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의 향기 ♣>/♧ 고전의 향기 ♧

桐城派와 曾國藩

화엄행 2009. 10. 20. 20:27

桐城派와 曾國藩

 

*동성파 운동
고증학이 전성 속에서도 고증학과는 다른 경향의 학문 사상 운동이 있었으니, 바로 동성파(桐城派) 운동이다. 이 운동은 안휘성 동성현(桐城縣) 출신의 방포(方苞: 1668-1749)가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고문(古文)을 본받을 것을 제창한 것에서 시작된다. 동성파는 문장에서 화려한 수사를 가능한 한 배제하고, 간결, 담백하면서 절도 있고 격조 높은 문장을 추구했으며, 사상적으로는 송대 유학의 정신을 지향했다. 고전 문어체를 배격하고 구어체 백화문을 사용하게 될 때까지, 중국의 지식인들 대부분은 동성파의 문장 정신을 따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청 왕조의 충신
동성파의 정신을 따라 송학의 기풍을 진작시키고자 했던 증국번(曾國藩: 1811-1872)은 태평천국군을 진압한 것으로 유명하다. 태평천국군이 진격해 오자 증국번은 고향의 호족들을 중심으로 일종의 향토방위 의용군인 상군(湘軍)을 편성하고, 양자강 일대의 수군도 새로 조직하여 연전연승했다. 황제와 만주족 지배층은 한족인 증국번의 세력이 강대해질 것을 염려하여 그 활동을 제한했지만, 증국번은 청 왕조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여 신임을 얻었다. 1860년에는 양자강 유역의 태평천국군 토벌의 전권을 맡아 태평천국의 난 진압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동치중흥에 대한 기여
증국번은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한 이후 외국과의 화친을 기반으로 서양의 군사기술을 비롯한 문물을 도입하고 산업 발전을 도모했던 청나라 말기의 일시적인 중흥기, 즉 동치중흥(同治中興)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1860년대에 시작된 이른바 양무운동에서 이홍장 좌종당 등과 함께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증국번은 청 왕조에게 있어 더 없는 충신이었음과 동시에, 개인적으로는 성실하고 고결한 인품으로 주위 사람들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았다. 특히 충성, 청렴, 강직 등의 덕목을 강조했는데,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증국번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사상적으로는 정이, 주희를 필두로 하는 송대 유학을 근간으로 삼아 다양한 학문 경향의 장점을 두루 취하고자 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증국번은 동생 증국전과 함께 호남 출신의 청나라 초기 학자 왕부지의 전집인 {선산유서}(船山遺書)를 편찬, 간행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증국번에 대한 평가
만주족 왕조인 청나라에 충성을 다했다는 점 때문에, 증국번에 대하여 한간(漢奸), 즉 일종의 민족 반역자로 비판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특히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면서 증국번은 영국, 프랑스 세력의 도움까지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훗날 청 왕조 전복을 꾀하는 혁명 운동파의 입장이나, 그 보다 더 훗날의 시각에서 내릴 수 있는 평가이다. 예를 들어 공산화 이후 중국에서는, 민중 운동으로서의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한 봉건 지주 계급 및 반동 세력의 주구 정도로 증국번을 폄하하는 경우마저 없지 않았다.

한편 증국번은 중체서용론, 즉 중국의 전통적인 가치, 윤리, 사상을 기본 틀로 삼고, 서양의 문물제도를 선택적으로 수용한다는 입장의 선구 격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증국번과 중체서용론자 그리고 양무운동의 핵심 세력은 전통적인 유교 사상의 우월성을 의심치 않았으며, 그에 대한 자긍심도 결코 잃지 않았다. 이 점 역시 훗날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이 극복하지 못한 한계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증국번은 수구파와 변법파의 중간 정도에 해당하는 인물로 볼 수 있다.

메모: 한간(漢奸)은 청나라 때 지배민족인 만주족과 내통한 한족을 비하시켜 말하는 표현이다. 더 나아가 외국 침략자에 협조하여 민족을 배반하는 사람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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