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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方廣佛華嚴經疏演義鈔 卷第六 / [5] <卷第六 終>

화엄행 2009. 3. 27. 03:46

2008/05/12 오 전 3:46

 

大方廣佛華嚴經疏演義鈔    卷第六

淸凉山 大華嚴寺沙門 澄觀述





然說十住等處가 雖復各遍法界와 乃至塵毛나

爲門不同하며 亦無雜亂이니라


  그러나 十住 等을 설하는 處所가 비록 다시

각각 法界 내지 塵毛에 두루하나  門을 삼음이

같지 않으며 또한 雜亂함이 없다.


 


然說十住下는 第四에 釋妨이니 謂有問言호대

利天에 說十住法이 旣遍虛空하고 周於毛道

인댄 未知니라 夜摩天等에도 亦說十住不아 設

爾何失고 二俱有過로다 若彼不說인댄 則說處不

遍이요 若彼亦說인댄 處則雜亂이어늘 何以經中

에 唯云利에 說十住法하고 夜摩天處에 說十

行等耶아할새 故爲此通이라


於中에 三이니 初는 總答前問이요 次는 重通再

難이요 後는 一一會下는 以一例餘라


初中은 卽隱顯門이라 一門이 顯時에 餘門이 則

隱이니 如以十住爲門에 唯言十住遍이요 十行爲

門에 唯明十行遍等이라 故云호대 爲門不同이며
亦無雜亂이니라


 '然說十住’아래는 第四에 비방과 힐난을 풀어 줌

이다. 말하자면 어떤 이가 물어 말하길, “만약 도

리천에서 十住法을 설함이 이미 허공에 두루 하고

毛道에 두루 하다면 아직 알 수 없다. 야마천등에

서도 또한 十住를 설하는가 설하지 않는가? 설사

그렇다면 무슨 허물이 되는가? 둘 다 허물이 있다.
만약 그곳(야마천 등)에서 설하지 않는다면 즉 설

하는 곳이 두루 하지 못함이요, 만약 그곳에서 또

한 설한다면 處가 雜亂하다. 어찌하여 經 중에서는
오직 도리천에서 十住法만을 설함을 말하고 야마천

에서는 十行만을 설하는 등을 말하였는가?”라고

하니, 그러므로 이를 통하기 위함이다.


  그 중에 三이 있으니, 初는 총히 앞의 물음에 답

함이요, 다음은 다시 힐난함을 거듭 통하게 함이

다. 後에 ‘낱낱 會’아래는 하나로 나머지를 例함

이다. 初 가운데에는 곧 隱顯門이다. 一門이 나타

나는 때에 나머지 다른 門은 숨으니, 十住로 門을

삼음에 오직 十住가 두루 하다고 말하고, 十行으로
문을 삼으면 오직 十行이 두루 하다고 밝히는 등과
같다. 그러므로 “爲門不同 亦無雜亂(문을 삼음이

같지 않고, 또한 잡란하지 않다)”라고 말했다.

 

 

 

若約十住與十行等 全位相攝인댄 則彼此互無

하야 各遍法界요 若約諸位相資인댄 則彼此

互有하야 同遍法界니



  만약 十住와 十行 등 全位가 서로 섭수함을

잡는다면 곧 彼此가 서로 없어져서 각각 법계

에 두루하고, 만약 諸位가 서로 바탕이 됨을

잡는다면 곧 彼此가 서로 있게 되어 함께 법계

에 두루한다.



 


若約十住로 至彼此互有同遍法界者는 卽第二에

重通再難이니 謂更有問言호대 若約爲門不同인

댄 爲互相見不아 若相見者인댄 還成雜亂이요

若不相見인댄 何以知遍이리오 하니 今答此問에
明有見不見이니 謂若約相卽인댄 則不相見이요

若約相入인댄 則許互見이니라


言若約十住與十行等이 全位相攝인댄 則彼此互

無하야 各遍法界者는 是相卽門이니 謂若以十住

로 攝於餘位則唯有十住요 餘位는 如虛空이니

以餘位廢已하야 同十住故라 餘位도 亦爾하야

十住遍時에 非十行等遍일새 故로 云호대 各遍

法界니라


‘若約十住로 彼此互有同遍法界’라는 것은 즉 第

二에 다시 힐난함을 거듭 通함이다.  다시 어떤 이

가 물어 말하길, “만약 門을 삼음이 같지 않음을

잡는다면 상호간에 서로 보는가 보지 못하는가? 만

약 서로 본다면 도리어 雜亂함을 이루고, 만약 서

로 보지 못한다면 어떻게 두루 함을 알겠는가?”라

고 한다. 이제 이 물음에 답하여 보고 보지 못함이
있음을 밝히니, 만약 相卽함을 잡는다면 서로 보지
못하고, 만약 相入함을 잡는다면 서로 봄을 허락한

다.


  ‘若約十住與十行等 全位가 相攝인댄 則彼此互無

하야 各遍法界’라고 말한 것은 相卽門이다. 만약

十住로써 나머지 다른 位를 섭수하면 오직 十住만

있고 나머지 位는 허공과 같으니, 나머지 位가 자

기를 폐함으로써 十住와 같아지기 때문이다. 나머

지 位도 또한 그러하여 十住가 두루 할 때에는 十

行 등이 두루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각각 法界

에 두루 한다’라고 말한다.



 


言若約諸位相資인댄 則彼此互有하야 同遍法界

者는 是相入門이니 以約力用互資하야 不壞自他

니 如兩鏡相照에 東鏡이 動時에 鏡中之影도 亦

動이라 故得同遍法界나 而有主伴일새 故非雜亂

이니라 如十住爲門인댄 帶十行等하야 同遍法界

時에 但名十住遍이요 不名十行等遍이며 若十行

等爲門이라도 亦然이니 則有力能攝者가 爲主요
無力彼攝者가 爲伴이니라


前相卽門中엔 正十住遍時에 不妨餘遍이로대 但

隱顯不同耳니라 十住遍時에 十行等이 卽隱하고

十行遍時에 餘隱도 亦然이니라 依相卽門인댄

亦名爲純이니 遍周法界塵毛하야 唯有十住等故

요 後相入門은 亦名雜門이니 以諸位가 一時相

資遍故로 則十住中에 有十行等이니라 餘義는

至義分齊中하야 廣辨호리라




‘若約諸位相資인댄 則彼此互有하야 同遍法界’라

고 말한 것은 相入門이다. 力用이 서로 바탕이 되

어 自와 他를 무너뜨리지 않음을 잡음이니, 마치

두개의 거울이 서로 비춤에 동쪽 거울이 움직일 때

에 거울 가운데의 그림자도 또한 움직이는 것과 같

다. 그러므로 함께 법계에 두루할 수 있으나 主와

伴이 있으니, 그러므로 雜亂하지 않다.


  十住로 門을 삼는다면 十行 등을 띄고서 함께 법

계에 두루 하는 것을 다만 十住가 두루 하다고 이

름하고, 十行 등이 두루 하다고는 이름하지 않는

다. 만약 十行 등으로 門을 삼더라도 또한 그러하

니, 즉 힘이 있어 능히 섭수하는 것이 主가 되고,

힘이 없어 섭수되는 것이 半이 된다.


  앞의 相卽門 중에서는 바로 十住가 두루 하는 때

에 나머지가 두루 함을 방해하지 않되, 다만 숨고

나타남이 같지 않을 뿐이다. 十住가 두루 하는 때

에는 십행 등이 곧 숨고, 十行이 두루 하는 때에

나머지가 숨음도 또한 그러하다. 相卽門에 의지하

면 또한 純이라 이름 하니, 법계의 塵毛에 두루 하

여 오직 十住 등만이 있기 때문이다. 뒤의 相入門

은 또한 이름이 雜門이 되니, 모든 位가 일시에 서

로 바탕이 되어 두루 하는 까닭으로 즉 十住 가운

데에 十行 등이 있다. 나머지 뜻은 ‘義理分齊’중

에 이르면 자세히 가려내리라.

 

 

 

一一會品은 准此知之니라



낱낱 會와 品은 이에 준하여 알지니라


 


三은 以一例餘라


  三은 하나로써 나머지를 例로 듦이다.

 

 

 

十에 餘佛同者는 此佛이 旣爾인댄 餘佛도

例然이라 故로 諸會結通하야 皆云我等諸佛

도 亦如是說이라하니라


 


  十에 ‘餘佛同’이라는 것은 이 부처님이 이

미 그러하시다면 나머지 부처님의  例도 그러

하시다. 그러므로 모든 會에서 結通하여 모두

이르길, “우리들 諸佛도 또한 이와 같이 설하

느니라”고 하였다.

 




十에 餘佛同者下는 第五에 隨難重釋中에 二니

先은 正顯同이요 後에 然主主下는 釋通妨難이



前中에 以竪窮三際하며 橫遍十方하야 佛佛德用

과 說法皆同故니 故로 經에 云三世諸佛이 已說

今說當說이라하니라 疏中引經에 我等諸佛도 亦

如是說은 卽橫論也니 卽證法佛言也요 十地經에

云我不見有諸佛世界에 彼諸如來- 不說此法이라

하니 卽金剛藏證法菩薩言也니라


  十에 ‘餘佛同’ 아래는 第五에 힐난함에 따라

거듭 해석하는 가운데 둘이 있으니, 先은 같음을

바로 나타냄이요, 後에 ‘然主主’ 아래는 해석하

여 비방과 힐난을 통하게 함이다. 

  앞 가운데에 세로로(시간적으로) 三際를 다하고 가

로로 시방에 두루 하여 佛과 佛의 德用과 설법이

모두 같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經에 이르길, “三

世의 모든 부처님이 이미 설하시었고, 지금 설하시

며 當來에도 설하시리라”고 하였다. 疏 중에서 인

용한 經에 “우리들 모든 부처도 또한 이와 같이

설하느니라”고 함은 즉 가로로(공간적으로) 논함이

니,  즉 법을 증득한 부처님의 말씀이다. 『十地

經』에 이르길, “내가 모든 부처님 세계에서 저

모든 여래가 이 법을 설하시지 않음을 보지 못했느

니라”고 하였으니, 즉 金剛藏 證法菩薩의 말이다.



 

 

然이나 主主가 不相見이며 伴伴이 不相見이

요 主伴伴主라야 則互相見하나니 若互不相

見인댄 卽各遍法界어니와 互相見故로 同遍

法界니 亦無雜亂하며 亦無障碍니라



  그러나 主와 主가 서로 보지 못하며 伴과 伴

도 서로 보지 못한다. 主와 伴,  伴과 主라야

곧 서로 본다. 만약 서로 보지 못한다면 곧 각

각 법계에 두루 하나, 서로 보는 까닭에 함께

법계에 두루 하니, 또한 雜亂됨이 없고 또한

장애가 없다.

 

 

 

然主主下는 二에 通難이니 謂有問言호대 餘佛

說處가 與遮那佛로 爲相見不아 設爾何失고 二

俱有過니라 謂若相見인댄 卽乖相遍이요 若不相

見인댄 卽乖主伴이라할새 故爲此通이니라 謂見

與不見이 二義俱成이니 二互相見에 主伴義成이

요 見與不見에 遍義皆成이로대 但各遍同遍으로
以爲異耳니라


文具四句하니 一에 言主主不相見者는 遮那爲主

時에 十方餘佛은 但得爲伴이요 不得爲主며 若

餘佛爲主면 遮那도 亦卽爲伴이요 不得爲主라

故로 云호대 主主不相見이니라


 ‘然主主’아래는 二에 비방과 힐난을 통하게 하

려함이다. 어떤 이가 물어 말하길, “ 나머지 佛이

설하시는 곳이 비로자나불과 더불어 서로 보는가

보지 못하는가? 설사 그렇다면 무슨 잘못이 되는

가? 둘 다 잘못이 있다. 만약 서로 본다면 즉 서로
두루 함에 어긋나고, 만약 서로 보지 못한다면 즉

主와 伴에 어긋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를

통하게 하기 위함이다. 보고 보지 못함의 두 가지

뜻이 다 이루어짐이니, 둘이 서로 봄에 主와 伴의

뜻이 이루어진다. 보고 보지 못함에 두루 뜻이 다

이루어지나  다만 각각 두루 함과 함께 두루 함이

다를 뿐이다.


  文에 四句를 갖추니, 一에 ‘主主不相見’이라

말한 것은 비로자나가 主가 되는 때에 시방의 나머

지 佛은 다만 半이 될 뿐이요 主가 되지 못하며,

만약 나머지 佛이 主가 된다면 비로자나도 또한 즉
半이 되고 主가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主와 主

가 서로 보지 못한다’고 하였다.

 

 

 

二에 伴伴不相見者는 如諸佛이 爲遮那伴時에

遮那가 更不得爲伴일새 故로 云호대 伴伴不相

見이니 非謂彼諸伴佛이 自不相見이니라 言主伴

伴主라야 則互相見者는 卽第三第四句也라


三에 主伴得相見者는 如遮那가 爲主하야 見餘

伴佛에 伴佛도 亦見遮那故니라


四에 伴主相見者는 如遮那爲伴하고 餘佛爲主인

댄 則得相見이니라 然이나 三四二句가 義則不

異로대 但約一人하야 互通主伴일새 故成四耳니

라 言無雜亂者는 結爲文別故요 言無障碍者는

約常融攝故니라


  二에 ‘伴伴不相見’이라 말한 것은 諸佛이 비로

자나의 半이 되는 때에 비로자나가 곧 다시 半이

되지 못하는 것과 같으므로 “半과 半이 서로 보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저 모든 半佛이 스스로 서로

보지 못함을 말한 것은 아니다. ‘主伴伴主라야 則

互相見’이라  말한 것은 즉 第三?第四의 句이다.


  三에 ‘主伴得相見’이라는 것은 저 비로자나가

主가 되어 나머지 半佛을 봄에 半佛도 또한 비로자

나를 보는 까닭과 같다.


  四에 ‘半主相見’이라는 것은 저 비로자나가 半

이 되고 나머지 佛이 主가 되면 곧 서로 볼 수 있

음과 같다. 그러나 三과 四의  二句는 뜻이 곧 다

르지 않되, 다만 한 사람을 잡아서 서로 主와 半에
통하게 함이니, 그러므로 四를 이룰 뿐이다.

‘無雜亂’이라  말한 것은 결론하여 文을 구별하

기 위한 연고요, ‘無障碍’라고 말한 것은 항상

원융하게 섭수함을 잡은 까닭이다.

 

 

 

又上十處가 共爲緣起하야 擧一全收니 以一

一處가 稱法性故로 而隨前一一時하야 皆遍

此諸處하며 又隨一一處하야 皆具前時하야

頓說此經이라 此猶約器世間說이어니와 若約

智正覺과 及衆生世間인댄 卽一一佛身의 肢

節毛孔이 皆攝無盡重重之刹하며 普賢衆生도

一一皆爾하야 竝是遮那說經之處니라 




  또 위의 十處가 함께 緣起가 되어 하나를 들

면 전부를 거두어들인다. 낱낱 處所가 法性에

칭합하는 까닭으로 前의 낱낱 時를 따라 모두

이 모든 곳에 두루 하며, 또 낱낱 處所를 따라

서 다 前의 時를 갖추어서 몰록 이 經을 설한

다. 이것은 오히려 器世間(우리가 살고 있는 국토로,

器界라고도 한다.)
을 잡아 설함이고, 만약 智正覺

世間과 衆生世間을 잡는다면  곧 낱낱 佛身의

四肢와 마디마디 털 구멍이 다 다함이 없는 重

重의 刹을 섭수하며, 普賢과 衆生도 낱낱이 다
그러하여 아울러 毘盧遮那가 經을 설하는 곳이

다.

 

 

 

又上十處下는 第六에 總融十義라 於中에 分三

호리니 初는 正顯十義融通이요


○ 次에 而隨下는 對時顯處요 ○ 後에 此猶約

下는 通顯甚深이니 謂上十重은 但是器世間耳니
未說佛毛와 及衆生毛孔中事가 一一皆悉重重無

盡이니라


○ 言普賢衆生이 一一皆爾者는 普賢을 若望如

來인댄 亦名衆生世間이요 若望衆生인댄 亦名智

正覺世間이라 하니라 又擧普賢하야 則攝一切菩

薩也니라


 ‘又上十處’아래는 第六에 총히 열 가지 뜻을 원

융함이다. 그 중에서 三으로 나누리니, 初는 바로

十義를 융통함을 나타냄이요,


 ○ 次에 ‘而隨’아래는 時에 대하여 處를 나타냄

이다.


 ○ ‘後에 此猶約’아래는 통히 매우 깊음을 나타

냄이니, 위의 十重은 다만 器世間을 말했을 뿐이

다. 아직 부처님의 털구멍과 중생의 털구멍 가운데

의 일이 낱낱이 모두 다  설하지 아니하니 낱낱이

다 중중하여 다함이 없음을 말하진 못했다.


 ○ ‘普賢衆生이 一一皆爾’라고 말한 것은 普賢

을 만약 여래에다 두고 바라보면 또한  衆生世間이

라 이름하고, 만약 중생에다 두고 바라보면 또한

智正覺世間이라 이름한다.  또 보현을 들어서 곧

일체보살을 섭수함이다.

 



大方廣佛華嚴經疏演義 卷第六 終 / [依處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