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 * 독경 ♣>/성지 * 여행

덕수궁의 가을과 한국근현대회화 100선 전시

화엄행 2013. 11. 7. 22:49


박수근화백 작품으로, 제목은 모르겠음.

소위 경매가 약 100억이나 나간다고 관람객들의 입에서 흘러나온 

박수근화백의 <절구질 하는 여인>

사진을 찍지못하게 하는 것을 성능후진 핸드폰으로 스리살짝 찍어 상태가 그저그러함. ㅎㅎㅎ




興天寺銅鐘

  • 제작시기/일시 보물 제1460호


이 동종은 현재 덕수궁의 보호각내에 걸려져 전시되고 있으나 이것은 금세기에 이르러 현재의 위치로 옮겨 놓은 것이지 이전에는 다른 곳에 있었으며 그 동안 여러 차례의 이관(移管)이 있었으니 이 동종이 주성된 내력과 그 동안의 이동 경위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이 동종은 세조 7년(1461) 7월에 조선 태조의 후비(後妃)인 신덕왕후(神德王后)를 추도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이 동종은 본래 덕수궁 근처 신덕왕후의 정릉 근처에 위치했던 흥천사(興天寺)에 있었다. 그런데 이후 중종 5년(1510)에 화재로 흥천사가 불타 없어지자 이 동종은 영조 23년(1747)에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에 옮기게 되었다. 

19세기에 이르러 일제 강점 이후 일본인들에 의하여 광화문이 철폐되어 경복궁 건춘문의 북쪽으로 이건됨에 따라 이 동종은 창경궁으로 옮겨졌으나 그 후 덕수궁의 현재의 자리로 다시 옮겨진 것이다. 
이와 같이 이 범종은 만들어진 후 460년 간 여러 차례 이동되고 더욱이 중종조에는 사찰의 화재로 인하여 위기를 당했었으나 종의 각부가 완존(完存)함은 다행한 일이라 하겠다. 

종의 크기는 전고(全高) 2.82m, 구경(口徑) 1.7m, 하후(下厚) 0.3m이며 이 동종은 종래의 여러 범종과 같이 크게 나누어 종신(鐘身)과 용뉴(龍?)로 이루어졌으며 용뉴로써 고리를 삼아 그 위에 현수되고 있다. 

종신의 정상에 원조(圓彫)된 용뉴는 쌍두(雙頭)로서 양쪽의 머리를 서로 반대방향으로 취하고 약간 숙여 땅을 바라보고 있는데 양쪽 다 입을 꽉 다물어서 여의보주(如意寶珠)는 보이지 않는다. 용두(龍頭)는 부리부리한 두 눈과 큼직한 코 · 입 등이 웅건(雄建)한 동체(胴體), 사실적인 용린(龍鱗) 등과 잘 어울려서 생동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다. 특히 용두 좌 · 우에까지 동체가 미치면서 쌍룡(雙龍)이 서로 동체를 말아올려 정상에 큼직한 여의보주를 받들고 있는 모습은 실로 꿈틀거리는 생물의 인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웅용(雄龍)은 조성 연대도 뚜렷하여 조선 초기의 금속 공예와 조각사 연구에 귀중한 일례(一例)가 될 것이다. 

종신의 정상에는 용뉴뿐이고 용통(甬筒)이 없으며 어깨 위에는 연화문대(蓮華紋帶)를 돌려 장식하고 있다. 즉 견부(肩部)에는 태조(太彫) 일선대(一線帶)를 양주(陽鑄)하여 구획하고 그 위로 연화문을 양각하였는데 이 연화는 단엽의 복판(伏瓣)인 바 판(瓣) 주변에 또 하나의 넓직한 복판이 보인다. 
상대(上帶)는 견대(肩帶)와 좀 떨어진 밑쪽에 태조 일선대를 돌려 표시하여 곧 이 간지(間地)를 상대로 볼 수 있겠는데 여기에는 아무런 조식(彫飾)이 없다. 

유곽(乳廓)은 상대와 약간 떨어진 바로 밑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네 군데에 배치하였는데 그 형태는 우리나라 범종에서 한 규범이 되어 있는 사다리꼴이다. 주곽(周廓)은 내 · 외 구획이 약간 도드라지게 가는 선으로 양주되어 돌대(突帶)를 이루었고 이 주곽내에는 또 하나의 내 · 외 구획세조(區劃細彫)가 있으며 그 안에 세선조(細線彫)의 평행쌍선으로 화려한 당초문(唐草文)을 양각하였다. 유곽내의 유두(乳頭)는 구유(九乳)로서 원좌(圓座)내에 각기 1유(乳)씩이 돌출되었는데 원좌는 가는 선으로 표시되었고 그 안에 복엽(複葉) 8판의 연화문을 조각하여 각 유두의 주변을 돌게 하였으니 곧 유두는 각 연화원좌의 중심에 돌기되어 있다. 

유곽과 유곽 사이에는 보살상을 1구(軀)씩 배치하였는 바 그 수는 유곽과 같이 4구이다. 이 보살상은 양각된 입상(立像)으로서 원형두광(圓形頭光), 보관(寶冠), 천의(天衣) 등 모두 선조(線彫)로 표현하였는데 각 입상이 부분적으로 마손(磨損)되어 전체적으로 완전한 존용(尊容)은 1구도 없다. 그러나 4구의 보살을 종합해 보면 보관은 여러 가지 장식으로 화사하며 상호(相好)도 원만하고 천의는 양쪽 어깨와 팔에 걸쳐 유려한 선으로 하부에 이르고 옆으로 펼쳐진 의문(衣紋)은 더욱 섬려(纖麗)하다. 그리고 양쪽 발의 밑부분까지 천의자락이 내려져 휘감고 있어서 상계(上界)에 임하고 있는 인상이며 아울러 자세도 정제(整齊)되었다. 
종신 중앙에는 태조(太彫) 1선(線)을 가운데 두고 그 상 · 하에 약간 좁은 1선조(線彫)를 하나씩 배치하여 이른바 3조선대(條線帶)를 돌려 중대(中帶)를 이루고 있다. 

종신 하부에는 당좌(撞座)도 없고 별다른 조식(彫飾)이 없으며 하단에서 상당히 떨어진 위쪽에 서로의 간격 13cm를 둔 태조 2선조가 돌려지고 그 내면에는 가늘게 조각한 평행파상문(平行波狀紋)과 약간 굵어진 권운문(卷雲紋)이 일정한 배열로 양각되어 종신의 하부를 장식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이 태조선대 중 하선조(下線彫) 바로 밑의 종신 표면은 하단에 이르기까지 두드러진 것이다. 그러므로 일견(一見)하면 이러한 모양은 마치 문양이 없는 하대가 마련된 것처럼 보이는데 여기서는 역시 태조 2선내(線內)의 파상권운문대(波狀卷雲紋帶)를 하대(下帶)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하대와 중앙의 3조선대와의 사이에는 문양 조식이 없고 명문만이 가득히 양주(陽鑄)되어 있다. 즉 종신 주위를 일주하듯 해서(楷書)로 각자(刻字)되었는데 자경(字徑)은 2.6∼4cm이며 이에 의하면 이 동종의 주성 연대와 그 경위 등을 비롯하여 여러 관계자들을 알 수 있다. 

흥천사 신동종명병서 (명문(銘文) 생략) 

명문에서 ‘천순육년임오(天順六年壬午)’는 세조 7년(1461)에 해당된다. 
그리고 명문 내용을 보면 감주(監鑄)에 있어서 도제조(都提調)에 효령대군(孝寧大君), 임영대군(臨瀛大君), 영응대군(永膺大君)을 비롯하여 제조(提調), 부제조(副提調)의 제직함(諸職銜)과 성명이 밝혀지고 이 밖에 주성(鑄成)에 직접 관계된 낭청(郞廳), 감역(監役), 주성장(鑄成匠), 노야장(爐冶匠), 주장(注匠), 조각(彫刻), 목수(木手), 수철장(水鐵匠), 각자(刻字), 사령(使令) 등의 여러 관계자들을 기록하고 있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이 범종은 이태조의 후비인 신덕왕후의 명복을 빌고 추도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므로 곧 왕명을 받들어 여러 대군들까지 관여하여 이른바 왕실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동종은 전체적인 양식이 기본 형태부터 우리나라 범종의 전형을 보이고 있는 신라시대나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양식을 따르지 않고 있으며 각부에 있어서도 고유한 면을 많이 결(缺)하고 있다. 

부연 : 그러면 태조때에 있었던 원래의 종은 어디로 ? 
그에 관한 기록은 모르겠고, 아무튼 세조는 새 범종 제작에 
많은 공을 들인듯 합니다.


이 동종은 현재 덕수궁의 보호각내에 걸려져 전시되고 있으나 이것은 금세기에 이르러 현재의 위치로 옮겨 놓은 것이지 이전에는 다른 곳에 있었으며 그 동안 여러 차례의 이관(移管)이 있었으니 이 동종이 주성된 내력과 그 동안의 이동 경위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이 동종은 세조 7년(1461) 7월에 조선 태조의 후비(後妃)인 신덕왕후(神德王后)를 추도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이 동종은 본래 덕수궁 근처 신덕왕후의 정릉 근처에 위치했던 흥천사(興天寺)에 있었다. 그런데 이후 중종 5년(1510)에 화재로 흥천사가 불타 없어지자 이 동종은 영조 23년(1747)에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에 옮기게 되었다. 

19세기에 이르러 일제 강점 이후 일본인들에 의하여 광화문이 철폐되어 경복궁 건춘문의 북쪽으로 이건됨에 따라 이 동종은 창경궁으로 옮겨졌으나 그 후 덕수궁의 현재의 자리로 다시 옮겨진 것이다. 
이와 같이 이 범종은 만들어진 후 460년 간 여러 차례 이동되고 더욱이 중종조에는 사찰의 화재로 인하여 위기를 당했었으나 종의 각부가 완존(完存)함은 다행한 일이라 하겠다. 

종의 크기는 전고(全高) 2.82m, 구경(口徑) 1.7m, 하후(下厚) 0.3m이며 이 동종은 종래의 여러 범종과 같이 크게 나누어 종신(鐘身)과 용뉴(龍?)로 이루어졌으며 용뉴로써 고리를 삼아 그 위에 현수되고 있다. 

종신의 정상에 원조(圓彫)된 용뉴는 쌍두(雙頭)로서 양쪽의 머리를 서로 반대방향으로 취하고 약간 숙여 땅을 바라보고 있는데 양쪽 다 입을 꽉 다물어서 여의보주(如意寶珠)는 보이지 않는다. 용두(龍頭)는 부리부리한 두 눈과 큼직한 코 · 입 등이 웅건(雄建)한 동체(胴體), 사실적인 용린(龍鱗) 등과 잘 어울려서 생동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다. 특히 용두 좌 · 우에까지 동체가 미치면서 쌍룡(雙龍)이 서로 동체를 말아올려 정상에 큼직한 여의보주를 받들고 있는 모습은 실로 꿈틀거리는 생물의 인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웅용(雄龍)은 조성 연대도 뚜렷하여 조선 초기의 금속 공예와 조각사 연구에 귀중한 일례(一例)가 될 것이다. 

종신의 정상에는 용뉴뿐이고 용통(甬筒)이 없으며 어깨 위에는 연화문대(蓮華紋帶)를 돌려 장식하고 있다. 즉 견부(肩部)에는 태조(太彫) 일선대(一線帶)를 양주(陽鑄)하여 구획하고 그 위로 연화문을 양각하였는데 이 연화는 단엽의 복판(伏瓣)인 바 판(瓣) 주변에 또 하나의 넓직한 복판이 보인다. 
상대(上帶)는 견대(肩帶)와 좀 떨어진 밑쪽에 태조 일선대를 돌려 표시하여 곧 이 간지(間地)를 상대로 볼 수 있겠는데 여기에는 아무런 조식(彫飾)이 없다. 

유곽(乳廓)은 상대와 약간 떨어진 바로 밑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네 군데에 배치하였는데 그 형태는 우리나라 범종에서 한 규범이 되어 있는 사다리꼴이다. 주곽(周廓)은 내 · 외 구획이 약간 도드라지게 가는 선으로 양주되어 돌대(突帶)를 이루었고 이 주곽내에는 또 하나의 내 · 외 구획세조(區劃細彫)가 있으며 그 안에 세선조(細線彫)의 평행쌍선으로 화려한 당초문(唐草文)을 양각하였다. 유곽내의 유두(乳頭)는 구유(九乳)로서 원좌(圓座)내에 각기 1유(乳)씩이 돌출되었는데 원좌는 가는 선으로 표시되었고 그 안에 복엽(複葉) 8판의 연화문을 조각하여 각 유두의 주변을 돌게 하였으니 곧 유두는 각 연화원좌의 중심에 돌기되어 있다. 

유곽과 유곽 사이에는 보살상을 1구(軀)씩 배치하였는 바 그 수는 유곽과 같이 4구이다. 이 보살상은 양각된 입상(立像)으로서 원형두광(圓形頭光), 보관(寶冠), 천의(天衣) 등 모두 선조(線彫)로 표현하였는데 각 입상이 부분적으로 마손(磨損)되어 전체적으로 완전한 존용(尊容)은 1구도 없다. 그러나 4구의 보살을 종합해 보면 보관은 여러 가지 장식으로 화사하며 상호(相好)도 원만하고 천의는 양쪽 어깨와 팔에 걸쳐 유려한 선으로 하부에 이르고 옆으로 펼쳐진 의문(衣紋)은 더욱 섬려(纖麗)하다. 그리고 양쪽 발의 밑부분까지 천의자락이 내려져 휘감고 있어서 상계(上界)에 임하고 있는 인상이며 아울러 자세도 정제(整齊)되었다. 
종신 중앙에는 태조(太彫) 1선(線)을 가운데 두고 그 상 · 하에 약간 좁은 1선조(線彫)를 하나씩 배치하여 이른바 3조선대(條線帶)를 돌려 중대(中帶)를 이루고 있다. 

종신 하부에는 당좌(撞座)도 없고 별다른 조식(彫飾)이 없으며 하단에서 상당히 떨어진 위쪽에 서로의 간격 13cm를 둔 태조 2선조가 돌려지고 그 내면에는 가늘게 조각한 평행파상문(平行波狀紋)과 약간 굵어진 권운문(卷雲紋)이 일정한 배열로 양각되어 종신의 하부를 장식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이 태조선대 중 하선조(下線彫) 바로 밑의 종신 표면은 하단에 이르기까지 두드러진 것이다. 그러므로 일견(一見)하면 이러한 모양은 마치 문양이 없는 하대가 마련된 것처럼 보이는데 여기서는 역시 태조 2선내(線內)의 파상권운문대(波狀卷雲紋帶)를 하대(下帶)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하대와 중앙의 3조선대와의 사이에는 문양 조식이 없고 명문만이 가득히 양주(陽鑄)되어 있다. 즉 종신 주위를 일주하듯 해서(楷書)로 각자(刻字)되었는데 자경(字徑)은 2.6∼4cm이며 이에 의하면 이 동종의 주성 연대와 그 경위 등을 비롯하여 여러 관계자들을 알 수 있다. 

흥천사 신동종명병서 (명문(銘文) 생략) 

명문에서 ‘천순육년임오(天順六年壬午)’는 세조 7년(1461)에 해당된다. 
그리고 명문 내용을 보면 감주(監鑄)에 있어서 도제조(都提調)에 효령대군(孝寧大君), 임영대군(臨瀛大君), 영응대군(永膺大君)을 비롯하여 제조(提調), 부제조(副提調)의 제직함(諸職銜)과 성명이 밝혀지고 이 밖에 주성(鑄成)에 직접 관계된 낭청(郞廳), 감역(監役), 주성장(鑄成匠), 노야장(爐冶匠), 주장(注匠), 조각(彫刻), 목수(木手), 수철장(水鐵匠), 각자(刻字), 사령(使令) 등의 여러 관계자들을 기록하고 있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이 범종은 이태조의 후비인 신덕왕후의 명복을 빌고 추도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므로 곧 왕명을 받들어 여러 대군들까지 관여하여 이른바 왕실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동종은 전체적인 양식이 기본 형태부터 우리나라 범종의 전형을 보이고 있는 신라시대나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양식을 따르지 않고 있으며 각부에 있어서도 고유한 면을 많이 결(缺)하고 있다. 

부연 : 그러면 태조때에 있었던 원래의 종은 어디로 ? 
그에 관한 기록은 모르겠고, 아무튼 세조는 새 범종 제작에 
많은 공을 들인듯 합니다.

이 동종은 현재 덕수궁의 보호각내에 걸려져 전시되고 있으나 이것은 금세기에 이르러 현재의 위치로 옮겨 놓은 것이지 이전에는 다른 곳에 있었으며 그 동안 여러 차례의 이관(移管)이 있었으니 

이 동종이 주성된 내력과 그 동안의 이동 경위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이 동종은 세조 7년(1461) 7월에 조선 태조의 후비(後妃)인 

신덕왕후(神德王后)를 추도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이 동종은 본래 덕수궁 근처 신덕왕후의 정릉 근처에 위치했던 흥천사(興天寺)에 있었다. 

그런데 이후 중종 5년(1510)에 화재로 흥천사가 불타 없어지자 

이 동종은 영조 23년(1747)에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에 옮기게 되었다. 

19세기에 이르러 일제 강점 이후 일본인들에 의하여 광화문이 철폐되어 

경복궁 건춘문의 북쪽으로 이건됨에 따라 이 동종은 창경궁으로 옮겨졌으나 

그 후 덕수궁의 현재의 자리로 다시 옮겨진 것이다. 
이와 같이 이 범종은 만들어진 후 460년 간 여러 차례 이동되고 

더욱이 중종조에는 사찰의 화재로 인하여 위기를 당했었으나 

종의 각부가 완존(完存)함은 다행한 일이라 하겠다. 

종의 크기는 전고(全高) 2.82m, 구경(口徑) 1.7m, 하후(下厚) 0.3m이며 

이 동종은 종래의 여러 범종과 같이 크게 나누어 종신(鐘身)과 용뉴(龍?)로 이루어졌으며 

용뉴로써 고리를 삼아 그 위에 현수되고 있다. 

종신의 정상에 원조(圓彫)된 용뉴는 쌍두(雙頭)로서 양쪽의 머리를 서로 반대방향으로 취하고 

약간 숙여 땅을 바라보고 있는데 양쪽 다 입을 꽉 다물어서 여의보주(如意寶珠)는 보이지 않는다. 

용두(龍頭)는 부리부리한 두 눈과 큼직한 코 · 입 등이 웅건(雄建)한 동체(胴體), 

사실적인 용린(龍鱗) 등과 잘 어울려서 생동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다. 

특히 용두 좌 · 우에까지 동체가 미치면서 쌍룡(雙龍)이 서로 동체를 말아올려 

정상에 큼직한 여의보주를 받들고 있는 모습은 실로 꿈틀거리는 생물의 인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웅용(雄龍)은 조성 연대도 뚜렷하여 조선 초기의 금속 공예와 조각사 연구에 

귀중한 일례(一例)가 될 것이다. 


종신의 정상에는 용뉴뿐이고 용통(甬筒)이 없으며 어깨 위에는 연화문대(蓮華紋帶)를 돌려 장식하고 있다. 즉 견부(肩部)에는 태조(太彫) 일선대(一線帶)를 양주(陽鑄)하여 구획하고 그 위로 연화문을 양각하였는데 이 연화는 단엽의 복판(伏瓣)인 바 판(瓣) 주변에 또 하나의 넓직한 복판이 보인다. 
상대(上帶)는 견대(肩帶)와 좀 떨어진 밑쪽에 태조 일선대를 돌려 표시하여 곧 이 간지(間地)를 상대로 볼 수 있겠는데 여기에는 아무런 조식(彫飾)이 없다. 

유곽(乳廓)은 상대와 약간 떨어진 바로 밑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네 군데에 배치하였는데 그 형태는 우리나라 범종에서 한 규범이 되어 있는 사다리꼴이다. 주곽(周廓)은 내 · 외 구획이 약간 도드라지게 가는 선으로 양주되어 돌대(突帶)를 이루었고 이 주곽내에는 또 하나의 내 · 외 구획세조(區劃細彫)가 있으며 그 안에 세선조(細線彫)의 평행쌍선으로 화려한 당초문(唐草文)을 양각하였다. 유곽내의 유두(乳頭)는 구유(九乳)로서 원좌(圓座)내에 각기 1유(乳)씩이 돌출되었는데 원좌는 가는 선으로 표시되었고 그 안에 복엽(複葉) 8판의 연화문을 조각하여 각 유두의 주변을 돌게 하였으니 곧 유두는 각 연화원좌의 중심에 돌기되어 있다. 

유곽과 유곽 사이에는 보살상을 1구(軀)씩 배치하였는 바 그 수는 유곽과 같이 4구이다. 이 보살상은 양각된 입상(立像)으로서 원형두광(圓形頭光), 보관(寶冠), 천의(天衣) 등 모두 선조(線彫)로 표현하였는데 각 입상이 부분적으로 마손(磨損)되어 전체적으로 완전한 존용(尊容)은 1구도 없다. 그러나 4구의 보살을 종합해 보면 보관은 여러 가지 장식으로 화사하며 상호(相好)도 원만하고 천의는 양쪽 어깨와 팔에 걸쳐 유려한 선으로 하부에 이르고 옆으로 펼쳐진 의문(衣紋)은 더욱 섬려(纖麗)하다. 그리고 양쪽 발의 밑부분까지 천의자락이 내려져 휘감고 있어서 상계(上界)에 임하고 있는 인상이며 아울러 자세도 정제(整齊)되었다. 
종신 중앙에는 태조(太彫) 1선(線)을 가운데 두고 그 상 · 하에 약간 좁은 1선조(線彫)를 하나씩 배치하여 이른바 3조선대(條線帶)를 돌려 중대(中帶)를 이루고 있다. 

종신 하부에는 당좌(撞座)도 없고 별다른 조식(彫飾)이 없으며 하단에서 상당히 떨어진 위쪽에 서로의 간격 13cm를 둔 태조 2선조가 돌려지고 그 내면에는 가늘게 조각한 평행파상문(平行波狀紋)과 약간 굵어진 권운문(卷雲紋)이 일정한 배열로 양각되어 종신의 하부를 장식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이 태조선대 중 하선조(下線彫) 바로 밑의 종신 표면은 하단에 이르기까지 두드러진 것이다. 그러므로 일견(一見)하면 이러한 모양은 마치 문양이 없는 하대가 마련된 것처럼 보이는데 여기서는 역시 태조 2선내(線內)의 파상권운문대(波狀卷雲紋帶)를 하대(下帶)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하대와 중앙의 3조선대와의 사이에는 문양 조식이 없고 명문만이 가득히 양주(陽鑄)되어 있다. 즉 종신 주위를 일주하듯 해서(楷書)로 각자(刻字)되었는데 자경(字徑)은 2.6∼4cm이며 이에 의하면 이 동종의 주성 연대와 그 경위 등을 비롯하여 여러 관계자들을 알 수 있다. 

흥천사 신동종명병서 (명문(銘文) 생략) 

명문에서 ‘천순육년임오(天順六年壬午)’는 세조 7년(1461)에 해당된다. 
그리고 명문 내용을 보면 감주(監鑄)에 있어서 도제조(都提調)에 효령대군(孝寧大君), 임영대군(臨瀛大君), 영응대군(永膺大君)을 비롯하여 제조(提調), 부제조(副提調)의 제직함(諸職銜)과 성명이 밝혀지고 이 밖에 주성(鑄成)에 직접 관계된 낭청(郞廳), 감역(監役), 주성장(鑄成匠), 노야장(爐冶匠), 주장(注匠), 조각(彫刻), 목수(木手), 수철장(水鐵匠), 각자(刻字), 사령(使令) 등의 여러 관계자들을 기록하고 있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이 범종은 이태조의 후비인 신덕왕후의 명복을 빌고 추도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므로 곧 왕명을 받들어 여러 대군들까지 관여하여 이른바 왕실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동종은 전체적인 양식이 기본 형태부터 우리나라 범종의 전형을 보이고 있는 신라시대나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양식을 따르지 않고 있으며 각부에 있어서도 고유한 면을 많이 결(缺)하고 있다. 

부연 : 그러면 태조때에 있었던 원래의 종은 어디로 ? 
그에 관한 기록은 모르겠고, 아무튼 세조는 새 범종 제작에 
많은 공을 들인듯 합니다.










중화전 계단의 석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