道라면 居然히 交徹한다.

질문하길,"眞과 妄이 서로 어긋남이 물과 불 같거늘

어떻게 交徹할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

答하길, "여기에는 많은 뜻이 있다. 一은 眞과 妄의

두 法이 한가지로 一心인 까닭이니, 하나로써 이것

들을 관통하므로 交徹하였다. 그러므로 『起信論』

에 이르길, "一心法에 의지함에 二種門이 있으니,

一은 心眞如門이요 二는 心生滅門이다. 그러나 二

門이 모두 각각 一切法을 總攝하니, 이 二門이 서로

떠나지 않은 까닭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르

길, "一心을 떠나지 않았으니 그러므로 交徹하였

다."고 한다.



二는 妄攬眞成이라 無別妄故는 亦是起信論勝

等意니 眞如隨緣하야 成一切法은 眞徹妄也요

眞隨妄顯이라 無別眞故는 妄徹眞也니 若無有妄

이면 對何說眞이리오 如無緣生이면 則無無性故

니라



二는 妄이 眞을 잡아서 이룸이다. 따로 妄이 없는

까닭이다. 또한 『起信論』과 『勝經』等의 뜻이

다. 眞如가 緣을 따라 一切法을 이루는 것은 眞이

妄을 통철함이요, 眞이 妄을 따라 나타남이다. 따로

眞이 없는 까닭은 妄이 眞에 통철함이니, 만약 妄이

없다면 무엇을 대하여 眞을 說하겠는가? 만약 緣生

이 없다면 곧 無性도 없기 때문이다.




三은 眞妄名異나 體無二故는 如向所引有諍으로

說生死요 無諍說涅槃等을 俱不可得이니 則體無

二也라 故로 下經에 云若遂假名字하야 取著此

二法하면 顚倒非實義라 不能見正覺이라하니 明

以無二爲實也니 豈非交徹이리오



三은 "眞과 妄이 이름은 다르나 體는 둘이 없는 까

닭이다."라는 것은 먼저 인용한 "번뇌(다툼)가 있으

면 生死를 說하고, 번뇌(다툼)가 없으면 열반을 說

한다"는 등과 같은 것은 둘 다 얻을 수 없으니,

곧 體가 둘이 없음이다. 그러므로 아래 經에서 이르

길, "만약 假名字를 쫓아서 이 二法에 取着하면 顚

倒되어 實다운 義가 아니어서 正覺을 볼 수 없다."

고 하니, 無二로써 實이 됨을 밝힘이니 어찌 交徹함

이 아니겠는가?





四는 眞外有妄이면 理不遍故下는 反成二義니

此句는 眞徹妄이요

五는 妄外有眞이면 事無依故는 卽妄徹眞也라
 
此亦法性宗義니 一切法이 皆如어니 豈妄外有眞

이며 眞如一切어니 豈眞外有妄이리오 是知眞妄

이 常交徹이나 亦不壞眞妄之相이니 則該妄之眞

은 眞非眞而湛寂이요 徹眞之妄은 妄非妄而雲興

이니라


四는 "眞밖에 妄이 있으면 이치가 두루하지 않는 까

닭이다" 아래는 도리어 두가지 뜻을 이룬다. 이 句

는 眞이 妄을 통철함이다.

 五는 "妄밖에 眞이 있으면 事가 依支할 곳이 없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곧 妄이 眞을 통철함이다. 이

것은 또한 法性宗의 뜻이다. 一切法이 모두 같나니

어찌 妄밖에 眞이 있으며, 眞如가 일체에 두루 하니

어찌 眞밖에 妄이 있겠는가? 

眞과 妄이 항상 交徹하나 또한 眞과 妄의 相을 무너

뜨리지 않음을 알게 된다. 즉 妄을 갖춘 眞은 眞이

면서 眞이 아니나 湛寂함이요, 眞을 통철한 妄은 妄

이면서 妄이 아니나 구름같이 일어난다.





○ 事理雙修라 依本智而求佛智者는 二에 不碍

兩存이니 上來交徹과 不碍之義를 恐人誤執하야

爲泯二相일새 故擧此言이니라

亦由惑者가 執禪則依本性의 無作無修하야 鏡本

自明이라 不拂不瑩이라

執法則須起事行하야 當求如來하며 依他勝緣하

야 以成己德이라하니라 爲偏執일새 故此雙行

이니라


○ "事와 理를 雙으로 닦고 本智에 의지하여 佛智를

구한다"라는 것은 二에 兩存을 장애하지 않는 것이

다. 위의 交徹과 不碍의 뜻을 사람들이 잘못 집착하

여 '二相이 없다'고 말할까 두려워하기에, 그러므로

이 말을 거론한 것이다.

또한 미혹한 자가 禪에 집착함으로 말미암아 곧 本

性은 지을 것도 없고 닦을 것도 없으며, 거울은 본

래 스스로 밝다는 것에 의지하여 털어버리지도 아

니하고 밝게 닦지도 않는다.

법에 집착하면 모름지기 事行을 일으켜서 마땅히

여래를 구하며, 他의 殊勝한 因緣에 의지함으로써

자기의 덕을 이룬다고 한다. 두 가지는 치우쳐 집

착하기에 그러므로 여기서는 雙으로 行한다.



依本智者는 約理而說이니 無漏智性이 本具足故

요 而求佛智者는 約事而論이니 無所求中에 吾

故求之니 心鏡이 本淨이나 久?뺤옄塵勞하야 恒沙

性德이 埋塵沙煩惱일새 是故로 以順法性의

貪等하야 修檀施等故며 諸佛은 已證이어시

늘 我未證故니라

又理不碍事라 不妨求故며 事不碍理라 求卽無求

故니 若此之修를 名曰無修라 無修之修와 修卽

無修가 爲眞修矣니라



"本智에 의지한다"는 것은 理를 잡아서 설함이니,

無漏智性이 본래 구족한 까닭이다. "佛智를 구한다

는 것은 事를 잡아 설함이니, 구할 바가 없는 가운

데에 내가 짐짓 이를 求함이다.

心鏡이 본래 淸淨하나 오래도록 塵勞에 가려서 恒

沙와 같은 性德이 함께 먼지와 모래같이 많은 煩惱

속에 묻혀 있다. 이러한 까닭으로 法性에 貪等이

없는 것을 따름으로써  檀施(布施波羅蜜)等을 닦는

연고며, 제불은 이미 증득하셨으나 나는 아직 증득

하지 못한 까닭이다.

또 理가 事를 장애하지 않아서 求하는데 방해롭지

아니한 까닭이며, 事가 理를 장애하지 않아서 求한

즉 求할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닦는 것을 

이름하여 '無修'라 하니, 無修의 修와 닦되 닦음이

없는 것이 참으로 닦음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