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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華嚴의 修行觀 / 高 榮 燮 / / 청호불교논집 제1집(1997)

화엄행 2009. 3. 27. 20:07

2006/01/12 오 전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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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華嚴의 修行觀

高 榮 燮 / 2003/12/01
/ 청호불교논집 제1집(1997)


I. 화엄의 인간 이해
1. 發心하는 존재
2. 誓願하는 존재
II. 화엄의 수행관
1. 普賢의 願行
1) 菩薩道의 전개
2) 修行 階位
2. 華嚴 觀法
1) 三種法界觀과 理事無碍觀
2) 十重唯識觀과 三聖圓融觀
3. 華嚴禪
1) 敎禪一致論
2) 禪嚴一致論
III.화엄 수행의 요체
1. 無明에서 般若로
2. 緣起에서 性起로





I. 화엄의 인간 이해


내 살갗을 벗겨 종이를 삼고
내 뼈를 쪼개 붓을 삼으며
내 피를 뽑아 먹물을 삼아
경전을 베껴 써서
수미산 만큼 쌓더라도

불교에서는 인간을 어떻게 보는가? 또 불교에서는 아알라야識의 전환을 통해 無明을 제거
하고 般若를 드러내는 과정인 수행을 어떻게 보는가? 불교에서 인간과 수행의 문제가 왜 중
요시되는가? 종교적 실천의 주체인 인간과 그 인간의 삶의 내용인 수행의 문제는 모든 종교
에 있어서 가장 첨예하게 직면하는 문제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모든 이론과 실천의 주체는 인간일 수밖에 없다. 인간은 모든 활동의 주체이다. 때
문에 그 인간에 의해 역사는 전개되는 것이다. 불교의 화엄 역시 실천수행에 입각한 가르침
이기에 각 지역에서 인간을 중심으로한 다양한 수행 내용과 방법이 모색되어 왔다.
불교에서의 수행 내용과 방법은 불교적 인간의 삶의 모습에서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불
교적 인간의 사유방식과 삶의 모습의 추적은 불교의 모든 것을 이해하는 지름길이 된다. 화
엄에 보이는 인간의 모습 역시 불교적 인간이 지니고 있는 삶과 생각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따라서 화엄의 수행관을 살피는 것은 화엄의 인간 이해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아니될 것이
다.
{화엄경}에서 보이는 인간은 곧 發心하고 誓願하는 존재이다. 특히 화엄 行者는 성불과 회
향을 위해 發心과 誓願하는 모습을 지닌 인간으로 표현된다. 즉 화엄적 인간은 正覺(成佛)을
하려고 발심하는 존재이며, 동시에 그 깨달음을 廻向하려고 서원하는 존재이다.
불교가 다른 가르침과 다른 점은 여러 측면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보다 개성
적이며 변별성을 지닌 점은 아마도 수행에 대한 精緻한 이론과 그 실천에 있을 것이다. 그
수행의 치열함은 위의 [入不思議解脫境界普賢行願品]에서 언급하는 것과 같이 '내 살갗을 벗
겨 종이를 삼고, 내 뼈를 쪼개 붓을 삼는다'는 뜨거운 열정에서 자세히 엿볼 수 있다.
보살은 현실적 인간인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한 어떠한 도구를 다른 곳에서 찾는 것이 아니
라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 즉 자기 몸으로부터 찾는 존재이다. 보살의 위대함은 바로 자기를
넘어서는 어떠한 보편적인 진리를 위해 자기의 한 몸을 기꺼이 던지는 것에 있는 것이다.
그는 살갗을 벗기고 뼈로 붓을 만드는 단계에서 멈추지 않고 '내 피를 뽑아 먹물을 삼아,
경전을 베껴 써서 수미산만큼 높게 쌓더라도 法을 소중히 여기므로 자기의 몸과 목숨도 아끼
지 아니한다'는 이 절절함이 바로 보살 수행자의 갈 길이다.
보현보살이 선재동자에게 한 이 法門은 보살의 願行이 얼마나 철저하며 치열한가를 알 수
있게하는 구절이다. 내 한 몸둥어리의 공양이 중생을 제도하는 데에 있어 얼마만한 효용가치
가 있을까? 중생들의 고통을 뽑아내 주고[拔苦] 즐거움을 건네주는[與樂] 노력이 거저 될 리
없다.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온몸까지 던지는 肉身공양을 통해서 비로소 실현되는 것이다.
이것은 전생에 수행하던 비로자나 붇다의 모습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나를 넘어서는 어
떠한 보편적인 진리를 향해 온몸을 던지는 보살이면 누구나가 할 수 있는 행위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연기적 존재라는 사실을 사무치게 통찰했을 때 나오는 同體大悲의 정신이며, 波
羅蜜行이며 普賢行願의 실행인 것이다. 따라서 {화엄경}에서 보이는 인간은 성불(正覺)을 위
해 發心하는 존재이며, 그것으로 얻은 깨달음을 廻向하고자 誓願하는 존재인 보살의 모습을
하고 있다.


1. 發心하는 존재

{화엄경}에서는 인간을 어떻게 보기에 보살의 대자비심이 끊임없이 나타나는 것일까? 화엄
에서는 인간을 發心하는 존재로 파악한다. 발심은 發菩提心으로 위없이 바르고 평등한 깨달
음[無上正等正覺]을 구하려는 마음이다. 현실적 인간인 중생들은 본디 붇다가 될 성품을 지니
고 있다. 그래서 언제라도 어떠한 계기에 의해 아알라야識의 전환이 있게 된다면 본디의 성
품을 회복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중생의 마음은 본래부터 형상을 떠나 있고 성품을 떠나 있다. 그래서 모습과 성품에 매이
지 않으므로 한 마음[一心]이 주인공인 것이다. 때문에 衆生心을 곧 一心이라고 하는 것이다.
허지만 중생들은 자신의 본래마음을 보지 못하고 형상을 만들고 성품을 만들어 집착하기 때
문에 고통을 받고 윤회를 반복한다.
{대승기신론}에서 밝히는 一心과 같이 중생심은 바로 대승의 마음[大乘心]이며, 넉넉한 마
음이다. 너무나 넉넉하여 바다와 같고 허공과 같다. 그렇지만 중생들은 無明의 바람에 의해
本覺이 가려져 不覺의 상태에 놓여 있다. 그래서 어떠한 계기(수행)에 의해야만, 즉 어떠한
인식전환의 과정을 거쳐야만 不覺의 어둠이 사라지고 비로소 깨달음[始覺]을 회복한다.
이 본래의 깨달음[本覺]을 회복하기까지의 과정이 바로 수행이요, 인식 전환의 과정인 것이
다. 다시 말해서 본래의 깨달음의 상태를 가리고 있는 무명이 어떠한 계기에 의해 제거되고
반야가 환하게 드러나기까지의 과정이 수행인 것이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發菩提心을 통해 正覺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살아있는 것들이
면 모두 성불할 수 있다. 경문에서는 '처음 발심했을 때 곧 성불을 한 것'[初發心時便成正覺]
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하여 {화엄경}에 나타난 인간은 성불을 위해 發心하는 인간이며, 그것
으로 인해 얻은 깨달음을 회향하기 위해 誓願하는 인간이다. 즉 成佛(正覺)과 廻向을 동일시
하는 인간이다. 다시 말해서 {화엄경}의 인간은 성불을 위한 發心과 회향을 위한 誓願의 정
신으로 자기를 넘어서는 어떠한 보편적인 길로 나아가려는 보살적 인간이다. 그의 지평은 언
제나 중생의 지평 위에서 펼쳐진다.
발심을 한다는 것은 인간과 세계에 관한 연기적 통찰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통
찰을 통해 자기를 넘어서는 어떠한 보편적인 진리의 구현을 위해 나아가는 것이다. 마음을
일으킨다는 것은 어떠한 계기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 전환의 계기가 치열하면 치열할수록
발심은 깊어지는 것이다.
화엄수행자가 발심하는 존재로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자신의 삶의 긴장과 탄력을 통해
언제나 전환하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 화엄적 인간이 이렇게 발심하는 존재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시선, 즉 연기에 대한 사무친 통찰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 존재로서 나를 넘어서는 어
떠한 보편적인 원리를 위해 자기를 기꺼이 던진다는 의식으로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기 때문
인 것이다.
붇다의 가르침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연기적 통찰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인
간과 세계의 모습은 곧 현실적 인간인 우리들의 삶의 총화[一切]이다. 인간(6根)과 세계(6境)
와 인간행위(6識)로 구성되는 一切가 우리들의 삶의 총화이듯이 불교가 연기적 존재로 우리
를 규정할 때, 우리가 궁극적으로 겨냥해야 할 관심의 대상은 인간과 세계일 수밖에 없다. 따
라서 수행자의 삶의 모습 역시 이 一切의 해부를 통해서 엿볼 수밖에 없다.
{화엄경}에서는 인간과 세계에 관한 해명을 끊임없이 緣起의 법칙[事적 표현]으로서 또는
性起의 모습[理적 표현]으로서 풀어나가고 있다. 여기에서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인간과 세
계를 緣起的 내지 性起的인 체계로 해명하는 것이다.
緣起와 性起는 화엄의 핵심술어 중의 하나이며, 인과연기(因果緣起, 理實法界)와 해탈경계
(如來出現, 佛境界)의 다른 표현이다. 즉 연기가 事(구체적 사태)적 표현이라면, 성기는 理(추
상적 원리)적 표현이다. 다시 말해서 緣起가 논리적 구조와 시간적 계기의 측면을 지닌 有爲
적 현상이라면, 性起는 개념과 언어를 거부하는 측면을 지닌 無爲적 원리이다. 따라서 화엄에
서 인간과 세계에 관한 해명을 緣起와 性起라는 술어를 매개하지 않고는 그 설명이 불가능한
것이다. 화엄에서의 수행도 바로 이 두 술어를 전제로 하여 전개되는 것이다.


2. 誓願하는 존재

화엄적 인간은 發心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誓願하는 존재이다. 발심을 통해 얻은 위 없이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현실적 인간인 중생들에게 나누어 주는 기쁨을 만끽하는 誓願하는
존재이다. 그는 역시 자기를 넘어서는 어떠한 보편적인 진리를 위해 기꺼이 한 몸을 던지는
이타적 인간이다. 이러한 모습은 "大方廣佛華嚴經"이라는 경 이름의 풀이에서도 잘 나타난다.
元曉는 자신의 {화엄경疏}[序]에서 경의 제목을 풀이하면서 '大方廣'이란 法界의 무한함이
며, 佛華嚴이란 行德의 가없음이라 했다. 이 말은 존재의 세계가 한없는 것이 대방광이라면,
실천의 덕이 끝없는 것이 불화엄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법계의 무한함이란 존재의 세계
가 크고 바르게 되어야 붇다의 행을 넓혀갈 수 있고, 붇다의 행과 덕이 있어야만 크고 바른
존재의 세계를 아름답게 꾸며갈 수 있다는 것이다.
화엄에서의 수행의 내용인 성불(正覺)과 회향(行願)도 경의 제목에서 보여 주듯이, 大方廣
과 佛華嚴의 연기적 내지 성기적 전개로 표현되고 있으며, 그 전개의 지평 위에서 수행, 즉
보살도가 실행되는 것이다. 때문에 성불과 회향이 둘이 아니며 시간적 先後가 있는 것도 아
니다.
화엄의 수행은 무명(無明)을 제거하고 반야(般若)를 드러내는 과정이다. 즉 온갖 분별과 탐
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으로 불타는 집에서 살아가는 중생들이 어떠한 인식 전환의 계기
[修行]를 통해 분별심을 제거하고 반야 지혜를 얻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극한
수행으로 탐진치에 의해 일어나는 온갖 혹업고(惑業苦)의 윤회로부터 무명을 제거하고 반야
의 동두렷한 지혜를 얻어야 한다. 그 지혜를 얻는 과정이 수행이며 보살도의 실천과정이다.

화엄에서 말하는 法界는 내 마음 바깥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몸둥어리와 사물의 총
화인 세계 사이에서 一心으로 펼쳐지는 치열한 긴장과 탄력의 영역자체이다. 그리고 이 법계
를 통해 우리들 자신이 모두 重重無盡의 因陀羅網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화엄에서는 우리의 인식주관에 의해 대상화 되고 인과적 범주에 속하는 시간과 공간으로 규
정되기 이전의 그 자체로서의 존재세계를 法界 또는 法性이라고 부르고 있다.

법계라는 것은 다름 아닌 일체중생의 身心本體이다. 본래부터 신령스럽게 밝아 막힌 데가 없으며 광
대하여 텅 비고 고요한 것, 이것이 유일한 眞境이다. 모습[形貌]이 없되 大千世界를 펼쳐 놓고 가장자리
[邊際]가 없되 萬有를 함용한다. 心目의 사이에 뚜렷하지만 相을 취할 수 없고 色塵의 안에서 빛을 발
하되 理를 헤아릴 수 없다. 진리를 꿰뚫는 慧眼과 망념을 여윈 明智가 아니고서는 능히 自心의 이와 같
은 靈通을 보지 못한다.

법계는 우리의 인식을 벗어난 어떠한 범주가 아니다. 이 글을 지은 裴休의 말대로 모든 중
생의 身心의 本體가 바로 법계인 것이다. '法'이란 우리의 인식기관이 접하고 있는 삼라만상
으로서의 모든 생물과 무생물인 존재를 말하는 것이고, '性'이란 우리의 인식기관이 끊임없이
수용하고 있지만, 대상화하여 분석할 수 없는 본래성이다. 대상화되어 인식되는 것과 그것의
本來性은 원래가 원융한 일체를 이루면서 그 자체로서 현현한 것이다.
화엄이 보여주는 이러한 통찰은 인간과 세계를 一心의 法界라는 영역을 통해 緣起的, 또는
性起的 공관(空觀)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 空觀은 모든 대상에 대한 연기적 통찰에서 일어나
는 끝없는 同體大悲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따라서 화엄의 메시지는 인간, 나아가서는 살아
있는 모든 것들[有機體]에게까지 그 시선이 미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미생물에 이르기까
지도 법계연기의 그물 속에서 눈길을 주고받으며, 그 눈길은 끊임이 없이 지속되는 것이다.
화엄에서 보여주는 이러한 시선의 따뜻함은 그물의 원리에 입각하여 인간과 세계를 법계의
연기를 통해 설명하고 있기에 가능하다. 즉 사물 개체에 대한 따뜻함 그것은 대상화된 시선
이 아니라 주체적인 시선이자 자기화된 시선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면 그러한 시각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바로 보살의 大悲心에서 나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菩提心을 일으킨 보살이 菩薩道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 보살도는 끊임없는 수행을 통해 나오며, 그 수행과정은 인간과 세계를 一心의 법계라는
영역을 통해 緣起的으로 때로는 性起的으로 묘사되고 표현되고 있다. 각 지역에서 전개된 화
엄의 수행 역시 이러한 두 축으로 설명되고 있다.
때문에 화엄에서의 수행은 {화엄경}에서 보여주는 普賢의 願行을 중심으로한 菩薩道 실천
뿐만이 아니라 이후 중국과 한국에서 전개된 다양한 화엄의 시각, 즉 華嚴觀法과 華嚴禪의
전개를 통해 그 수행법을 더듬어 보아야만 그 大綱을 엿볼 수 있다. 그 지향점은 역시 無明
을 제거하고 般若를 드러내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이 글에서는 중국 화엄종의 초조인 杜順(法順)으로부터 智儼-法藏-澄觀-宗密을 잇는 화엄
종사들의 화엄 觀法과 李通玄의 독특한 전개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화엄의 초조인 義湘의 시
각을 통해 화엄 수행의 방법을 더듬어 볼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는 澄觀에서 宗密로 넘어가
는 과정에서 성립된 華嚴과 禪의 만남, 즉 종밀을 통해서 비로소 성립된 華嚴禪과 고려 普照
知訥의 禪嚴一致의 한 형식인 普照禪까지 살펴볼 것이다.
화엄 수행이 無明을 제거하고 般若를 드러내는 과정이듯이 거기에는 제거하고 드러내는 전
환의 과정이 있다. 동시에 그 전환의 과정에는 반드시 자기를 넘어서는 보편성의 입장과 자
기 안에서 성취를 구하는 특수성의 측면이 있다. 화엄이 보살도를 중심으로한 보현의 願行을
하나의 보편성으로 전제한다면, 그것이 중국이나 한국으로 와서 개인적인 수행체계로 내면화
된 점은 오히려 특수성에 해당할 것이다.
{화엄경}에 나타난 인간은 보살적인 인간이며 成佛과 廻向을 동일시하는 인간이다. 그는
성불을 위해 發心하는 인간이며, 회향을 위해 誓願하는 인간이다. 그는 자기를 넘어서는 어떠
한 보편적인 가르침을 위해 자신의 한 몸을 기꺼이 던지는 이타적 인간이며, 끊임없는 수행
의 역정 속에서 살아가는 수행자적 인간이다.
이러한 점에서 {화엄경}에 나타난 인간은 자기를 넘어서는 보편성을 지닌 인간이며, 이후
중국과 한국에서 전개된 화엄 종사들의 삶은 보다 개인 내면의 문제를 지향해간 특수성을 지
닌 삶의 역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화엄의 보살도가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華嚴 觀法이나 華嚴禪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비록 그 모습이 몇몇 종교적 천재에 의해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전개되었다 하더라도 華嚴
觀法이나 華嚴禪 역시 보살도의 구현이라는 {화엄경}의 메시지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이 점에서 보편성과 특수성의 경계가 어떠한 연속성의 영역으로 드리워져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II. 화엄의 수행관

阿含을 중심으로 하는 根本불교에서부터 阿毘達磨(부파)불교, 般若中觀敎義, 解深密唯識교
의, 法華天台교의, 華嚴교의, 禪宗교의, 密宗교의, 淨土교의 등에서 보여주는 다양하고도 精緻
한 수행 내용과 방법은 불교의 궁극적 목표가 이러한 다양한 수행형식과 내용에 의해 성불
(正覺)에 이르는 것임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포괄적인 불교수행법이 발전한 것은 불교의 궁극적 목표[成佛]로 나아가는 치열한
求道心에 의해 가능했던 것이다. 그 방법이 자기 중심적인[특수성] 것이든 함께하는[보편성]
것이든 成佛을 통해 중생을 구제한다는 점에서 모두다 공통된 목표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다양한 불교의 수행법이 중국에 와서는 중국 고유의 수행법과 결부되기도 하여 각 사
상의 修養論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화엄경}의 수행은 보살도로 요약된다. 보살은 보리심을 일으켜 성불을 지향하는 사람이다.
보리심을 일으킨다는 것은 위없이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阿 多羅三 三菩提, 無上正等覺]을
얻으려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즉 보살은 발(보리)심, 즉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려
고 마음을 일으키는 존재이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나누어 주면서 기쁨을
느끼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서 보살은 정각을 위해 發心하는 존재이며, 그것으로 얻
은 깨달음을 회향하기 위해 誓願하는 존재이다. 보살도는 바로 發心과 誓願하는 보살의 삶의
과정이며 수행의 과정이다.


1. 普賢의 願行

화엄에서는 '초발심시 변성정각'(初發心時 便成正覺)이라고 설하고 있다. 이 말은 처음 발심
했을 때 곧 성불(정각)을 했다는 것이다. 즉 發心과 成佛(正覺)을 하나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發心이 수행의 원인이라면 正覺(성불)은 수행의 결과라 할 수 있다. 때문에 발심 수행이 없이
성불(정각)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화엄이 이 우주를 구석구석까지 더듬고 있는 것은 현실적 인간들의 삶의 총화인 一切를 一
心의 법계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이 一心의 의미망이 끊임없이 법계라는 영역에 網과 目을
드리워 자유롭게 넘나들기 때문에 重重無盡한 것이다. 화엄의 특장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다. 이러한 점은 수행의 과정, 즉 수행 階位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화엄에서는 이러한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수행의 단계가 켜켜이 펼쳐져 있다. 그러한 과정
은 十住(解)·十行·十廻向·十地 등의 단계를 거쳐 等覺과 妙覺을 통해 설명되고 있다. 이
단계를 더듬어 보면 화엄에서의 보살도의 전개과정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화엄에서는 수행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이것은 화엄사상사를 살펴보면 크게 세
부분으로 요약된다. 첫째는 {화엄경}에서 보이는 보현의 願行을 중심으로 하는 菩薩道이며,
둘째는 중국 화엄 교학에서 전개된 다양한 觀法이다. 셋째는 華嚴과 禪이 만나는 지평에서
비롯된 華嚴禪이라는 측면이다. 그러면 먼저 화엄에서는 보살도가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살펴
보자.


1) 菩薩道의 전개

세상 일에 따라 발심함[隨事發心]이란 번뇌가 무수하더라도 모두 끊기를 서원하고, 善法이 무량하더라
도 다 닦기를 서원하며, 중생이 무변하더라도 모두 제도하겠다고 서원하는 것이니 이는 (사홍서원의)
앞의 세 일에 대하여 결정코 원을 달성하겠다고 기약하는 것이다.

보살이 보살일 수 있는 것은 發菩提心, 즉 發阿 多羅三 三菩提心 때문이다. 원효는 그의
{無量壽經宗要}에서 이 발심을 隨事發心과 順理發心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隨事
發心이란 세상사에 따라 발심하는 것이며, 順理發心이란 이치에 순응하여 발심하는 것이다.
원효는 수사발심은 退轉의 가능성이 있으니 不定性人도 능히 일으킬 수 있지만, 순리발심
은 諸法이 다 幻夢과 같은 줄을 信解하여 廣大心을 일으키므로 退轉이 없으니 菩薩性의 사람
이라야 능히 일어나게 할 수 있다고 한다.
이와같이 보살은 發心을 전제로 하기에 보살인 것이다. 원효가 발심을 이렇게 두 가지로
보는 것은 自利利他의 行願으로 佛道를 이룰려고 지향하는 뜻으로서 내려지고 있으며, 이
것은 불교 일반의 發心思想을 대표하는 것이다.

普賢行願은 {화엄경}의 핵심술어 중 하나이다. [普賢行品](80화엄), [普賢菩薩行品](60화엄)
[普賢行願品](入不思議解脫境界普賢行願品,40화엄) [普賢三昧品](80화엄) 등 보현보살을 品名
으로 나타내고 있는 여러 品에서 보현보살의 願行에 대해 언급되고 있다.
보현행원은 말 그대로 보현보살이 일으킨 願行이다. 本願이 諸佛如來가 因行時에 세운 大
誓願이라면, 보현행원은 이러한 제불여래의 본원을 行으로 충족시켜 가는 보살행이다. 마치
선재동자가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구도의 길을 가는 과정에서처럼 보살은 일체의 고통을
감내하면서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는 行을 한다. 이러한 本願과 行願이 결국은 三昧로서 접합
되는 것이다.
誓願은 願하는 힘이다. 즉 어떠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목숨을 건 굳센 맹세며 다짐이다.
그런데 그 어떠한 목표는 언제나 혼자만을 위한 범주가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게까지
미치는 광범위한 범주이다. 우리가 언제나 다짐하는 사홍서원은 그러한 서원 가운데에서 가
장 포괄적인 것이다.
보살의 서원은 나를 넘어서는 어떠한 보편적인 원리를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즉 '나'라는 좁은 울타리가 아니라 나를 구성하는 모든 인연에 대한 회향의
정신으로 서원하는 것이다.
보살에게는 자신의 한 몸을 던지겠다는 願力이 있다. 보살은 원력으로 살아가는 존재이다.
원력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本願力을 말한다. 本願은 붇다가 보살이었을 때 세운 서원
이고, 本願力은 본원의 힘의 작용이 성불한 후에 나타나 있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本
願은 붇다와 보살이 과거세에서 아직 佛果를 완성하기 이전에 중생들의 구제를 위하여 일으
키는 因位에서의 誓願이다. 따라서 원행은 보살의 誓願이자 붇다의 본원인 것이다.
성불한 뒤에 大悲利他行을 일으키게 되는 것은 因位에서 誓願을 일으킬 때에 붇다를 보고
나도 저렇게 하리라고 발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本願은 成佛完成의 조건이 되며 붇다
가 중생제도를 하게 되는 근본원인이 된다.
{화엄경}이 붇다의 깨달음을 그대로 나타낸 경전이지만, {화엄경}의 설주인 毘盧遮那佛은
어디까지나 침묵을 지킬 따름이고 무수한 보살들이 교대로 나타나서 부처의 세계에 대하여
찬양하고 중생의 實相을 보이며 보살이 행해야 될 실천을 밝힌다. 그래서 여러 보살들이
출현하여 붇다를 기리며 자신도 성불을 발원하는 것이다.
붇다를 받들어 공경하면서, 나도 성불하리라는 굳은 서원을 되풀이 하는 일이야말로 成佛
道에 있어서 가장 근본이 되는 일이요, 청정한 서원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보살행을 닦아
나아가는 일은 成佛道의 완성을 좌우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지나간 세상 보살로 있을 때에 한량없는 부처님께 공양하면서 무수한 큰 誓願을 세웠기 때문에 위
없는 지혜를 얻었느니라.

구름과 같이 수 많은 보살들이 모여와서 붇다의 덕을 제각기 찬탄하며 무수한 큰 서원을
세운다. 보살은 그 서원의 힘으로 용맹정진하여 위 없는 지혜를 얻는다. 그러한 서원이 없다
면 보살은 아무런 존재의미가 없는 것이다. 보살이 보살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서원이 있
기 때문이다. 보살은 붇다의 처소에서 청정한 행을 닦고 원력을 일으켰기 때문에 보살인 것
이다.
화엄에서는 비로자나불의 세계를 찬탄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세계는 너무나 깊어서 찬
탄하는 보살들도 잘 알지 못하는 세계이다. 보살들은 몸소 성불의 길로 나아가고 싶어한다.
이러한 생각을 안 붇다는 三昧에 든 채로 보현보살을 나타내어 모인 대중에게 보이게 한다.
이윽고 보현보살은 곧 一切如來淨藏三昧에 들어가자 시방세계의 여러 붇다들이 나타나 각각
말한다.

(장하다, 선남자야!) 그대가 이 三昧에 든 것은 비로자나 부처님의 본래의 願力때문이요, 또 그대가
모든 부처님의 처소에서 닦은 청정한 行과 願力 때문이다.

보현이 三昧에 들어 三昧의 법을 얻자 붇다는 보현보살에게 지혜에 들어가는 힘과 갖가지
지혜를 준다. 여기서 三昧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화엄에서는 특히 華嚴三昧와 海印三
昧가 주목된다. 화엄삼매는 華嚴行으로 중생이 어떻게 하여 법계에 들어가는가를 설하는 行
이다. 즉 화엄삼매는 [離世間品]에서 설하는 보살행으로서 중생의 行이면서 동시에 여래의
行이다. 다시 말하면 여래에서 중생으로, 중생에서 여래로의 往來가 行이며, 그것의 合一이
三昧이다. 그러나 그것은 行에 의하여 三昧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삼매에서 이러한 왕래의
行을 파악하는 입장이다.
경전에서는 계속해서 비로자나불이 三昧 속에서 침묵한 채로 설법을 한다. 따라서 듣는 사
람도 三昧를 통해서 그 설법을 들어야만 한다. 이처럼 붇다로부터 갖가지 지혜를 얻은 보현
보살은 붇다의 威神力을 받들어 중생들을 佛法의 바다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 설법을 하는
것이다.
{화엄경}에서는 보현보살을 비롯한 여러 보살의 설법은 비로자나불이 法輪을 굴리는 모습
의 延長이라 할 수 있다. 즉 비로자나불의 세계인 一切의 世界海에 대해 그 세계가 이루어지
는 인연을 보현보살이 대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엄경}이 보살도의 실천을 통해
서 불세계를 구현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보현의 願行이 얼마만한 무게를 지니
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화엄은 普賢보살의 願行을 바로 菩薩道의 으뜸으로 삼고 있다. 그것은 위에서 말한대로
{화엄경}의 설법이 붇다의 威神力을 받아 보현보살에 의해 실행되어지기 때문이다. 보현보살
은 毘盧遮那佛을 대리하여 불세계를 설한다. 보현보살의 大慈悲 願力은 佛境界의 한 없는 지
혜를 얻는 원동력이 된다.
그것은 {화엄경}이 大方廣佛이 설하는 경이 아니라 대방광불을 설한 경이며, 시방세계 海
會보살들이 우주만법의 실체인 대방광불을 설하여 세상에 나타난 경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海會보살들은 어디까지나 법신 비로자나불의 위신력을 받아서 설했기 때문에 결국은 붇다가
설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보현보살 역시 부처의 위신력을 받아서 설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보현보살의 願을 일으켜서 모든 부처님 경계의 한 없는 지혜를 얻으면, 그는 한없이 훌
륭한 자재를 얻어 가없는 부처님 세계로 들어가느니라.

어떠한 사람도 보현보살의 원을 일으킬 수 있다. 그래서 그가 모든 佛境界의 한없는 지혜
를 얻으면 佛世界로 들어갈 수 있다는 이 선언은 發菩提心을 일으킨 이에게는 환희심을 불러
일으키게 한다. 보현보살만이 불경계의 한 없는 지혜를 얻어 불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보현보살의 願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결코 가벼이 넘길 일이 아니다.
이처럼 화엄에서 願行이 차지하는 비중은 실로 막중하다. 보현보살의 願行은 바로 현실적
인간인 중생들을 제도하는 보살도인 것이다. 보살도는 화엄의 수행과정이며 깨달음의 과정이
다.

모든 보살이 닦는 부처님 법은 바로 보현보살이 닦는 행이다.

이 경문에 의하면 보현보살이 닦는 행과 모든 보살이 닦는 불법이 동일시 되고 있다. 비로
자나불의 一切 世界海가 이루어지는 원인도 보현보살에 의해 설명된다. 그러므로 보살도는
그대로 佛自證의 開顯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화엄경}에 있어서는 一切의 보살은 모두 보
현보살에 統一되는 것이며 문수라 할지라도 보현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經에서는 보살이 能說人으로서 佛陀를 대표하고 佛陀는 所說人으로서 沈默하고 있다. 그러
나 能說의 보현이나 所說의 佛陀는 그 의미는 다르나 그 體의 別은 없다. 그러므로 普賢의
說은 모두 佛意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으며 佛陀는 沈默하고 있는 그대로 大說法을 하고 있는
것이다.
붇다의 위신력과 붇다의 理法으로부터 보현보살의 善根과 願行, 중생의 行業 등 이 모든
인연들의 화합으로 비로자나불의 세계는 이루어진다. 이처럼 화엄에서 말하는 重重無盡의 法
界緣起도 결국은 보현보살의 보살도에 입각한 것이라는 점이 분명하다.
보살도 수행 과정은 곧 자기의 발견을 가능하게 한다. 때문에 보살의 청정한 身口意業은
보살의 근본행이 된다. {화엄경}에 나타나는 보살도의 과정 중에는 비록 十信이 品名으로 나
타나 있지 않지만 모든 보살도의 근본이 바로 청정한 身口意行이라는 점에서 굳이 독립된 품
명으로 표현되지 않은 것 같다. 아마도 믿음은 모든 보살행의 출발점이기 때문일 것이다.
화엄 수행에서의 보현행원은 그 출발점이자 종착점인 것이다. 지극히 이타적이며 보편적인
보현행원이 중국 교학에서는 몇몇 종교적 천재들에 의해 화엄 관법이나 화엄선의 특수한 형
태로 전이되지만, 그 맥락은 기본적으로 보현행원을 모티프로 하여 전개된다.
{화엄경}에서 보이는 보살도의 문제는 화엄 수행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먼저 {화
엄경}이 보여주는 處所와 法會 回數나, 그 법회에서 보여주는 說法의 內容이 매우 상징적으
로 처리되어 있다. 이 상징 속에 화엄 수행의 과정이 투영되어 있다. 한 계위에서 다른 계위
로 나아가는 단계마다 상징적 전환의 장치가 있다. 그 장치에 의해 각 계위의 위상이 촉발된
다.


2) 修行 階位

{화엄경}의 보살도는 十住(解)로부터 十行, 十廻向, 十地의 순서로 전개된다. {화엄경}에서
는 모든 보살행의 바탕이 되는 十信에 대한 별도의 品은 없다. 다만 [淨行品] 속에 보살도의
바탕이 되는 믿음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화엄경}에 나타난 수행의 기본체계는 十住·十行·十廻向·十地·等覺·妙覺의 位로 전개
된다. 十住에 앞서 모든 보살행의 바탕이 되는 믿음[十信]에 대해서는 모든 수행 果位에서 이
미 일상적 수행으로 전제된 것이기에 독립적으로 재론하지 않는다. 다만 身口意業의 淸淨이
라는 측면에서의 信行이 [淨行品]에서 願行의 의미를 머금고 설해지고 있다.
그런데 {화엄경}에는 경전의 구조와 수행의 구조가 유기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경전의 편집자는 천계의 공간구조를 통한 기본적인 十數的 修行集合들이 거
시적 구도에 의해 階位化 된다고 보고 있다. 즉 欲界 6天의 수행집합들과 天界의 空間構造는
각기 '①淨行(願行)-四天王天 ②十住-33天( 利天) ③十行-夜摩天 ④十廻向-兜率天 ⑤十藏-
化樂天 ⑥十地-他化自在天으로 짝지우며, 계속해서 ⑦十願-정행이 곧 원행이므로 정행에 포
함됨 ⑧十定-여러 가지 三昧(定)를 주제로 함 ⑨十通-佛陀의 신통력을 주제로 함 ⑩十頂-頂
은 灌頂 또는 忍의 의미, 무생법인 등을 주제로 함'이라고 보면서 ⑦⑧⑨⑩의 영역이 그 앞의
수행체계에서도 당연히 요청되는 수행적 덕목임을 넉넉히 이해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편집자가 경전의 구조를 치밀한 배치에 의해 짰다고 파악하는 것이다.
하여튼 {화엄경}의 편집자는 어떠한 공간구조의 질서 위에 각 수행집합들을 배치했음에 틀
림없다. 때문에 각 수행계위(집합들)는 하나씩 켜켜히 깊어지고 넓어져서 앞의 位를 거쳐 다
음 위로 넘어가면서 마지막에는 等覺과 妙覺의 果位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펼쳐진다.

{화엄경}은 붇다가 설하는 것이 아니라 붇다를 설하는 경이다. 이 말은 {화엄경}에서의 主
語는 붇다가 아니라 바로 法을 설하는 보살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비로자나불의 一切 世界
海가 어떻게 성립되었으며, 어떠한 모습인가를 다양한 修辭를 동원하여 표현하는 것이다. 그
런데 이 說者들은 모두가 대보살들이다. 이를테면 普賢, 文殊, 法慧, 功德林, 金剛幢, 金剛藏
보살 등이다. 이러한 보살들이 장소에 따라 說主로 등장한다.
또 처소에 따라 등장인물이 다를뿐만 아니라 그 보살들이 하는 역할도 각기 다르다. 그러
나 그렇게 인물과 역할이 각기 다르지만 모두 여래출현, 즉 연기의 궁극적 표현인 性起에 집
중되고 있다는 점에서 화엄의 특징이 보인다. 바로 이점에서 화엄의 우주적 다양성과 그 통
일성을 읽어낼 수 있다.

{화엄경}에는 [十信品]이 없다. 보살 수행의 가장 밑바탕이 되는 믿음에 대해 [십신품]이
라는 품명이 따로 설정되지 않고, 다만 [淨行品](믿음을 설함) 안에서 믿음에 대한 언급이 있
을 뿐이다. 智首보살의 물음에 文殊보살이 '어떻게 하면 身口意業을 물들이지 않고 청정히 하
여 지혜로운 身口意業을 따르게 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 형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보살이 身口意業을 성취하면 일체의 훌륭한 功德을 얻어 부처님의 正法에 마음이 걸림이 없고 ……
중생을 위하여 제 2의 尊導가 된다.

'믿음은 공덕의 어머니'라는 언설처럼 보살 수행의 출발점인 믿음은 바로 자기 자신의 身口
意業을 성취함으로써 비로소 얻게 된다. 그리고 그 공덕은 결국 誓願의 밑거름이 되는 것이
다. 이것은 여래의 발바닥[如來足下相輪]에 비유된다. 믿음은 땅 위를 굳건히 딛고 서있는 발
바닥으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일 것이다. 보살은 중생을 위하여 붇다에 버금가는 자리에 올라
끊임없는 發願으로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은 곧 보살도로 나아가는 밑바탕이
되는 것이다.
보살도의 과정은 階位에 따라 다르게 표현된다. 믿음[信]에 이어 나아가는 열 가지 머무름
이란 [十住品]에서는 法慧보살이 須彌山頂會에 나타나 여래의 발가락[如來足指]으로부터 나
온 放光을 통해 10住에 대해 설하고 있다.
[十行品]에서는 功德林보살이 夜摩天宮會에 나타나 여래의 발가락[如來足指]으로부터 나온
放光을 통해 10行에 대해 설하고 있다.
[十廻向品]에서는 金剛幢보살이 兜率天宮會에 나타나 여래의 양무릎[如來兩膝]으로부터 나
온 放光을 통해 10廻向에 대해 설하고 있다.
[十地品]에서는 金剛藏보살이 타화자재천궁회에서 여래의 눈썹 사이[如來眉間]의 흰 터럭
[白毫相]으로부터 나온 放光을 통해 10地에 대해 설하고 있다. 初地인 歡喜地에서 제 7지인
遠行地까지, 그리고 不動地인 제 8지에서 제 10지인 法雲地에 이르기까지 각 地 사이에서의
전환의 과정이 자세하게 묘사되거나 표현되고 있다. 특히 제 7地인 遠行地에서 제 8地인 不
動地로의 전환은 보살도의 한 절정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각 품마다 설법 내용과 일치되는 상징성을 지닌 보살이 說主로 나타나 법을 설하고
있다. 이처럼 {화엄경}에 나타난 이름 하나, 개념 하나가 지니는 의미를 결코 가벼이 취
급할 수 없다. 신체의 부위인 발바닥에서부터 발가락-양무릎-두 눈썹 사이의 흰 터럭으로 점
점 올라가고 있다. 이렇게 한 단계씩 위로 향해 나아가는 것이 바로 보살 계위의 전환의 과
정이다. 이러한 전환의 과정이 바로 菩薩道의 실천과정이다.
{화엄경}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상징적 형식을 취하여 설하고 있다. 그래서 {화엄경}
을 상징철학이라고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 상징성은 보살의 수행과정에서도 보이고 있으
며 각 품별로 등장하는 보살들의 '열'(滿數) 가지 비유의 언설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화엄경}이 보여주고자 하는 궁극적인 메시지를 性起, 즉 여래의 출현이다. 그래서 이 경전
의 전반부가 法을 중심으로 닦아 나아가는 能攝如來出現의 果因緣起를 열어보이고 있다면,
후반부는 여래를 밝히는 所攝如來出現의 因果緣起를 설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경전
이 보여주는 모습은 전·후반부에 모두 나타나는 여래의 출현이 性起로 내재화된다는 것이
다. 하여 화엄 수행은 바로 이 性起, 즉 여래출현의 모습에 의한 세계 성립은 어떻게 되며 그
세계를 만들어가는 菩薩道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일체 세계는 어떠한 모습으로 형성되며 그러한 세계를 만들어 가려면 보살은
어떻게 수행을 해야 하는가를 밝히는 과정이 바로 더 높은 단계의 수행의 계위로 나아가는
菩薩道의 역정이자 普賢行願인 것이다. 화엄 관법이나 화엄선 역시 이러한 보살도의 과정에
서 전개된 특수성의 한 모형인 것이다.
따라서 보살도가 화엄 수행의 보편성의 범주라면 華嚴 觀法과 華嚴禪은 그 보살도의 내면
화 과정에서 모색된 특수성의 범주로 파악될 것이다. 禪 수행이 지니고 있는 내면화의 함의
가 어떠한 여과장치에 의해 외면화될 수 있다면 그것은 보다 넉넉한 울림이 있는 수행법이
될 것이다. 그러면 華嚴 觀法에 대해 살펴보자.


2. 華嚴 觀法

흔히 화엄을 敎學으로만 보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화엄에는 三昧·止觀·禪定이라는 인
도불교적 실천체계에 근본을 둔 觀門을 통한 다양한 觀法이 설정되어 있다. 나아가서는 華嚴
과 禪의 만남인 華嚴禪까지 전개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화엄 관법은 인도불교적 실천체계에 근본을 두면서도 중국 화엄종에
서 새로운 실천체계로서 자리매김한 것이다. 즉 중국 화엄종의 화엄조사들이 華嚴敎義를 實
踐行道로 구현해 낸 실천원리이며 觀行體系이다.
{화엄경} 속에서 觀法의 의미는 '觀一切法', 즉 一切法을 觀察 照明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또 '觀法'의 法이란 바로 法界(dharma dh tu)를 의미한다고 말해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觀法은 觀法界라는 의미로서 法界에 깨달아 들어간다는 의미로서 [입법계품]의 入法界와도
상통하는 뜻이라 할 수 있으며, 慧로서 諸法의 性相을 分別 照見하는 것을 말한다. 인도 사
상의 흐름을 살펴보면 法이란 술어의 의미는 매우 포괄적인 함의를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觀一切法이라고 하는 觀照의 세계는 근본적으로는 보살행을 실천하기 위한 움직임
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화엄교학에서는 법계에 들어가는 것을 보통 말하는 진리를 깨닫는다는 의미로 사용
하는 것이 아니라 體驗에 기본을 둔 종교적인 전환, 즉 三昧에 의해서 법계에 도달하는 것이
라고 한다. 이것은 곧 一切法, 즉 諸法을 관찰하고 조명하는 것이야말로 보살행으로 나아가
는 기본자세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과 세계 사이에서 연기적으로 형성되는 일체법은
화엄 수행자의 궁극적 대상일 수 밖에 없다.
현실적 인간들의 삶의 총화인 一切(法)는 연기를 통해 구성된다. 인식주체와 세계는 끊임없
는 육촉(六觸)연기를 통해 한 세계[一切]를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일체법을 관찰 조명하는
觀法은 인간(6根)과 세계(6境)로 포괄되는 일체를 대상화하여 연기의 앵글로 인식하는 행위(6
識)인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 인간들의 삶의 총화인 一切의 法을 관찰 조명하지 않고 중생의 삶을 질적으
로 승화시킬 수 있을까? 그것은 현실적 인간의 삶이 이루어지는 이 三界에서 보살도는 비롯
될 수밖에 없다. 불타는 집인 이 三界는 우리의 번뇌가 만들어내는 無形의 집이다. '삼계는
허망하다, 다만 一心의 지음이다'는 말처럼 현실적 인간인 중생들은 삶의 한복판인 欲界·
色界·無色界의 三界를 벗어나는 길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과 세계 사이의 긴장과 탄력을 통해 구성되는 일체법은 바로 화엄뿐만 아니라 불교가
지향하는 대상이다. 때문에 여기에서의 觀法의 法을 일체법이라고 정의하는 경우, 그 일체법
이란 緣起法으로서의 의미가 강하다고 할 수 있다. {화엄경}에 있어서의 보살행의 기본자세
는 緣起의 현상을 관찰 조명하고, 그 연기법이 空( nya, nyat )임을 체득했을 때에 참으로
보살행은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혜의 눈으로 一切衆生, 衆生界, 法性 등을 관찰하고,
또는 如來의 莊嚴, 佛境界, 佛光明을 관찰하여 여래의 지혜를 잘 이해하여 소화하는[會得] 것
이다. 연기법은 一心을 통해 설명된다. 따라서 이 一心만이 붇다의 깨달음의 一心과 生死에
허우적거리는 중생의 一心을 이어주는 것이다.

{화엄경}에 있어서 관법의 관찰 대상은 두 가지로 정리되어 진다. 하나는 如來正覺의 깨달
음의 세계를 관찰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一心에 의해 전개되는 十二緣起의 현상을 逆順으
로 관찰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찰에 의해 보살은 佛智慧를 會得하는 것이다.
본래 觀法은 止觀과 三昧와 마찬가지로 관찰의 결과로서 지혜를 완성해 가는 것이 가장 근
본적인 목적이었다. 때문에 觀法이라는 용어는 觀行 또는 觀門이라는 용어로도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이 두 술어가 모두 實踐行道의 의미를 강하게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중국 화엄 교학에 있어서 실천교의로서의 화엄 관법은 隋唐불교의 종교적 형성 속에서, 특
히 禪者의 실천수행도에 자극받아 화엄적 실천관행으로서 성립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화
엄 관법에 관한 많은 서물이 지어졌다.
화엄 관법은 두 가지 관점에 의해 인간과 세계를 바라본다. 그 두 가지는 바로 緣起觀과
性起觀이다. 즉 性海의 果德에서 설하면 性起觀이요, 重重無盡의 用에서 논하면 곧 緣起觀이
자 화엄의 奧旨를 닦는 觀門의 근본 체계라고 해야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性起觀은 無碍
의 법계에 깨달아 들어가는 방법으로서 자기의 一心 本覺 속에 法界 萬德을 갈무리해 있다고
말하고, 緣起觀은 한 티끌의 존재를 통하여 법계에 들어가는 요문으로서의 연기관을 정의하
고 있다.
다시 말하면 화엄의 핵심술어인 緣起와 性起가 각각 하나의 관법으로서 한 측면을 나타내
고 있다. 성기관은 성해의 과덕에서 바라보지만 연기관은 한 티끌의 존재를 통하여 바라본다.
결국은 성기와 연기가 각기 理와 事의 자리에서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다.
따라서 화엄 관법은 한 마디로 말하면 화엄교학 가운데에서 實踐行道의 부분을 밝히기 위
한 觀行체계라 할 수 있다. 그 실천행도는 근본적으로 空觀의 체득으로부터 시작하여 불세계
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화엄의 관법은 화엄종의 초조로 불리는 杜順(法順)에 의해 비롯되었다. 법순은 그의 주요저
술인 {법계관문}(修大方廣佛華嚴法界觀門)을 통해 화엄의 수행관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중국 화엄교학에 있어 특히 이 {법계관문}은 법장의 {妄盡還源觀}과 함께 中唐 이후의 중국
불교계에 지극히 커다란 영향을 준 것으로 언급되고 있다. 이것은 위의 두 책이 머금고 있는
화엄 관법의 내용과 의미가 중국 화엄 수행의 핵심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觀法은 두순의 {法界觀門} 이후 화엄학자들에 의해 여러 가지 종류가 고안되었는데 이것을
대략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① 敎의 深淺에 따라 觀行의 순서를 세운 것으로는 五敎止
觀·遊心法界記·十門唯識觀이 있고, ② 근본적 直覺에 의하여 세운 法界觀門·妄盡還源觀·
普賢觀·華嚴世界觀·三聖圓融觀·華嚴心要觀 등이 있고, ③ 大小乘의 觀門에 의지하여 華嚴
一乘義를 나타내려 하는 것으로서는 十二因緣觀 등이 있다.
이러한 관법들이 대부분 화엄 종사들의 저술 제목이나 저술 내용으로 명명된 것이 하나의
특징이다. 여기에서는 크게 三種法界觀·理事無碍觀·十門[重]唯識觀·三聖圓融觀으로 분류하
여 살펴볼 것이다. 먼저 삼종법계관과 이사무애관에 대해 알아보자.


1) 三種法界觀과 理事無碍觀

중국 화엄종의 관법은 초조인 두순(557~640)에서부터 이미 비롯된다. 두순은 그의 주요저술
인 {법계관문}(1권, 修大方廣佛華嚴法界觀門)에서 三重觀法을 제시하여 화엄이 교학만이 아니
라 실천수행의 관법까지 포괄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두순의 {법계관문}은 이후 여러 화엄 종사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조명되면서 三種法界觀이
라는 하나의 관법을 형성하게 된다. 두순의 {법계관문}은 자신의 종교적 체험에 기반을 두고
조직된 것으로서 표면적으로는 논리적인 표현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뒤에는
杜順의 직관적인 예지를 엿볼 수가 있다.
먼저 {법계관문}에서 보이고 있는 관법은 세 가지 관문으로 요약된다. 첫 번째는 眞空觀이
요, 두 번째는 理事無碍觀이며, 세 번째는 周遍含容觀인데, 이 三觀은 거듭 30種의 관법으로
나누어진다.
그런데 이 세 가지 관법[三重觀門] 중 첫 번째의 眞空觀은 般若空觀을 입장으로 하는 네
觀門으로 다시 구체화된다. 첫째는 會色歸空觀이요, 둘째는 明空卽色觀이다. 셋째는 空色無碍
觀요, 넷째는 泯絶無寄觀이다. 이 진공관은 화엄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공관, 즉 반야공관
의 입장에서 色과 空의 이분을 空의 입장에서 觀하는 것이다. 법계관의 제일을 진공관에 둔
것은 그것의 뿌리가 반야 이래의 대승공관이기 때문이다.
{법계관문}을 화엄의 가장 중요한 관법으로 여긴다면, 그 관법의 기본을 空觀에 둔 것은
화엄 관법에 있어서 空觀의 중요성을 의미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두 번째의 理事無碍觀
과 세 번째의 周遍含容觀 역시 이 眞空觀의 기초 위에서 구조된 것이다.
두 번째인 理事無碍觀은 理遍於事, 事遍於理, 依理成事, 事能顯理, 以理奪事, 事能隱理, 眞理
卽事, 事法卽理, 眞理非事, 事法非理의 10門에 의해 설해진다.
세 번째인 周遍含容觀은 理如事, 事如理, 事含如理, 通局無碍, 廣 無碍, 遍容無碍, 攝入無
碍, 交涉無碍, 相在無碍, 普融無碍의 10門으로 나눠진다.
일반적으로 이 세 가지의 관법을 순차적으로 여겨 周遍含容觀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경
향이 화엄교학의 흐름이지만 오히려 화엄관법의 근본은 기초로 전제되어 있는 眞空觀이라 하
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緣起를 매개로 하는 空觀은 인도불교 이래 중국불교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교학의 바로미터이기 때문이다.
{법계관문}의 사상은 화엄 초조인 法順 자신이 {화엄경}의 법문을 뽑아내어 禪觀에 의해
실천적 체계로서 논리화시킨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텍스트는 법순 자신의 독자적 사상이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전에 이런 실마리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화
엄경} 이러한 觀行的 입장에서 이해된 것은 이미 眞諦의 교판사상으로써도 전해졌고, 또 隋
의 開皇 10년(590)에 장안에 온 남인도의 번역가인 達摩 多의 교판으로서 주목되는 四諦(소
승경), 無相(반야경), 法相(능가경), 觀行(화엄경)의 四敎에서도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법계관문}의 三重觀 속에는 대승불교의 근본이 되는 空觀, 理事無碍의 緣起觀, 周遍含容의
華嚴法界觀이 솥의 세 발처럼 갖추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이 점때문에 {법계관문}
의 화엄 관법적 圓融性이 잘 드러나고 있으며 이후 화엄 관법에 사상적 영향을 지속적으로
준 것이라 여겨지는 것이다.
따라서 {법계관문}은 진공관을 기초로 하여 이사무애관과 주변함용관이 전개된 것이라 보
아야 할 것이다. 또 이사무애관의 원융성 위에 설정되어 있는 주변함용관 역시 결국은 화엄
법계의 事事無碍에로 전개되기 때문에 법순의 三重觀門은 眞空觀을 바탕으로 해서 구조된 것
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진공관은 緣起·空 위에서 정립된 것이며, 연기에 대한 사무친 통찰 위에서 새로이 태
어난 인간이 곧 보살이라는 면에서도 화엄 수행의 여러 측면이 투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지엄의 관법에서 잘 나타난다.

理事無碍觀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두순의 3종법계관 속에 들어있는 이사무애관이 모
티프가 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의 관법의 형식으로 정리되었던 것은 지엄
이래의 화엄 종사들에 의해서 이다.
화엄교학의 기초를 사실상 세운 智儼(602~668)의 저서는 {搜玄記}(大方廣佛華嚴經搜玄分齊
通智方軌) {孔目章} {五十要問答} {十玄章} {金剛般若波羅蜜經略疏} 등 5종의 저서만이 현존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해동 신라 義湘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지엄의 저술 {華嚴一乘十
玄門}은, 첫째 지엄의 저작은 同別의 2敎의 입장을 관철하고 있지만 이 책은 그것이 결여되
어 있으며, 둘째 이 책의 법계연기설과 {수현기}의 법계연기설이 서로 어긋난다는 점에서 지
엄의 저작에서 제외시킨다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그래서 지엄의 저술 중 斷簡을 제외한
완전한 것은 {수현기} {공목장} {오십요문답} {금강반야경약소} 네 가지 뿐이라고 한다.
지엄의 최초 저작인 {수현기}는 그가 27세에 저술한 지엄의 교학을 자리매김하는 중요한
저술이다. 이 저술은 5門分別, 즉 첫째 歎聖臨機德量由致, 둘째 明藏攝分齊, 셋째 辨敎下所詮
宗趣及能詮敎體, 넷째 釋經題目, 다섯째 分文解釋으로 나누어 설명되고 있다. 그런데 두 번째
인 明藏攝分齊 가운데에서 그의 교판으로서 주목되는 漸교·頓교·圓교의 3敎가 보인다. 이
頓·漸·圓 三敎는 小乘·三乘·一乘의 사상으로 이해되고 圓敎一乘에서 체계화 된다. 그
리고 세 번째인 所詮宗趣及能詮敎體에서는 그의 교학의 중요한 논제인 宗趣論이 설해지고 있
다.
다섯 번째인 分文解釋은 總料簡敎之分齊와 別釋文分齊로 나누어 지는데, 別釋文分齊는 다
시 大邪顯正明其分齊와 約所詮義明其分齊의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이 중 約所詮義明其分齊
에서 열 가지 門을 연 것이 十門玄, 즉 나중의 十玄門이다.
이 십현문에 각기 十義의 의미를 부여한 것이 지엄 화엄 관법의 한 특징이다. 그는 10가지
문 중의 첫 문인 同時具足相應門에 敎義具足, 理事具足, 解行具足, 因果具足, 人法具足, 分齊
境位具足, 師弟法智具足, 主伴依正具足, 逆順用自在具足, 隨生根欲示現具足의 열 가지 의미를
부여하면서 이들 열 가지가 十門에 상응함에 있어 先後가 없다는 것이다.
지엄은 이 十門에 十義를 갖추어 百門으로 전개시키면서 一과 一切가 동시에 구족·상응하
여 법계에 두루하는 無盡의 연기를 이론적으로 상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十義는 각기 상대
적으로 이해되지만, 여기에서는 온갖 상대적 입장을 포섭하는 의미로 조직되며, 앞의 五對에
서는 이론적인 입장이 主가 되는 것 같지만, 뒤의 五對는 실천적 내용을 고려하지 않으면 이
해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이러한 相對는 서로 대립하면서도 항상 相關的으로 성립하는 것이
요, 결코 단독으로는 존립할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이 十義의 구족은 화엄사상에 있어서 敎義, 理事, 解行, 因果 등 이른바 이항대립의 상대개
념 중에 그 양면을 구족함으로써 화엄의 圓融無碍사상을 낳은 母體가 되었다 할 수 있다. 이
를테면 설명하는 언어로서의 能詮인 敎와 설명되는 의미로서의 所詮인 義는 서로를 의존하여
성립하는 것으로,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양자는 실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중국적 불교가 理事의 추구에 있다면 그 理事의 문제를 최초로 언급한 텍스트는 두순의
{법계관문}이다. 그것은 {법계관문}이 立論하고 있는 세 가지 관법 중 두 번째 관법인 理事
無碍觀에 중국불교의 理事無碍觀의 전형적인 이론의 전개가 있기 때문이다.
이 理事를 {대승기신론}의 논리체계로 살펴보면 心眞如門은 理에, 心生滅門은 事에 짝지워
질 것이다. 이 眞如와 生滅로서의 理事는 空과 有로 교체되어 연기의 법은 有인 것 같으나
곧 空이며, 空은 곧 不空이므로 有와 空은 둘이 아니며 一際圓融이 되는 것이다.
지엄이 부여하는 十義도 敎義, 理事 등 이항대립의 개념들도 결국은 인도불교가 고민해왔
던 空有논리에 대한 중국적 변용인 것이다. 理事의 논리가 단순히 상대개념만이 아니라 無碍
와 圓融의 원리로까지 전개된 점은 중국불교의 특징이라 할 것이다. 敎와 義라는 이항대립의
개념들도 단순한 이항대립이 아니라 無碍와 圓融의 길로 전환되는 연기적 매개 개념을 통한
상호 보완적인 것들로 여겨진다.
義 없이는 敎가 성립하지 않고, 敎 없이는 義가 나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義는 항상
밖으로 敎를 표현하고, 敎는 안으로 義를 지향한다. 온갖 상대적 관계는 이런 관련 속에서 구
체화 되며 이것은 모두 연기적 관계이다. 이것은 敎와 義 사이에서만 벌어지는 상대적 관
계가 아니라 理事로부터 나머지 八義에 이르기까지도 이러한 관계로 상응한다.
十玄門의 사상은 {화엄경} 해인삼매의 입장에서 조직된 것으로 처음의 同時具足相應門이
나머지 九門을 총괄하면서 다시 그 기초적인 의미를 지니며, 나머지 九門은 모두 {화엄경}의
독자적인 사상을 달리 전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지엄의 다른 저서인 {오십요문답}에서도 四尋思觀·唯識略觀·空觀·普敬認惡의 네 가지
관법에 관한 항목이 있다. 유식교학의 한 관법이기도 한 사심사관은 지엄에 의해 三乘의 교
학으로 사용된 관법으로 華嚴관법과 唯識관법의 상호관련성을 보여준다.
화엄관법에다 유식관법을 원용한 면에 있어서는 유식약관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유식
의 行法에 기초한 空觀은 身口意 三業 및 十法을 조정하여 그 위에 십법이 空인 것을 체득하
는 것이다. 여기서는 방편으로서 십법의 경계를 보여줌으로써 방편의 의미를 빌려 空觀을 주
장하고 있다. 이것은 유식관과 마찬가지로 실천을 중심으로 설해진 공관이라는 점이 특징이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의 普敬認惡의 관법은 三階敎의 교의와도 관련이 있지만, 특히 천태의 性具사상 혹
은 性惡사상과의 영향관계도 포함하여 화엄 관법적 견지로부터 고찰된 것이다.
또 {공목장}에서는 두 가지 관법, 즉 진리와 끊임없이 일체가 되어 행하는 空觀과 중생이
한 면만을 보고 집착하는 미혹을 물리치고 진리의 전체 모습을 관하는 지혜의 눈을 갖춘 通
觀으로 설명되고 있다. 관법에 대한 지엄의 근본적 태도는 관법에 모든 가치를 인정하여 행
자의 근기에 따라야만 한다고 하고, 一乘所目과 圓敎所攝처럼 구극에서는 一乘圓敎를 지목하
여 그곳으로 향해 나아가는 실천방법으로서 관법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 여겨진다. 그것
이 결국 그에게는 廻向의 行이고, 普賢의 行願이며, 眞理 그것의 法界인 것이다.
觀法에 대한 지엄의 이러한 입장을 살펴보면 중국 화엄종에서 성립된 화엄 관법은 {화엄
경}의 주요 메시지인 보살도의 중국적 변용임이 분명하다. 成佛과 廻向, 즉 普賢의 願行이 결
국 발보리심을 통해 '집이 있는 곳에서 집이 없는 곳으로 나아가는 출가' 수행자들의 궁극적
목표 역시 성불과 회향이듯이, 중국 화엄 觀法 역시 이 목표를 벗어난 수행법이 아닌 것이다.
이것은 결국 發心하는 존재이자 誓願하는 존재인 화엄행자의 수행모습인 것이다.

삼종법계관과 이사무애관이 화엄 관법 형성의 중요한 형식이 되었다는 것은 주지하는 일이
다. 이러한 관법이 두순이나 지엄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이후의 여러 화엄 종사들에 의해 지
속적으로 실행되었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화엄종의 완성자인 법장(643-712)도 두순과 지엄의 관법에 영향을 받으면서 많은 저술을
남겼다. 이 가운데에서 화엄 觀法과 관련이 있는 저술은 {華嚴三昧章} {發菩提心章} {五敎止
觀} {遊心法界記} {妄盡還源觀} {普賢觀行法門} {華藏世界觀} {華嚴經義海百門} 등 여덟 권
이 해당될 것이다. 이들 여러 저서 가운데에서 특히 {화엄삼매장}과 {발보리심장}은 같은 책
이며 {발보리심장}은 뒤에 {법계관문}과 {화엄삼매장}을 참고하여 增廣한 것이었을 것이다고
추측되기도 한다.
{화엄삼매장}은 三昧를 크게 發心·簡敎·顯過·表德(顯德)의 네 항목으로 나누고, 여기에
다시 각각 分科를 하고 있다. 發心에는 {대승기신론}에 따라 三心을 세우고 거기에 제 각기
十心을 설정하여 모두 三十心을 성립시키며, 簡敎에는 十類 衆生이 보여지는 聖敎에 대하여
수행인의 자세가 밝혀진다. 顯過에서는 凡夫 迷人의 과실이 人과 法으로 나누어져 24過失이
열거되며, 表德(顯德)에서는 5門을 열거하여 그 네 번째의 十門止觀과 다섯 번째의 理事圓融
義에 十門의 十義을 설정하여 전부 百義를 열거하고 있다.
{발보리심장}의 色空章에서는 十門의 止觀을 설하고 있으며, 특히 理事圓融義에 대해서는
十門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것은 理事無碍에서 事事無碍로 들어가는 觀門의 과정을 설한 것
인데, 事事無碍의 입장이란 항상 실천적으로는 理事無碍의 內觀에 의해 現成한다고 해야 한
다. 이런 의미에서 理事無碍는 단순히 事事無碍의 전단계라고만 할 수 없다. 오히려 事事無碍
의 입장에 있어서의 理事無碍적 內觀으로서도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五敎止觀}은 초조인 두순의 저작이라고 언급되기도 했고, {遊心法界記}도 이설이 있었으
나 지금은 법장의 저술로 인정되고 있다. 특히 五敎의 조직에 따라 세워진 것이 {유심법계
기}인데 이것은 法是我非門·緣生無性門·事理混融門·言盡理顯門·法界無碍門 의 5門으로 5
敎止觀을 祖述한 것이다. 이 중에 앞의 4문을 모두 입법계의 妙軌로서의 방편으로 짝지운 것
은 {법화경}의 方便門을 열어서 진실의 相을 나타낸다고 하는 權實의 입장이 들어있다면, 다
섯 번째의 法界無碍門은 究竟으로서의 진실로서 華嚴三昧의 개념으로 이해된다.
화엄삼매란 解行의 因에서 명명되었지만, 이를 다시 果海에서 말하면 바로 해인삼매이자
법계무애의 입장이다. 따라서 방편으로서는 解와 行이지만 解에 있어서는 緣起相由와 理性融
通에 의해 설해지고, 行에 있어서는 一과 一切의 卽入無盡을 논하는 것이자, 十玄緣起의 行에
대한 이해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力無力相由에서 緣起를, 生卽不生에서
性起를 해석하여 眞空妙有에 대한 序細의 두 뜻을 이해시키는 것이다. 觀門의 입장에서 終
頓二敎의 입장이 圓敎 속에 융회됨을 설한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圓敎의 입장에서 五敎로 조직한 것이 {妄盡還源觀}이다. 이 저술 역시 법장의 저술 여부로
의심이 되고 있지만, 이 저술의 내용은 體·用·遍·德·止 다섯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첫째의 體는 自性淸淨圓明體로서 절대의 體에서 일어난 用은 海印森羅常住用과 法界圓明自用
의 두 가지 用이다. 둘째의 用은 곧 해인삼매와 화엄삼매로써 해석되어 있다. 셋째의 遍은 一
塵에서 法界에 周遍하여 無盡을 내어 空有를 含容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넷째의 德은 경
계에 의해 行을 열어보이며, 行用은 항상 體로 귀결된다는 점에 다섯째의 止의 입장이 있고
또 止에 의해 觀을 일으키는 바가 六觀이다. 行을 원만하게 이루는 것은 止觀이며, 行의 성립
근거는 境이다. 따라서 境 그 자체가 이미 事事無碍法界의 因果周遍에 의하기 때문에 이 觀
門의 一門에 그대로 들어감이 바로 그대로 法界을 거두어 들이는 것으로 前後始終이 없다.
이것은 전체가 각기 一念으로 佛地를 성취하는 三昧로써 설해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법장
의 관법에 대한 인식은 一體로서의 自性淸淨圓明體 위에다 一眞法界의 사상이 근본으로 두어
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觀法에 대해 긍정적인 시선을 준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관법에 대해 크게 주
목한 화엄 종사들이 거의 없었다. 다만 의상만이 그의 저술에서 관법에 대한 생각의 一端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義湘(625~702)의 여러 저작 중 {華嚴十門看法觀}(1권)은 그의 화엄 觀法에 관한 생각을 살
펴볼 수 있는 것이지만 지금은 현존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의 주요 저서인 {華嚴一乘法界圖}
및 몇몇 발원문을 통해서 관법에 대한 그의 생각을 살펴볼 수밖에 없다.
의상의 화엄사상이 智儼의 교학사상을 누구보다도 강력하게 이어받고 있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특히 의상은 지엄의 실천주의의 영향을 받아 그대로 우리나라의 화엄사상을
구축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의상이 자기의 독창적인 목소리가 없다는 것은 아니
다. 오히려 누구보다도 그의 화엄은 매우 창의적이다.
특히 의상이 智儼의 三敎判설을 계승하기는 하였으나, 표제에 '一乘'이라고 붙인 것처럼 小
乘·三乘에 대해서 一乘을, 漸敎·頓敎에 대해서 圓敎를 중시하고, 지엄의 同別二敎 幷存의
圓敎로부터 別敎一乘 獨尊의 圓敎에 역점을 두고 있다. 바로 이 점이 지엄과는 다른 의상
특유의 교판사상이라고 강조되고 있다.
觀法에 대한 의상의 생각은 앞에서 언급한대로 {화엄일승법계도}를 중심으로 살펴볼 수밖
에 없다. 의상의 이 저술에 나타난 화엄 관법의 형식은 緣起實相陀羅尼法으로 요약된다. 이것
은 다시 緣起觀과 實相觀과 陀羅尼觀으로 3分 된다. 의상이 가지고 있었던 화엄 관법에 대한
생각은 이들 세 가지가 총괄되어 緣起實相陀羅尼라는 一體性을 지닐 때 비로소 선명하게 된
다.
그런데 의상이 지엄의 다라니 해석 가운데에서 呪術로서 취급하고 있는 것의 영향을 받아
주술적 眞言다라니법으로서 수행자의 실천수행과 결부시키려는 의도로 {화엄일승법계도} 가
운데에서 다라니법을 강조한 것은 아닐까라고 여기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연기실상다라니법을 관하려고 하려면 數十錢法을 먼저 깨달아야만 한다는 의상의
文句가 나타나고 있는 점에서 의상이 말하고자 하는 다라니는 주술적 입장으로만 한정할 수
는 없을 것이다. 다라니는 오히려 연기법을 나타내기 위한 가장 적절한 표현이었을 것이다.
연기실상다라니는 먼저 연기법을 통해 실상을 보고 그것을 다라니법으로 총괄하는 관법이
다. 의상은 {화엄일승법계도} 속에서 12인연의 관찰로부터 이러한 수행을 시작한다. 의상은
{화엄일승법계도}를 지을 즈음에 {화엄경}과 {십지경론}을 전거로 했다고 말하고 있다. 따
라서 의상의 12인연관이 {화엄경}과 그 [十地品]의 주석인 {十地經論}의 12因緣觀에 유래된
것이다는 것은 충분히 예측할 것이다.
의상의 연기관은 {화엄경}의 12인연의 연기 관찰에 그 근원을 일으키고 그 12因緣의 緣生
法을 화엄의 '無障碍法界'로서 파악되는 것에 의해 연기실상다라니법은 화엄연기관으로서 의
미지워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연의 연기관으로부터 시작된 관법은 實相다라니법을
파악하는 것에 역점이 두어져 그것은 '法性'으로서 상징되고 있으며, 연기법의 구극적 관찰에
의해 법성은 파악되어 법성의 다함없는 德用에 눈뜨는 것에 의해 舊來成佛論이 대두되고 있
다.
'本來'라는 말이 인식의 유무를 초월한 문자 그대로 본래성을 의미하는 것에 대하여, '舊來'
란 본래성에의 인식적 회귀를 포함한다. 그래서 수행의 得益에 舊來라는 말을 사용한 것도
그러한 재발견의 감개의 뜻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원래 그러한'이라고 하는 본래
성의 자각인 것이다. 義湘은 舊來成佛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피력하고 있다.

묻는다: 묶여있는 有情은 아직 다 끊지 못하였으며, 보살은 아직 복덕을 이루지 못하였다. 어떠한 뜻
으로 舊來成佛이라 하는가?
답한다: 보살이 아직 끊지 못했으므로 성불이라 이름하지 못하지만, 보살이 다 끊고 福과 智가 究竟
을 이루고 여기에서 이미 벗어난 것을 舊來成佛이라 한다.

舊來成佛에 대한 답변에 이어 의상은 '무엇이 끊음인가'라는 물음에 {地論}을 인용하여 '허
공과 같다'고 하면서 '現斷已去를 이름하여 舊來斷이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눈앞에서 끊고나
서 이미 벗어난 상태를 이름하여 끊음이라고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의상의 舊來成佛은 지엄의 一念成佛에 바탕하여 있으면서도 舊來에 성불한 佛이 불변
부동의 모습이 아니라 일체 중생의 근기에 따라 생생약동 작용하는 一面을 제시하고 있는 점
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므로 의상의 이러한 생각은 보다 具像性이 강한 法藏에로의 移行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화엄 관법에 대한 의상이 생각은 {화엄일승법계도}가 '法性圓融無二相'으로부터 시
작되어 '舊來不動名爲佛'로 끝나는 것처럼 圓環的인 구성 위에 보여지며 그 원환적인 구성의
근간이 되는 것은 수행자의 연기관의 通觀일 것이다.
의상이 중점을 둔 法性을 뒷바침하는 緣起觀이야말로 나중의 華嚴法界緣起觀에로 큰 발전
을 가져오게 되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되어지는 것이다. 法藏에 의해 화엄법계연기는 확립되
었다고 말해지고 있지만, {五敎章}의 十玄門을 설한 가운데 세 번째의 諸法相卽自在門에서
'圓融法界無盡緣起, 無一一切幷不成故, 此但論法性家實德故'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法藏이 연
기법을 설명하는 것에 數十錢說을 사용하고 있는 것과 동시에 의상의 法性에 기초한 法界緣
起陀羅尼法의 영향을 받았던 것이라고 생각되어진다.
따라서 화엄 관법에 대한 의상의 생각은 연기실상다라법으로 요약되며, 이것이 六相의 법,
數十錢의 비유, 十玄門의 一乘法 등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연기관을 깨닫는 방편
인 것이며 그것은 동시에 性起로 나아가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이어서 십중유식관과 삼성원
융관에 대해 살펴보자.


2) 十重唯識觀과 三聖圓融觀

십중유식은 말 그대로 열 가지로 겹치는 유식의 견해를 말한다. 이것이 처음 발상된 것은
慈恩 窺基(632-682){大乘法苑義林章}의 五重唯識에 의해서이지만 법장은 法相敎學에서의 유
식관에 대한 성찰방법을 원용하여 허망한 三界를 구성하는 唯心의 중층성을 밝히는데 주력하
고 있다. 법장은 '三界虛妄 但是一心'에 대한 해석으로서 十重唯識을 제시하였다. 이 십중유
식에서 그의 교판, 즉 5교 10종판을 수정한 4교판과 더불어 唯識과 대비한 唯心의 견해를 엿
볼 수 있다.
그러면 법장이 정리 대비한 五重唯識과 十重唯識과 五敎를 살펴보자.
+--------+
1. 遣虛存實識++-------+-相見俱存唯識-----------大乘始敎
2. 捨濫留純識-++--------攝相歸見唯識-----------大乘始敎
3. 攝末歸本識--++-------攝數歸王唯識-----------大乘始敎
4. 隱劣顯勝識---+ 以末歸本唯識-----------大乘 終敎 頓敎
5. 遣相證性識-----------攝相歸性唯識-----------大乘 終敎 頓敎
轉眞成事唯識-----------大乘 終敎 頓敎
理事俱融唯識-----------大乘 終敎 頓敎
融事相入唯識-----------大乘 圓敎中別敎
全事相卽唯識-----------大乘 圓敎中別敎
帝網無碍唯識-----------大乘 圓敎中別敎



법장이 십중유식을 성립시킨 의도 가운데에는 확실히 자은 규기의 법상유식에 대한 폄하
의식이 있었던 것은 감출 수 없는 것이다. 위의 도표에 따르면 처음의 3重은 대승(시)초교
에, 가운데의 4重은 대승 종교와 돈교에, 마지막의 3重은 圓敎 안에서의 別敎에 짝지워지고
있다.
법장은 처음의 3重에서 법상유식의 교의를 기본으로 한 것은 법상유식을 가장 폄하하고자
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반면에 마지막의 3重은 가장 높이고자 한 교의이다. 법장은 계속해
서 이 십중을 다시 3分 하여 앞의 4重은 阿賴耶識緣起로, 가운데의 3중은 如來藏緣起로, 마지
막의 3중은 華嚴法界緣起로 얼개를 세우고 있다.
법장의 십중유식의 구상은 현상의 모습으로부터 여래의 성품에로 심화되어 가며, 거기에서
전환하여 '事'라고 하는 새로운 현상을 만들어 낸다. 하여 相과 事란 동일한 현상세계를 표현
하면서도 그 내용에 있어서는 커다란 의미를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여섯 번째의 '轉眞成事'에 의해 事의 출현은 후의 화엄법계연기의 사사무애법계의 기초를
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법장의 십중유식의 구조는 현상과 본체와의 제한이 없는 왕복작
용에 의해 구성되며 그것은 법장교학의 '緣起相由'의 중시와도 연관되는 연기관은 아닌가 생
각된다.
이처럼 법장의 십중유식관은 위의 도표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그의 5교 10종판이 {탐
현기} 이후로 4종판으로 재정비되면서 법상유식의 체계를 딛고 여래장교의와 화엄교의의 우
월함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에서 전개된 관법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십중유식관은 허망한 삼계를 구성하는 유심의 중층성을 밝히려는 의도에서 설정된
관법이며, 이러한 십중유식관은 慧苑이나 宗密 등에 의해 일부 계승되지만 화엄 관법이라는
큰 틀에서 보면 매우 상대적 표현이지만, 주요한 관법으로는 계승되었다고는 할 수 없는 것
이다. 계속해서 삼성원융관에 대해 살펴보자.

三聖圓融觀은 화엄의 傍系로 여겨지는 李通玄(635~730) 長者에 의해 시작된 화엄 관법이다.
거사의 신분으로 화엄의 연구와 실천행에 투신한 이통현은 독특한 화엄교학을 펼친 인물이
다. 그는 {新華嚴經論}과 {決疑論} 등을 저술하였다. 이 두 가지의 저술 속에서 화엄 관법의
하나인 三聖圓融觀이 보인다. 삼성원융관이란 毘盧遮那佛과 普賢보살과 文殊보살의 3聖 사이
에 각각 관계를 설정하여 三聖을 바라보는 관법이다. 이러한 삼성원융관을 觀門으로서 조직
한 것은 이통현 장자이다. 이 삼성원융관은 화엄 4조인 澄觀(739~839)에 의해 보다 구체화된
다.
이 삼성사상은 구조적으로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毘盧遮那佛에게는 독
립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文殊와 普賢에게만 개별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이 二聖의 원융
무이함을 가리켜 毘盧遮那라고 하는 三聖사상과, 둘째로 毘盧遮那·文殊·普賢의 三聖에게
제각각으로 개별의 의미를 주어 삼성이 평등한 관계에 서서 원융하다고 하는 원융사상이 있
다.
{신화엄경론}에 의하면 그는 비로자나불을 佛果에, 文殊를 法身本智·理·法寶에, 普賢을
行身差別智·行·僧寶에 해당시켜 해석하고 있다. 그래서 理와 行의 無碍圓融의 구극으로서
의 毘盧遮那法身의 一眞法界라고 의미를 붙이고 있다.
이통현은 三聖相對하면 여래는 果요, 문수와 보현은 因이다. 果가 言相을 일으키므로 설사
二因을 설하더라도 二因을 깨달을 때 果海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통현이 말하는 삼성원
융은 결국 문수의 智慧와 보현의 萬行이 시종일관하여 일체가 되어 나타나는 것을 毘盧遮那
의 一眞法界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통현의 원융사상에 대하여 理行無碍, 因果무애, 體用무
애, 理智무애, 三寶무애 등의 갖가지 삼성원융사상이 전개되지만 그 뿌리가 되는 것은 문수의
理와 보현의 行으로서 法身의 根本智와 差別智의 無碍圓融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
이다.
보현의 智가 해당될 때에 그것은 언제나 法身根本智에 대한 差別智로서의 萬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理와 行 사이가 양방의 지혜에 의해 결부된 것이다. 그 결과 無所住의
智야말로 毘盧遮那의 佛境界로서 의미지워지며 화엄법계에 있어서 삼성원융사상의 전체상이
성립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통현의 三聖圓融에 대한 입장은 三聖이 毘盧遮那의 一眞法界의 다른 모습이며,
문수의 智慧와 보현의 萬行이 비로자나와 혼융되어 나타나는 것이 삼성인 것이다. 이 점에서
바로 비로자나와 문수와 보현의 삼성은 각기 원융과 조화의 모습에 따라 다양하게 投映되고
表出되는 것이다.
이렇게 이통현의 관법에서는 {화엄경}에서 보이는 보살도가 毘盧遮那佛의 本願과 혼융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문수와 보현 二聖이 융합하면 곧 因이 차서 비로자나의
果海에 沒入하며, 만일 이 觀과 상응하면 觸目對境하여 항상 三聖 및 十方의 제보살을 보는
것이라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징관의 삼성원융관은 이통현에 이어 지속되었지만 징관 자신은 이통현과의 관련성을 인정
하지 않는 것 같다. 왜냐하면 이통현의 삼성원융관과 징관의 삼성원융관의 차별성에서 그러
하다는 것이다. 즉 相對와 相融에 대한 생각의 차이가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징관은 삼성을
우선 '相對'와 '相融'에 의해 나누며 상대 속에서 여래를 果, 문수와 보현을 因으로 하여 因果
에 의해 상대시켜 여래의 果는 果分不可說로서 취급하지 않는다.
그래서 二聖의 因에 대해서 能信과 所信, 解와 行, 理와 智의 세 의미에 의해 상대시키고
있다. 그 가운데에서의 能信 所信과 解行의 상대는 이통현에게는 보여지지 않았던 것이다. 징
관이 信과 解行을 중시한 것은 징관의 三聖사상이 문수와 보현의 그것 자체의 본성을 밝히는
것에 중점이 있는 것은 아니었고, 문수의 智와 보현의 行을 실천해 가야할 것으로 하여 행자
의 측면을 중시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생각된다. 그것은 普賢 三事로서 理와 行과 證이라
고 하는, 證의 사항이 다루어지고 있는 것에서도 그러한 것이다.
澄觀의 삼성원융사상은 宗密에게 가장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것은 종밀이 {행원품소초}
가운데에서 징관의 {행원품소}의 歸敬偈의 주석 끝에 그 귀경의 대상으로서 삼보를 논하면서
보현과 문수를 僧寶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에서 잘 나타난다. 거기서 징관의 {삼성원융
관}의 거의 전문을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에서 특히 지적하고 싶은 것은 징관이
{삼성원융관} 속에서 '一心法界'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을 종밀은 '一眞法界'라고 고치고 있는
것이다. 종밀은 기본적으로 一心과 一眞을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의 표현으로서 보아
야 할까 혹은 종밀 스스로의 一眞法界論으로 보아야 할까의 문제는 있다.
하여튼 일심법계가 일진법계로 계승되고 전환되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는 점에서 삼성
원융관은 이통현 장자가 그 모티프를 제공했다고 한다면 징관은 삼성원융관을 보편화시킨 인
물이며, 이것을 계승 발전시킨 인물이 圭峯 宗密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화엄 관법은 일체법을 관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듯이, 인간(6근)과 세계(6경)를 포괄하는 일
체를 대상화하여 緣起와 性起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은 현실적 인간들의 삶의 총
화인 일체를 연기라는 앵글로 인식하는 행위(6식)를 매개로 하여 일체법을 觀하는 것이다.
따라서 화엄의 관법은 자기를 넘어서는 보살도의 구현이라는 점에서 매우 보편적이라 할
수 있는 인도적 사유방식이 중국으로 건너와서는 자기 안에서 성취를 구하는 매우 특수한 형
태로 전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보살도를 중심으로 하는 보편적 실천수행이라는 면
만이 아니라 철학적인 면, 즉 空有의 논변이라고 하는 인도적 사유방식이 理事라고 하는 중
국적 사유방식으로 전환한 것에서도 그 특성이 잘 나타나고 있다. 관법은 일체법을 관찰 조
명하는 것이지만 현실적 인간인 중생들의 삶의 총화인 일체가 연기적 시선을 매개해서 구성
된다는 점에서 관법 역시 화엄 수행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다.
화엄 관법은 三種法界觀을 시작으로 하여 화엄의 여러 종사들의 다양한 개성에 의해 이사
무애관, 십중유식관, 삼성원융관 등의 다양한 관법으로 계승되거나 전환되었지만, 그들 여러
관법들은 모두 {화엄경}이 보여주는 보살도의 구현, 즉 보현의 願行이 어떻게 중국적으로 전
환되었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화엄 수행관의 연장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화엄의 수행은 보살도의 전개를 통한 인간과 세계 이해 뿐만이 아니라, 위에서 언
급한 화엄의 관법, 그리고 다음 절에서 다룰 화엄선까지 포괄하는 매우 광범위한 수행 내용
과 방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다음 절에서는 화엄과 선이 만나 실천수행으로 승화된 화엄선에 대해 살펴볼 것이
다.


3. 華嚴禪
華嚴과 禪은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화엄에 있어서의 禪의 의미나 내용, 그리고 禪에 있
어서의 화엄의 의미나 내용은 일본 현대불교학자에 의해 이미 한 차례 다뤄진 적이 있다.
각 사상에 있어서의 상호 영향과 수용이라는 것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어느 사상이 다른
어느 사상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쳤으며, 또 어떤 사상이 다른 어느 사상을 어떻게 수용했는
가를 연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 두 사상간의 동일성과 차별성의 경계
를 긋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화엄과 선뿐만 아니라 화엄과 정토, 선과 정토,
천태와 선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중국 화엄이 외형적으로는 교학적인 모습으로 구현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禪은 실천
적인 모습을 머금고 있다. 화엄 조사들이나 선사들은 이 두 가지를 조화시키려고 어떠한 회
통의 길을 모색하였다. 그 모색의 과정에서 전개된 것이 화엄과 선의 만남인 華嚴禪이다.
華嚴禪이란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이는 현대 일본 불교학자인 吉津宜英이다. 물론 이에
앞서 화엄과 선과의 통로를 모색한 학자로는 高峯了州가 있다. 그러나 고봉료주는 이 두
사상의 만남의 통로를 모색했을 뿐 '華嚴禪'이라는 용어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華嚴禪이란 중국불교에서 성립된 두 종파인 화엄과 선종에 걸치는 연구 영역이며, 화엄과
선이라는 테마에서 총괄되는 여러 문제들 중의 하나의 結節点이다. 그런데 화엄선은 징관
의 화엄과 선의 융합에의 노력을 통해 비로소 禪嚴회통에로의 길이 모색되기 시작하였다. 이
후 이러한 길은 宗密에 의해 보다 치밀하게 체계화되었다.
宗密에 의해 형성된 화엄선은 그 사상성 때문에 어느 경우에서는 화엄과 선이라는 각각의
주제를 넘어서 불교의 여러 종파와 유교사상 등과도 관련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종밀의 가풍, 즉 유교와 불교와 도교를 회통하려는 의지에서도 나타난다.
또 화엄선이 화엄과 禪의 융합을 넘어 일치라는 점에 있듯이, 고려시대 보조 지눌의 禪嚴
一致論, 즉 禪敎一致論 역시 화엄과 선의 일치를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