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華嚴經 懸談 ♣>/大方廣佛華嚴經疏鈔懸談

大方廣佛華嚴經疏演義鈔 卷第十 / [2]

화엄행 2010. 10. 29. 05:33

大方廣佛華嚴經疏演義鈔  卷第十

淸凉山 大華嚴寺沙門 澄觀述

 

 

第二節. 藏敎所攝

 第二. 明敎攝

  1. 大意離合

 


今初 且西域東夏 弘闡之流 於一代聖言 或開宗分敎하며 或直釋經文하니 以皆含得失故耳니라

지금은 初이다. 우선 西域과 東夏[중국]에 널리 드날리는 流가 한 시대 성인의 말씀에 혹은 宗을 열어 敎를 나누며 혹은 바로 경문을 해석하니, 다 得失을 포함한 것일 뿐이다.


 今初且西域下 釋第一門이라 於中이니 雙標開合이요 且不分下 雙釋開合이요 以斯多義下 雙結開合이니 今初也

  西域開合者 如龍樹之釋大品 無著之解金剛等 皆合而不分也 智光戒賢 各分三時하니 皆開而不合也니라

  東夏 開不開者 如僧肇之解淨名 僧叡之釋思益等 皆合而不分也 生公之立四輪 智者之分四敎等 皆開而不合也 諸德 見開有失則合하고 見合有失則開하니 不應局執也니라

  ‘今初且西域’아래는 第一門을 해석함이다. 그 중에 三이니 처음은 開와 合을 함께 標함이요, 다음의 ‘且不分’아래는 開와 合함을 함께 해석함이요,  뒤에 ‘以斯多義’아래는 開와 合함을 함께 결론함이니, 지금은 初이다.

  서역에서 開合한 것은 龍樹가 『大品般若經』을 해석한 것과 無著이 『金剛經』을 해석한 것 등은 다 합하고 나누지 않은 것이다. 智光과 戒賢은 각각 三時로 나누니 다 열고 합하지 않은 것이다.

  東夏에서 열거나 열지 않은 것은 승조가 『淨名經』을 해석한 것과 승예가 『思益經』을 해석한 것 등은 다 합하고 나누지 않음이요, 生公이 四論을 세운 것과 智者의 四敎로 나눈 것 등은 다 열고 합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 大德이 열어서 失이 있음을 보면 합하고 합하여 失이 있음을 보면 열었으니, 응당 좁은 소견으로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且不分之意 略有五焉이라

우선 나누지 않은 뜻이 대략 다섯 가지가 있다.


  總標不分이라

  처음은 나누지 않음을 總體的으로 標함이다.


一則理本一味 殊途同歸일새 不可分也 一音普應하며 一雨普滋故 原聖本意인댄 爲一事故 隨一一文하야 衆解不同故 多種說法 成枝流故니라

一은 이치가 본래 한 맛이니 다른 길이지만 돌아가는 곳이 같기에 그러므로 나눌 수 없는 것이요, 二는 한 가지 소리로 널리 응하며 한 줄기 빗물로 널리 자라나기 때문이요, 三은 聖人의 本意를 찾아보면 하나의 일이 되기 때문이요, 四는 낱낱의 文을 따라서 여러 견해가 같지 않기 때문이요, 五는 여러 종류의 說法이  枝流를 이루기 때문이다.


  列釋이라 殊途同歸者 周易호대 天下 殊途而同歸 百慮而一致♣(1)라 하니라 謂若千逕九逵 王城 不二인댄 九流百氏♣(2) 大道寧差리오 今疏借用 乃通三義하니 約敎 始隨機異故 殊途 終歸顯實故 一致 約機則異 就理常一이요 體外無權이라 權卽是實이니 殊途同致也니라

  二는 열거하여 해석함이다. ‘殊途同歸’라는 것은 周易에 이르길, “천하가  다른 길이지만 돌아가는 곳이 같고, 백 가지로 생각하지만 하나의 이치이다.”라고 하였다. 말하자면 천 갈래 샛길과 아홉 갈래 큰길에 王城이 둘이 아닌 것과 같이 九流와 百氏에 大道가 어찌 차별이 나겠는가? 지금 疏文에 빌려 쓴 것은 곧 세 가지 뜻에 통한다. 一은 敎를 잡음이다. 처음에는 근기가 다름을 따르기 때문에 다른 길이지만 마침내 實을 나타내는 것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一致한다. 二는 根機를 잡으면 다르지만 이치에 나아가면 항상  하나요, 三은 體 밖에 權이 없어서 權이 곧 實이니, 그러므로 다른 길이지만  이르는 곳이 같다.

  ♣(1) 『周易』「繫辭」편의 글이다.

  ♣(2) 九流와 百氏 ; 九流는 前漢 『藝文志』의 설이다. 몸과 나라를 온전히 보호하는 데는 九流가 있다. 1.儒流 2.道流 3.陰陽流 4.法類 5.名流 6.墨流 7.縱橫流 8.雜流 9.農流 등 이다.

한편 百氏는 諸子百家를 말한다. 이 구류와 백씨는 비록 文說은 다르지만, 大道가 다른 것은 아니였다.


  ○ 二 一音普應하며 一雨普滋者 一音 卽是淨名이요 一雨 卽法華藥草喩品이라三草二木♣(3) 不同이나 同承一雨之潤이요 五性三乘♣(4)不一이나 法雨 一味無差 彼經호대 如來 知是一相一味之法하시니 所謂解脫相 離相 滅相 究竟涅槃常寂滅相이니 終歸於空等이라 하니라

  ○ 二에 ‘一音普應 一雨普滋[한 가지 소리로 널리 응하며 한 줄기 빗물로 널리 자라남]’라는 것은 一音은 곧 『淨名經』의 말이요, 一雨는 곧 『法華經』「藥草喩品」말이다. 말하자면 三草와 二木이 같지 않으나 함께 一雨의 윤택함을 받고, 五性과 三乘이 하나가 아니지만 法雨는 한 맛으로 차이가 없다. 그러므로 저 경에 “여래께서 一相一味의 법을 아시니,  이른 바 解脫相과 離相과 滅相과 究竟涅槃常寂滅相이니 마침내 空으로 돌아가는 것이다.”라고 하는 등이다.

  ♣(3) 三草二木 ; 三草는 小,中,上의 草로 각각 人天과 二乘과 菩薩을 상징한다.

二木은 작은 나무와 큰 나무로, 10地位 중 제7地 이전은 작은 나무요, 제8地 이상은 큰 나무에 비유한 것.

  ♣(4) 五性三乘 ; ‘五性’은 ‘五性各別’로, 유식종에서 중생의 성품에는 선천적으로 菩薩情性(; 본래부터 부처가 될 무루종자를 갖춘 이), 緣覺情性(; 벽지불이 될 무루종자를 갖춘 이), 聲聞情性(; 아라한이 될 무루종자를 갖춘 이), 三乘不定性(;두 가지 종자나 세 가지 종자를 갖춘 이), 無性有情(; 성문, 연각, 보살의 무루종자는 없고, 다만 人乘이나 天乘이 될 유루종자만을 갖춘 이) 등 5종의 구별이 있다는 것.

한편 三乘은 성문, 연각, 보살에 대한 세 가지 敎法. 乘은 물건을 실어 옮기는 것을 목표로 하니, 부처님의 교법도 중생을 실어 열반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 데 비유한 것이다. 1. 聲聞乘은 4諦법문이니, 부처님의 말씀하는 소리를 듣고 이를 관하여 해탈을 얻는다. 2. 緣覺乘은 12인연의 법문이니, 스승에게 가지 않고 스스로 세상의 이치를 관하여 깨닫는 것이다. 3. 菩薩乘은 6바라밀의 법문이니, 이 법문에 의하여 스스로 해탈하고 남을 해탈케 하여 부처를 이룬다.


  ○ 三 原聖本意인댄 爲一事故者 亦是法華中意 彼經호대 過去諸佛 以無量無數方便 種種因緣 譬喩言詞 而爲衆生하야 演說諸法하시니 是法 皆爲一佛乘故等이라 하며 又云호대 我此九部法 隨順衆生說하야 入大乘爲本일새 以故說是經이라하니 皆爲一事也로다

  ○ 三에 ‘原聖本意 爲一事故[성인의 본의를 찾아보면 하나의 일이 되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또한 『法華經』중의 뜻이다. 그러므로 저 경에 “과거 제불이 한량없고 수없는 방편과 가지가지 인연과 비유의 언사로 중생을 위하여 모든 법을 연설하시니, 이 법은 다 一佛乘을 위한 것이다.”라 하는 등이며, 또 “나의 이 九部法은 중생을 따라서 설하여 대승에 들어감으로 근본을 삼으니, 그러므로 이 경을 설한다.”라고 하였으니, 모두 ‘一事’가 된다.


  ○ 四 隨一一文하야 衆解不同者 此是通明諸經이라 如經 說一無常하면 或有解者 以生滅代謝일새 故云無常이라하며 或云無彼常故 名爲無常이라하며 或云不生不滅일새 名爲無常이라하며 或卽無法可常也라하며 或云眞如一法 隨染淨緣하야 轉變不常일새 故名無常이라하며 或聞無常 便知對常以說無常하야 非常非無常으로 以爲中道等하니 明知隨人解不同也로다 又苦集滅道 四名則同이나 隨機解殊하야 乃有四種이니라 又涅槃호대 十二因緣 下智觀者 得聲聞菩提하고 中智觀者 得緣覺菩提하고 上智觀者 得菩薩菩提하고 上上智觀者 得佛菩提라 하니라 又如中論偈호대 因緣所生法 我說卽是空이며 亦爲是假名이며 亦是中道義라하니 卽有多人解不同也로다

  ○ 四에 ‘隨一一文 衆解不同[낱낱의 文을 따라서 여러 견해가 같지 않다]는 이것은  여러 경을 통틀어 밝힌 것이다. 경에서 하나의 無常을 설하면 혹 어느 이해하는 자는 “生滅로써 代謝하니(변천하니), 그러므로 無常이라고 한다.”고 하며, 혹은 “저것은 항상함이 없기 때문에 이름 하여 無常이라 한다.”고 말하며, 혹은 “不生不滅하니 이름하여 無常이라 한다.”고 말하며, 혹은 “곧 항상 할만한 法은 없다.”고 하며, 혹은 “眞如一法이 染淨의 緣을 따라 轉變하여 항상하지 않으니, 그러므로 無常이라 이름 한다.”고 하며, 혹은 무상을 들음에 문득 常을 대하여 무상을 설한 줄 알아서, 常도 아니요 無常도 아닌 것으로 中道라 여기는 등이니, 사람이 이해하는 것을 따라 같지 않음을 분명이 알게 된다. 또 苦集滅道가 네 가지의 이름이 같지만 根機를 따라 이해하는 것이 달라서, 이에 四種이 있다. 또 『涅槃經』에 “십이인연을 下근기의 智慧로 觀하는 자는 성문의 보리를 얻고, 中근기의 지혜로 관하는 자는 연각의 보리를 얻고, 上근기의 지혜로 관하는 자는 보살의 보리를 얻고, 上上근기의 지혜로 관하는 자는 부처님의 보리를 얻는다.”고 하였다. 또『中論揭』에  “인연으로 생겨난 법을 나는 즉 空이라고 설하며, 또한 假名이며 또한 中道義라 한다.”고 하였으니, 곧 많은 사람의 이해가 같지 않음이 있는 것이다.


  或云호대 旣言因緣所生인댄 那得卽是空이리요 要須析因緣盡하야사 方乃會空하나니 呼十方空하야 爲卽空이니라 亦爲是假名者 有爲虛弱하야 勢不獨立이라 假衆緣成이니 賴緣故 非施權之假니라 亦是中道義者 離斷常故 名爲中道 非佛性中道라 한다 若作此解者인댄 雖三句皆空이라도 尙不成卽空이어든 況卽假卽中 生滅四諦中義也로다 

  혹은 “이미 因緣所生이라 말한다면 어찌 ‘卽是空’이겠는가? 반드시 인연을 분석하여 다하고서야 비로소 이에 空을 알리니, 十方空을 불러 ‘卽空’이라 한다. ‘亦爲是假名’이라는 것은 有爲는 虛弱하여 形勢가 홀로 서지 못하기에 衆緣을 假藉하여 이뤄지니, 緣에 의지하기 때문에 假요 權(방편)으로 施設하는 假가 아니다. ‘亦是中道義’라는 것은 斷과 常을 떠나기 때문에 中道라 이름한 것이요, 佛性中道가 아니다.”라고 한다. 만약 이런 見解를 짓는 자라면 비록 三句가 다 空하더라도 오히려 ‘卽空’을 이루지 못할 것인데, 하물며 ‘卽假’와 ‘卽中’이겠는가? 이것은 生滅四諦 중의 뜻이다.


    或云호대 因緣所生法 不須破滅 體卽是空이라 而不得卽假卽中이니 設作假中이라도 皆順入空이니라 何者 諸法 皆卽空이니 無主我故 假亦卽空이니 假施設故 中亦卽空이니 離斷常二邊故라 한다 三翻語異 俱順入空이라 退非二乘析法이요 進非別圓이니 乃是三獸渡河之意♣(5)로다

  혹은 “인연으로 생겨난 법은 모름지기 破滅하지 않고서도 體가 곧 空이라서 卽假 ․ 卽中하지 않으니, 설사 假와 中을 짓더라도 다 따라서 空에 들어간다. 어째서인가? 諸法이 다 卽空이니 主體로서의 ‘我’가 없기 때문이며,  假 또한 卽空이니 假가 施設했기 때문이며, 中 또한 卽空이니 斷과 ․常의 二邊을 떠났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이것은 세 가지(空, 假, 中)로 번역하여 말이 다르지만 함께 空에 따라 들어갔다. 물러나도 二乘의 分析法이 아니요 나아가도 別 ․ 圓이 아니니, 곧 ‘세 짐승이 강을 건너는 뜻’일 뿐이다.

  ♣(5) 三獸渡河之意 ; 『優婆塞戒經』의「三種菩提品」에 부처님께서 善生에게 말씀하신 내용으로 다음과 같다. 항하사를 세 마리 짐승이 함께 건너가는데, 토끼는 발이 강바닥에 닫지 않고 떠서 건너고, 말은 발이 강바닥에 닫기도 하고 닫지 않기도 하면서 건너고, 코끼리는 강바닥을 딛고서 건너간다. 이것은 12인연의 강을 건넘에 聲聞은 토끼와 같고, 緣覺은 말과 같으며, 如來는 코끼리와 같음을 비유한 것이다. 즉 성문과 연각이 부처와 다름을 비유한 것이다.


  或謂卽空卽假卽中이니 三種迤邐하야 各各有異로다 三種皆空者 無主故이요 虛設故이요 無邊故이니라 三種皆假者 同有名字故 三種皆中者 中眞中機中實故니라 謂空名中者 約眞諦故 假名中者 就機設化 不住化不化故 中名中者 約一實諦之中道故라 하니라 得別失圓이로다

  혹은 “卽空,  卽假, 卽中은 세 가지가 이어지며 각각 다름이 있다. 세 가지가 다 공이라는 것은 主體가 없기 때문에 空이요, 虛說이기 때문에 空이요, 한계가 없기 때문에 空이다. 세 가지가 다 假라는 것은 똑같이 名字가 있기 때문에 假이며, 세 가지가 中이라는 것은 中道의 眞이요 中道의 機요 中道의 實이기 때문이다. 空을 中이라 이름한 것은 眞諦를 잡았기 때문이요,  假를 中이라 이름한 것은 機에 나아가서 敎化를 시설함에 敎化하고 敎化하지 못함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요, 中을 中이라 이름한 것은 一實諦의 中道를 잡았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이것은 別을 얻었으나 圓을 잃음이다.


  或謂卽空卽假卽中 雖三而一이요 雖一而三이라 不相妨礙하니라 三種皆空者 言思道斷故三種皆假者 但有名字故 三種皆中者 卽是實相故 但以空爲名 卽具假中이요 悟空 卽悟假中이며 餘亦如是라 하니라 是知隨聞一法하야 起種種解 圓機受敎 無敎不圓이요 偏機受敎 圓亦偏矣로다 旣隨一文異解어니 何須分判不同이리오

  혹은 “卽空과 卽假와 卽中은 비록 셋이나 하나요, 비록 하나이나 셋이다. 서로 방해하여 장애되지 아니한다. 세 가지가 다 空이라는 것은 말과 생각의 길이 끊어졌기 때문이요, 세 가지가 다 假라는 것은 다만 名字만 있기 때문이요, 세 가지가 다 中이라는 것은 즉 實相이기 때문이다. 다만 空으로 이름을 삼음에 곧 假와 中을 갖추며, 空을 깨달음에 곧 假와 中을 깨달으며,  나머지도 또한 이와 같다.”라고 한다. 이것은 一法 듣는 것을 따라서 가지가지의 理解를 일으키니, 원만한 근기가 가르침을 받음에 敎가 원만하지 않음이 없고, 편협한 근기가 가르침을 받으면 원만함도 또한 편협해짐을 알게 된다. 이미 一文을 따라감에 理解가 다른데, 어찌 모름지기 같지 않은 것을 나누어 판단해야겠는가?


  ○ 五 多種說法 成枝流者 上義 亦傍該諸經이어니와 正引當經立理 法界品호대 法欲滅時 有千部異하야 千種說法等이라하니 何不尋條以得根하고 便欲派本而爲末하며 混淳源之一味하야 成澆薄之枝流

  ○ 五에 ‘多種說法 成枝流[여러 종류의 說法이  枝流를 이룬다]’라는 것은 위의 뜻은 또한 부차적으로 諸經을 갖추었지만 지금은 바로 當經을 인용하여 이치를 세웠다. 「법계품」에 “법이 소멸하려고 할 때에는 千部로 달라져서 千 가지로 법을 설할 것이다.”라고 하는 등이니, 어찌 가지를 찾아서 뿌리를 얻지 않고, 문득 근본을 나누어 末로 삼으려 하며, 깨끗한 근원의 한 맛을 섞어서 얄팍하게 枝流를 이루겠는가?


以斯五義故不可分이니 分之 乃令情構異端하야 是非競作이라 故以不分爲得이니라

이 다섯 가지 뜻 때문에 나눌 수 없는 것이니, 이를 나누면 곧 情이 異端에 얽혀서 是非를 다투게 된다. 그러므로 나누지 않음으로써 德을 삼았다.

  

  以斯五義下 總結也 夫子호대 攻乎異端이면 斯害也已라하시니 何得執異迷同하야 是非競作이리오

  ‘以斯五義’아래는 三에 總히 結함이다. 夫子[孔子]께서 이르시길, “異端을 專攻하면 이는 해로울 뿐이다.”라고 하시니, 어찌 다른 것에 집착하고 같은 것에 迷惑하여 是非를 다투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