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의 향기 ♣>/♧ 고전의 향기 ♧

[스크랩] 신영복 교수의 楚辭 강의-- 2

화엄행 2009. 10. 20. 20:15

나는 굴원의 이 시를 ‘이상과 현실의 갈등’이라는 의미로 읽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상과 현실의 모순과 갈등은 어쩌면 인생의 영원한 주제인지도 모릅니다.

이 구원(久遠)의 주제에 대하여 굴원의 결론은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가장 정갈하게
간수해야 하는 갓끈을 씻고, 반대로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실타협주의나 대중추수주의와는 구별되는 대응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획일적 대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초사를 여러분과 함께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물론 현실과 이상의 갈등을
노래한 굴원의 정신세계도 매우 의미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만 나는 초사가
대표하고 있는 남방문학의 낭만주의적 정신세계가 갖는 의미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낭만주의는 물론 시대와 나라에 따라서 매우 넓은 스펙트럼으로 나타납니다.
문학이나 미학적 영역에서부터 사회체제에 대한 비판적 세계관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한 영역을 포괄하고 있음이 사실입니다.

낭만주의가 대체로 부정적 의미로 인식되는 것은 인간의 정신을 구속하는 억압에
대한 원천적 저항과 비판의식을 내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대응방식의 개인주의적
성격 때문에, 또는 사회에 대한 소아병적 인식의 협소함 때문에, 그리고 동경이나 도피
또는 복고적 비탄이라는 실천의 허약함 때문에 그것의 긍정적 의미가 크게 훼손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날과 같은 강고한 억압구조 속에서는 그 숨겨진 구조에 우리들이
문화적으로 길들여지는 것 즉 포섭됨으로써 발견할 수 없는 그 구조를 드러내는
초기 방식의 하나로 낭만주의는 새로운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현대중국의 혁명과 건설이, 특히 인류사 최대의 드라마라고 하는 대장정이
이러한 낭만주의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는 심증(?)을 지울 수 없기도 합니다.

중국 역사에서는 남과 북이 싸우면 언제나 남쪽이 집니다. 중국의 전쟁사는 언제나
남의 패배와 북의 승리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기후가 온화하고 물산이 풍부한 남방인들의
기질이 험난한 기후와 풍토에 단련된 북방의 기세를 당하기 어려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싸움에 지는 것을 ‘패배’라고 하고 그것을 ‘敗北’라고 씁니다.
북(北)에게 졌다(敗)고 쓰는 것이지요.

그런데 유일하게 남방이 북방을 물리친 정권이 바로 현대중국입니다. 호남성 장사(長沙)의
모택동이 이끈 중국공산당이 건설한 중화인민공화국이 곧 남방정권입니다.
현재의 강택민 주석의 측근들 역시 소위 상해파로서 남방 출신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여기서 중국권력을 논의하자는 것이 아니라 낭만주의가 갖는 의미입니다.

1972년 닉슨의 중국방문 때의 일입니다. 모택동이 닉슨에게 건넨 선물이 놀랍게도
초사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모택동은 초사를 손에서 한시도 놓는 일이 없었다는
것이지요.

장정(長征)때에도 손에서 초사를 놓지 않았다고 하지요. 흔히 조직(組織)의 유소기(劉少寄),
이론(理論)의 모택동이라고 하지요. 모택동 사상이 이러한 남방적 낭만주의가 갖는
자유로움과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입니다.

남방과 낭만주의와 창조적 정신영역이 서로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추측입니다.
현실에 매달리지 않고 현실의 건너편을 보는 거시적 시각과 대담함이 곧 낭만주의의
일면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넓고 긴 안목이 비록 초사의 세계나 남방적 낭만주의와 무관한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처하고 있는 공고한 체제적 억압과 이데올로기적 포섭기제를 드러내어야 하는
당면의 과제와 한 번쯤 연결시켜보는 것도 매우 유의미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굴원은 동정호 남쪽에서 방황하다 BC. 295년 5월 5일 멱라수(汨羅水)에 돌을 안고
투신하여 59세로 일생을 마칩니다. 중국에서는 지금도 단오절인 이 날을 ‘시인의 날‘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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