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華嚴經 懸談 ♣>/大方廣佛華嚴經疏鈔懸談

大方廣佛華嚴經疏演義鈔 卷第九 / [6]

화엄행 2010. 8. 24. 00:53

大方廣佛華嚴經疏演義鈔  卷第九

淸凉山 大華嚴寺沙門 澄觀述

 

第二節. 藏敎所攝

 第一. 明藏攝

  1. 明藏

   1) 釋三藏

    ③ 阿毘達磨藏


第三 阿毘達磨藏이라

第三 아비달마장이다.

  初 總標

  처음은 총히 표함이다.


阿毘 名對 達磨 云法이라 法有二種이라勝義法이니 謂卽涅槃이라 是善是常일새 故名爲勝이라 法相法이니 通四聖諦 相者性也 狀也♣(1) 二俱名相이니라

阿毘는‘對’라 하고 達磨는‘法’이라 한다. 법에는 두 종류가 있다. 一은 勝義法이니 곧 열반을 말한다. 善이며 常이기에 그러므로‘勝’이라 이름한다. 二는 法相法이니 사성제에 통한다. 相이라는 것은 性이며 狀이니, 두 가지를 함께‘相’이라 이름한다.

♣(1) 相者 性也 狀也 ; 體性은 같은 점과 다른 점이 있다. 相은 외적인 것에 의거하고 性은 내적인 것에 주관하는 것이 다른 점이다.  體라는 것은 性과 相을 통칭한 것인 즉 의미의 넓고 좁음이 같지 않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의 性은 體의 性이기 때문에 性卽相의 차원에서 相이라 이름한 것이다.

한편 여기서의 相은 性과 狀의 복합적인 의미라면, 狀은 순수하게 ‘모습 ․ 모양’의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二 正釋이라 文中이라이요이요 異名이라 初中 得名이요 釋名이라 前中釋法이요 釋對

  今釋法中 卽取俱舍意釋이라호대 能持自性故名爲法이니 若勝義法인댄 唯是涅槃이요 若法相法인댄 通四聖諦라 하니라 是善是常일새 故名爲勝卽釋彼論也 相者 性也 狀也 二俱名相者 亦釋彼論也 以四聖諦中 滅諦 是理而皆云相者 滅諦之相卽體相也 餘三約相 卽相狀也♣(2)니라

  二는 바로 해석함이라. 글 중에 셋이다. 처음은 名이요, 다음은 相이요, 후는 異名이다. 처음 중에 둘이다. 먼저는 이름을 얻음이요, 후는 이름을 해석함이다. (得名) 중에 먼저 법을 해석하고, 후는 對를 해석함이다.

  지금 법을 해석하는 중에 곧 『俱舍論』의 뜻을 취하여 해석하였다. 그러므로 논에 이르길, “능히 자성을 지니기 때문에 법이라고 하니, 만약 승의법이라면 오직 열반일 뿐이요, 만약 법상법이라면 四聖諦에 통한다”라고 하였다. ‘是善是常 故名爲勝’이라 한 것은 곧 저 논을 해석한 것이다. ‘相者性也狀也 二俱名相’이라 한 것도 또한 저 논을 해석한 것이다. 사성제 가운데에 滅諦는 이치인데도 다 相이라 말한 것은 滅諦의 相은 體에 卽한 相이요, 나머지 셋의 相을 맺음은 相에 卽한 狀이다.

♣(2) 滅諦之相卽體相也 餘三約相 卽相狀也니라

; 앞의 주석(1)의 설명으로 이 의미를 풀이한다면 다음과 같다.

四聖諦 중 苦諦 ․ 集諦 ․ 道諦는 현실의 苦라는 性狀과 苦의 근원이 되는 愛慾번뇌의 상징인 集이라는 性狀 및 열반에 이르는 방법의 상징인 道라는 性狀으로 대표되고, 이것을 性과 狀의 의미를 살린 相에 卽한 모습(狀)이라는 의미로 풀이 할 수 있다.

한편 滅諦는 苦와 集의 性狀을 벗어나 깨달음의 목표인 이상의 열반인 진실한 이치이기에, ‘性卽相’이란 뜻을 살린 滅性과 滅相의 복합인 滅이란 體에 卽한 相이라 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法旣有二하고 對亦二義 一者 對向이니 謂向前涅槃이요 二者 對觀이니 觀前四諦니라

법에 이미 두 가지 있고 對에도 또한 두 가지 뜻이 있다. 一은 對向이니 앞의 열반을 향하는 것을 말하고, 二는 對觀이니 앞의 四諦를 관하는 것이다.


  法旣有二下 釋對 亦二 釋對義 亦取論意 彼論호대 此能對向하며 或能對觀일새 爲此屬之라 하니라

  ‘法旣有二’아래는 二에 對를 해석함이다. 또한 둘이니, 初는 對의 뜻을 해석했는데 또한 논의 뜻을 취하였다. 저 논에 “이것은 능히 對向하며, 혹은 능히 對觀한다. 그러므로 이것을(對를) 붙였다.”고 하였다.


其能對者 皆無漏淨慧 及相應心所等이라 由對果對境하야 分二對名이라 慧但是對 而非是法이니 非所對故니라

그‘能對’라는 것은 다 無漏淨慧와 相應心所 등이다. 對果와 對境으로 말미암아 對의 이름을 둘로 나누었다. 그러므로 慧는 다만 對요 法이 아니니, 所對가 아니기 때문이다.


  其能對者下 出對法體 亦取論意 論頌호대 淨慧隨行名對法이라 하니라 論曰 慧 謂擇法이요 謂無漏 淨慧眷屬 名曰隨行이니 如是總說無漏五蘊하야 名爲對法이라하니라 由對果對境하야 分二對名等者 釋疑 疑云호대 唯一淨慧 何有二對之名할새 故爲此通이니라 慧但是對 而非是法이니 非所對故者 揀濫이니 此是古德解釋이라 意云호대 爲分能所일새 故言慧但是對니라 若據法持自性인댄 慧何非法이리오 下揀云 非所對故니라

  ‘其能對者’아래는 對法의 體를 나타냈으니, 또한 논의 뜻을 취하였다. 그러므로 논의 頌에 이르길, “청정한 지혜가 따라서 行하는 것은 이름하여 ‘對法’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논에 “智慧는 擇法이고 淨은 無漏요 淨慧의 眷屬을 ‘隨行(따라 行함)’이라 이름하니, 이와 같이 無漏五蘊을 총체적으로 설명하여 ‘對法’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由對果對境 分二對名’ 등이라는 것은 의심을 풀어줌이다. 의심하여 “오직 하나의 淨慧가 어떻게 二對의 이름이 있는가?”라고 하기에, 그러므로 이것을 통하게 해 주었다. “慧는 다만 對일 뿐이요 법이 아니니, 所對가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은 혼동됨을 가려낸 것인데, 이것은 古德의 해석이다. 뜻으로 말하자면 能과 所로 나누었기 때문에 慧는 다만 對일 뿐이라고 말하였다. 만약 법이 자성을 지님에 의거한다면 慧가 어찌 법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아래에서 가려내어 ‘非所對故’라고 하였다.

 

言對法者 法之對故 對法藏 特名慧論하니라 舊譯 爲無比法이라하니 以詮慧 勝故니라

對法이라고 말한 것은 법의 對이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對法藏을 특히 慧論이라 이름한다. 舊譯에서는‘比法이 없다’고 하니 慧가 수승함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言對法者下 釋名也이니 卽會六釋이라 法之對者 依主釋也 故對法藏 特名慧論者 若據所對所依인댄 應名法論이어늘 慧依於法 慧爲其主일새 故名慧論이라 所詮中 詮於慧學하니라 舊譯已下 出其異名이며 兼成上慧義니라

  ‘言對法’아래는 二에 이름을 해석한 것이니, 즉 六合釋으로  會通함이다. 法의 對라는 것은 依主釋이다. ‘故對法藏 特名慧論’이라는 것은 만약 所對와 所依에 의거한다면 응당 法論이라고 해야 하지만 慧는 법에 의지함에 慧가 그 主가 되니, 그러므로 慧論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所詮 중에 慧學을 밝혔다. ‘舊譯’이하는 그것(對法)의 異名을 드러내었으며 아울러 위에 慧의 뜻을 이룩하였다.


世親攝論호대 阿毘達磨 有四義하니 謂對故 數故 伏故 通故라하니

세친의『攝論』에“아비달마는 네 가지 뜻이 있으니,  對와 數와 伏과 通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世親攝論云下 第二辯相이라 於中 總標

  ‘世親攝論云’아래는 第二에 相을 辯論함이다. 그 중에 둘이니, 先은 총체적으로 標함이다.


對義 同前이요 數者 於一一法 數數宣說하야 訓釋言詞 自相共等 無量差別故 伏者 由此具足論處所等하야 能勝伏他論故 通者 此能通釋素怛纜義故니라

對의 뜻은 앞에서와 같고, 數는 낱낱의 법을 자주자주 宣說하여 言詞와 自相과 共相 등을 訓釋함이 무량하게 차별하기 때문이다. 伏이라는 것은 이것으로 말미암아 논하는 처소 등을 갖추어서 능히 다른 論을 勝伏하기 때문이다. 通이라는 것은 이것이 능히 소달람의 뜻을 通釋하기 때문이다.


  後對義同下 別釋이라 數者 數字 通去入二聲이나 此取去聲이요 數數宣說者 數卽入聲이니라 自相者 如色 變礙爲相하고 以領納爲相等이요 共相者 共有無常苦空等이니 廣如十地疏明하니라

  論處所等者 卽瑜伽論說이라 論有七例하니 頌云호대 論體論處所 論據論莊嚴 論負論出離 論多所作法이라하니라 亦如初地中辨하다

  言勝伏他論者 勝約能立이요 伏約能破 梁論호대 伏者 此法 能伏諸說이라 立破二能 由正說依止等方便故니라 通者 梁論名解하니 由阿毘達磨 修多羅義 易解了故니라

  ‘後對義同’아래는 따로 해석함이다. 數라는 것의 數字가 去聲과 入聲 두 聲에 통하나 여기서는 去聲을 취하였고, ‘數數宣說’이라는 것의 數字는 곧 入聲이다.♣(3) ‘自相’이라는 것은 色은 변하고 장애함으로 相을 삼고, 受는 領納함(받아들임)으로써 相을 삼는 등과 같다. ‘共相’이라는 것은 無常 ․ 苦 ․ 空 등을 함께 가지고 있음이다. 자세한 것은 「十地品」疏에서 밝힌 것과 같다.♣(4)

  ‘論處所’ 등은 곧 『瑜伽論』의 설이다.♣(5) 논에 일곱 가지 例가 있으니 偈頌에 “論體와 論處所와 論據와 論莊嚴과 論負와 論出離와 論多所作法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初地 중에 가려낸 것과 같다.

  ‘勝伏他論’이라 말한 것은, 勝은 能立(; 세우는 주체)을 잡았으며 伏은 能破(; 파하는 주체)를 잡았다. 그러므로 『梁論』에 “伏은 이  법이 능히 모든 주장을 항복시킨다. 能立과 能破의 두 가지 ‘能’은 바로 依止勝相 등의 방편을 설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通’은 『梁論』에 ‘解’라 하였으니 아비달마로 인하여 수다라의 뜻을 쉽게 알아지기 때문이다.

♣(3) 漢字의 音은 平聲, 上聲, 去聲, 入聲 등의 四聲으로 나뉘는데, 현대 중국어의 1聲~4聲까지의 구분과 흡사하다. 平聲은 시작부터 끝까지 평평하게 같은 음조를 내는 것이고, 上聲은 높은 소리에서 시작하여 높은 소리로 올리는 것이고, 去聲은 높은 소리에서 낮은 소리로 떨어지는 음조로 중국어의 제4성에 가깝다. 入聲은 짧고 빠르게 거둬들이는 음조를 말한다.

‘數’字는 三聲에 통한다. 去聲일 경우엔 ‘수량의 칭호, 양의 많고 적음, 理致, 運數, 재주, 술수’ 등의 명사로 쓰인다.

上聲일 경우엔 ‘헤아리다, 세다, 나열하다’ 등의 동사로 쓰인다.

入聲일 경우는 ‘삭’으로 발음하며, ‘누차, 자주, 여러번, 번번히’ 등의 부사로 쓰인다.

♣(4) ‘自相’과 ’共相‘ ; 自相은 色心 등이 다르기 때문이며, 共相은 無常 ․ 無我가 같기 때문이다. 또한 自相은 곧 俗諦이고 共相은 眞諦라는 등이다.

♣(5)『瑜伽論』제45권에 언급되었다. 이치를 관찰하는 중에 있는 갖가지 일들을

‘因明處’라고 하는데 일곱 가지로 나누었다. 이 중 ‘論處’만 살펴보기로 한다.

‘論處’ 즉, 論하는 장소에는 6종이 있다. ① 於王家(왕가에서) ② 於集理家(이치에 집착하는 이의 집에서) ③ 大衆中(대중 가운데서) ④ 賢哲前(어질고 현명한 사람 앞에서) ⑤ 於解法義沙門婆羅門前(법의 뜻을 이해하는 사문이나 바라문 앞에서) ⑥ 於樂法義者前(법의 뜻을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등 여섯 곳이다.


亦名優波提舍 此云호대 論議 亦名磨怛理迦어든 此云호대 本母라하니 謂以敎與義 爲本爲母 亦云호대 依藏生解 藏爲解母 本卽是母 亦名磨夷이어든 此云호대 行母 依藏成行故 行之母故니라

또한‘優波提舍’라고도 하는데 이곳에서는 論議라고 한다. 또한‘磨怛理迦’라고도 하는데 이곳에서는 本母라고 하니, 敎와 義로써 本이 되고 母가 됨을 말한다. 또  藏에 의지하여 이해하므로 藏이 解의 母가 된다고도 한다. 本이 곧 母이다. 또한‘磨夷’라고도 하는데 이곳에서는 行母라고 한다. 藏에 의지하여 行을 이루기 때문이며, 行의 母이기 때문이다.


  異名 可知也 問曰 三藏 前二 是佛所說이요 後一論藏 是菩薩說이니 是則如來不說三藏耶아할새이라 波沙最初 卽有此問하니 問曰 誰造此論 答佛世尊이니라 誰問誰荅 或云舍利弗하며 或云諸天하며 乃至 或云化比丘이요이라 하니라 若爾인댄 何以言迦多演尼子 荅彼 諷誦耳니라 有云호대 亦是彼說이라하니 是則論藏 有是佛說이요 有是菩薩說하야 取經中義하야 廣以釋之以本統末인댄 亦佛說三藏耳니라

  다른 이름은 알 수 있다. 묻기를 “三藏에서 앞의 둘은 부처님의 말씀이요, 뒤의 論藏 한 가지는 보살이 설한 것이다. 이러하면 여래께서 三藏을 설하지 아니하셨는가?”라고 하니, 答한다.『毘婆沙論』맨 처음에 곧 이런 질문이 있다. 묻기를 “누가 이 논을 지었는가?”라 하니, 답하길 “부처님 세존이시다.” “누가 묻고 누가 답했는가?” “혹은 사리불이 물었다 하며 혹은 諸天이 물었다 하며 내지 혹은 변화한 비구가 묻고 부처님께서 답하셨다고 한다.” “만약 그렇다면 어찌하여 迦多演尼子가 지었다고 말하는가?” 答한다. “그는 諷誦(; 暗誦하는 것)하였을 뿐이다. 어떤 이는 또한 그가(迦多演尼子가) 설했다고도 하니, 이것은 論藏에 佛說이 있고 菩薩說이 있어서 經 중에서 뜻을 취하여 자세하게 그것을 해석하였다. 本으로써 末을 통괄한다면 또한 부처님께서 三藏을 설하신 것이다.”


然此三藏 約其所詮컨댄 畧有二門이라 一者 剋性인댄 則經詮三學이요 律唯戒心二學이요 論唯慧學이니 如攝論說하니라 約兼正인댄 則三藏之中 經正詮定이요 毘尼 詮戒 論詮於慧 兼各通三하니라

그러나 이 三藏은 그 所詮을 잡는다면 간략히 두 가지 門이 있다. 첫째는 剋性이라면(嚴正하게) 經은 三學(戒 定 慧)을 설명하고, 律은 오직 戒와 心의 二學뿐이요, 論은 오직 慧學뿐이니『攝論』에서 설한 것과 같다. 둘째는 兼과 正(부차적인 것과 주된 것)을 잡는다면 삼장 중에 經은 바로 定을 설명하고, 毘尼는 戒를 설명하고, 論은 慧에 대해 설명하며, 아울러 각각 三藏에 통한다.


  然此三藏下 第三 總顯所詮也 如攝論說者 亦是世親攝論第一이라호대 又能說三學故 立素怛纜藏이요 能成辨增上戒 增上心學故 立毘奈耶藏이라 謂具尸羅 卽無悔等하야 漸次能得三摩地故 能成辦增上慧故 立阿毘達磨藏이니 謂能決擇無倒義故라 하니라 梁論 亦同하다 言兼各通三者 經中戒慧 其文非一이어니와 毘尼增三 云云호대 何增戒學 所謂增心學 增慧學 是名增戒學等이라 하니라

  ‘然此三藏’아래는 第三에 所詮을 총체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如攝論說’이라는 것은 또한 世親의 『攝論』 第一권이다. 論에  “또 능히 三學을 설명하기 때문에 素怛纜藏을 세웠고, 능히 增上戒와 增上心學을 분별하기 때문에 毘奈耶藏을 세웠다. 말하자면 尸羅를 갖춤에 곧 후회 따위가 없어져서 점차로 능히 삼마지를 얻기 때문이다. 능히 增上慧를 갖췄기 때문에 阿毘達磨藏을 세웠으니, 말하자면 능히 無倒義(轉倒됨이 없는 뜻)를 결택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梁論』도 또한 같다. ‘兼各通三’이라 말한 것은 經 중의 戒와 慧는 그 文이 하나가 아니지만, 毘尼를 三藏에 더한 것은 글에 이르길, “어떻게 戒學을 증장하는가? 이른바 心學을 증장하는 것과 慧學을 증장하는 것이 戒學을 증장하는 것이다.” 등으로 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