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華嚴經 懸談 ♣>/大方廣佛華嚴經疏鈔懸談

大方廣佛華嚴經疏演義鈔 卷第十 / [4]

화엄행 2011. 1. 9. 14:43

大方廣佛華嚴經疏演義鈔  卷第十

淸凉山 大華嚴寺沙門 澄觀述

 

 

第二節. 藏敎所攝

 第二. 明敎攝

  1. 大意離合

  2. 古今順違

  (1) 敍此方

 

第二 古今違順 曲分爲二호리라 先敍此方이요 後明西域이라 今初 諸釋雖衆이나 略敍數家하야 勒爲五門호리라

第二는 古今違順[옛과 지금의 옳고 그름]을 자세히 둘로 나누겠다. 먼저 此方[이 곳 중국]을 서술하고 뒤에 西域을 설명하겠다. 지금은 처음이다. 여러 해석이 비록 많지만 간략히 數家[몇 분]를 서술하여 五門으로 묶겠다.


第二古今違順中 一一師中 多分爲二하니 先敍昔義後辨順違

第二의 古今違順 중에는 각각의 스님 중에서 많은 분량을 둘로 하리니, 먼저 옛 뜻을 서술하고 뒤에 順違를 분별하겠다.



   1) 立一音敎


立一音敎 謂如來一代之敎 不離一音이언대 然有二師하니 後魏菩提流支호대 如來一音 同時報萬호대 大小幷陳이요 姚秦羅什法師호대 佛一圓音 平等無二하야 無思普應이어든 機聞自殊 非謂言音 本陳大小니라 維摩經호대 佛以一音演設法이어시든 衆生 各各隨所解라하니라

上之二師初則佛音具異 後則異自在機 各得圓音一義로다이나 並爲敎本 不分之意耳니라

一은 一音敎를 세운다. 如來의 一代敎가 一音을 여의지 않음을 말하는데 두 분의 論師가 있으니, 한 분인 後魏의 보리유지가 “如來의 一音이 同時에 널리 알리되 대승과 소승을 아울러 진술하셨다.”고 하였다. 두 번째 분인 姚秦의 구마라집 법사는 “부처님의 一圓音이 평등히 둘이 없어서 생각함이 없이 널리 응하시는데, 根機의 듣는 것이 스스로 다름이지 言音이 본래 대승․소승을 편다고 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維摩經』에 이르길 “부처님께서 一音으로써 법을 연설하시는데 중생이 각자 이해한 바를 따른다.”고 하였다.

위의 두 분 스님의 처음 분은‘佛音이 다름을 갖추었다’이고, 뒤 분은‘다름은 스스로 根機에 있다’이니 각각 圓音의 一義를 얻었다. 그러나 둘 다‘敎의 근본은 나누지 못한다’라는 뜻일 뿐이다.


 一音中疏 上之二師下 辨順違 先出彼意니라 言各得圓音一義者 言含縱奪하니 縱之則順이라 下出現品 明如來圓音 有其十義하고 十義之後 復六句融通하니 今但得十義中之一耳로다 初師 卽順善口天女 一聲之中 與百千種樂으로 而共相應하니 則佛一音之中 有多音也니라 後師 卽順如水一味 隨器成異하니 則如來 本無多音이라호대 各得一義耳니라 又此二義 若不會釋이면 敵體相違 互不相許則齊楚俱失♣(1)이요 並應奪之이니 若取各自所宗이라 各得一義而與之耳니라 然並爲敎本下 又都奪耳니라

 一音 중 疏에 ‘上之二師’아래는 順違를 가려냄이다. 먼저 저들의 뜻을 나타내었다. ‘各得圓音一義’라 말한 것은 말에 縱[긍정]과 奪[부정]을 포함하니, 縱[긍정]하면 順이다. 아래의 「출현품」에 如來의 圓音이 열 가지 뜻이 있음을 밝히고 열 가지 뜻 다음에 後에 다시 六句로 融通하니, 지금은 단지  十義 중의 하나를 얻었을 뿐이다. 첫 번째 論師는 즉 善口天女가 一聲 중에 백 천 가지 음악으로 함께 서로 응하니, 즉 부처님의 一音 중에 多音이 있음을 隨順한 것이다. 뒤의 論師 즉 물이란 한 가지 맛이 그릇에 따라 다르게 되니, 곧 여래는 본래 多音이 없음을 수순함이다. 그러므로 ‘각각 一義를 얻었다’고 했을 뿐이다. 또 이 두 가지 뜻을 만약 회통하여 해석하지 않으면 體에 대적하여 서로 어긋나니,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지 아니하면 齊나라와 楚나라를 함께 잃음이요 아울러 응당 그것을 奪[부정]함이니, 각각 스스로 宗崇하는 것을 取함과 같다. 그러므로 각각 一義를 얻어서 함께했을 뿐이다. ‘然並爲敎本’아래는 또한 모두 奪[부정]일 뿐이다.

♣(1) 齊楚俱失 ; 이 이야기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莊子』「徐無鬼」편에 이르길, “齊나라 사람이 자기 자식을 宋나라로 귀양을 보내고서, 자기 집 문지기는 죄를 짓고 발이 잘린 사람을 임명했다. 그는 또 (공중에 걸어야 잘 울리는) 목이 긴 鐘을 구해가지고 이를 묶어두었다. 그는 잃어버린 자식을 찾으려 하면서도 문밖을 나간 적도 없었다. 이는 일을 잘못 판단한 것입니다. 楚나라 사람으로 남의 집에 의탁하면서 그 집 문지기와 싸운 자가 있었는데, 밤중에 아무도 없을 때 뱃사람과도 싸웠습니다. 배가 강 언덕을 떠났더라면 충분히 怨恨을 샀을 것입니다.[뱃사공이 그 초나라 사람을 태우고 떠났더라면 원한을 사서 (초나라사람 자신이) 위험해졌을 겁니다.] (齊人蹢子於宋者 其命閽也不以完. 其求銒鐘也 以束縛. 其求唐子也 而未始出域. 其遺流矣. 夫楚人寄而蹢閽者 夜半於無人之時 而與舟人鬪. 未始離於岑 而足以造於怨也.)라고 한 것이다.

두 번 째는 『文選』「子虛賦」와 「上林賦」를 인용한 것이다. 「子虛賦」에 楚나라의 子虛가 齊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허풍을 떨기를, “...초나라의 雲夢이란 연못이 대단히 화려하다고 자랑했는데, 어떤 서생이 또 齊나라의 크기를 말하길, ”雲夢정도의 연못을 삼키는 것은 가슴 속에 8~9할도 지장이 되질 않으이!.“라고 하였다. 이는 齊나라와 楚나라 서로가 자랑한 것인 즉, 지금의 ‘互不相許(서로가 서로를 인정하지 않음)’인 것이다.

「上林賦」에서 亡是公[무시공, 假設의 인물로 烏有先生이라고도 함.]이 껄껄 웃으며 말하길, ”楚나라는 잃었고 齊나라도 아직 얻은 것은 못 된다네“ 라고 하고, 또 ”齊나라와 楚나라의 일은 또한 어찌 자네가 아직 크고 화려함을 보지 못한 것을 말하고, 유독히 天子의 上林을 듣지 못한 것을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비판하였다. 이것은 곧 ‘並奪[함께 부정함]’한 것이다. 



   2) 立二種敎

    ① 西秦 曇牟讖 三藏 ; 立半滿敎


第二 立二種敎 自有四家하니라 西秦曇牟讖三藏 立半滿敎하니 卽聲聞藏 爲半字敎 菩薩藏 爲滿字敎 隨遠法師♣(2) 亦同此立하니라

第二는 二種의 敎를 세움이니 본래 四家가 있다. 一은 西秦의 曇牟讖[담무참]三藏이 半滿敎를 세웠는데, 즉 聲聞藏은 半字敎이며 菩薩藏은 滿字敎이다. 隋나라의 遠法師도 또한 이와 동일하게 세웠다.

♣(2) 隨遠法師 ; 隋나라의 淨影寺의 慧遠스님을 말한다.


 隨遠法師 亦同此立者 彼涅槃疏初호대 聖敎雖衆이나 畧有二種하니 聲聞藏이요 菩薩藏 是也니라

 ‘隋遠法師 亦同此立’이란 것은 그가 지은 『열반경』 疏初에서 “聖人의 가르침이 비록 많지만 간략히 두 가지가 있으니, 一은 聲聞藏이요 二는 菩薩藏이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斯則文據涅槃이니 盖是對小顯大 通相之意 未於大中 顯有權實 亦含半滿이로다

이것은 『열반경』에 의거한 글이니 대체로 小乘에 對하여 大乘을 나타내는 通相적인 뜻이다. 아직 大乘 가운데에 權과 實이 있고 또한 半과 滿을 포함하였음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斯則下 順違 先明其順이니 順於至敎니라 涅槃半滿 前已廣引하니라

 言蓋是對小下 辨違 上言順者 但順通相之意 未知佛之深旨로다 半滿之言 顯在小大 密意 復有以權爲半하고 以實爲滿하니 則大乘中 有半滿矣니라 亦猶緣覺聲聞 開之有異 則成二乘하고 合之有同이라 總稱爲小 權實 亦爾하야 開之有異이라 權可稱半이요 合之大同이라 故並稱滿이니라 是則實敎 唯滿이요 小敎 唯半이며 權大乘者 亦半亦滿也로다

 ‘斯則’아래는 順違다. 먼저 그 順[긍정함]을 밝혔으니 至敎[지극한 가르침]를 따른 것이다. 『涅槃經』의 半과 滿은 앞에서 이미 자세히 인용하였다.

 ‘蓋是大小’아래는 違[부정함]를 분별함이다. 위에서 말한 順이라는 것은 다만 通相적인 뜻에 順함일 뿐 아직 부처님의 깊은 趣旨는 알지 못함이다. 半과 滿이란 말은 小乘과 大乘에 드러나 있지만 비밀스런 의미는 다시 權으로 半이 되고 實로 滿이 되니, 곧 대승 가운데에도 半과 滿이 있다. 또한 마치 緣覺과 聲聞이 펼치면 다름이 있어서 곧 二乘을 이루고, 이를 合하면 같음이 있어서 모두 小乘이라 일컫는 것처럼, 權과 實도 또한 이러하여 열면 다름이 있다. 權을 半이라 칭하면서 合하면 대체로 같다. 그러므로 함께 滿이라 칭한다. 이러한 즉 實敎는 오직 滿일 뿐이요 小乘敎는 오직 半일 뿐이며, 權大乘이라는 것은 또한 半이면서 또한 滿인 것이다.



    ② 隋 延法師 ; 立漸頓敎


隋延法師 立漸頓二敎하니 謂約漸悟機인댄 大由小起 所設 具有三乘일새 故名爲漸이라 若約頓機인댄 直往於大하야 不由於小일새 名之爲頓이니라

二는 隨나라 延法師가 漸과 頓 二敎를 세웠으니, 漸悟의 근기를 잡는다면 大乘은 小乘으로 인하여 일어나기에 시설한 것이 三乘을 갖추고 있기에 그러므로 漸이라 이름 하였다. 만약 頓悟의 根機를 잡는다면 바로 대승으로 나아가서 소승을 말미암지 않을 것이니, 이를 頓이라 이름 한다.


此雖約機하야 說有漸頓이나 而所說法 不出半滿하니라

이것은 비록 근기를 잡아 頓과 漸이 있다고 설명하였지만 설한 바의 법은 半과 滿을 벗어나지 않았다.


 此雖約機下 辨順違 直出立意 不離半滿하니 半滿順違 卽此順違也니라 言不出半滿者 頓卽前滿이요 漸具半滿이라 以具有三乘하니 二乘 是半이요 大乘 是滿故니라 以機就敎 有直有曲일새 故分漸頓耳니라

 ‘此雖約機’아래는 順과 違를 분별함이다. 곧바로 뜻을 세워 드러내면 半과 滿을 벗어나지 않으니, 半敎와 滿敎의 順[긍정]과 違[부정]가 곧 이 順違이다. ‘不出半滿’이라 말한 것은 頓은 즉 앞에서의 滿이요 漸은 半과 滿을 갖추었다. 三乘( ; 聲聞과 緣覺의 二乘과 大乘을 합하면 三乘이 된다)을 갖추었으니, 二乘은 半이요 대승은 滿이기 때문이다. 根機로써 敎에 나아감에 直[곧바로 나아감]도 있고 曲[우회해서 나아감]도 있기에, 그러므로 漸과 頓을 나누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