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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의 세계(下) - 믿음은 도의 근원, 공덕의 어머니

화엄행 2013. 3. 7.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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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믿음은 도의 근원, 공덕의 어머니 

   비로자나불의 세계는 말로써 설명할 수가 없다. 절대의 세계, 완성된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앞서 말한바와 같이 이것을 인분(因分)으로 말하는 것이다. 인분이란 보살의 수행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것을 신위(信位)로부터 설명한다. 신만성불(信滿成佛)이라고 하여 믿음이 완성되면 그것이 그대로 성불인 것이다. 참된 믿음에 눈뜨면 거기에 부처님의 광명이 빛나고 있는 것이다. 만(滿)은 만족하다는 뜻으로 믿음이 만족스럽게 갖추어지면 그것이 그대로 성불이라는 말이다.
   이 점을,「발심한 보살은 곧 그것이 부처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처음 발심한 보살이 그대로 부처님이라는 말이다.
   우리들의 마음에도 보현보살을 볼 힘이 갖추어 있다. 보현의 행 즉 자기가 진실한 행[보현행(普賢行)]에 눈 뜨면 그것으로서 보현보살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점이 화엄경의 인분가설(因分可說)의 첫째가는 주안점(主眼點)이다. 진실한 행이란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것이 보현행으로서 선재동자가 문수보살의 가르침을 받아 보리심을 일으키고 보현행을 깨달으며 53선지식을 찾아 배우고 최후에 보현보살을 뵈옵게 되어 법계에 깨달아 들어갔다 하는 것은 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品)에 상세히 말씀되어 있다. 여기서 보현보살을 뵈올 수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우리들도 참된 행을 깨달으면 보현보살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믿는다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것을 알게 된다.
   이 믿음에 대하여는 십신(十信)의 단계로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십신에서 다시 나아가 십주(十住) · 십행(十行) · 십회향(十廻向) · 십지(十地) · 등각(等覺) · 묘각(妙覺)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등각이라 하는 것은 깨달음과 같다는 뜻으로 보살이면서 동시 부처님인 단계를 말한다. 다음은 묘각인데 이것은 부처님으로서 수행의 마지막 단계이다. 
  「믿음」에 대하여 화엄경에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믿음은 도의 근원이고 공덕의 어머니가 되나니 일체 선법을 자라게 하며,
     모든 의혹을 모두 끊어 없애어 무상도를 열어 밝게 드러낸다.
     신위도원공덕모(信爲道元功德母) 증장일체선법(增長一切善法)
     제멸일체제의혹(除滅一切諸疑惑) 시현개발무상도(示顯開發無上道)」

   믿음에 관하여는 화엄경에 여러 가지로 설명되어 있으나 이,「믿음은 도의 근원이고 공덕의 어머니가 된다」라고 한 말씀은 유명하다. 믿음은 모든 도의 근원이 된다. 불교수행의 근본이고 믿음은 온갖 공덕의 어머니이다. 참된 신앙만 있으면 저절로 좋은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을 공덕의 어머니라고 하는 것이다.
   믿음에 의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에 들어가고 온갖 수행을 하여 공덕을 쌓을 수 있다. 믿음에 의하여 온갖 선법을 증대시킬 수 있다.
   믿음에 든다고 하는것은 의심을 끊는 것이다. 의심이 있고서는 신앙의 길은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모든 의혹을 제하여 없앤다.」라 하는 것이다. 또 위 없는 도를 나타내고 계발한다고 하였다. 위 없는 도라 하면 부처님을 말한다. 또, 믿음이란「마음이 맑고 조촐한 것」이라고도 설명했다. 
   우리들의 때묻은 마음을 맑게 하는 것이 믿음이다. 부처님을 믿으면 저절로 부처님 힘에 감화되어 때묻은 마음이 맑아지는 것이다. 부처님은 비로자나로서 순수하고 청정하므로 이러한 부처님을 대하고 부처님을 믿을 때 자기 마음이 저절로 아름답게 바뀌어 가는 것이다. 또는 법을 믿는 것이다. 법은 진실을 가르친다. 끊임없이 마음에서 법을 생각하며 마음이 진리에 동화되어 차차 마음이 맑아진다. 이것이 믿음이다. 그리고 이 믿음 가운데는 이미 깨달음의 지혜가 갖추어 있다고 보는 것이「신만성불」의 뜻이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깨달음의 지혜를 머금은「믿음」의 힘이 갖추어 있다고 하는 것이 화엄경의 인과일여(因果一如)의 사상이다.
   그렇지만 우리들의 마음에는 번뇌가 있다. 욕망이라든가 노여움이라든가 타인에 대하여 교만심이나 질투심을 갖는 등 번뇌가 있어서 마음의 본성인 지혜가 어두워진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비록 그러하나 번뇌가 있더라도 거기에 믿음이 숨겨져 있는 것이므로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믿음의 힘을 키워가면 마음은 저절로 밝아지고 깨달음의 지혜가 나타난다고 하는 것이 불교의 입장이다.
   거기에, 「불법의 바다는 믿음으로서 능히 들어간다」라 하는 까닭이 있다. 

     [5] 이타행이 수행의 근본

   화엄경에는 여래성기품(如來性起品)이 있다. 여기서는「여래의 성기」를 말씀하고 있는데 여래가 불성(佛性)이라는 형태로 우리들의 마음 속에 있고 그것이 나타나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우리 모두에게는 불성이 있다. 그리고 그 불성이 수행에 의하여 나타나게 된다. 불성은 반드시 깨닫게 된다. 언젠가는 그 모습을 나타낸다. 이것을 성기(性起)라 한다.
   화엄경에는 연기(緣起)에 대하여 성기를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의심이 있으면 성기는 일어나지 않는다.
  「생사의 집은 의심으로 소지(所止)를 삼으며 열반의 성에는 믿음으로써 능히 들어감을 삼는다」
라고 하였다.
   소지라함은 멈추는 곳이라는 뜻이다. 우리들은 의심에 사로 잡혀서 생사세계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우리들이 의심에 머물러 있는 한 결코 생사세계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다음에 열반의 성은 믿음으로써 능히 들어감을 삼는다 하였다.
   십신(十信)의 단계에서 믿음이 완전하게 되면 다음의 십주(十住)로 나아간다. 십주의 맨 처음은 초발심주(初發心住)라고 한다. 믿음이 완성되면 보리심을 일으킨다. 그리고 거기에 신만성불이 있다.
   이 십주를「진제(眞諦)의 공리(空理)에 안주한다」고 한다.
   불교의 행은 이타(利他)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타인에 대하여 선(善)을 행하는 것이 불교의 행인데 그것을 공의 입장에서 행한다. 어느 입장에서 선에 사로 잡히면[집착하면] 괴로움의 원인이 된다. 선을 행하기에 앞서 공의 도리를 단단히 몸에 익힐 필요가 있다.
   공에 머무르면 우리들이 어떤 경지에 몰리더라도 괴로움에 떨어지지는 않는다. 슬픔도 넘어설 수가 있다.
   대개 불교를 믿는다고 하여 반드시 불행이 없다고는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누구나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으로서 죽음은 최대의 불행이다. 그러나 공에 머무르면 어떤 불행에 직면하더라도 괴로울 것이 없다.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우리들은 원한에 사로잡히거나 과거에 행한 선행에 사로잡힐 때도 있다. 거기에서 괴로움이나 슬픔이 일어난다. 선을 행하더라도 세간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이 불만이 되기도 하고 괴로움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화엄경에서,「진제의 공리에 안주한다」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서 이타행이 나오게 된다.
   이타행이라 하더라도 행은 거짓 있는 모양이다. 가유(假有)다. 사물을 인정하지 아니하면 행은 성립되지 않지만 공의 입장에서 사물의 참 모습을 보는 것이 가유의 입장으로서 거기서 이타행이 나오게 된다.
   즉 타인을 위하여 도움을 주는 행 가운데 참된 기쁨이 있다. 참으로 사는 기쁨이라 하는 것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아니고 타인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다. 이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십행의 단계이다.
   그 다음에는 좋은 일을 행하더라도 그것을 자기 것으로 하지 않고 성불로 회향하는 것을 말씀한 것이 십회향이며 다시 그 위의 십지(十地)가 있다.
   요컨대 화엄경은 신위(信位)의 이해가 중요하다. 참된 믿음을 얻는 것으로서 법계에 드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여기서 화엄경이 이해하기 어려운 경전이면서도 범부들이 친근할 수 있는 경전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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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일본「재가불교(在家佛敎)」327호의 전역이다.<편집부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