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의 향기 ♣>/♧ 고전의 향기 ♧

[스크랩] 선몽대 仙夢臺; 예천 호명 백송(행소리)

화엄행 2009. 8. 8. 09:50



*선몽대(仙夢臺) 대호는 퇴계선생 친필
퇴계 이황의 종손(從孫)이며 문하생인 우암 이열도가 1563년 창건한 정자로 선몽대 대호 세글자는 퇴계선생의 친필이다. 신선이 나오는 꿈을 꾼 후 지은 퇴계 친필 현판과 퇴계선생의 시에 약포 정탁, 서애 류성룡, 학봉 김성일, 금계 황준량, 한음 이덕형, 청음 김상헌, 다산 정약용 등의 차운借韻 친필시가 게액되어 있다. 특히 대위에 이르면 내성천 백사장의 평사십리가 한눈에 펼쳐지고 넓고 큰 내가 자랑하듯 울창한 노송이 들어서 여름에는 피서지로 봄, 가을,겨울에는 산책코스로 좋다.

주변에는 여름철 피서지로 모래사장과 송림등 경관이 아름다운 '서당마을'과 조선중기 건축사의 귀중한 자료인 '연안이씨별좌공종택', 그리고 조선 선조때 명재상 약포 정탁의 유물을 보존하고 있는 '정충사', '도정서원'이 있다.

예천군 호명면 백송리 선몽대,난산,燕巢形-백송 燕巢形局 仙夢臺 퇴계 從孫 이열도(1538-1591) 


寄題仙夢臺; 퇴계 친필 시

松老高臺揷翠虛  白沙靑壁畫難如 吾今夜夜凭仙夢 莫恨前時趁賞疎 

솔은 늙고 대는 높아서 푸른 하늘에 꽂힌 듯하고,
강변에 흰 모래와 푸른 벽은 그림 그리기보다 어렵구나.
내가 지금 밤마다 선몽대에 기대니
전날에 가서 기리지 못하였음을 한탄하노라.(가정 계해년,1563년,도산에서 퇴계)
(藥圃,鶴峯,西涯,漢陰,淸陰,茶山의 次韻詩,1563년 건립/김학범 장동수, 마을숲 163p)

 

약포 정탁

주인이 능히 스스로 맑고 빈 곳을 점쳤는데

낭원(郎苑)과 현도(玄都)가 이보다 못하도다

꿈을 깨고 몇 번이나 대(臺) 위에 누워서

하늘에 찬 달과 별을 보았을까

*낭원은 신선이 사는 곳이요, 현도는 옥경산에 있다.


 

           謹次仙夢臺韻; 서애 류성룡

高臺登眺若憑虛 漁釣生涯我不如 花落半庭春事晩 碧簾松影蕭疎(서애)

 

높은 대(臺)에 올라보니 공중을 의지한 것 같구나

고기잡고 낚시질하는 것, 나는 그러하질 못하였네

꽃이 뜰에 떨어지니 봄이 이미 늦었는데

푸른 주렴 솔 그림자가 다시 소조(蕭條)하도다


 


  퇴계선생의 仙夢臺 韻을 공경히 次韻하다.(鶴峯續集 제1권) -학봉 김성일

半畝松陰倒碧虛 玉壺今日興何如 憑君更聽儒仙句 便覺塵緣立地疏

넓다란 솔 그늘이 푸른 허공 가렸으니 술 마시는 오늘의 그 흥취가 어떠한가

그대 인해 유선의 시구 다시 들으니 속세 인연 그 자리서 멀어짐을 깨닫겠네.

國譯 鶴峯全集 2, 정선용 譯, 1999, 민족문화추진회

 

한음 이덕형

옥 같은 구름과 구슬 같은 달이 빈 대(臺)에 비치는데

유묵(遺墨)을 새로 새기니 그림 같구나

늘 이 대에 올라 신선의 꿈을 꾸고자 하니

주인이 나를 기다려 드리웠던 발을 걷는구나


청음 김상헌

모래가 희고 내가 맑아서 담담해 빈 것 같으니

옥 같은 산이요 구슬 같은 전원에 비교하는 곳이 어떨까

신선의 땅이 하도 멀어 오기가 어렵다 하나

이 정자에 오고감을 게을리 하지 말자 


정사우(丁士優)-다산 정약용의 선조 

물 속에 있는 신선의 집과 같이 거울처럼 비치는데

주인의 마음마저 담박한 듯하네

이틀 동안 선몽대에 오르 내리니

천 척이나 높은 세상 티끌이 생각에 소원하도다


난정(蘭亭)의 옛 자취가 이미 허무하게 되었으니

좋은 일 이 때에 누구와 함께 할 것이냐

거북이와 학 같은 분들이 거듭 놀게 되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가을이 오매 서신을 보내는 것을 소흘하지 말진저


정재유

속인(俗人)이 이에 이르니 자연스레 마음이 허명하구나

신선을 꿈꾸는 마당에는 나래가 돋는 것 같도다

퇴계 선생이 먼저 시를 쓰고 우리 할아버지가 화답하였으니

예로 부터 내려온 운치가 소흘하지 않았지요


정약용-선몽대記

예천에서 동쪽으로 10여리 가면 한 냇가에 닿는다. 그 시내는 넘실대며 구불구불 이어져 흐르는데 깊은 곳은 매우 푸르고 낮은 곳은 맑은 파란색이었다. 시냇가는 깨끗한 모래와 흰 돌로 되어 있어, 바람이 흩어지는 노을의 아름다운 모습이 사람의 눈에 비쳐 들어 온다. 시냇물을 따라 몇 리쯤 되는 곳에 이르면, 높은 절벽이 깎아 세운듯이 서 있는데 다시 그 벼랑을 올라가면 한 정자를 볼 수 있다. 그 정자에는 선몽대라는 방(榜)이 붙어 있다.

선몽대의 좌우에는 우거진 수풀과 긴 대나무가 있는데, 시냇물에 비치는 햇빛과 돌의 색이 숲 그늘에 가리어 보일락말락 하니 참으로 이색적인 풍경이었다. 대개 태백산 남쪽에서 시내와 산의 경치가 뛰어난 곳은 오로지 내성,영천(지금 영주),예천이 최고인데 선몽대는 유독 그 기괴한 모양 때문에 여러 군에 이름이 났다.

하루는 아버지(정재원,1780년 예천군수 재임시 열아홉살인 다산은 책방에서 공부하며 시를 남김)를 따라 정상국(相國,정탁)의 유상(遺像)을 배알하고, 기을 바꾸어 이 누대에 올랐다. 배회하며 바라보다가 이윽고 벽 위에 여러 시가 잇는 것을 보았는데, 그 중에 하나는 관찰사를 지내신 나의 선대 할아버지께서 일찍이 지으신 것이었다. 시판(詩板)이 깨어져 글자가 갈라지고 한쪽 구석이 떨어져 나가기도 했으나, 字句는 빠진 것이 없었다. 아버지께서 손수 먼지를 떨어내시고 나에게 읽으라 하고서 말씀하시길, "공이 일찍이 영남에 관찰사로 내려 왔을 때 이 누대에 오르신 것이다. 공이 지금부터 200여년 전에 사셨던 분인데 나와 네가 또 이 누대에 올라와서 즐기니,어찌 기이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셨다.

그러고는 나에게 명하여 그 시판의 시를 옮겨 본떠서 번각(飜刻)하고 다시 단청을 입혀 걸어 놓게 하시고, 이윽고 나를 불러 기(記)를 쓰라고 하셨다.(다산이 19살에 예천군수인 아버지 정재원을 찾아 와 책방도령으로 공부하며 고평의 정탁 영정을 배알한 후 선몽대에 올라 기문을 작성하였다. 뒷날 다산은 예천을 추로지향이라 지칭하였다. 200년 전의 선조가 시를 써 놓은 곳을 아버지와 함께 다시 올라 기문을 쓰는 감회는!)

*지난 가을 백송파 문중 시사 직전에 도둑이 들어와 선몽대의 문짝을 12개나 떼어 가서 선몽대 현판만 남겨 놓고 약포 서애 학봉 한음 청음 다산 제공의 시판을 떼어서 종가에서 보관하고 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퇴계친필 현판과 시들은 떼어 가지 않았다.
기껏 민속주점이나 까페에 장식용으로 팔려고 이런 짓을 하다니...

출처 : 예천 백송
글쓴이 : 이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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