七佛寺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
쌍계사와 함께 하동을 대표하는 사찰로 칠불사(七佛寺)를 꼽을 수 있다.
가락국 태조 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이곳에서 수도한 후 성불하였다고 해서 이름 지어졌다. 만들어진 시기는 서기 103년으로 전해진다.
이는 서기 48년 세워졌다고 전해지는 김해 장유사(長遊寺)와 함께
'불교 남방유래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의미 부여되고 있다.
수로왕과 왕비 허황옥(許黃玉)이 왕자들 보러 섬진강 뱃길로 들어와
오늘날 십리벚꽃길을 지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쌍계사 북쪽 20리 되는 곳인
지리산 토끼봉(1533m) 아래 800m 고지에 있는 절이다.
연담 유일(1720-1799)이 쓴 칠불암 상량문에 의하면
신라 신문왕 때 지리산 옥부선인이 부는 옥피리 소리를 들은 일곱 왕자가
입산하여 6년만에 도를 깨닫고 이 절을 창건했다 고 한다.
그러나 전설에 따르면 선사 옥보를 따라 출가한 가락국 수로왕의 7왕자가
지리산에 운상원을 짓고 수행하여 6년만인 103년 8월 보름에 성불했기 때문에
칠불암으로 고쳤다고 한다.
신라 옥보고는 이 절의 운상원에서 50년 동안 거문고를 공부하고
30곡을 지어 세상에 전하였다고 한다.
칠불사는 1948년 여순반란군토벌 때 불에 타버려 다시 지었다.
신라 때 김해에서 온 담공선사가 지었다는 아자방의 2중 온돌이 복원되어 있다.
http://chilbulsa.or.kr/maha/introduce/introduce_01.html
칠불사는 지리산의 중심봉인 반야봉(1,732m)의 남쪽 800m 고지에 위치하고 있다. 신라말 도선국사가 지은『옥룡자결』(玉龍子訣)에 의하면 지리산 칠불사는 와우형(臥牛形)의 명당으로, 제일의 양택이라고 했다. 임진란에 퇴락한 가람을 서산대사와 부휴대사가 중수하였다. 그 후 1800년에 큰 화재가 나서 보광전, 약사전, 미타전, 벽안당(亞字房), 칠불각, 설선당, 보설루, 요사 등 10여 동의 건물이 전소되었는데 대은율사와 금담율사에 의해 모두 복구되었다. 그러나 6·25전란으로 인해 1951년 1월경에 전소되었다. 27년간 폐허로 남아 있던 것을 제월통광(霽月通光) 스님이 1978년부터 15여년에 걸쳐 대웅전, 문수전, 아자방, 운상원, 설선당, 보설루, 원음각, 요사, 영지, 일주문 등을 복원 중창했고, 이 외에 선다원, 사적비, 다신탑비 등을 세웠다. | |||||||||||
칠불사는 1세기경에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그들의 외숙인 범승(梵僧) 장유보옥(長遊寶玉) 화상(和尙)을 따라와 이곳에서 동시 성불한 것을 기념하여 김수로(金首露) 왕이 국력으로 창건한 사찰로서, 가야불교의 발상지이다. 이 외에 칠불사 경내에 있는 영지(影池)와 칠불사 인근 지역에 남아있는 명칭 등을 통해서도 칠불사가 가야불교의 성지임을 알 수 있다. 칠불사의 영지는 칠왕자의 그림자가 나타났다는 연못이다. 수로왕 부부가 출가한 일곱 왕자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와서 왕자를 보려 하자 장유화상은 “왕자들은 이미 출가하여 수도하는 몸이라 결코 상면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꼭 보고 싶으면 절 밑에 연못을 만들어 물 속을 보면 왕자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장유화상의 말에 따라 김수로왕 부부는 연못을 만들어 놓고 그 연못을 보니 과연 일곱 왕자들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를 보고 수로왕 부부는 환희심을 느끼고 돌아갔다고 한다. 그로 인하여 이 연못을 영지라 부르게 되었다. | |||||||||||
지리산은 예로부터 문수보살이 일만 권속을 거느리고 상주하는 곳이다. 지리산이라는 이름도 문수보살의 갖춘 이름인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師利菩薩)에서 ‘지(智)’자와 ‘리(利)’자를 각각 따온 것이다. 지리산은 상봉인 천왕봉과 주봉인 반야봉으로 연결되는데, 반야봉은 곧 문수보살의 대지혜를 상징한다. 이와같이 지리산은 문수도량인데, 특히 칠불사는 생문수(生文殊) 도량으로서, 칠불사에서 참선을 하거나 기도를 하면 문수보살이 근기에 맞추어 화현하여 기도를 성취시켜 주고, 또한 공부인을 보살펴서 견성오도케 하는 영험있는 도량이다. | |||||||||||
지리산 칠불사는 아자방 선원과 운상선원이 있어 무수한 도승을 배출한 동국제일선원이다. 아자방은 신라 효공왕 당시 담공(曇空)선사가 축조한 선원으로서, 방안 네 귀퉁이에 50cm씩 높은 곳은 좌선처이고 가운데 십자 모양의 낮은 곳은 경행처이다. 담공선사의 축조 당시에는 한번 불을 지피면 100일간 따뜻하였으므로 신비한 온돌방이라 하여 세계 건축사에 기록되었으며, 현재는 경남유형문화재 제144호로 지정되어 있다. 운상선원은 옥보대라고도 하는데, 장유보옥선사의 이름을 따서 옥보대라고 한다는 설과 거문고 전승자인 옥보고의 이름을 따랐다는 설이 있다. 현재는 운상선원을 대중 선방으로 사용하고 있다. 칠불사의 아자방과 운상선원에서 고려시대의 정명선사, 조선시대의 서산대사(1520-1604), 부휴대사(1543-1615), 초의선사(1786-1866), 이외에 백암, 무가, 인허, 월송선사 등 선승들이 주석하며 수선안거했다. 근현대에는 용성선사, 금오선사, 서암선사 등 큰스님들이 수선안거 했다.
이 외에도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이신 용성선사는 아자방에서 선승들을 지도하는 여가에 『귀원정종』(歸源正宗)을 저술하여 불교의 종지를 드러냈으며, 금오선사는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서암선사 등 선승들을 모아 결사정진을 하였다. | |||||||||||
해동계맥은 조선 순조 26년(1826) 병술(丙戌)에 대은낭오(大隱朗悟) 선사가 지리산 칠불사에서 『범망경』에 의하여 서상수계(瑞祥受戒)한 계맥이다. | |||||||||||
신라 사찬 공영의 아들 옥보고(玉寶高)가 지리산 운상원에 들어가 50년 동안 현금을 연구하여 새로운 곡조 30곡을 지었다. 이 곡조를 속명득(續命得)에게 전하고, 속명득은 귀금(貴金)선생에게 전하였다. 귀금선생이 운상원에서 나오지 않자 신라왕은 금도(琴道)가 끊어질까 염려하여 이찬 윤흥(允興)에게 그 음률을 전수 받게 했다. 이에 윤흥은 안장(安長)과 청장(淸長)을 지리산으로 보내 귀금선생이 비장(秘藏)한 음률을 배워 오게 하니 귀금선생은 표풍(飄風) 등 세 곡을 안장과 청장에게 전했다. 안장은 그의 아들 극상(克相)과 극종(克宗)에게 전했다.(『삼국사기』, 권32. 樂) | |||||||||||
신라 흥덕왕(興德王) 3년(828)에 사신으로 당나라에 간 대렴공(大廉公)이 차 종자를 가져와 왕명으로 지리산 화개동에 처음으로 심었다.
제10송
제17송
칠불사에 주석하셨던 스님들의 다시가 많이 전하는 것도 칠불사가 차의 중흥지로서 주요한 사찰이었음을 의미한다. 서산대사와 부휴대사의 다시를 소개한다.
부휴대사의 다시(茶詩)
화개동이 다도(茶)道의 성지임을 기리고 나아가 다선일여(茶禪一如)의 풍류가 더욱 진작되어 불국정토(佛國淨土)가 이룩되기를 염원하여 통광스님이 칠불사 경내에 다신탑비(茶神塔碑)를 세웠다. |
圓音閣(좌)
범종을 울리는 근본 뜻은 천상과 지옥중생을 제도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종신부는 항아리 모양으로 상대와 하대, 유곽에는 보상화문과 당초문이 새겨져 있고, 9개의 유두 주위에는 연꽃을 새겼다. 그리고 공양상 4구가 돋을새김 되었으며 명문이 새겨져 있다. 위에는 용뉴와 음통이 장식되어 있다.
普說樓(우)
정면5칸의 맞배지붕으로 누각 건물로 문(門)의 역할을 한다. 보설루의 정면에는 "동국제일선원(東國第一禪院)"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창건 이후 이 절은 수도승들의 참선도량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다. |
칠불사의 금당인 대웅전은 팔작지붕에 앞면과 옆면 각 3칸씩의 규모로, 근래에 지은 건물이다.
안에는 최근에 조성한 금동 석가여래좌상과 좌우에 협시하고 있는 문수ㆍ보현 보살좌상의 삼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그 밖에 역시 최근에 조성한 후불탱ㆍ칠성탱ㆍ신중탱 등이 있다.
대웅전 오른쪽에 처마를 나란히 하여 문수전이 자리한다. 팔작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로 근래에 지은 건물이다.
안에는 전각 이름대로 최근에 조성한 금동 문수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고, 후불탱과 신중탱 등의 불화가 있다. 이 문수전은, 칠불사가 문수신앙 도량임을 잘 나타내주는 전각이다.
선방인 아자방(亞字房)은 신라 효공왕) 때 담공 선사가 처음 지은 이중 온돌방이다. 내부의 방 모양이 ‘亞’자와 같이 생겨서 아자방이라 하였다.
아자방은 길이가 약 8m이고, 네 모서리의 높은 곳은 스님들이 좌선하는 곳이며 중앙의 낮은 곳은 불경을 읽는 곳으로 1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다. 이 온돌은 만든 이래 천 년을 지내는 동안 한 번도 고친 일이 없다고 하는데, 불만 넣으면 아래 위 온돌과 벽면까지 골고루 한 달 동안이나 따뜻했다고 한다. 100년마다 한 번씩 아궁이를 막고 물로 청소를 했었다. 하지만 1951년 불에 타 없어졌다가, 근래에 지금과 같이 새로 지었다. 이 아자방은 그 교묘한 구조와 과학성이 인정되어 1979년 세계건축협회에서 펴낸 『세계건축사전』에도 수록되어 있다.
현재 아자방 터가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44호로 지정되어 있다.
↓화엄사의 꽃매화
화엄사 나한전 앞에 핀 꽃매화
볼거리에 담긴 하동의 역사와 문화 | ||
[경남의 재발견-하동군] 강이 품지 못한 삶도 보듬었던 나무들 |
http://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396333
하동은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다. 이곳 사람들 아닐지라도 한번 찾은 이들에게 그리움을 남긴다.
무엇보다 섬진강이 자아내는 은은함 덕일 것이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은 복잡한 이 마음을 소리 없이 위로하고, 어디까지 펼쳐져 있는지 모를 은빛 모래는 지친 이 몸을 포근히 감싼다.
정작 섬진강은 핏빛 다툼에 편할 날이 많지 않았다. 그냥 묵묵히 받아들여야만 했다.
'섬진강(蟾津江)' 이름 유래부터 그렇다. 두치강·모래가람·다사강으로 불렸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다 두꺼비 전설이 담기게 된다. 1385년 왜적이 침략하자 수십만 마리 두꺼비떼가 나타나 울어 대며 쫓아냈다 한다. 여기서 '두꺼비 섬' '나루 진'자를 땄다 한다.
뱃길이 중요 교통수단이던 시절, 이곳은 군침 도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삼한시대 백제가, 이후 통일신라가, 또 지나서는 후백제가 이 땅을 거머쥐었다. 고려·조선시대에는 뱃길 타고 호남지역으로 진출하려는 일본이 하루가 멀다 하고 호시탐탐 노렸다. 조선 후기에는 농민항쟁이 있었고, 일제강점기 때는 의병이 들고 일어났다. 1950년대를 전후해서는 이데올로기 아픔에 핏물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섬진강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쉽게 떠나지는 않았다. '하동 포구 팔십리'를 따라 생활 터전을 이어갔다.
1970년대까지 섬진강을 가로지르는 교통수단은 '줄 배'였다. 광양 진월면 쪽에서는 하동으로 통학하는 이가 많았는데, '줄 배'가 발이었다. 하동 광양·구례를 연결하는 다리가 하나둘 들어서며 그 풍경도 사라졌다. 하동 광평리~광양 다압면을 잇는 섬진교는 1935년 만들어졌다. 6·25전쟁 때 인민군 남하를 막기 위해 폭파됐다가 1980년대 중반 다시 연결됐다. 1992년에는 하동 금남면~광양 진월면을 잇는 섬진강교, 1995년 하동 금성면~광양제철소를 연결하는 섬진대교가 들어섰다.
2003년에는 하동 탑리~구례 간전면을 잇는 남도대교가 개통해 '영·호남 화합 상징'으로 부각했는데, 좀 뜬금 없기는 하다. 남도대교 바로 앞 화개장터가 '화합의 장소'로 한창 드러날 때였다는 점을 떠올릴 만하다. 그래도 이곳 사람들에게는 새삼스러운 시선이었다. 하동과 광양·구례는 '나와 너'를 구분하는 것이 불필요했다. 다리 하나 놓을 때 이름 놓고 지역 간 다툼이 많다지만, 남도대교는 그럴 일도 없었다. 광양에도 재첩이 많이 나지만 '하동 재첩'으로 이름났다고 해서, 반대로 하동도 만만찮은 매실이 '광양' 쪽에서 두드러진다고 해서 섭섭해하는 분위기도 아니다.
추사 김정희 선생도 감탄한 하동 화개차밭./박민국 기자 |
시선을 옮겨보면 하동은 '나무'로도 빠지지 않는 고장이다. 십리벚꽃길 같이 단지 눈을 호사롭게 하는 것만은 아니다.
하동 벚나무는 오늘날 귀한 문화유산으로 남아있기도 하다. 팔만대장경 경판에는 나무 10여 종류가 사용됐다. 특히 산벚나무는 너무 무르지도, 너무 단단하지도 않아 경판으로 더없이 좋았다 한다. 하동 지리산 쪽 벚나무는 이에 적합해 벌목 후 섬진강을 따라 남해 판각 장소로 옮겨졌다 한다.
1950년대에는 부산판자촌 짓는데 사용하기 위해 하동 지리산·광양 백운산에서 벌목한 것들이 섬진강을 타고 수시로 빠져나갔다고 한다.
하동은 차(茶) 시배지다. 신라 828년 흥덕왕 때 당나라 사신으로 간 대렴공이 '차 씨'를 가져오자 왕이 지리산을 지정했고, 화개동천에 심으면서 싹 텄다. 화개차를 맛본 추사 김정희 선생은 "중국 최고 차인 승설차보다 낫다"고 하였다 한다. 화개면 운수리 쌍계사 주변은 지방기념물 61호 '우리나라 차 시배지'로 지정되었다. 화개면 정금리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1000년 차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거대 고목을 생각했다면 조금 실망스러울 수 있겠다. 차 나무는 원래 그리 크지 않아 높이 4m 20㎝·둘레 57㎝에 불과하다.
하동읍 광평리에 있는 소나무숲 '송림'은 1745년 조성돼 백성들 강바람·모래 피해를 덜게 했다. 악양면 '취간림'은 악양천 물을 막기 위해 조성한 숲이다. 지금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밝힌 고 정서운 할머니 뜻을 기린 '평화의 탑'이 있어 의미를 더한다.
하동읍 광평리에 있는 '송림'은 1745년에 조성돼 섬진강 바람과 모래 피해를 막아주는 구실을 했다. /박민국 기자 |
악양면에는 눈길 사로잡는 소나무가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들판 한가운데 우두커니 자리하고 있는 '부부송', 11그루 소나무가 하나처럼 보이는 '십일천송', 큰 바위를 마치 뚫고 나온 듯한 '문암송(천연기념물 491호)'이다.
옛 시절 섬진강 주변은 대나무 숲을 이루고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졌다. 제방공사가 이러한 아쉬움을 남겼지만, 대신 비옥한 땅을 만들기도 했다. 오늘날 섬진강 빛과 흡사한 은빛비닐하우스가 강 주변을 차지하고 있다.
쌍계사와 함께 하동을 대표하는 사찰로 칠불사(七佛寺)를 꼽을 수 있다. 가락국 태조 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이곳에서 수도한 후 성불하였다고 해서 이름 지어졌다. 만들어진 시기는 서기 103년으로 전해진다. 이는 서기 48년 세워졌다고 전해지는 김해 장유사(長遊寺)와 함께 '불교 남방유래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의미 부여되고 있다. 수로왕과 왕비 허황옥(許黃玉)이 왕자들 보러 섬진강 뱃길로 들어와 오늘날 십리벚꽃길을 지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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