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 * 독경 ♣>/성지 * 여행

金剛山 乾鳳寺 - 일주문, 騰空臺

화엄행 2013. 6. 10. 16:09

 

 

520년(신라 법흥왕 7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하고 원각사라 하였으며, 758년에 발진화상이 중건하고 정신, 양순스님등과 염불만일회를 베풀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염불만일회의 효시가 됩니다. 여기에 신도 1,820인이 참여하였는데, 그 중에서 120인은 의복을, 1700인은 음식을 마련하여 염불인들을 봉양하였습니다. 787년에 염불만일회에 참여했던 31인이 아미타불의 가피를 입어서 극락에 왕생하였고, 그 뒤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이 차례로 왕생했다고 합니다.

이로써 아미타 도량이 되었습니다. 고려말 도선국사가 절 서쪽에 봉황새 모양의 바위가 있다고 하여 절 이름을 서봉사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1358년에는 나옹스님이 중건하고 건봉사로 개칭하여 비로소 염불과 선, 교의 수행을 갖춘 사찰이 되었습니다.

1465년에는 세조가 이 절로 행차하여 자신의 원당으로 삼은 뒤 어실각을 짓게 하고 전답을 내렸으며, 친필로 동참문을 써서 하사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조선왕실의 원당이 되었는데, 성종은 효령대군, 한명회, 신숙주, 조흥수, 등을 파견하여 노비, 미역밭과 염전을 하사하고 사방 십리 안을 모두 절의 재산으로 삼게 하였습니다. 임진왜란 때에는 사명대사가 승병을 기병한 곳으로 호국의 본거지이었으며, 1605년에는 사명대사가 일본에 강화사로 갔다가 통도사에서 왜군이 약탈하여 갔던 부처님 치아사리를 되찾아와서 이 절에 봉안한 뒤 1606년에 중건하였습니다.

1802년에는 용허 석민스님이 제2회 염불만일회를 열었으며, 1851년에는 벽오 유총스님이 제3회 염불만일회를 열었고, 1878년 4월 3일에 산불이 일어나서 건물 3,183칸이 전소되었는데 다음 해에 대웅전, 어실각, 사성전, 명부전, 범종각, 향로전, 보안원, 낙서암, 백화암, 청련암을 중건하였습니다.

1881년에는 만화 관준스님이 제4회 염불만일회를 설치하였고, 1906년에는 신학문과 민족교육의 산실인 봉명학교도 설립하였습니다. 1908년 제4회 만일회를 회향한 뒤 금암 의훈스님이 제5회 염불만일회를 설하고 옛부터 있던 돌무더기의 소신대에 31인의 부도를 세우는 한편 1921년 인천포교당과 봉림학교를 세웠으며, 한암스님을 청하여 무차선회를 여는 등 우리나라 4대 사찰의 하나요 31본산의 하나로서 명망을 떨쳤던 곳입니다.

한국전쟁 때 완전히 폐허화 되었으나 중창불사를 통해 사격을 다져가고 있습니다.

 

 

 

 

 

甲稧 (갑계 - 稧 ; 계계)


 한 절 안에 있는 승려끼리 친목과 절을 보조할 목적으로 조직한 공동단체.

자(子)년 생에서 사(巳)년 생까지, 오(午)년 생에서 해(亥)년 생까지를 한 단체로 매(每) 6세까지로 한 갑계를 만든다.

그 방법은 계원 되는 이들이 얼마씩의 입계금(入稧金)을 내고 그 윗 갑계에서 약간의 보조금을 받고, 또 사중에서도 얼마쯤 찬성금을 주어 본전을 삼고, 그 돈으로 식리(殖利)도 하고, 또는 계원들의 공동 노력으로 사중 공사를 도급으로 맡기도 하여 생기는 소득을 계에 넣어서 기본금을 늘임. 계원들이 늙게 되면 토지도 사서 사중에 바치고, 그 밖에 필요한 불사나 도구 따위를 계금으로 마련하여 사중에 비치하기도 함. 이와 같이 사중 재산을 늘이며, 계원의 친목을 도모하는 것으로, 경상도 일대 사원에서 성행하였고, 그 중에도 동래 범어사의 그것이 가장 우수하였다.

이것은 조선 중엽 이후부터 생긴 듯하며, 최근 30년 전(1930)까지 존속되었다.

 

 

 

 

 

 

 

 

 

31人 騰空遺骨(蹟) 기념지탑

여기서 (蹟)자는 원래 骨자였었는데,

후대에 이 글자가 지워지자 누군가 蹟자로 새겨 넣었다함.

 

 등공대 해설사겸 안내인

 

 앞쪽으로 저 멀리 구름에 가리워진 곳은

금강산 甘露峰이라 함.

 

 

 騰空이란

육신이 살아있는 그대로 허공으로 날아오르면서,

몸은 벗어버리고 영혼만 부처님의 연화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등공은 염불만일회에서 이루어진다.

염불만일회란 일념으로 염불을 목적으로, 살아서는 마음을 편안히 하고,

죽은 후에는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법회를 말한다.
염불만일회의 시작은 신라 경덕왕 17년(758년, 무술년)에 발징화상께서

원각사를 중수하고 염불만일회를 베푸니,

이것이 한국불교 염불만일회의 효시이다.

 

이 때 발징화상이 정신, 양순 등 스님 31명과 염불을 드렸는데, 뜻을 같이하는 신도 1,820명이 환희심이 일어 자원을 하였다.

그 가운데 120명은 의복을, 1,700명은 음식을 시주하여

주야로 쉬지 않고 기도를 하였는데,

신라 원성왕 3년(787년) 염불만일회에서 선행을 닦던 스님 31명이

아미타불의 가피를 입어 극락정토에 다시 태어났으며,

시주를 하던 신도들도 모두 극락왕생을 하였다.

건봉사 북쪽에 위치한 등공대는 만일(27년 5개월)동안 기도하시던 스님들이

원성왕 3년인 787년 회향을 할 때, 건봉사를 중심으로 사방 허공으로

몸이 그대로 떠올라 날아가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1.5km 정도를 날아오른 스님들은 육신의 허물은 그대로 땅에 떨어트리고,

맑고 밝은 정신만 등공을 한 것이다.

 

그 후 세월이 흘러 1900년인 광무4년에 들어 스님들의 다비식을 거행한 곳을,

몸을 살랐다고 하여 <소신대(燒身臺)>라고 하였다.
소신대는 많은 사람들이 와서 그 뜻을 기려 기도에 정진을 하였는데,

오랜 세월 풍화작용으로 부서지고 허물어져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이곳에서 기도를 하던 양씨 성을 가진 연대월 보살이

이를 안타깝게 여겨 백원을 희사하고, 기념탑을 세워 봉안할 것을 서원하였다.

이를 가상히 여긴 스님들과 신도들이 동참하매, 순식간에 모인 돈이 천원이 모였다.

갑인년(1914년) 4월에 역사를 시작하여,

을묘년(1915년) 5월에 역사를 마치고 등공탑을 세워 그 뜻을 만천하에 알렸다.

 

그 후 소신대를 등공탑이 있다고 하여서 <등공대>라고 불렀다. 

 
건봉사 등공대는 이렇게 31명의 스님들이

살아있는 몸을 그대로 허공으로 올랐다는 기록이 있어 유명하다.

신라 때부터 많은 스님들이 금강산 건봉사를 수행처로 삼은 점이나,

우리나라의 4대 사찰에 건봉사가 들어가는 것도 다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1915년 세워진 등공탑 비문에 보면(운고 김일우 지음)

 

「절 북쪽 5리쯤에 아직도 몸을 불사른 대가 있는데,

오랜 세월을 겪다보니 꽃이피고 잎이지는 변천을 겪었다. 많은 시일을 보내자니 바람에 닳고 비에 씻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폐허에 돌을 포개놓고 구경하게 두매, 산도 이로 인해 무안해 하고,

물도 이 때문에 소리를 삼킬 지경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등공대의 위치는

금강산의 감로봉을 주산으로 동(東)으로 행룡하던 용맥이

건봉사 뒤편을 지나 북(北)으로 방향을 바꾸어 구불구불 달려

용진처에서 살짝 솟구친 돌혈이다.

 

이곳은 커다란 기운이 있는 곳으로 팔공산 갓바위와 비교되는 곳이다.

갓바위 역시 팔공산 동봉(東峰)에서 주맥이 아주 멀리 뻗어 

머리를 치켜들어 돌혈로 자리한 곳이다.

 

등공대 설명 자료 → http://cafe.daum.net/hsfrs/AcvZ/957?q=%B5%EE%B0%F8%B4%E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