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華嚴經 懸談 ♣>/大方廣佛華嚴經疏鈔懸談

大方廣佛華嚴經疏演義鈔 卷第十 / [3]

화엄행 2011. 1. 5. 19:35

大方廣佛華嚴經疏演義鈔  卷第十 <3>

 

淸凉山 大華嚴寺沙門 澄觀述

 


其分敎者 亦有多義하니 理雖一味 詮有淺深일새 故須分之하야 使知權實이니라

敎를 나눔에도 또한 많은 뜻이 있으니, 一은 이치는 비록 한 맛이지만 설명함에는 얕고 깊음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나누어서 權과 實을 알게 해야 한다.


 其分敎者下 釋分敎中 乃有十意하니 前五 對前五義 後五 顯過於前이라

今初 理雖一味等者 謂今欲分敎 非欲分理 迷於權實이면 寧契佛心이리오

 ‘其分敎者’아래는 敎를 나눔을 해석하는 가운데 이에 十意가 있으니, 前五는 前의 (敎를 나누지 않는) 五義에 對한다. 後五는 前(敎를 나누지 않는 것)보다 나음을 나타내었다.

지금은 初니 一은 ‘理雖一味’ 등 이라는 것은 지금은 敎를 나누고자 하는 것이지 理致를 나누고자 하는 것이 아니니, 權과 實에 迷惑한다면 어찌 佛心에 契合하겠는가?


約佛 雖則一音이나 就機 差而敎別이니라

二는 부처님을 잡으면 비록 一音(한 가지 소리)이지만, 根機에 나아가면 차별이 나서 敎가 다르게 된다.


 二中一音 但是敎本이라 非卽是敎 敎乃在機 隨機不同일새 今分彼敎이라 淨名호대 佛以一音演說法이나 衆生 各各隨所解라하니 今分隨所解耳니라 其猶長風 是一이나 百竅異吹하니 豈以一風不殊 便謂百竅齊響이리오 一雨亦就佛說이나 三草卽就機殊하니 今分三草敎殊 非析一雨令異니라호대 雖一地所生이며 一雨所潤이나 而諸草木 各有差別이라 하니 以一音一雨 義相不異故 但說一音이라

 二 중에 一音은 다만 敎의 근본일 뿐이지 즉 敎인 것은 아니다. 敎는 이에 根機에 있다. 根機를 따라서 같지 않기에 지금은 저 敎를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淨名經』에 이르길, “부처님은 一音으로써 法을 연설하시나 중생이 각각 이해하는 바를 따름이다”라고 하였으니, 지금은 이해하는 바를 따라 나눌 뿐이다. 그것은 마치 長風은 하나이지만 백 개의 구멍에서 다르게 부는 것과 같이, 어찌 하나의 바람이 다르지 않다고 해서 문득 백 개의 구멍에서 가지런하게 울린다고 하겠는가? 一雨도 또한 佛說에 나아감이나 三草는 즉 根機의 다름에 나아간 것이니, 지금은 三草로 나눈 가르침이 다름이지 一雨를 분석하여 다르게 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경에 이르길, “비록 한 땅에서 생긴 것이며 一雨가 적신 것이지만, 모든 초목이 각각 차별이 있다.”라고 하였다. 一音과 一雨가 뜻이 서로 다르지 않기 때문에 다만 一音만을 설명하였다.


本意未申이고 隨他意語하야 而有異故니라

三은 本意는 아직 펴지 않고 다른 뜻을 따라서 말씀하여 다름이 있기 때문이다.


 三中 本意未申者 如佛 本爲一事하야 出現於世 四十餘年 未顯眞實하시니 今分一代時敎 豈妨判有淺深이리오 言隨他意語者 佛有三語 隨自意語 說自所證一實等故 隨他意語 一向方便으로 引衆生故 隨自他意語 半稱自證하고 半隨機故 今分後之二語 不分初一隨自意也니라

 三 중에 ‘本意未申’이라는 것은 부처님께서 본래 一大事를 위하여 세상에 출현하셨으나 사십 여 년 동안 아직 진실을 드러내지 않음과 같으니, 지금 一代時敎를 나눔에 어찌 敎判에 깊고 얕음이 있음에 방해되겠는가? ‘隨他意語’라 말한 것은 부처님은 세 가지 말씀이 있으시다. 一은 自意를 따라 말씀하시니, 스스로 증득하신 一實 등을 설하시는 것이다. 二는 他意를 따라 말씀하시니, 한결같은 방편으로 중생을 인도하시는 것이다. 三은 自와 他의 뜻을 따라 말씀하시니, 半은 자신이 증득한 것에 칭합하고 半은 根機를 따르는 것이다. 지금은 뒤의 두 가지 말씀을 나누고, 처음 한 가지인 ‘自意를 따름은’은 나누지 않았다.


言有通別하니 就顯說故니라

四는 말에는 通과 別이 있으니 顯了說에 나아갔기 때문이다.


 四中 言有通別者 如前所引하야 此通隨聞異解어니와 有不通者일새 就此分之 如說人空法有 斯卽小乘이라 不可名大 若說二空이면 此可名大 不得名小니라 說有五性 非是一性이요 說一性處 非是說五 如是等文 無容異解일새 故須分之니라

 四 중에 ‘言有通別’이라는 것은 앞에서 인용한 것처럼 이 通은 들음에 따라 다르게 이해하는 것이며, 통하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여기에 나아가서 나눈다. 만일 ‘(만물을 상징함)은 空하나 法은 존재한다’라고 설한다면, 이것은 곧 小乘이라서 大乘이라 이름 할 수 없다. 만약 二空을 설한다면 이것은 大乘이라 이름 할 수 있어도 小乘이라 이름하지 않는다. 五性이 있다고 설한 것은 一性이 아니요 一性을 설하는 곳에서는 五性을 설하지 아니하니, 이와같은 등의 글은 다른 理解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나눠야 한다.


雖分權實이나 須善會佛意 有開顯故니라

五는 비록 權과 實을 나누지만 반드시 부처님의 뜻을 잘 알아야 하니, ‘開(열음)과 顯(드러냄)’이 있기 때문이다.


 五中有二義故 雖分權實이나 不成枝流 善會佛意 所說權敎 乃是隨宜所說實者 稱理究竟이니라 有開顯者 說彼權敎 是方便門이요 說於實敎 是眞實相이니 不隨方便爲眞實이면 則方便門 知實理之普周하면 則眞實相이라 法華經호대 此經 開方便門하야 示眞實相이라 하니 今就開顯故 不滯枝流 約佛施張故 須分權實이니라

 五 중에는 두 가지 뜻이 있기 때문에 비록 權과 實을 나누지만 枝流를 이루지는 않는다. 一은 ‘善會佛意’니 설하신 權敎는 곧 마땅함을 따름이요, 설하신 實敎는 이치의 究竟에 칭합함이다. 二는 ‘有開顯’이라는 것은 저 權敎를 설하시는 것은 방편문이요 實敎를 설하심은 진실상이니, 방편을 따르지 않고도 진실하면 방편문이 열리고 實理가 널리 두루함을 알면 眞實相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법화경』에 “이 경은 방편문을 열어서 진실상을 보임이다.”라고 하였으니, 지금은 開와 顯에 나아가기 때문에 枝流에 막히지 않는다. 부처님께서 (가르침을) 베풀어 펼치심을 잡았기 때문에 반드시 權과 實을 나눠야 한다.♣(1)

♣(1) ① 善會佛意 ; 부처님께서 權을 말씀하심은 곧 根機를 따름이요, 부처님께서 實을 말씀하심은 곧 이치에 칭합함이다. 부처님의 뜻을 이와 같이 잘 이해해야 한다. 이미 부처님의 뜻이 비록 나눠졌지만 枝流를 이루지 않으니, 그러므로 다름에 집착하거나 같음에 미혹하지 않는 것이다.

② 有開顯等者 ; 가르침 중에서 부처님께서 스스로 開顯을 말씀하셨다. 그런데 開字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一佛乘을 나누어 달리 三乘을 말씀하시니, 그것을 開라고 한다. 즉 근본으로부터 末로 흐름이다. 둘째는 길을 내고[開除] 開發하는 것이니, 이는 곧 三乘을 말씀하여 방편을 삼아서 하나의 진실로 돌아가게 함이다. 즉 末을 섭수하여 本으로 돌이키는 것이다. 지금은 뒤의 의미를 잡은 것이니 어찌 枝流를 이루겠는가?

   

又王之密語 所爲別故 不識權實이면 以深爲淺하야 失於大利하고 以淺爲深하야 虛其功故 莊嚴聖敎하야 令深廣故 諸聖敎中 自有分故 諸大菩薩 亦開敎故니라

또 왕의 비밀스런 말에 할 바가 다르기 때문이며, 權과 實을 알지 못하면 깊은 것으로써 얕음을 삼아서 큰 이익을 잃고, 얕음으로써 깊음을 삼아서 그 공덕을 헛되게 하기 때문이요, 聖敎를 장엄하여 깊고 넓게 하기 때문이며, 모든 聖敎 가운데에 저절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이요, 모든 대보살도 또한 敎를 열기 때문이다.


 又王之密語下 有五意하야 顯過前不分이니 初一也 涅槃第九 說先陀婆 一名四實이니 一者이요 二者 三者 四者라 하니라 釋中이요니라 

 ‘又王之密語’아래는 다섯 가지 의미가 있어서 앞에 나누지 않음보다 나음을 드러내니, 이것은 첫 번째이다.『涅槃經』 第九에 “先陀婆는 하나의 이름에 네 가지 實이니[사실적 의미가 있으니], 一은 소금이요, 二는 그릇이요, 三은 물이요, 四는 말[馬]이다.”라고 하였다. 해석하는 중에서는 一은 물이요, 二는 소금이요, 三은 그릇이요, 四는 말이다.


 故 彼文호대 如是四種 皆同此名이라 有智之臣 善知此名하야 若王洗時 索先陀婆하면 卽便奉水하며 若王食時 索先陀婆하면 卽便奉鹽하며 若王食已 將欲飮漿하야 索先陀婆하면 卽便奉器하며 若王欲遊하야 索先陀婆하면 卽便奉馬 如是智臣 善解大王 四種密語니라 是大乘經 亦復如是하야 有四無常하니 大乘智臣 應當善知하니라

 그러므로 저 글에서 “이와 같은 네 가지는 다 이 이름과 같다. 지혜로운 신하가 이 이름을 잘 알아서 만약 왕이 세수할 때에 선타바를 찾으면 곧 물을 올리고, 만약 왕이 식사할 때에 선타바를 찾으면 곧 소금을 올리며, 만약 왕이 식사를 마치고 숭늉을 마시려고 하여 선타바를 찾으면 곧 그릇을 올리며, 만약 왕이 외출하고자 하여 선타바를 찾으면 곧 말을 대령한다. 이와 같이 지혜로운 신하가 대왕의 네 가지 密語를 잘 이해한다. 이 대승경도 또한 다시 이와 같이 네 가지 無常이 있으니, 大乘의 지혜로운 신하는 응당 잘 안다.


 若佛出世하야 爲衆生說호대 如來涅槃이라하면 智臣 當知此是如來 爲計常者하야 說無常相하야 欲令比丘 修無常想이라 或復說言호대 正法當滅이라하면 智臣 應知此是如來 爲計樂者하야 說於苦相하야 欲令比丘 多修苦想이라 或復說言호대 我今病苦 衆僧破壞라하면 智臣 當知此是如來 爲計我者하야 說無我相하야 欲令比丘 修無我想이라

 만약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시어 중생을 위하여 말씀하시되 ‘如來涅槃’이라 하면 지혜로운 신하는 마땅히 이것은 여래께서 ‘항상 하신다’고 헤아리는 자를 위하여 無常의 相을 말씀하시어 비구로 하여금 ‘無常想’을 닦게 하고자 함인 줄을 안다. 혹 다시 말씀하시길 ‘正法이 당래에 멸할 것이다.’라고 한다면 지혜로운 신하는 응당 이것은 여래께서 즐거움을 헤아리는 자를 위하여 ‘苦相’을 설하시어 비구로 하여금 苦想을 많이 닦게 하고자 함인 줄을 안다. 혹 다시 말씀하시길 ‘내가 지금 병들어 고통스럽고, 衆僧도 무너질 것이다.’라고 한다면, 지혜로운 신하는 응당 이것은 여래께서 ‘我’를 헤아리는 자를 위해서 ‘無我相’을 말씀하시어 비구로 하여금 無我想을 닦게 하고자 함인 줄을 안다.


 或復說言호대 所謂空者 是正解脫이라하면 智臣 當知此是如來 說正解脫 無二十五有라하야 欲令比丘 修學空想이라 以是義故 是正解脫 則名爲空이며 亦名不動이라 謂不動者 是解脫中 無有苦故 是故不動이라 是正解脫 爲無有相이니 謂無相者 無有色聲香味觸等이라 故名無相이요 是正解脫 常不變易이라 是解脫中 無有無常熱惱變易일새 是故解脫 名曰 常住不變淸凉이라 或復說言호대 一切衆生 有如來性이라 하면 智臣 當知此是如來 說於常法하야 欲令比丘 修正常法이라 是諸比丘 若能如是隨順學者 當知하라 是人 眞我弟子라 하니라

 혹 다시 말씀하시길 ‘空이라 하는 것은 正解脫이다’라 하면 지혜로운 신하는 응당 이는 여래께서 正解脫을 설함은 二十五有가 없다고 말씀하여 비구로 하여금 空想을 修學케 하고자 하는 줄을 안다. 이러한 뜻으로 이 正解脫은 곧 空이라 이름하며 또한 不動이라 이름 한다. ‘不動’이라 하는 것은 이 해탈 중에 苦가 없기 때문이니, 이런 까닭에 不動이다. 이 正解脫은 相이 없나니, 無相이라 하는 것은 色 ․ 聲 ․ 香 ․ 味 ․ 觸 등이 없음이다. 그러므로  無常이라 이름하고 이 正解脫은 항상 變易[변화하여 바뀜]하지 않는다. 이 해탈 중에는 無常과 熱惱와 變易이 없으니, 이런 까닭에 해탈을 이름 하여 ‘常住와 不變과 淸凉’이라 한다. 혹 다시 말씀하시길 ‘일체중생은 여래의 性品이 있다’라고 하면, 지혜로운 신하는 마땅히 이는 여래께서 常法을 설명하여 비구로 하여금 正常法을 닦게 하고자 하신 줄을 안다. 이 모든 비구가 만약 이처럼 따라서 배울 수 있는 자라면,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진실로 나의 제자이니라.”라고 하였다.


 然彼經疏 不釋不次所以하고 但按次配釋而已 前四 彰權隱實이요 後一 彰實隱權이니라 今謂前別喩中 卽無常苦空無我 而爲其次 以水方圓任器 是無常故 鹽是味故 器是當其空하야 有器之用故 馬由人策하야 不自在故니라 合中 無常苦無我 是三修法 屬生死故 四合空者 是正解脫故 而解脫中 空無我苦不淨及無常 卽是常故 一空中 明有四義하야 並以器喩하고 而最後佛性 彰其妙有하야 卽合前馬하니라

 그러나 저 經의 疏에 차례대로 하지 않은 까닭을 해석하지 아니하고 다만 차례를 살펴 배대하여 해석했을 뿐이니, 앞의 넷은 權을 드러내었고 實을 숨김이요 뒤의 하나는 實을 드러내고 權을 숨김이다. 지금은 말하자면 앞의 따로 비유한 것 중에 곧 無常과 苦와 空과 無我로 그 차례를 삼았으니, 물이 모나고 둥근 것은 그릇에 맡긴 것이 無常이기 때문이요, 소금은 맛이기 때문에 苦다. 그릇은 마땅히 空해야만 그릇의 쓰임이 있기 때문이요, 말은 사람의 채찍으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합한 중에 無常과 苦와 無我의 이 세 가지 닦는 法이 生死에 속하기 때문이요, 네 번째의 空에 합한 것은 正解脫이기 때문이니, 해탈 중에 空 ․ 無我 ․ 苦 ․ 不淨과 無常이 곧 常이기 때문이다.♣(2) 그러므로 하나의 空 속에 네 가지 뜻이 있음을 밝혀서 아울러 그릇으로 비유하고, 최후의 佛性은 그 妙有를 드러내어 곧 앞의 말[馬]에 합하였다.

♣(2) 合中無常苦無我 是三修法屬生死 ; 만약 비유의 차례를 따른다면 제3은 그릇에 합하니 空을 말한 것에 해당하지만, 지금은 三修를 따라서 차례를 삼기 때문에 空의 뜻을 세운 것이 도리어 제4가 된다. 그러나 『열반경』에는 열등한 세 가지 닦음이 있으니, 곧 無常과 苦와 無我이며, 수승한 세 가지 닦음이 있으니 常과 樂과 我이다. 『열반경』「哀歎品」에 ‘三修가 있는데, 비구는 苦와 無常과 無我를 닦는다.’고 하고, “我는 단지 我의 無想만을 닦는 것이 아니라 또한 그 나머지 諸想과 無常想과 無我想을 닦아 익힌다”고 하였는데, 간략히 空을 말하지 않았기에 三修라고 하였다. 그러나 空은 生死가 아니고 三修法은 生死法에 의지하여 三觀을 닦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사에 속한다고 하였다.


 然이나 空中四義 遮無常等이요 佛性一義 顯是眞常이니라 亦應具說我樂淨等이나 含在正解脫中하니 不動 是樂이요 無常 是淨이요 無變熱惱 卽是常義 馬又我義니라 是則此中 具彰八行이니라 由於生死無常等中 密顯常等일새 故爲密語니라 又初標中 鹽在初者 亦是苦空無常無我 而爲其次 如常所明이라 此釋 不同古師之義니라이나 引此文意 令隨所說言하야 須善得意 豈可混然하야 不分權實이리오

 그러나 空 가운데의 네 가지 뜻은 無常 등을 막음이요, 佛性 하나의 뜻은 眞常을 나타냄이다. 또한 응당 我 ․ 樂 ․ 淨 등을 갖추어 설명해야 하지만 正解脫 중에 포함되어 있으니, 不動은 樂이요 無常은 淨이요 無變과 熱惱는 곧 常의 뜻이요 말[馬]은 또 我의 뜻이다. 이러한 즉 이 속에 八行을 갖추어 나타낸다.♣(3) 生死와 無常 등으로 인한 중에 은밀하게 常 등을 나타내기에 그러므로 ‘密語’라고 하였다. 또 처음 나타내는 중에 소금이 처음에 있는 것도  苦 ․ 空 ․ 無常 ․ 無我로 그 차례를 삼은 것이니, 常에서 밝힌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 해석은 옛 스님의 뜻과는 같지 않다. 그러나 이 글을 인용한 뜻은  설하신 말씀을 따라서 반드시 뜻을 잘 얻게 함이니, 어찌 뒤섞어 權과 實을 나누지 않을 수 있으리오?

♣(3) 具彰八行 ; 境界에 있어서는 德이라 하고 마음에 있어서는 行이라고 하니, 다 觀行이기 때문이다. 이는 즉 고요하여 항상 常과 無常 등을 알며 이미 두 가지 알음알이를 내지 않나니, 밝은 거울이 마음에 있는데 어찌 妙行이 아니겠는가?


 ○ 言不識權實이면 以深爲淺等者 第二意也 如言初發心時 便成正覺 而謂但是如來方便說者 是以深爲淺也 不能正修하고 高推聖境하야♣(4) 卽不能速證無上菩提이라 故云호대 失於大利 離世間品호대 修此法者 少作功力으로 疾得菩提等이라하니라

 ○ ‘不識權實 以深爲淺’ 등이라 말한 것은 第二의 뜻이다. ‘처음 發心한 때에 문득 正覺을 이룬다’는 말처럼 ‘다만 如來의 方便說일 뿐이다.’라고 하는 것은 깊음으로서 얕음을 삼은 것이니, 바르게 닦을 수 없고 성인의 경계를 높이 추앙만 하여 곧 무상보리를 속히 증득할 수 없다. 그러므로 ‘失於大利’라고 하였으니, 「離世間品」에 “이 법을 닦는 자는 공력을 조금 짓고도 빨리 보리를 얻는다.”는 등이라고 하였다.

♣(4) 高推聖境 ; ‘이치로는 聖人의 境界에 들어간다고 한 것이지, 어찌 내가 할 수 있겠는가?’라 하는 것이다. 즉 凡夫의 상태에 머물러서 더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退屈心을 말한 것이다.


 ○ 言以淺爲深 虛其功者 猶如世尊 爲止亂想하사 令數息看心하고 爲厭苦者하여 令出三界어시늘 衆生 不了하야 耽味爲眞이라 勤苦不已하야 多用功力이나 所獲至微하야 不得涅槃 一日之價일새 故云호대 虛其功故라 하니 卽虛廢功力也니라

 ○ ‘以淺爲深 虛其功’이라 말한 것은 마치 세존께서 어지러운 생각을 그치게 하기 위해서 숨을 헤아려 마음을 보게 하시고, 苦를 싫어하는 자를 위하여 삼계에서 벗어나게 하시거늘, 중생이 깨닫지 못하고 耽味하여[깊이 좋아함] 眞이라 여긴다. 부지런히 수고로움을 그치지 않고 많은 공력을 쓰지만  얻는 것은 지극히 적어서 열반의 하루값어치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 功을 헛되게 한다’고 하였으니, 곧 헛되이 공력만 잃은 것이다.


 ○ 言莊嚴聖敎하야 令廣深故者 第三意也 謂分析權實空有하며 取捨偏圓遲速하야사 方知佛法 微妙深玄하야 無不包攝이라 譬猶不泛大海 豈識邊涯 不識木石이면 安知眞實 智論 釋法施云호대 依隨經論하야 廣作義理하야 爲立名字 皆名法施라하니라 又若不分權實이면 則謂三敎大同이라 하니라 今明大乘 尙有權實이어든 何況小耶 小乘 比大컨댄 猶若螢光 方於日照 小是佛敎라도 尙被斥訶어든 況於儒道 比之佛法컨댄 則天地懸隔矣 以此重重揀之하야사 方知佛法深奧니라

 ○ ‘莊嚴聖敎 令廣深故’라는 것은 第三의 뜻이다. 權과 實과 空과 有를 분석하며, 치우침[偏]과 원만함[圓]과 더딤[遲]과 빠름[速]을 取하고 버려서, 비로소 佛法이 미묘하고 깊고 그윽하여 거두어들이지 않음이 없는 줄을 아는 것을 말한다. 비유하면 大海에 띄우지 않고서 어찌 끝을 알며, 나무와 돌을 (구별하여) 알지 못하면 어찌 진실을 알겠는가? 그러므로 『智論』에 法施를 해석하여 이르길, “經論에 의지하고 따라서 널리 義理를 지으며 名字를 세우는 것을 다 法施라고 이름한다.”라고 하였다. 또 만약 權과 實을 나누지 않으면 ‘三敎가 대체로 같다’고 말할 것이다. 지금 대승을 밝힘에도 오히려 權과 實이 있는데, 어찌 하물며 소승이겠는가? 小乘을 大乘에 비교한다면  마치 반딧불을 햇빛에 비교함과 같다. 그러므로 小乘이 부처님의 가르침일지라도 오히려 배척과 꾸짖음을 당하는데, 하물며 儒敎와 道敎이겠는가?♣(5) 이것을 불법에 비한다면 天地가 懸隔함이니 이것을 거듭거듭 가려야 비로소 불법이 심오한 줄 알리라.

♣(5) 부처님의 가르침인 小乘도 반딧불 수준인데, 하물며 儒敎의 孔子와 孟子 등의 가르침과 道敎의 老子와 莊子 등의 가르침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는 淸凉 澄觀스님의 설명이다.


 ○ 言諸聖敎中 自有分故者 第四意也 如解深密 立三時不同하며 解節金光明 立三輪之異하며 涅槃 自分半滿하고 又約五味之差하니 皆佛自分也니라

 ○ 言諸大菩薩 亦開敎故者第五意也 若無著之扶五性及與三時 龍樹之判四門共與不共 皆揀權實하야 有取捨也니라

 ○ ‘諸聖敎中 自有分故’라고 말한 것은 第四의 뜻이다. 저 『解深密經』에서는 三時를 세움이 같지 않으며,『佛說解節經』과『金光明經』에서는 三論을 세움이 다르며,『涅槃經』에서는 몸소 半과 滿을 나누고♣(6)다섯 가지 맛의 차이를 잡았으니♣(7), 다 부처님께서 몸소 나누신 것이다.

 ○ ‘諸大菩薩 亦開敎故’라고 말한 것은 第五의 뜻이다. 만약 無著의 五性과 三時를 도움과 龍樹의 四門의 共과 不共을 判釋한 것이 다 權實을 가려서 취하거나 버린 것이 있다.  

♣(6) 半滿 ; 小乘과 權敎는 ‘半敎’요, 大乘과 實敎는 ‘滿敎’이다.

♣(7) 約五味之差 ; 『열반경』권14에 나온다. 소에서 젖이 나고 젖에서 우유죽[酪]이 나오며, 우유죽에서 싱싱한 煉乳[生酥]가 나오고 生酥에서 익힌 연유[熟酥]가 나오며, 熟酥에서 버터[醍醐]가 나오는 것처럼, 부처님도 이와 같으시어 12部經을 내셨고, 12部經에서 修多羅가 나오고 修多羅에서 方等經이 나왔으며, 方等經에서 般若婆羅蜜經이 나오고 반야경에서 大涅槃經이 나왔다.


以斯多義 開則得多而失少하며 合則得少而失多 但能虛己求宗일새 不可分而分之 亦何爽於大旨리요 故今分之니라

이러한 여러 가지 뜻 때문에 열면 얻음은 많고 잃음은 적으며 합하면 얻는 것은 적고 잃는 것이 많다. 다만 능히 자기를 비워서 宗을 구할 뿐이다. 나눌 수 없는 것이나 나누나니 또한 어찌 大旨와 어긋나겠는가? 그러므로 지금 나눈 것이다.


 以斯多義下 第三 雙結離合이나 而捨合從離니라

 ‘以斯多義’아래는 第三에 쌍으로 離[나눔]와 合[합함]을 결론하였으나 合을 버리고 離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