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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의신앙세계(中) - 탄허(오대산 월정사 조실)

화엄행 2013. 3. 7.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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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의신앙세계(中)   탄허(오대산 월정사 조실)

 

 

초발심시(初發心時) 변성정각(便成正覺)이라는 말은 화엄경에서만 나온다. 믿음이 만족하면 바로 발심주(發心住)가 되는 것이다. 발심주에 곧 발심하면 곧 정각을 이루는 도리가 있다. 부처님의 과덕(果德)과 내 마음이 똑 같다고 믿으면 발심주가 되는 것이다. 주(住)라 하는 것은 진리에 머물러 있다는 뜻이다. 주에 머무는 다음은 십행(十行)이다. 십행이 나오는 것은 주는 진리의 핵심이라면 행은 외각면이다. 한쪽으로 치우치면 안 된다. 주에 치우쳐도 안 되고 행에 치우치면 도로 세속이 된다. 그러므로 행에 치우치지 말고 주로, 주로 치우친 것은 행으로 그렇게 하여 주와 행이 하나로 되는 것이 회향(廻向)이다. 십신(十信)·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廻向), 이렇게 해서 보살이 닦아가는 십지(十地)가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고 보면 화엄경의 수행은 특별한 사람이나 하는 것이지 세간 사람은 할 것이 못 된다 하고 공포심을 낼 것이다. 그러니까 거기에서 선재동자(善財童子)와 같은 박지범부(薄地凡夫 )를 대표하는 군상(群像)들이 나와서 여실하게 성취하는 과정을 보인 것이다. 선재동자의 일행은 오백 동자, 오백 동녀, 오백 우바새, 오백 우바이, 육천 비구 등 일만 팔천의 대중들이었다. 이들 모두가 박지범부다. 선재동자가 앞장이 되어 五十三 선지식(善知識)을 차례로 친견하고 일생동안에 광겁지과(廣劫之果)를 다 마쳐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 중생은 할 수 없다는 생각은 낼 여지가 없다. 누구나 광겁지과를 일생 동안에 다 마치는 것이다.

 

마음과 부처와 중생의 이 셋이 원래로 차별이 없다[心佛及中生是三無差別]하는 것이 화엄경의 도리이다. 누구든지 할 수 있고 성취할 수 있는 것이 화엄경 도리이다. 이것을 못 믿으면 이것은 열기(劣機)라고 한다. 근기(根機)가 났다는 뜻이다. 이 도리를 믿는 중생을 대심(大心)중생이라고 한다. 대심중생이라 하는 것은 부처님과 중생이 과덕에 있어 다르지 않구나 하는 것을 미는 중생을 말한다. 그러므로 통현론[通玄의 華嚴論]에 이르기를 [다른 경에게 혹 퇴전(退轉)하는 것이 있지만 이 화엄경에서는 퇴전이 아예 없다]고 말하였다. 절대로 퇴전이 없다고 말하였다. 절대로 퇴전이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퇴전이라 하는 것은 [나는 안 된다, 나는 할 수 없다]고 하는 데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심불급중생(心佛及中生)이 차별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퇴전의 여지가 있겠는가. 참으로 이 점이 화엄경의 독특한 경지라 할 수 있다.

 

 

③청량소(淸凉疏)와 통현론(通玄論)

 

이에 대하여 청량국사는 세 가지 부차(復次)를 세워서 설명한다.

제 일 부차(第一復次)에서는 생생이 자유(自有)라, 중생과 중생이 스스로 다 갖추어 있다 하는 것이고, 제이부차(第二復次)에서는 타과(他果)가 재아(在我)라, 다른 사람의 과덕이 나에게 있다는 것이고, 제삼부차(第三復次)에서는 당과(當果)가 재아(在我)라, 당래(當來)에 내가 성불할 과덕이 지금 나에게 있다. 이렇게 삼부차(三復次)로 밝힌바 있다. 이것은 물론 훌륭한 말이다.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면 이 모두는 시종 연기(緣起)를 벗어나질 못한다. 본체적(本體的) 규명(糾明)이 못되는 것이다. 그런데 통현(通玄)의 화엄론의 대의(大義0는 무엇이었던가? 그 사구게(四句偈)를 살펴보자.

불시중생심리불(佛是衆生心裡佛)이니 부처는 이것이 마음 속의 부처이니[삼부자 같은 어름한 말이 없는 것이다] 수자근감 무이물(隨自根堪無異物)이라 자기 근기가 감당함을 따르고 다른 물건이 없으니[자기 근기를 따라서, 자기 근기가 감당해서 옳소! 하면 그것밖에 다른 물건이 아닌 것이다. 이 도리는 참선하는 사람이 아니면 믿지를 못한다] 욕지일체 제불원(欲知一切諸佛源)인댄 제불의 근원을 알고자 할진댄, 오자무명(悟自無明)이 즉시불(卽是佛)이라. 망상이 우글우글하는 이놈이 문득 부처인 것을 깨달을지라 하였다. 이것이 통현장자의 화엄론 四○권의 대의인 것이다. 앞서 말한 청량소의 삼부차와 비교하여 보건대 청량소의 삼부차는 그 취지가 종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연기를 면하지 못한다. 본체론이 못된다. 그래서 역대 조사들이 통현론을 중시해온 것이다.

 

덕홍각범(德洪覺範)선사는 임간록(林間錄)에서 통현장자의 인품을 찬탄하여 말하기를, 호수사령(虎受使令)은 심경공(心境空)이요―호랑이의 사령을 받으니 마음 경계가 공하며―여위 반조(女爲伴助)는 증애기(憎愛棄)라―천녀가 딸이 되어 도움을 받으니 미움과 사랑을 버림이라.

관잡전심(冠帀傳心)은 즉속진(卽俗眞)이요―흰 베로 관을 삼고 마음을 전하니 속(俗)에 즉(卽 )하여 진(眞)이 되느니라. 방우시법(方隅示法)은 즉 사리(卽事理)라―방우에서 법을 보이니 사리에 즉함이라. 지장조백(只將棗栢)으로 천재발(薦齋鉢)은―다만 대추와 잣 이파리로 바룻대를 채운 것은 아래염부비착미(我來閻浮非著味)라―내가 염부에 온 것이 맛에 집착함이 아니라 하였다. 이 말은 통현장차의 인품을 찬탄한 것이 四十권론을 찬탄한 것은 이렇다. 성현낙생 범유중(聖賢駱生凡乳中)하니―서연의 젖이 범부의 젖 가운데서 나니, 유유관조 정혜력(唯由觀照定慧力)이라―다만 관하여 비추는 정혜의 힘으로써만 나는 것이니 이색공관 일체경(以色空觀一切境)하니―색이 공한 관으로써 일체 경계에 들어가니, 주도근경 무전우(走刀筋脛無全牛)라―칼이 근경에 달리매 온전한 소가 없더라. 이렇게 각범선사가 칭찬하였다.

정말 아무리 읽어봐도 권태가 나지 않는 글은 화엄론이다. 재미가 있고 한 장만 읽어도 화엄경을 떡 주무르듯 주물러진다. 그러나 청량소는 몇 장을 넘겨도 화엄경이 어디에 가 붙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화엄론을 다들 정독하기를 권하여 마지 않는다. *(문책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