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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선재의 깨달음과 수행 - 해주 스님/동국대학교 불교학과 교수

화엄행 2009. 3. 27. 20:15

2006/01/15 오후 5:06

 

  내가 본 선재의 

깨달음과 수행
 

해주 스님/동국대학교 불교학과 교수

 

승가대학에서 경을 배우거나 배운 학인스님들에게 수행의 모델이 되는 분으로 화엄경의 선재동자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수행의 길목에서 볼 때 더욱 그러하다. 선재는 중생계가 끝날 때까지 보현원행을 계속한다는 원을 세웠기에 지금도 구법행은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선재는 그가 사는 복성에서도 가장 복이 많았다. 복성의 동쪽 사라 숲에 있는 탑 아래에서 문수보살이 부처님 법에 대하여 설하시는 법문을 듣고 선재는 당시 자신의 모습이 부처님과 너무나 다른 점을 발견하고 반성을 하였다.

선재는 자신이 어리석고 교만하며 탐내고 성내는 마음이 많아서 생사고통의 성에 갇혀 있음을 깨닫고 해탈의 길인 보살도를 걷기로 결심하였다. 즉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을 얻어 부처님처럼 되고자 하는 발심을 하여 보살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지혜가 구족해야 하며, 지혜를 구족하려면 선지식을 찾아가 법문을 들어야 한다는 문수보살의 가르침대로 덕운 비구 선지식을 만나러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그리고 계속해서 보현보살에 이르기까지 53선지식을 만나 보살도를 묻고 해탈법문을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보현보살에게서 보현행원을 일으키고 법계에 드는 깨달음의 여정이 일단 끝나고 있다. 선재는 보현보살과 평등하고 부처님과 평등하였다.
그러나 법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할 때까지 끝없는 원행으로 부처님의 공덕세계를 구현해 나가리라는 화엄행자가 된 것이다.

 

선재가 들어간 화엄법계는 모든 존재가 상즉상입하여 원융하고 무애자재하며 청정하고 평등한 세계이다. 여래성이 그대로 드러난 여래출현의 세계이다. 여래성은 여래마음이고 여래지혜이며 보리심이고 중생들의 본래마음이다.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낸 것(一切唯心造)이고, 생각한 대로 나타난다(如是如是 思惟分別 如是如是 無量顯現).

선재의 입법계는 대비심·대자심·지혜심 등의 보리심을 내어 일체중생을 구제하는 것이며, 선재의 본래 마음인 여래의 지혜로 본래 모습을 되찾는 것이며, 여래가인 법성가에 되돌아가는 것이다. 선재는 문수보살로부터 보현보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의 선지식을 두루 역참하여 입법계하는 일생성불의 구법여정을 보이고 있으나, 실은 선지식을 만날 때마다 깨달음을 얻어 해탈하고 있다.

문수보살에게서 신심을 일으켜 보살도를 구했을 때, 덕운 비구에게서 염불문을 성취했을 때, 관세음보살을 만나 대비행문을 얻었을 때도 해탈하였으며, 내지 사자빈신 비구니의 동산과 미륵보살의 누각에서 법문을 들었을 때도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면서도 다시 문수보살을 만나고 보현보살을 만났다.
선지식과 선재가 둘이 아니며, 佛果因行同時이다. 새록새록 해탈문에 들어가 입법계하지만 본래 법계 아닌 곳이 없다. 신신작불하면서도 구래성불이며, 여래출현이면서 불국장엄의 一乘菩薩行이다.

수행차제가 분명하면서도 원융무애하다. 선재의 한 몸으로 모든 선지식을 두루 역참하니 일체 계위가 하나의 계위이며 일위가 일체위이다. 하나를 이룰 때 일체가 다 이루어지며 하나의 바라밀을 닦을 때 일체바라밀이 원만해진다.
선지식의 해탈경계를 모두 다 펼치고 모든 바라밀을 온전히 다 닦음은 중중무진하게 불세계를 장엄하는 것이다. 선재보살의 길은 가도 가도 본래자리이고 이르고 이르러도 출발한 자리이면서 온 법계에 두루 통한다. 닦되 닦음이 없고 닦음이 없이 닦는 것이다.

모든 부처님도 그림자 같고 부처님의 설법이 메아리 같으며 보살행이 꿈과 같은 줄 관하였으므로 환과 같은 지혜·자비·원력으로 널리 회향하는 것이다. 일체법의 성품이 공하여 모양 없는 줄 철저히 깨달아서, 일체중생이 만족하고 위없는 보리 열반을 얻을 때까지 바라밀행을 그만두지 않는 것이다.

선재의 身口意는 수행의 도구이자 장엄구이며 그 삼업은 自利利他行이자 佛國莊嚴의 華嚴인 것이다.

늘상 사용하던 마음이지만 뜻대로 되지 않던 마음을 찾아 출가한 후에도 마음 공부하는 특별도량을 갈구하다가, 강원에서 화엄경의 ‘일체유심조’ 교설을 접하고는 마음에 대해 교학적으로 좀 더 공부하고자 대학과 대학원에 들어갔다.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면서 경학을 하는 것도 팔만사천 방편 해탈문의 하나임을 확신하고는 그대로 학교에 남아 화엄학을 강의하게 되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시비분별로 편안치 않던 마음을, 어느 날 문득 분명히 보아 한바탕 웃어버리고(小盜大盜是妄想 是是非非皆狗角 覺笑染淨分別夢 心佛光明鸚十方), 생로병사의 고통도 꿈인 줄 알아차린 듯 했으나(如來出現是無來 如來涅槃是無去 我之生死亦如然 須彌山海常放光), 선재보살과 같은 행원력은 도저히 따르기 어렵다.

수행의 길목에서 선재의 구법 원력을 다시금 되새겨보며, 生死解覺解인 줄 깨닫게 해준 무진인연에 감사드리고 예경 올린다.


 

나무 석가모니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