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의 향기 ♣>/♧ 문화와 예술 ♧

[스크랩] 궁궐건축의 부속건물

화엄행 2009. 8. 8. 09:55

응지당


강녕전의 서쪽 부속건물

 

 

연길당


강녕전 부속건물, 연길당 사진 뒤에 보면 담장이 있습니다. [북궐도형]에서 보면 이곳은 행각으로 되어 있습니다. 행각으로 복원해야 될 것 같습니다

 

 

함원전


함원전은 경회루와 교태전 사이에 있다.

함원전의 굴뚝이 놓인 뒤편 화계(花階)와 교태전의 아미산 화계가 담 하나 사이로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세종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곳 함원전에 관한 기록은 무척 이채롭다.

1452년 문종이 승하한 뒤 당시 왕세자인 노산군(단종)이 잠시 이곳에 거처를 정했다는 기록도 엿보이지만, 경복궁의 내전 깊숙이 위치해 '불사(佛事)'를 주로 행하던 공간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세조 9년(1463)에는 내수소(內需所)에서 불상 4구를 만들어 이곳에서 점안하기도 했다.

또한 세조 10년(1464)에는 회암사에서 법회를 열 때 '여래(如來)가 나타나는' 이적(異蹟)으로 사리를 얻자, 함원전에 공양(供養)토록 하였다고도 한다.

원각사의 백옥불상(白玉佛像)이 이루어지던 세조 12년(1466) 7월에는 이곳 함원전으로 불상을 들여 점안(點眼)하는 법회를 열기도 했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볼 때 함원전은 건립 초기에 불교와 깊이 연관된 궁궐 내 전각으로 볼 수 있다. 그 뒤 몇 차례의 소실을 거쳐 1865년 경복궁의 재건 무렵 다시 지었다.

한편 당시 현판 글씨는 신정왕후 조대비의 조카인 혜인 조영하가 썼는데, 조영하는 최익현과 함께 흥선대원군을 몰아내는 데 앞장선 인물로 이조판서와 병조판서, 예조판서를 두루 거친 당대의 실력자였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의 수습과정에서 대원군을 납치해 민씨 세력의 재집권에 공을 세우지만, 훗날 갑신정변(1884) 과정에서 살해되고 만다.

1876년(고종13) 11월 교태전에서 비롯된 대화재로 내전 일곽이 크게 손실되는데 그 때 함원전도 소실되고 만다.

이후 1888년 다시 복구되었으나, 경복궁의 다른 내전 건물과 마찬가지로 1917년 창덕궁 대화재 이후 일제에 의해 이를 복원한다'는 핑계로 1918~1920년 무렵 창덕궁으로 뜯겨나간다.

현재의 함원전은 경복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1995년 다시 복원된 것이다. 현판은 옛날에 쓰던 것을 수리하여 다시 걸어 놓았다. 정면 6간 측면 4간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다. 

 

흠경각


강녕전 뒤편에서 경회루 쪽으로 난 작은 문을 통해 들어가면 흠경각이 나온다.

흠경각은 세종 20년(1438) 1월에 건립되었고, 여기에 장영실로 하여금 참여하도록 하였다.

그 뒤 흠경각은 몇 차례 소실을 반복하다가 마지막으로 1888(고종 25년) 재건되지만, 1917년 창덕궁 대화재 이후 일제에 의해 이를 '복원한다'는 핑계로 1918~1920년 무렵 경복궁의 다른 내전 건물과 마찬가지로 이곳 흠경각 건물도 뜯겨진다.

현재의 흠경각은 경복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1995년 다시 복원된 것이다.

현판은 동강 조수호 선생이 쓰고, 제작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06호 각자장(刻字匠) 기능보유자인 철재 오옥진 선생이 맡았다. 정면 6간 측면 4간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다.
당시 흠경각에는 자동물시계인 옥루(玉漏)와 별자리의 위치를 표시한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地圖)를 설치하여 시간과 천체의 운행을 살피도록 하였다.

하지만 이미 세종 16년(1434) 7월 자격루를 설치한 보루각(報漏閣)을 만들었으며, 그이전에 경회루 북쪽에는 천체의 운행을 살피는 간의대(簡儀臺) 등을 설치하였다.

경회루와 내전 지역에 이처럼 천체의 운행과 기상의 변화 등을 살피는 과학기구를 가까이 두었다는 것은 농정(農政)에 대한 깊은 관심과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또한 세종의 왕권이 보다 공고해지고 궁궐의 기능이 확장되었음을 의미한다.

그 뒤 흠경각은 몇 차례 소실을 반복하다가 마지막으로 1888(고종 25년) 재건되지만, 1917년 창덕궁 대화재 이후 일제에 의해 이를 '복원한다'는 핑계로 1918~1920년 무렵 경복궁의 다른 내전 건물과 마찬가지로 이곳 흠경각 건물도 뜯겨진다.

현재의 흠경각은 경복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1995년 다시 복원된 것이다.

현판은 동강 조수호 선생이 쓰고, 제작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06호 각자장(刻字匠) 기능보유자인 철재 오옥진 선생이 맡았다. 정면 6간 측면 4간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다

교태전


강년전뒤에는 양의문이있고 양의문을 지나면 교태전이 있다. 왕후의 침전이다. 왕이 궁궐밖의 일을 처리한다면, 왕비는 궁내의 살림을 책임진다. 중전이란 위치가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이 나타난다.

왕비는 단순이 왕자만을 생산하는 그런 존재는 아니다. 경복궁의 중심축에서 일직선으로 배열되어 있는 건물들 가운데 마지막이 교태전이다. 강녕전의 뒤로 돌아가면 양의문이 나오는데 교태전은 그 문안에 들어앉아 있다 강녕전이 왕의 침전이라면 교태전은 왕비의 침전이자 시어소이다. 사극같은 것을 보면 흔히 왕비는 후궁들과 싸움이나 하는 그런 존재로 인식되어 졌다.하지만 이는 정말 잘못된 인식으로 왕비는 공인으로서 궁궐의 내명부를 비롯한 여러층의 여인들을 치리하는 일등 처리하야할 업무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일을 수행하는 공간이 교태전이다. 교태전은 왕비의 침전인 동시에 왕비의 업무공간인 것이다. 교태전의 모양도 강녕전의 지붕처럼 용마루가 없다.              


교태전은 태조초년 경복궁떄는 없었다. 그로부터 거진 50년후에 세종22년무렵 건립된 것르로 전해진다. 경복궁의 다른건물처럼 임진란떄 불타고 그후 고종초년 다시 중건하였으나 1917년 창덕궁 지붕에 용마루(흰색빔이 없다)내전의 화재로 .전소된 대조전을 짓는다는 명분하에 헐어 옮겨 버렸고 그 빈터에는 박람회장으로 사용했다.

하지만 일제가 정녕 노린 것은 경복궁의 노른자위인 왕과왕후의 처소를 뜯어냄으로서 조선왕조를 절단하고 왕통을 끊겠다는 속셈일 것이다.
광화문-홍례문-영제교-근정문-사정문-양의문 많은 문을 지나쳐야 들어설 수 있는 비밀스런 곳이기도하다. 교태전은 경복궁 여러 전각중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었다고 한다  임진란중 일본 종군승의 기록을 보면, 궁궐 가운데 있는 전각에 도달으니 향기로운 냄새가 진동을 했다..라고 전해지니 당시의 화려한 교태전을 말해준 대목이다.

이런 교태전을 일제는 전소된 대조전을 짓는다는 명분하에 헐어 옯겨 버렸고 그 빈터에는 박람회장으로 사용했다. 하지만 일제가 정녕 노린 것은 경복궁의 노른자위인 왕과.왕후의 처소를 뜯어냄으로서 교태전의 단청은 눈부시다 왕후의 침전인 까닭에 용마루가 없이 지붕마루를 넘어자는 기와골의 몰매가 아름답다.

그리고 흔치 않은 육각기둥도 눈에 띈다 .모두가 새로 지은 것이라서 그윽한 옛멋은 없다. 교태전 월랑에는 음식을 만드는 내소주방과 의복을 만들고 다듬는 상의원도 자리하고있다

 

아미산


교태전를 끼고 돌면 아기자기한 후원인 아미산이 나온다. 이는 자역적 지형을 그대로 살리면서 인공적인 건조물을 조화시킨 우리나라 고유의 궁중후원이다. 아미산 이라는 명칭은 원래 중국 산동성 박산에 있는 유명한 산 이름인데 경회루 연못에 연당을 만들 때 파낸 흙으로 인조산을 만들었다.

아미산의 의미
이름이 산이지 후원에 꾸민 언덕에 불과 하지만 이는 또하나의 중요한 의미가 있다.백두산으로부터 나온 우리의 민족정기는  한북정맥을 타고 북한에 이르고 북한산은 백악까지 이른다. 이렇게 북악까지온 정기는 아미산이라 인공산을 타고 왕과 왕비에게 이른다.

아미산은 돌화분과 석지등 석조물을두고 주위에 화초를 심어 꾸몄다. 석지 가장자리에는 달을 상징하는 두꺼비 네 마리를 조작해 놓아 눈길을 끈다. 그래서 이 석지를 월궁이라고도 한다.아미산 후원에는 보물 제811호로 지정괸 아름다운 굴뚝들이 서 있다 교태전 일곽의 구들에서 땅속으로 연결된 이 네 개의 굴뚝은 화강석 지대석위에 30단 남짓으로 벽돌을 쌓고 육각면에는 각기 십장생.사군자.만자문양등을 조각하였다.이들 문양 가운데 박쥐와 불가사리 문양도 보이는데 박뒤는 복을 불가사리는 벽사의 뜻으로 새긴 것이다

기와로 덮은 연가도 아름답다.아미산 후원에서 자경전 영역으로 나가는 담장에 꽃들이 활짝 피었다. 여성공간의 벽사와 미를 추구하는 화려한 치장이다. 주홍색 색조가 사뭇 도전적일 만큼 아름답다.아미산은 네층의 단으로 조성한 화계이다. 지금은 그렇고 그런 나무들과 역시 그런 꽃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옛날 왕비가 이곳에 살적에는 각종 기화요초가 서로 아름다움을 겨루고 있었을 것이다.

화초나 나무외에 기묘하게 생긴돌을 홍강암으로 깍은 석분에 담아 놓은 것도 있다. 괴석이라고한다. 되석들이 놓인 윗단에는 키가 보통 어른 높이정도 되는 높이의 화강암으로 된 웬  석조물이 둘 서있다 아랫부분은 무슨 받침대처럼 다듬어졌고 윗부분은 한변이 50cm가 조금 넘거나 못된 직사각형으로 우묵하게 하였다. 무엇을 담아놓았던 그릇인가 싶기도 한데 그앞면을 보니 동쪽에 닜는 것은 낙하담 서쪽은 함월지라는 이름이 생겨져 있다

깊은 웅덩이 담 연못지등의 글자로 보면 이것은 돌 연못-석지임을 알 수 있다. 괴석과 석지를 설치한 뜻은 이곳이 그러한 괴석과 연못, 돌과 물로 이루어진 절경이요 선경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 한다.석지가 있는 윗단에는 굴뚝 네기가 서있다. 붉은 벽돌을 육각형으로 사람키 한길 반은 되게 쌓고 그위에 둘레를 돌아가며 기와를 얹고 가운데에는 깁 모양으로 연기 빠지는 구멍 연가를 만들어얹었다. 온돌로 난방을 하는 우리나라 건물에서 굴뚝은 없어서는 안될 요소이다.

그러한 굴쭉을 집에 붙여 짓지 않고 땅밑으로 길을내 연기를 후원 화계로 뽑아 내었다. 기능상으로 이렇게 하는 것이 연기를 더 잘 나가게 하고 또 연기가 집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 효과가 있다. 뿐만 아니라 자칫 집의 미관을 해치기 쉬운 굴뚝을 이렇게 따로 세워놓고, 그 면마다 돌아가며 귀면이나 봉황등의 벽사사 십장생 사군자 만자문 당초문등의 길상문을 구워 박아 넣었다.


칙칙하기 시방인 굴뚝이 오히려 각종 아름다움과 상징이 깃든 미술품으로 승화하였다. 기능만을 숭상하는 오늘날의 인텔리전스 빌딩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반전이다

 

함화당


이건물도 본래 행각이나 기타부속건물을거느렸을터인데 지금은 본채만 덜렁 서있다 썰렁하기 그지없다.

 

 

 

집경당


본래 행각이나 기타부속건물을거느렸을터인데 지금은 본채만 덜렁 서있다 썰렁하기 그지없다.

 

향원정


이곳의 수원은 북쪽 언적 밑에 솟아나는 열상진원이라는 샘물이다 .열상진원이란 차고 맑은 물의 근원이라는 뜻이다. 말 그대로 차고 맑아서 건청궁의 식수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열상진원의 샘물은 흘러 향원지로 들어가는데 그냥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멈추과 방향을 바꾸는 과정을 거친다. 여기서도 옛사람들의 범상치않은 의도를 살필수 있다. 물길을 따라나온 물이 일단 둥근 수조에 모여 잠깐 멈추다가 반 바퀴 돌아서 다시동쪽으로 방향을 바꿔 판석 밑으로 숨어든다. 잠깐 숨어들었다가 다시 안쪽으로 나타나 좁은 수로를 타고 연못으로 들어간다." 서류동입"의 명당수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이렇게 흘러든 물은 연지에 머물다 남쪽 호안에 뚫린 구멍으로 넘쳐 들어 향원지 남쪽 함화당과 집경당 땅 밑을 지나 나타나고 숨다가 경회루 연지 동쪽 호안의 용두의 입을 통해 연목으로 떨어진다.

향원정은 고종 10년에 건청궁을 지을 때 함꼐 세워졌다 건청궁 안쪽에 못을 파고 그 안에  섬을 만들어 2층의 육모정인 '향원정'을 짓고 나무로 구름다리를 걸어 "취향교"라 하였다. 지금은 남쪽에서 나무다리를 건너 섬으로 가게 되어있지만, 옛날에는 이 다리를 북쪽에 놓아 건청궁 쪽에서 건널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지금도 섬의 북쪽에는 에는 옛 다리의 흔적이 남아있다. 하지만 이곳은 역사가 있는 곳이다. 세조실록에 의하면 세조 2년에 취로정이란 정자를 짓고 주변 연못에 연꼿을 심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취로정'이 '향원정'의 전신으로 생각된다 향원정은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한 만남의 장소로 쓰였다.

 

협길당과 집옥재


건청궁을 자리에서 서쪽으로 바라보면 도량이 있고 그건너편에는 높은 담과 철문이 있다. 철조망으로 쌍여있는 그곳은 군부대이다.

지난 35년동안 일반일들에게는 금지 되었는 곳이다(물론 지금도 금지되고 있는 장소이다) 군부대는 1961년 5.16쿠테타 부터였다.

청와대 근위 부대, 12.12쿠테타 모의 장소등으로  더 잘 알려진 이 부대는 1961년 5.16쿠테타 보름만에 6월 1일 박정희 소장을 경호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5.16세력이 서울 인근 30사단의 1개 대대를 차출하여 현 위치에 임시주둔시킨 것이 시초였다. 그러다가 1965년 1월 부대가 정식으로 주둔하면서 초대 단장으로 박 대통령의 부관을 지낸 하나회원 손영길 소령이 부임하고 전두환 중령이 2대 단장으로 근무했다. 이때부터 군인들의 정치 교육장이 되다시피 했다  5.16직후부터 경복궁 한편에 주둔하면서 현대사의 골곡을 지커부고 때때로 개입했던 수도방위사령부 30경비단이 드디어 1996년 12월 8일 경복궁 35년 역사를 마감하고 민간인들의 눈에 띄지 않게 새벽부터 역사적인 부대이전을 시작하였다 (경향신문)

이 구역에는 현재 집옥재 건물이 남아있다 집옥채는 고종 5년 6우러 경복궁이 중건된 뒤에 건림되었는데, 고종이 서재로 사용하였던 건물이다. 그리고 집옥재 남서쪽 지금의 연병장일대에는 태원전등 전각과 회랑도 있었으나 일제때 모두 혈어 버려 그 흔적을 찾을수없다.
문화재 관리국은 태원전 일곽을 2000년부터 2004년까지 4년에 걸처 25동 469평을 복원한다는 계획을 세워 놓고 있다

 

 

 

건청궁터


향원정의 다리인 취향교가 원래는 북쪽을 향하고 있다. 그럼 향원정 북쪽엔 뭔가 특별한 건물이 있다는 뜻이다. 그곳에는 건청궁이 있었다. 건청궁은 (1873년 고종10)에 지었다.경복궁 중건 사업은 흥선대원군이 주도한데 비해 건청궁의 영건은 고종이 주도하였다.

고종은 재위 10년이 되는해 친정을 내세웠다 당시 정국의 주도권은 생부인 흥선 대원군이  쥐고 있었다. 그런 의지의 일환으로 고종은 경복궁 뒤쪽으로 조정의 관료들과 흥선대원군도 모르게 건청궁을 짓고 공사를 벌린것이다.  후에 관료들의 반대 상소가 빗발쳤으나 고종은 끝까지 자신의 뜻을 고집하였다 .

처음 건청궁은 왕으로서 정치가로서 스스로 자립하려는 고종의 의지의 징표라 할 수 있다  1894년 고종이 일본의 압역을 피해 경복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하였가 한달만에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오는데 그때 임어한 곳이 바로 이 "건청궁"이다.

견복궁의 내정 일대를 버리고 후미진 건청궁으로 임어한 까닭은 일본의 압박을 피해 보려는  궁여지책이었을 것이다.하지만 일제는 1929년 이곳 건청궁일대의 건물을 헐어 버리고 그 자리에는 1939년에 미술관을 지었다 그 미술관은 얼마전에는 민속박물관으로 그 다음에는 전통공예전시관인가로 쓰다가 헐려 없어지고 1998년 말 현재 그곳은 빈터로 남겨져있으며 그 빈터에는 잔디가 파랗게 깔려있다가 발굴조사를 위해 지금은 텅빈 빈지로 남아있다

제수합


민속박물관 앞쪽으로는 조그마한 건물이 초라하게 한채 서 있다. 얼추보면 왕궁의 건물로서는 너무 초라한 모양이다. 제수합은 왕과 왕비 익가족의 참식과 주어용 건물중 하나로서, 그 규모는 14칸이다. 궁궐내에 있는 건물이지만 그 규모가 양반집보다 작고 단청도 붉은색 만을 사용한 가칠로 소박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자경전 꽃담


건물왼쪽으로 돌아서면 벽에는 또하나의 묘한 글씨가 새겨저있다. "천귀만수"라는 글자이다. 이 역시 안녕과 장수를 비는 글귀이다

 

자경전과 청연루


만세문을 통과하면 자경전이 나온다.자경전은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타 없어지기이전에는 없던 건물이다. 애초에 자경이란 이름은 정조임금이 즉위하면서 그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를 위해 창경궁에 커다랗게 집을 짓고 자경당이라 이름을 붙인데서 비롯되었다. 자경이란 자친 곧 왕이 어머니나 할머니등 왕실의 웃어른이 되는 여성에게 경사가 임하기를 바란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고종 4년에 자경전이란 건물을 새로 지으면서 비로소 경복궁에 자경전이 자리를 잡았다. 당초 자경전이 완공될 무렵에는 고종이 정무를 보는 건물-편전으로 사용되었다. 승지들이 공무를 가지고 입시하기도 하였고 진강(왕이 관인 학자들과 학문을 토론)을 하기도 하였고 소견-고위 신료들을 불러들여 정사를 의논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873년(고종10)12월에 큰불이나서 그일대 건물들과 함꼐 불타 없어졌다. 이 화재 직후 곡 다시 지었으나, 지은지 1년 반쯤쥐인 1876년 11월에 또 불이나서 타 버렸다. 이때 고종이 창덕궁으로 옮겨간뒤에 자경전을  다시 지었다.

 

자경전옆 협경당


자경전은 청여루라고 하는 누마루집과 협경당이라고하는 건물 세채가 잇닿아 있는 건물이다

 

자경전 굴뚝


건물뒤로 오면 첫느낌은 참으로 썰렁하기 그지없다 조그마한 화계 하나없으니 하지만 그러기에 우리 조상들은 그곳 굴둑을 화려하게 장식을 하였다. 그냥 굴뚝이라 하기엔 너무나 아름답지않은가....십장생과 불로초 연꽃 포도 국화 오리 작은새등 그야말로 한폭의 병풍이다. 특히 연꽃과 포도는 다산과 남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성들이 사용하는 가구등에는 그런 무늬를 많이 볼 수 있다.우리의 굴뚝은 모방된 문화가 아니라, 온돌방 구조에서 생겨난 우리만의 독창적인 문화이다. 우리 굴뚝은 궁궐이든 사대부집이든 천민들의 토담집들이든 나름대로의 아름다움과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자경전굴뚝은 그 규모에서나 외양에서나 집의 지체 높음에 아주 걸맞게 마련되어있다. 이곳 자경전에 와서 보면 우리 굴뚝은이미 연기만 뺴내는 그런 단순한 연통이 아니다. 더욱이 집채와 따로 떨어져 있어서 굴뚝은 주위의 조경과 어우러져 그대로 하나의 작품이요 썩 좋은 장식이다. 거기다가 굴뚝 벽면에 마련한 조각들을 보면 그대로 가 예술품이다.  또한 그위에 얹힌 연가도 눈길을 끈다. 나란히 줄지어 얹힌 연가의 모양은 마치 누가 새집으을 만들어 얹어놓은 듯한 착각을 하게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 연가는 연통과 이어져 있지 않는 장식품에 불과하다.

 

 

자경전 앞 건물터


지금은 잔디가 깔려있다. 장금이가 주로썼던 수라간으로 현재 복원공사 하고 있다.

 

 

 

동궁 자선당


자선당은 세자와 세자빈의 침전이며 동궁전이라고도 부른다. 자선(資善)이란 "착한 성품을 기른다"는 뜻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세종 9년(1427)에 자선당을 짓기 시작했다. 자선당은 문종이 세자로 책봉된 뒤 1450년 2월 즉위하기 전까지 20여년간 머물던 곳이기도 하며, 1441년 7월 단종이 이곳에서 탄생하기도 한다.

또한 이때 세자빈 권씨가 단종을 낳은 뒤 이곳에서 승하하기도 한다. 자선당은 이후 몇 차례 소실을 거친 뒤 임진왜란 때 완전 소실되어 고종 4년(1867)에 이르러 다시 재건된다.

그러던중 1915년 일제가 시정5주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 개최를 앞두고, 박람회를 개최한다는 핑계로 1914년 동궁 일대를 완전히 철거한다.

이때 자선당은 경복궁 철거업무를 맡아보던 일본인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에 의해 일본으로 빼돌려져 '조선관(朝鮮館)' 간판을 달아 미술관으로 쓰였으나, 1923년 관동 대지진 때 불타 없어지고 기단석만 남는 비운을 맞게 된다.

이후 자선당 기단석은 오쿠라호텔 경내에 방치되어오다가, 1996년 반환되어 현재 경복궁 명성황후 시해터 부근에 옮겨 놓았다.

한편 현재의 자선당은 1999년 12월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정면 7간 측면 4간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자선당 현판 글씨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06호 각자장(刻字匠) 기능보유자인 철재 오옥진 선생이 썼다.

비현각


비현각은 세자가 스승을 모시고 학문을 연마하던 편전에 해당한다. 비현(丕顯)이란 뜻은 "크게 드러나다"라는 뜻이다.

이곳의 건물이름은 조선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복궁전도>와 <경복궁도>에 나와있다.

비현각 역시 임진왜란을 통해 소실되어 없어진 것을 고종 4년(1867)에 이르러 다시 재건된다.

하지만 일제강정기인 1915년 시정5주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앞두고 '박람회를 개최한다'는 핑계로 1914년 동궁 일대를 완전히 철거하고 만다. 이때 비현각은 다른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일제에 의해 방매처분된다.

팔려나간 비현각의 행방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한다.

첫번째는 서울 장충동의 일본인 별장인 남산장(南山莊)으로 팔려나갔다는 이야기다.

두번째는 일본인 건축가 나카무라 요시헤이(中村與資平)가 1912년 남대문 정거장 뒤 봉래동 자신의 집으로 뜯어가 설계사무소로 쓰다가 누전에 의해 불타버렸다는 이야기다.

한편 현재의 비현각은 1999년 12월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정면 6간 측면 2간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자선당 현판 글씨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06호 각자장(刻字匠) 기능보유자인 철재 오옥진 선생이 썼다.

 

동궁앞 건물터


또 그 주위에는 세자를  교육하고 보필하는 세자시강원(춘방)이라는 기관과 세자의 경호를 담당하는 세자익위사(계방)이라는 관서가 있다. 하지만 고종 연간 이 자료를 보면당시 중건된 동궁 일곽은 북으로는 편전 우측의 자선당에서 남으로는 동십자각 이북의 춘방과 계방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어서 중건 계획에서 아주 중요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곧 자선당과 비현각 일곽(세자와 세자빈의 처소 현 복원), 장방과 소주방 그리고 별감방 일곽(세자궁에 딸린 내관의 처소) 계조당 일곽(세자가 신하들로부터 조하를 받는곳) 동남쪽 궁장 옆 춘방과 계방일곽(세자시강원과 세자익위사) 춘방 책고와 별군직청 일곽(세자를 위한 책고)등이 그것이다

 

출처 : 황세옥의 전통건축이야기
글쓴이 : 황세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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