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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치의 불탑 / 이주형/서울대학교고고미술사학과 교수 / <東鶴 통권95호>

화엄행 2009. 3. 27. 19:53

2006/01/03 오 전 12:57

산치의 불탑 / 이주형/서울대학교고고미술사학과 교수 / <東鶴 통권95호>

 

     불교미술산책
http://www.donghaksa.or.kr/new/donghakji/paper/95/13.htm

 

 

산치의 불탑
 

이주형/서울대학교고교미술사학과 교수

산치대탑

 

인도 불교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한 불탑은 산치Sanchi에 있는 것이다.

이 밖에도 유서가 깊거나 규모가 큰 불탑이 많지만, 산치의 불탑이 특별히 유명한 것은 이 탑이 원래의 모습을 온전히 갖추고 있고 탑의 문에 새겨진 아름다운 조각이 마음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산치는 중인도 마디야프라데쉬 주의 주도인 보팔에서 북쪽으로 46킬로미터 되는 곳에 위치한다. 델리에서 아침 6시발 샤탑디 익스프레스 열차를 타면 오후 2시경 보팔에 도착하고 여기서 차로 1시간 남짓이면 산치에 닿으니, 인도의 불교유적치고는 비교적 쉽게 찾아갈 수 있는 곳이다. 이 곳은 급행열차도 서지 않는 작은 마을에 불과하다. 이곳에 외지인들과 이방인들의 발길이 미치는 것은 순전히 마을의 남동쪽에 있는 커다란 불교사원지 때문이다.

 

         

                                                                                                 산치 사원의 복원도 (Percy Broun)            

이 사원지는 남북으로 1킬로미터쯤 되는 길쭉하고 나지막한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다. 언덕 위의 중심 구역은 남북으로 380미터, 동서로 200미터의 크기이다. 그 안에 많은 스투파와 건물지가 흩어져 있는데, 그 중앙에 세워진 장중한 스투파가 참배객을 맞는다.

이 사원의 스투파(=탑) 가운데 가장 크기 때문에 ‘제1탑’ 혹은 ‘대탑(Great Stupa)’이라 불리는 이 스투파는 원래 기원전 3세기에 아쇼카 왕이 세운 것이다. 대탑의 남쪽 문 옆에 아쇼카가 세운 석주의 아랫부분이 남아 있어 그 사실을 알려준다. 이 석주 위에는 부처님의 첫 설법지인 사르나트에 아쇼카가 세웠던 석주처럼 네 마리의 사자가 등을 맞댄 주두柱頭가 올려져 있었다. 후대에 석주의 밑동이 부러지면서 떨어져 폐허 속에 뒹굴고 있던 이 주두는 지금 아래쪽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아쇼카가 세운 스투파는 벽돌로 축조되었고 지름이 18미터에 불과했다. 현재의 스투파 내부에 흔적이 남아있는 아쇼카 스투파는 발굴 결과 기원전 2세기쯤 파괴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기원전 185년 마우리아의 왕위를 찬탈하여 슝가 왕조를 세운 푸시야미트라 왕은 힌두교를 신봉하며 불교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는데, 아마 푸시야미트라 때 아쇼카 스투파가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다행히도 그로부터 몇 십 년 뒤 이 스투파는 다시 재건되었다. 훼손된 아쇼카 스투파 위에 돌을 덧쌓아 스투파를 확장한 것이다. 오래된 스투파가 훼손되거나 허물어질 경우 그 스투파를 그대로 두고 그 위를 덮어 더 큰 규모로 증축하는 것은 인도 불교도들의 관습이었다. 사르나트의 대탑도 이 같은 방식으로 증축된 것이다.

이때 산치 대탑은 지름이 37미터로 늘어나고 높이도 17미터에 달하게 되었다. 바깥쪽에 돌을 쌓아 스투파의 외벽을 새로 축조하고 그 안쪽에 돌을 쌓아 넣었다. 외벽에 콘크리트를 바르고 그 위에 다시 회를 발랐다. 스투파의 아래쪽에는 커다란 원형 기단을 만들고 남쪽으로 계단을 내어, 기단 위에 올라가 탑 주위를 돌며 참배할 수 있도록 했다. 기단 위쪽의 요도繞道(탑돌이를 하는 길)와 아래쪽의 요도 둘레에는 석조 울타리를 세웠다. 이 석조 울타리는 마치 목조 울타리처럼 가구架構되어 있어서 원래 나무로 만들던 울타리를 돌로 바꾸어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로부터 한 세기쯤 뒤에는 스투파의 사방에 돌로 된 문이 세워졌다. 이 문들도 목조 문을 만드는 방식처럼 석재가 조합되어 있어서, 이에 앞서 목조 문을 만드는 오랜 관습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렇게 해서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 전반 사이에 우리가 보는 스투파가 모양을 갖추게 되었다.

이슬람의 침입(13세기) 이후 오랫동안 폐허로 버려져 있던 산치 사원지를 19세기에 영국인들이 처음 발굴했을 때, 대탑 안에서는 사리(유골)가 발견되지 않았다. 아마도 원래의 아쇼카 스투파가 파괴될 때 그 안에 있던 부처님의 사리마저 유실된 것으로 추측된다. 기원전 2~1세기에 스투파를 재건할 때 아쇼카 스투파 안의 사리를 확인하지 않고 그냥 증축하지 않았나 짐작할 뿐이다.

아무튼 이 스투파 안에 원래 석가모니 부처님의 사리가 들어 있었던 것은 틀림없다. 산치에는 대탑 외에도 많은 스투파가 있는데, 대탑의 인근에는 대탑의 절반 정도 크기이지만 모양이 똑같은 스투파(제3탑)가 있다. 제3탑 안에서는 돌로 된 사리기가 두 개 나왔는데, 거기에 “사리불의 것”과 “목건련의 것”이라는 명문이 또렷이 새겨져 있었다. 잘 알려진 대로 사리불과 목건련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으뜸가는 두 제자로서 ‘지혜제일’과 ‘신통제일’이라 불린 분들이다. 제3탑에 이렇게 사리불과 목건련의 사리를 모신 것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대탑에는 사리불과 목건련의 스승인 석가모니 부처님의 사리를 모셨을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산치 사원 중심구역의 아래쪽 등성이에는 제3탑과 비슷한 크기의 스투파가 한 기 있다. 제2탑이라 불리는 이 스투파 안에서는 네모난 돌 상자가 나왔고, 그 안에 다시 납작한 원형의 사리기가 네 개 들어 있었다. 그 사리기들에는 “헤마바타의 존사尊師 카사파고타”라는 명문을 필두로 모두 열 분의 스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헤마바타Hemavata는 문헌에 하이마바타Haimavata라 기록된 부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인도 불교사에서 부처님이 돌아가신 지 100년 뒤에 승단이 상좌부와 대중부라는 두 부파로 분열하고, 그 뒤에도 부파가 계속 나뉘어 기원전후에 18개 또는 20개의 부파가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하이마바타는 그 중의 한 부파로 한역 문헌에서는 설산부雪山部라 불린 것이다. 이 사리기의 명문을 통해 산치 제2탑에는 설산부의 10대 존사의 사리가 봉안되었음을 알 수 있고, 산치 사원도 설산부의 승가에 소속되었던 것을 알게 된다. 산치 근방의 소나리 사원지에서도 헤마바타의 명문의 발견된 것으로 보아 산치 일대는 설산부의 거점이었던 듯하다.

흔히 인도의 스투파는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불탑으로 알고 있으나, 실상 스투파에는 부처님 외에 여러 성인들의 사리를 봉안할 수 있었다. 아함 경전에서는 ① 부처님, ② 성문, ③ 벽지불, ④ 전륜성왕의 네 부류를 위해 스투파를 세울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 부처님은 석가모니 외에 다른 많은 부처님들을 포함한다.

인도에서는 실제로 가섭迦葉, 구나함모니拘那含牟尼, 구루진拘樓秦 등 과거의 부처님들을 위해 세운 스투파가 존재했음이 알려져 있다. 성문은 물론 산치 제2탑에 사리가 봉안된 사리불이나 목건련 같은 부처님의 제자를 가리키고, 벽지불은 부처님을 뵙지 않고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던 성인들을 말한다. 전륜성왕은 무기이자 보배인 수레바퀴를 굴리며 세계를 지배하는 제왕을 뜻한다. 결국 인도에서 스투파는 부처님 외에 불제자들과 후대의 고승들을 위해서도 만들어졌고, 때로는 유력한 재가불자를 위해 만든 스투파도 있었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후대의 기록이지만, 5세기 초에 인도에 갔던 중국의 법현法顯 스님은 각종 스투파에 공양하는 불교도들의 관습을 전하고 있다. 우선 사리불과 목건련, 대가섭, 아난 등 불제자의 탑이 언급되어 있다. 이 가운데 특히 아난 존자의 탑은 비구니 스님들의 출가를 위해 힘써 주었던 인연 때문에 주로 비구니 스님들이 공양했다고 한다. 이 밖에 아비담阿毘曇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아비담의 탑을, 대승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반야바라밀의 탑과 문수사리의 탑, 관세음의 탑을 경배했다고 한다. 아비담의 탑과 반야바라밀의 탑은 각각 아비달마 논서와 반야경전을 봉안한 스투파라고 생각된다. 문수사리의 탑과 관세음의 탑은 각각 두 보살을 섬기는 대승불자들의 스투파였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했던 산치 대탑이 특히 유명한 것은 여기 새겨진 조각 때문이라고 했다. 산치 대탑의 사방에 세워진 네 개의 문에는 기둥과 상인방上引枋(기둥과 기둥 사이를 가로로 연결하는 부재)에 빼곡히 부조가 새겨져 있다. 돌에 새긴 조각치고는 매우 세밀하고 빈틈없이 새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당시 이 지역에서 석조 조각에 익숙한 장인이 많지 않아, 돌 이외의 공예에 종사하던 사람들도 동원되어 작업을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상아세공인들이 조각을 하고 봉헌도 했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그래서인지 돌로 된 면 가득히 오밀조밀한 형상들이 부조로 새겨졌다. 이 부조들이 빛을 받으면 도드라진 여러 형상들이 그 틈 사이로 스며든 그림자들 위로 마치 만화경같이 화려한 모습을 드러낸다.

문의 각 부분에는 다양한 주제가 새겨졌다. 그 중 남문과 동문의 상인방에는 스투파와 보리수를 공양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 스투파와 보리수는 모두 일곱 개로, 비바시毘婆尸 부처님부터 석가모니 부처님까지 과거 부처님 일곱 분을 나타낸 것이다. 인도에서 과거7불에 대한 숭배가 일찍부터 성행했던 것은 산치뿐 아니라 여러 곳의 불교미술 유물을 통해 볼 수 있다.

산치 부조 가운데 가장 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과 마지막 생의 이야기들을 부조로 새긴 것이다.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를 나타낸 것을 본생도本生圖라 하고, 마지막 생의 이야기를 나타낸 것을 불전도佛傳圖라 한다. 본생도와 불전도는 초기 불교미술에서 가장 애호된 주제이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 회에서 상세히 이야기하기로 하겠다.

이 밖에 쿠시나가라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놓고 다툼을 벌인 왕들의 이야기, 아쇼카 왕이 부처님의 성적聖跡을 순례하는 이야기 등도 등장한다. 이런 이야기들이 어우러져 탑 문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다. 옛적의 참배자들은 이 사원에서 참배자들을 안내하는 임무를 맡은 스님의 설명을 들으며 즐거워하고, 부처님을 추억하며 그 가르침을 되새겼을 것이다. 

산치는 요즘 불자들이 찾는 인도의 불적 가운데 8대 불교성지에 못지않게 인상적인 곳이다. 8대 불교성지는 부처님과의 인연 때문에 나름대로 특별한 의미가 있으나, 눈으로 잘 알아볼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아니면 보드가야처럼 티베트의 불자들로 뒤덮여 하루가 다르게 더 번잡한 모습으로 변해 가고 있다.

산치에는 인도의 다른 곳에서 쉽사리 느낄 수 없는 평화로움이 있고, 아름다운 불탑이 예스러운 모습으로 온전히 남아 있다. 동쪽의 절터에 홀로 앉아 충만한 모습의 대탑을 내려다보며 그 옆으로 석양을 바라보면 이천 년 전의 그 시간이 그리 멀지 않은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