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쇼카 왕과 8만 4천의 불탑 / 이주형/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 東鶴 통권94>
불교미술 산책 | |||||||||
아쇼카 왕과 8만 4천의 불탑 이주형/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아쇼카Asoka라는 이름은 근심·걱정이 없다는 뜻이다. 한역 불전에서는 이것을 음으로 옮겨 ‘아육阿育’이라 하기도 하고, 뜻으로 옮겨 ‘무우無憂’라 하기도 했다. 『아육왕전』에 따르면, 아쇼카 왕은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뒤 100년쯤 뒤에 즉위했다고 한다. 그는 36년 내지 37년간 왕위에 있었다고 하는데, 같은 시기에 활동한 서방의 왕들의 연대와 비교해 볼 때 기원전 268년쯤 즉위했음을 알 수 있다. 아쇼카 왕은 즉위 후 7년째 되는 해에 불법에 귀의했으나, 처음에는 그다지 신심이 깊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듬해 칼링가(동인도의 현재 오릿사 지방)를 정벌하면서 수십만 명이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고 포로가 되는 참상을 보고 깊이 뉘우치는 바가 있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폭력에 의한 승리가 아니라 다르마dharma에 의한 승리를 다짐하고 다르마의 이상을 널리 알리는 데 힘을 다했다. ‘다르마’는 불자들이 삼보의 하나로 섬기는 ‘달마達摩’ 또는 ‘법法’과 같은 말이다. 그런데 인도에서 이 말은 불교적 맥락에만 국한되지 않는 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아쇼카가 쓴 ‘다르마’라는 말도 자연과 인간의 이법理法이라는 포괄적인 뜻이었던 듯하다. 그러나 불교에 깊이 감화되었던 아쇼카가 쓴 이 말에는 불교의 정법이라는 의미가 깊이 반영되어 있었다고 보는 것이 불교학자들의 중론이다. 다르마에 의한 승리를 표방한 아쇼카는 정법에 따른 자비와 보시의 삶을 권하는 칙령(흔히 ‘아쇼카 법칙法勅’이라 한다)을 영토의 곳곳에, 커다란 바위나 돌기둥에 새기도록 했다. 또 정법을 전하기 위해 포교승을 변방의 곳곳으로 보냈다. 스리랑카의 불교사인 『마하밤사』에 따르면, 카슈미르와 간다라·히말라야·마하라슈트라(아잔타 석굴이 위치한 서인도의 지방)·수반나부미(미얀마 남부)·스리랑카에 이때 불법이 전해졌다.
특히 스리랑카에는 아쇼카의 아들인 마힌다 장로가 불법을 전했다고 한다. 아쇼카의 석각 법칙도 그러한 사정을 기록하고 있는데, 아쇼카에 의해 정법이 유포된 지역에는 서쪽의 그리스인 왕 안티요카의 왕국, 투라마야와 안티키니의 왕국도 포함되어 있다. 안티요카는 당시 시리아의 왕 안티오코스이고, 투라마야는 이집트의 왕, 안티키니는 마케도니아의 왕으로 추정된다. 아쇼카를 통해 불교는 범세계적인 종교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깊은 신심을 낸 아쇼카는 우파굽타라는 스님의 인도로 부처님의 성지를 순례하며 성적聖蹟을 참배하기도 했다. 부처님 탄생지인 룸비니에 이르러 그 곳의 인연을 듣자, 그는 오체투지하여 경배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 곳에 부처님의 성적을 기념하는 석주石柱를 세웠다. 기둥 위에는 부처님을 상징하는 말의 상을 올리고 아래에 법칙을 새겼다. 가는 곳마다 이런 일을 반복했다. 부처님이 처음 설법하신 사르나트의 녹야원에는 네 마리의 사자가 올려진 석주를 세웠다. 사자도 물론 부처님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부처님의 법문을 사자의 포효에 비유한 ‘사자후師子吼’라는 말은 지금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사방을 향하여 정법을 전하는 네 마리 사자의 위쪽에는 원래 커다란 수레바퀴가 올려져 있었다. 수레바퀴는 서아시아에서 인도까지 고대에 널리 쓰이던 태양의 상징이었다. 변함없이 세계를 운행하며 만물에 생명의 빛을 주는 태양을 나타내는 수레바퀴는 불교도들에게 정법의 상징으로서 법륜法輪이 되었다. 사르나트 근방에서 나는 다갈색 사암으로 정교하게 깎아 곱게 마연한 이 사자 주두는 후대에 기둥이 파괴될 때 떨어져 방치되어 있다가 20세기 초에 녹야원의 폐허 속에서 다시 발견되었다. 지금 사르나트박물관의 중앙 홀 정면에 모셔진 이 주두는 인도의 국장國章이 되어 있다. 『아육왕전』에 따르면, 아쇼카는 사르나트에서 부처님이 법륜을 굴리신 곳을 참배하고, 그 곳에 스투파를 세웠다고 한다. 이 스투파는 아쇼카가 전설적으로 만들었다고 하는 8만4천의 불탑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앞에서 아쇼카가 근본팔탑 가운데 일곱 개를 열어 사리를 꺼내 유포시켰다는 이야기를 했다. 일곱 개만을 열 수 있었던 것은 라마그라마에 있던 불탑의 사리는 나가(naga: 고대 인도에서 코브라 뱀을 신격화하여 물의 신으로 섬긴 것으로, 동아시아에서는 용왕이라 한다)들이 용궁에서 받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쇼카는 왕사王師격인 야샤 존자가 해를 가려서 일식을 일으킨 사이에 8만4천의 스투파를 한 순간에 세웠다고 한다. 이것은 물론 전설적인 이야기이다. ‘8만4천’이라는 숫자도 사실을 기록한 것이라 볼 수는 없다. 4의 배수를 좋아하는 인도인들은 ‘8만4천’을 전체성의 상징으로 즐겨 사용하곤 했다. ‘8만4천 겁劫’·8만4천의 법문’·8만4천의 번뇌’ 등은 불전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표현이다. ‘8만4천의 탑’이라는 표현도 아쇼카가 수많은 스투파를 만든 것을 상징적으로 미화하고 있는 것이다. 8만4천은 아닐지라도 아쇼카는 수백 혹은 수천의 스투파를 세웠을 것이다. 지금 그 존재를 일일이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인도에 다녀갔던 중국의 현장玄乍(627~645년 인도 순례)과 같은 구법승들은 각지에서 아쇼카가 세운 스투파를 본 것을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도 지금 인도와 파키스탄에 남아 있는 대형 스투파들 가운데 상당수가 아쇼카 때까지 기원이 올라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르나트의 녹야원지에 터만 남아 있는 스투파도 그 한 예이다. 바로 인접한 곳에 아쇼카의 석주가 세워져 있기 때문에 이 스투파는 아쇼카가 건립한 것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 이 스투파는 직경이 13m에 달하는데, 원래 아쇼카가 세운 스투파는 이보다 훨씬 작은 크기였다. 인도에서는 오래된 스투파를 정비하고 보수할 때 덧씌워 확장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이 스투파도 여러 번에 걸쳐 확장되었음을 발굴 결과 확인할 수 있었다. 복발부가 남아 있지 않은 것은 후대 사람들이 복발부의 벽돌을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건축 자재로 여겨 스투파를 허물고 마구 갖다 썼기 때문이다.
아쇼카가 세운 스투파는 아쇼카 제국의 서북쪽 영토였던 파키스탄 북부의 탁실라에도 남아 있다. 인더스 강 상류의 동안東岸에 위치한 탁실라는 고대에 이 지역의 거점도시로 번성했으며, 학문과 문화 교류의 중심지로 이름이 높았다. 아쇼카는 왕자 시절에 부왕의 명으로 직접 이 곳을 정벌하기도 했다. 아쇼카는 8만4천의 스투파를 조성할 때 1억의 인구가 있는 곳에 사리함을 하나씩 주어 세우도록 했다. 그런데 인구가 36억이던 탁실라에서는 36개의 사리함을 원했다고 한다. 그러자 아쇼카는 8만4천의 사리도 모자랄 만큼 사람 수가 많은 것을 깨닫고, 야차에게 명하여 그렇다면 탁실라에서 35억의 인구를 없애고 사리함 1개만을 주겠다고 답하게 했다. 그래서 탁실라 사람들은 1개의 사리함만으로 만족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탁실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탑 ‘치르 토프’는 아쇼카가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지금은 ‘다르마라지카’(‘정법의 왕이 세운 것’이라는 뜻으로 아쇼카가 세운 불탑을 일컫는 일반 명칭이다)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이 밖에도 아쇼카가 세운 것으로 보이는 스투파는 인도 각지에 남아 있다. 탑문에 새겨진 아름다운 조각으로 이름난 산치의 대탑, 인도 남동부에 위치한 아마바라티의 대탑도 아쇼카 때까지 기원이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도 밖에서도 아쇼카와 관련된 스투파를 찾아볼 수 있다. 네팔의 불교도들에게 가장 성스럽게 여겨지는, 카트만두에 있는 스와얌부나트 스투파는 구전을 통해 ‘아쇼카 차이티야’(차이티야는 성소를 가리키는 말로 스투파를 뜻하기도 한다)라고도 불린다. 스리랑카의 아누라다푸라에 있는 투파라마는 아쇼카 자신이 세우게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의 아들인 마힌다 장로가 아쇼카에게 받은 부처님의 쇄골을 안치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스리랑카 최초의 불탑이다. 중국에서도 아쇼카가 세웠던 불탑이 남북조시대(4~6세기)에 발견되었다는 기록이 문헌상에 전한다. 아쇼카 때부터 200여 년 뒤인 기원후 1세기에야 비로소 중국에 불교가 전해졌기 때문에, 이것은 물론 역사적 사실은 아니고, 중국인들이 일찍부터 불교와 인연이 깊었음을 확인하고자 하는 갈망에서 생겨난 전설일 것이다. 우리나라 사서인 『삼국유사』에도 아쇼카의 불탑이 고구려 영토였던 요동성에서 발견되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고구려의 옛 왕이 국경을 순행하다가 요동성에서 오색구름이 땅을 덮은 것을 보고 다가가니 솥같이 생긴 토탑土塔이 보였다가 사라졌다고 한다. 그 곳을 파 보니 ‘불탑’이라 쓰인 범서梵書가 나왔다고 한다. 그 토탑이 아쇼카가 염부제 곳곳에 세운 불탑의 하나였다는 것이다. 솥같이 생겼다는 것으로 보아 이 탑은 복발형의 인도식 스투파였음을 알 수 있다. 아쇼카의 불사를 인연으로 불탑은 아시아 동반부 불교권의 광대한 지역에서 장구한 시간 동안 불자들이 부처님을 숭모하는 가장 성스러운 예배대상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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