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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影幀 摸寫와 眞殿 運營에 대한 고찰

화엄행 2010. 12. 8. 01:22

http://kyujanggak.snu.ac.kr/HEJ_GAE/GAE_00_00_00_00_013.jsp?ptype=class&subtype=ga&lclass=02

 

13. 조선후기 影幀 摸寫와 眞殿 運營에 대한 고찰

 

목차

머리말

一. 肅宗代 內外眞殿의 成立

  1. 南別殿 重建과 太祖 影幀摸寫

  2.1713년(숙종 39) 御容 圖寫와 眞殿 奉安

二. 英祖代 御眞奉安處의 확대

  1.1748년(영조 24) 肅宗影幀摸寫와 永禧殿 확장

  2. 御眞圖寫의 定例化와 奉安閣의 첩설

三. 19세기 眞殿 運營의 실제

  1. 純祖~哲宗代 眞殿 운영과 御眞圖寫

  2. 高宗代 眞殿 운영의 변화

맺음말



머리말

  

1688년(숙종 11) 肅宗은 全州 慶基殿의 太祖影幀을 서울로 가져와 새로 모사한 후 南別殿[永禧殿]에 봉안하였다. 영정을 실은 배가 한강을 건넜을 때 숙종은 직접 나루에까지 나가 영정을 맞이했고 함께 궁궐로 들어왔다. 1695년(숙종 21) 숙종은 태조의 영정을 모사했던 화원에게 자신의 御容을 그리게 한 후 이를 江都[강화도]에 봉안하였고 그 봉안처에 ‘長寧’이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1713년에는 즉위 40년을 기념하여 尊號를 올리고 稱慶·陳賀하는 여러 의식과 함께 다시 御容을 그린후 江都와 궐 내의 眞殿[璿源殿] 및 五臺山 璿錄閣에 봉안하였다. 

兩亂 이후 국왕의 초상을 다시 그리기 시작한 것은 숙종대부터이다. 世傳되던 선왕의 어진을 보수하는 정도에 그쳤던 그 이전의 前例에 비추어볼 때 숙종이 태조의 영정을 그려 都城內의 진전에 봉안하고 자기의 御容까지 그려 봉안처소를 마련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숙종에 이어 英祖도 선원전에 봉안되었던 숙종의 어진에 흠이 있다면서 永禧殿을 5실로 확장한 후 새로 그린 숙종의 어진을 봉안하였다. 英祖는 10년에 한차례씩 어진 그리는 것을 정례화하여 13본에 이르는 어진을 남겼다. 그리고 이 어진들을 慶熙宮의 泰寧殿, 江都의 萬寧殿, 生母의 사당인 毓祥宮 및 자신의 私家인 彰義宮에 봉안했다. 또한 숙종대에서 영조대를 거쳐 정조 초반에 이르기까지 國家典禮에서 眞殿 관련 의식은 크게 늘어났다.1)

  이에 대해서는 김지영, 2004 〈18세기 後半 國家典禮의 정비와 「春官通考」〉「한국학보」 114, 118~ 122쪽 참조.

  

현재 奎章閣에는 조선후기 영정모사 또는 어진도사의 사실을 기록한 10종의 의궤가 전해진다.2)  이 10종의 의궤는 1688년 「(太祖)影幀摸寫都監儀軌」(奎13978), 1713년 「御容圖寫都監儀軌」(奎13996) 1735년 「(世祖)影幀摸寫都監儀軌」(奎14922), 1748년 「(肅宗)影幀摸寫都監儀軌」(奎13997), 1837년 「(太祖)影幀模寫都監儀軌」(奎13980, 13981) 1872년 「御眞移摸都監廳儀軌」(규13998/13999) 1899년 「影幀摸寫都監儀軌」(奎13982/13983/13986/13988/13989/ 15069), 1900년(광무4) 「影幀摸寫都監補完儀軌」 (奎13984), 1901년(광무 5) 「影幀摸寫都監儀軌」(규13990-1/13990-2/13992/13994) 1902년(광무6) 「御眞圖寫都監儀軌」(奎14000/ 14001) 등이다.

 

이 의궤에는 행사가 시작되게 된 계기로부터, 행사를 준비하는 구체적인 과정과 그 가운데에서 봉착한 문제들, 摸寫 후의 봉안의식과 마무리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인 사실이 담겨져 있다. 의궤의 기록을 중심으로 조선후기 影幀·御眞 관련 의식의 실제를 살펴보고 이 시기 御眞 奉安處所 확대와 진전 운영방식변화의 의미를 고찰하고자 한다.



一. 肅宗代 內外眞殿의 成立 

 1. 肅宗代 南別殿 重建과 太祖影幀摸寫


18세기 새로운 眞殿制度 성립의 序幕을 연 것은 肅宗初 南別殿 重建 사업이었다. 前期 이래의 진전제도가 兩亂을 거치면서 무너진 상태에서 朝鮮은 난 후 보전된 서울 南別殿,3) 全州 慶基殿, 永興 濬源殿 등 3개소의 眞殿을 겨우 유지해가고 있었다.  南別殿은 현재 서울시 중부경찰서 자리에 있었다. 1690년(숙종 16) 永禧殿으로 개칭되었다. 1900년(광무 4)에 장조의 부묘로 비워진 채 있었던 경모궁 자리로 옮겨 건립되었다. 영희전에 봉안되었던 어진들은 1908년 ‘享祀釐正에 관한 件’이라는 칙령이 내려지면서 모두 창덕궁 내의 璿源殿으로 옮겨졌다.(장필구, 2004〈복원연구를 통한 영희전의 고찰〉(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조선시대 어진을 봉안하는 진전제도는 크게 태조의 어진을 보관하는 각처의 太祖眞殿과 先王·先后의 어진을 봉안하는 서울의 璿源殿으로 나누어 마련되었다.4)조선시대 진전제도에 일반에 대해서는 조선미, 1983 「韓國肖像畵 硏究」 (悅話堂) 4장 1절이 참조가 된다 1983 「韓國肖像畵 硏究」 (悅話堂) 4장 1절이 참조가 된다. 國祖로서 태조 진전은 모두 여섯 곳이 건립되었는데 서울의 文昭殿, 永興 濬源殿,5) 濬源殿은 咸鏡道 永興府 順安社 黑石里에 세워진 태조진전이다. 이 곳은 桓祖의 舊邸이며 태조가 태어난 곳으로 1396년(태조 5)에 창건하여 태조의 수용을 봉안하였다. 조선후기까지 외방의 태조진전으로 계속 존속된 곳은 영흥 준원전과 전주 경기전 단 둘 뿐이었다. 平壤 永崇殿,6) 永崇殿은 평안도 평양부 성내 高麗 長樂宮 옛터에 세워진 태조진전이다. 국초에 창건되어 태조의 어진을 봉안하였다. 임진왜란 때 다른 곳으로 옮겨 영정이 보존되었다. 光海 초에 예관을 보내 봉선전에 모셔져 있던 세조 영정과 함께 환안하도록 하였는데 이루지 못하고 水原과 開城에 임시로 봉안하였다. 1619년(광해 11)에 다시 서울의 남별전에 이안하였다가 1622년(광해 14) 강화도에 영숭전을 세우고 태조어진을 봉안하였다. 병자호란 때에 영숭전이 파괴되고 어진도 찢어져 난이 끝난 후 남은 조각을 종묘 북쪽 계단에 매안하였다. 開城 穆淸殿,7) 穆淸殿은 開城府 崇仁門 안 태조의 옛집에 세워졌다. 태종조에 창건되어 태조의 어진을 봉안하고 사우를 세웠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소실되었다.(「春官通考」 卷26, 吉禮, 舊眞殿) 1900년(광무 4) 개성 유생들의 요청에 의해 복설되었다. 慶州 集慶殿,8) 集慶殿은 慶尙道 慶州府에 세워진 태조진전이다. 임진왜란 후 江原道 江陵으로 옮기고 역시 집경전이라 칭했다. 1631년(인조 9)에 집경전에 화재가 나 어진이 불타버리자 영흥 준원전의 어진을 이모하여 다시 봉안하였다. 이후 폐지되었는데 자세한 시기는 알 수 없다.(「춘관통고」권 26, 吉禮, 舊眞殿) 全州 慶基殿9) 慶基殿은 전라도 전주부 남문 내에 세워진 태조진전이다. 1410년(태종 10)에 창건되었다. 이곳에 봉안되었던 태조의 영정은 임진왜란 때에도 무사히 보존되었다. 1688년(숙종 14)에 경기전의 어진을 서울로 옮겨 2본을 이모한 후 하나는 서울의 남별전에 봉안하고 하나는 이듬해에 還安하였다. 등이 그것으로 1418년(태종 18) 이전에 모두 완성되었다. 한편 先王·先后의 어용을 봉안하는 璿源殿은 세종대에 마련되었다. 당초에는 궁궐 밖 종부시 서쪽에 있었는데 1438년(세종 20)에 경복궁 文昭殿 동북쪽에 새로이 선원전을 지어 모두 옮겼다. 

이렇게 잘 갖추어진 진전에 보관되어 오던 태조 이래 역대 국왕 및 왕후의 영정은 임진왜란이 일어나 일대 수난을 겪게 된다. 서울이 함락되고 경복궁이 불타면서 선원전의 어진은 모두 소실되었다. 平壤 永崇殿의 태조 영정은 宗廟 御寶와 함께 평양에 파묻어 보존하도록 하였지만 결국 소실되었다. 慶州 集慶殿의 태조어진과 광릉 奉先殿의 세조 어진은 각각 진전 참봉과 奉先寺의 승려 三行의 공으로 보존되었다.10)「선조실록」 선조 26년 3월 16일 경기전의 영정도 무사히 꺼내 아산으로 옮겨 보존하였고 영흥 준원전의 영정은 땅에 묻어 보존하였다. 

왜란이 끝난 후에 다시 난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난 중에 보존된 慶基殿의 태조영정,11) 당시에 아산현에 보관되어 있었다. 奉先殿의 세조영정 및 禮安에 옮겨져 있는 경주 集慶殿의 태조영정을 서울로 옮겨 종묘에 임시로 안치해두었다가 다시 각처로 돌려보내자는 의견이 있었다. 강화를 거쳐 묘향산으로 갔던 영정은 各處의 眞殿이 차례로 복구되면서 원래의 자리를 찾아갔다. 

1614년(광해 6)에는 전주 경기전을 중건하여 묘향산에 있던 태조영정을 옮겨 봉안하였다.12)「광해군일기」 광해 6년 6월 8일 1617년(광해 9)에는 전주 경기전에 관원을 파견하여 태조영정을 모사한 후 平壤 永崇殿에 봉안하려다가 이루지 못하였고 1619년(광해 11)에는 개성과 수원에 머물러 있던 영숭전의 태조영정과 奉先殿의 世祖影幀을 일단 서울의 奉慈殿으로 옮기고 南別殿으로 고쳐 부르도록 했다.13) 奉慈殿은 광해군의 생모인 恭嬪 金氏의 신주가 모셔져 있던 곳이다. 1615년(광해 7)에 공빈이 공성왕후로 추존되어 종묘에 부묘된 후 비워진 상태로 있었다. 

1624년(인조 2) 李适의 亂이 일어나 朝廷이 남쪽으로 피난할 때 도성 내 남별전의 太祖·世祖 영정은 영정축만을 제거하고 옮겨 무사히 보존되었고 강화부에 영숭전이 건립된 후 이곳으로 옮겨졌다. 1631년(인조 9)에는 불과 3년전에 새로 지은 江陵의 集慶殿에14) 왜란 전에 집경전은 경주에 있었는데 여기에 봉안된 영정을 예안에 옮겨 두었었는데 1628년(인조 6) 강릉에 새 집경전을 세우고 영정을 옮겨 봉안하였다. 불이 나 여기에 모셔졌던 태조영정이 소실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으로 강화부 영숭전의 태조영정을 잃어버렸다가 후에 되찾았으나 너무 손상된 곳이 많아 埋安하였으며 세조의 영정은 성 밖에서 찾아 원종의 영정을 모신 서울의 崇恩殿에 봉안하였다가 후에 남별전을 중수한 후 옮겼다. 濬源殿과 慶基殿의 태조영정은 난 중에도 무사히 보존되었다.15) 준원전의 영정은 난 중에 옮겼다가 1641년(인조 19)에 정전 공사를 마친 후에 다시 봉안되었다. 경기전의 영정은 강화 적상산성으로 옮겼다가 다시 전주에 봉안하였다. 

숙종이 1677년(숙종 3)에 서울의 南別殿을 重建한 것은 유지·보수에 그치고 있었던 양난 이후 진전 운영에 새로운 출발을 알렸다.16) 숙종대 남별전 중건에 대해서는 현재 규장각에 소장된 「南別殿重建廳儀軌」(奎14353)를 참고하면 그 상세한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또 파리국립도서관에는 본 행사와 관련된 御覽用 儀軌가 소장되어 있다. 남별전 중건의 이유는 이 곳이 주변 여염집들과 섞여있어 호위와 순라 등에 어려움이 있고 또 부분적으로 퇴락하여 전면적인 보수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남별전 터에 재건립하는 방안과 인경궁17) 광해군대 인왕산 아래에 세운 궁궐로 인조반정으로 완공을 보지 못하였다가, 그 후 창덕궁을 보수하기 위해 해체되어 숙종 당시에는 터만 남아 있었다. 정전 터로 옮기는 방안 등이 논의되다가 이전의 터를 다지고 중건하는 것으로 결론지워졌다. 남별전에 봉안되어 있던 世祖와 元宗의 영정은 慶德宮의 資政殿에 임시로 옮겼다가 완공된 후 다시 옮겼다.18)「숙종실록」 숙종 3년 7월 11일 주목되는 사실은 이 때에 남별전에 봉안될 영정이 2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세 칸으로 건축되었다는 것이다.19)「숙종실록」 숙종 3년 5월 6일 새로운 한 칸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1688년(숙종 14) 肅宗은 宗室 李侃의 차자를 받아들여 남별전의 남은 한 칸에 太祖御眞을 봉안하기로 결정했다.20)「(太祖)影幀摸寫都監儀軌」 戊辰三月三日. 예조에서는 1656년(효종 7)과 1661년(현종 2)에 이미 이러한 논의가 있었으나 물력의 부족으로 시행하지 못했던 일이며, 남별전을 중건할 때 3실로 만든 것이 태조영정을 보관하려는 계획이었음을 상기시키면서 역시 영정을 모사하여 봉안하자고 청했다.21)「숙종실록」 숙종 14년 3월 3일 즉 남별전을 3실로 구축한 것은 태조어진 봉안을 염두에 둔 일이었다. 그렇다면 왜 태조어진이었을까. 

양난 이후 조선은 국가적으로 많은 피해를 입어 어려움을 겪었지만 기록이 파괴되고 물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조선전기에 마련되었던 여러 제도들이 제대로 복구되지 못한 채 거의 한 세기를 보냈다. 그러나 차츰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는 성리학적 역사의식을 중심으로 내적인 치유를 해나가려는 지배층의 공감대가 형성된 가운데 조선전기의 역사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이를 국가적으로 공인하는 작업을 단행한다.22) 정옥자, 1998 〈조선중화사상연구〉(일지사) 顯宗은 태조의 계비인 神德王后 강씨를 종묘에 부묘하는 의식을 거행하였고 숙종은 1681년(숙종 7)에 廟號가 없었던 조선조 2대 국왕에게 ‘定宗’이라는 廟號를 올리고 諡號를 추상하였으며 1683년(숙종 9)에는 太祖와 太宗에 시호를 더해 올리는 의식을 단행하였다.23) 숙종대 태조, 태종에 대한 시호추상의 구체적인 과정과 그 정치적 의미에 대해서는 김호, 2003 〈1683년(숙종 9) 태조 및 태종의 시호가상과 「태조시호도감의궤」〉〈규장각소장의궤해제집〉2 참조. 현종이 神德王后 康氏를 祔廟한 것이나 定宗의 廟號를 올린 일의 경우에는 ‘당연히 했어야 했지만 당시의 여러 가지 정치적 여건 때문에 이루어지지 못해 宗廟의 禮典에 흠이 되기에 바로잡는다’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太祖와 太宗에게 諡號를 더해 올린 일은 이와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태조 시호 추상의 논의가 시작된 것은 宋時烈의 箚子로부터 시작되었는데 태조의 徽號가 여덟자로 후대의 국왕인 世祖와 宣祖보다 휘호의 글자 수가 적기 때문에 휘호를 더 올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표면적인 것은 글자 수를 늘리는 것이었지만 송시열의 의도는 조선이라는 국가의 존재 이유를 보편적인 원리로써 밝히고 이를 공인받는 것이었다. 송시열은 조선 개국의 정당성을 春秋大義를 밝힌 것에서 찾고 태조 공업의 가장 위대한 내용 또한 이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때문에 ‘威化島 回軍’의 공로를 諡號에 반드시 밝혀야 한다고 했다.24) 김호, 윗글 296~301쪽. 이는 성리학적인 기준으로 조선의 역사를 재평가한 것으로 이는 달리 생각하면 성리학적인 기준에 맞지 않으면 자신들의 國王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분명하고 단호한 입장의 재확인이기도 했다. 國王의 입장에서는 國祖와 先王에 대한 시호 추상이 조선 역대 왕업의 위대함을 다시 일깨움으로써 이를 계승한 국왕으로서의 자기 위상을 강화할 수 있는 기회로 받아들여졌기에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결국 국왕과 사대부의 명분과 이해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시점에서 太祖가 再發見되었으며, 조선이라는 국가의 정신적 가치를 재천명하고 王業의 위대함을 표상하기 위해 태조의 영정이 도성 내 진전에 봉안된 것이다. 

1688년(숙종 11) 당시 태조 영정은 영흥의 濬源殿과 전주의 慶基殿 두 곳에 봉안되어 있었다. 1656년(효종 7) 논의 당시 경기전의 영정을 모사하자고 결정되었던 바 있었으므로 이번에도 그 결정을 따르기로 하였다. 이전에 眞殿에 봉안된 영정을 재모사할 때에는 언제나 신하들과 畵員을 해당 진전으로 파견하여 모사하게 하고, 그린 후에는 새로운 장소에 봉안하였다. 그러나 1688년에는 영정 모사 과정을 국왕과 대신이 직접 감독할 수 있도록 서울로 가져와 작업하였다. 영정이 서울로 올라오게 됨에 따라 국왕이 공식적으로 영정모사와 관련된 거둥을 할 일이 많아졌고 영정이 올라오고 다시 봉환되는 내내 태조 영정모사 의식의 의미가 선전될 수 있었다. 또한 국왕이 郊外로 나아가 맞이하는 의식이나 外方까지 널리 畵師를 구하는 과정 등을 통해 영정모사의 정치적 효과는 배가되었다.25) 1688년 영정모사의 상세한 과정에 대해서는 김지영, 2002 〈숙종대 진전제도의 정비와 「(태조)영정모사도감의궤〉「규장각소장의궤해제집1」 참조. 

전주 경기전에 봉안되어 있던 영정은 4월 8일에 서울로 옮겨져 慶德宮 資政殿에 봉안되었다. 영정을 옮기는 일이 국왕의 행차에 버금가는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고 인식했기 때문에 儀仗과 差備에 많은 신경을 써 세심하게 준비를 했다. 이를 위해 도제조 1, 제조 예조판서, 도청, 낭청 각 1명씩 파견되었다.26) 陪行하는 신료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都提調 領中樞府事 金壽興, 提調 兼 禮曹判書 南龍翼, 都廳 弘文館 副應敎 李墩, 郎廳 禮曹正郞 魏定相, 承政院左承旨 李玄錫, 藝文館奉敎 沈季良, 兵曹參知 金萬吉, 京畿殿參奉 沈若潢 또 禁漏에서는 奏時官을 파견하고 漏器도 실어보내 정확한 의식의 수행을 가능하도록 했다. 영정은 黑長櫃에 담은 후 神輦에27) 영정을 옮기는 가마를 말한다. 영정을 옮길 때에는 輦과 輿가 이용되었는데 국왕이 행차할 때 궁 안에서는 輿를 타고 궁 밖으로 나갈 때 輦으로 갈아타는 것과 같은 방식을 적용하였다. 神輦의 가로받침목의 길이는 포백척으로 4척 9촌으로 이를 기준으로 도로와 교량을 고쳐 만들도록 했다. 신연의 앞에는 芙蓉香을 꽂았고 향정에는 沈束香을 사용하였다. 실어 옮겼는데 30명의 군사가 각읍에서 차출되어 이 일을 담당하였다.28) 신연을 지는 협연군은 모두 紅號衣를 착용하였다. 연·여를 지는 군인과 의장군인들이 모두 같았는데 이를 위해 紅衣, 紅巾, 紅帶를 중앙에서 새로 염색하여 내려보냈다. 당초에는 군인들이 교대할 때마다 옷도 서로 갈아입도록 했다가 시간이 지체될 염려가 있다고 하여 그 수만큼 추가하여 지급하였다. 또 일정한 거리마다 교대해주고29) 애초에는 매 15리에서 20리마다 군사를 교대해주도록 했는데 실제 가마를 옮겨보니 한번에 18명 밖에는 가마를 멜 수가 없어 교대해주는 거리를 10리간으로 줄이도록 했다. 30명의 군사를 더 차출하여 사고 등으로 부족해지는 인원을 메우게 했다. 

한편 영정이 서울로 들어오기 전 숙종이 직접 한강 나루에 나와 영정을 맞이하였다.30) 1837년(헌종 3)에도 영흥 준원전의 태조 어진을 서울로 가져와 모사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 헌종은 敦義門 밖에서 어진을 맞이하였다. 영정이 서울에 도착하기 하루 전에 숙종의 거둥을 위한 준비를 마쳤고 도착 당일에는 창덕궁에 있던 숙종이 종친·문무백관을 이끌고 서빙고 나루로 나아가 면복을 입고서 영정을 실은 신연을 맞이했다. 의궤에 수록된 의주를 통해 그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자. 

初嚴이 울리자 종친문무백관이 모두 朝房에 모여 朝服을 입었다.[4품 이상은 조복을 5품 이하는 흑단령을 입었다.] 司僕寺正은 仁政門 밖에 연을 준비하고 합문 밖에 여를 놓아 두었다. 이엄이 울리자 종친들과 문무백관이 모두 돈화문 밖 자신들의 자리에 나아가 대기하였다. 시위군사들은 부대를 전정에 도열시켰고 여러 호위관들은 합문 밖으로 가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좌통례가 합문 밖에서 중엄을 청한다. 삼엄이 울리자 북소리를 그치고 내외문을 열고서 좌통례가 “밖에 준비가 끝났습니다”라고 알렸다. 遠遊冠과 絳紗布를 입은 숙종이 輿에 올라타고 나가는데 좌우통례가 앞에서 인도하고 尙瑞院 관원은 寶를 받들고 앞에 섰다.[숙종이 연에 오르면 보를 말에 싣는다] 仁政門 밖에 이르러 숙종은 輿에서 내려 輦31) 임금이 궁 밖으로 나갈 때 타는 덮개가 있는 가마. 正殿의 正門 밖에서 輿에서 輦으로 갈아탄다. 으로 갈아탔다. 숙종이 탄 가마는 돈화문 밖에서 侍臣들이 말에 타는 것을 기다리기 위해 잠시 섰다가 이어 출발했다. 문 밖에 도열해있던 문무백관들은 몸을 굽힌 채 왕이 지나가는 것을 기다렸다가 몸을 펴고 차례로 따랐다. 

 

왕의 행차는 西氷庫에 곧 도착하였고 시신들과 왕이 차례로 말과 연에서 내렸다. 숙종은 곧 미리 설치되어 있었던 幄次로 들어가 다시 冕服32) 국왕이 국가 공식행사 때 입는 옷으로 신하들의 朝服이 이에 해당한다. 으로 갈아입었다. 영정을 실은 神輦이 강을 건너 선창에 도착하자 도감당상 이하 영정을 陪從하였던 신하들이 배에서 내려 조복으로 갈아입고 시립하는 자리고 가서 섰다. 영정궤를 신연에 다시 싣고 움직이기 시작하자 종친과 문무백관들은 조복을 입고 지영하는 자리에 나가 섰고 숙종도 악차에서 나와 기다렸다. 신연이 악차 앞에 이르자 숙종이 국궁하였다가 지나가면 몸을 펴고 연에 올라 신연을 따라 출발하였다. 

 

신연과 국왕의 행차가 慶德宮 崇政門 밖에 이르자 신연에 실었던 영정을 내려 신여로 옮기고 숭정전을 지나 자정전으로 들어가 어좌에 영정궤를 안치하고 좌우에 扇盖33) 靑盖, 紅盖, 鳳扇, 雀扇 등의 의장을 좌우에 벌여놓았다. 를 벌여놓았다. 숙종도 숭정문 밖에서 여로 갈아타고 숭정전 대차로 들어갔다. 숭정전 마당에는 종친과 문무백관들이 조복을 입고 동서로 나누어 2열로 서있었다. 숙종이 숭정전의 東偏門을 지나 資政殿 앞으로 가 네 번 절하고 전 안으로 들어가 영정을 살펴본 후 작헌례를 올렸다. 의식을 모두 마친 후에는 자정문 밖까지 걸어나와 여에 올라타고 다시 숭정문 밖에서 연으로 갈아타고 창덕궁으로 돌아갔다.34)「(太祖)影幀摸寫都監儀軌」(奎13978) 〈儀註秩〉 

 

멀리 교외에 거둥하여 태조의 어진을 맞이하고 태조의 어진을 실은 神輦과 함께 도성 궁궐 안으로 돌아와 궁궐 안 正殿에 봉안하는 엄숙한 의식을 통해 3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태조는 숙종이 다스리는 조선에 부활하였다. 또한 국내에서 가장 뛰어난 초상화가에 의해 모사된 태조의 영정이 도성 내 진전에 자리잡음으로써 조선이라는 국가의 정체성을 표상하기 위해 되살려진 태조에 대한 기억은 더욱 강한 권위를 부여받게 되었다.



 2. 1713년(숙종 39) 御容 圖寫와 眞殿 奉安


숙종은 1695년(숙종 21) 江華府에 長寧殿을 세우고 자신의 御容을 봉안하였다.35)「숙종실록」 숙종 21년 8월 7일(병신) 이전의 진전이 이미 돌아가신 先王의 초상을 봉안하고 제사를 올리는 장소였다면 숙종대의 長寧殿은 태조 이후로 살아있는 국왕의 초상을 봉안한 최초의 外方 眞殿으로 그 의미가 각별한 것이었다. 숙종은 왜 이러한 조치를 취했을까. 

1695년 御眞圖寫의 경위에 대해서는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숙종이 조정에 알리지 않고 화원 曺世傑에게 시켜 그리게 한 후36) 실록에는 이 해 숙종의 초상 도사와 관련한 어떠한 기록도 실려있지 않다. 다만 7월에 중전의 초상을 그리게 하기 위해 김진규를 불러들이려다가 바깥 여론의 반대로 포기하게 되었다는 내용이 있어 숙종의 어진도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것이 아닌가 추정할 뿐이다.(「숙종실록」, 숙종 21년 7월 27일) 內侍들에게 강화부로 옮겨 봉안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 때 강화부의 유수는 金構였는데 이 일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가 吏胥가 전하는 이야기를 듣고 급히 영접하기 위해 나루로 갔을 정도로 전혀 비공식적으로 진행된 일이었다.37)「숙종실록」, 숙종 21년 8월 7일(병신) 

江華府에는 태조의 영정을 봉안했던 永崇殿이 있었는데 병자호란 때 파괴된 상태였다.38) 이에 대해서는 앞 절의 내용 참조. 강화유수 金構는 영정을 강화부의 客軒에 임시로 봉안한 후 영전을 신속하게 건립하여 봉안하겠다고 보고했고, 숙종은 이 영전에 ‘長寧’이라는 칭호를 내렸다.39)「숙종실록」 숙종 21년 8월 7일(병신) 김구는 장녕전을 신속하게 수축한 공로로 加資의 상전을 받았는데 실록에서는 김구가 몇칸의 영전을 지은 것이 대단할 것도 없는데 분에 넘치는 상전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40)「숙종실록」 숙종 21년 9월 5일(갑자) 후에 長寧殿에 참봉 두 사람을 두어 지키게 하고 四孟朔에 봉심하도록 하였으니 이로써 장녕전은 국왕의 影殿으로 공식화되었다.41) 장녕전은 江華府 松嶽山 아래 癸坐丁向에 있으며 1695년에 숙종이 永崇殿의 옛 터에 세우도록 했고 ‘長寧殿’이라고 賜號하였다. 강화부 송악산은 현재 北山이라고 불리우는 곳으로 그 아래에 강화부 行宮이 있었으므로 장녕전도 그 안에 속했음을 알 수 있다.(「春官通考」 권24 吉禮 眞殿)

1695년의 御眞圖寫는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완성된 어진을 장녕전이라는 새로 건립된 외방진전에 봉안하고 이후 守直과 奉審규정을 마련하며 제도화하는 과정을 통해 그 존재가 차츰 공식화 되었다. 특히 1713년(숙종 39)의 어진 도사 및 진전 봉안 의식은 현 국왕의 어진의 존재를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숙종은 새로 도사한 어진을 다시 장녕전과 궁궐 안에 보관하게 함으로써 진전정책을 새로운 방향으로 확장시켰다. 

1713년(숙종 39)은 숙종이 즉위한 지 40년이 되는 해였다. 이해 초 崇政門에서 朝參儀式을 거행하는 날 영의정 李濡를 필두로 판부사 이이명, 병조 판서 趙泰采, 승지 南致熏·金德基·李德英·申鐔, 趙泰采 등이 잇달아 稱慶과 陳賀를 청했다.42)「숙종실록」 숙종 39년 1월 5일 숙종은 1674년 갑인년에 즉위하였지만 紀元이 1675년이라 아직 40년이라고 볼 수 없다고 하면서 짐짓 물리치는 듯한 태도를 보이다가 “大臣과 여러 신하들이 宣祖朝의 전례를 끌어서 억지로 청하니, 마지못해 따른다”며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稱慶과 陳賀를 주장했던 측에서는 숙종의 뜻을 살펴가면서 존호를 올리자고 주청했다. 당시 국제정세와43) 이 때 북쪽에서는 청나라의 세자가 바뀌어 변란의 조짐이 있었고 남쪽에서는 대마도주가 새로 바뀌면서 앞으로의 형세에 대한 염려가 가중되고 있었다. 천재·시변으로 민생이 궁핍해진 상황에서 이러한 일이 실질을 돌보지 않고 국왕을 잘못된 곳으로 이끄는 것이라며 반대하는 의견도44) 이조참판 李晩成, 예조참판 李壄, 응교 朴鳳齡 등이 반대의견을 냈다. 많았지만 결국 존숭의식과 진연을 치르기로 했다. 

존숭과 진연을 둘러싼 찬반의견이 팽팽하게 맞서면서 조정 대신들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은 때에 御眞圖寫라는 새로운 사안이 갑자기 논의되기 시작했다. 이 해 3월 30일 영희전 영정 봉심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좌의정 李頤命이 江華府 長寧殿의 영정이 숙종의 모습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였다는 점을 거론했다.45)「숙종실록」, 숙종 39년 3월 30일 傳神이 잘못되었다면 다시 그려서 봉안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왜 갑자기 이러한 주장을 했는지 전후 배경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고 실록에도 그 후 며칠동안 어진과 관련된 어떠한 내용도 나타나지 않는다. 

御容圖寫都監이 설치된 것은 4월 9일이다. 이날 숙종은 새로운 影子의 초본이 이미 완성되었다면서 대신들에게 보여 전신이 제대로 되었는지를 확인하게 했다.46)「숙종실록」, 숙종 39년 4월 9일; 「御容圖寫都監儀軌」(奎13996) 癸巳四月初九日 1695년과 같이 바깥 조정에는 알리지 않고 또 어진을 그린 것이다. 즉 당시까지는 현 국왕의 어진 도사가 도감을 설치하고 공식적으로 거행되어야 할 일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어진을 봉심하는 관원은 문무과 2품이상 중 이미 옥당을 거친 대신으로 한정했고 봉심하는 장소는 경덕궁의 景賢堂으로 정했다.47)「御容圖寫都監儀軌」(奎13996) 癸巳四月初九日 

奉審의 대상이 되는 影子는 草本 세 종이었다. 가장 먼저 그린 초본과 비단에 옮겨 그리고 채색까지 한 재초본(上綃本), 그리고 油紙초본을 臨模한 제삼본이 있었다. 대신들은 대체적으로는 비슷하게 그려지기는 했지만 逼眞하다고 하기에는 미흡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세 본 가운데에는 상초본이 더 낫다는 평이 우세했다. 봉심한 대신들 가운데 가장 자세한 의견을 내놓은 사람은 知敦寧府事 金鎭圭였다. 김진규는 1695년 숙종이 그에게 당시 중전이었던 인현왕후의 초상을 그리라는 지시를 내렸을 정도로 초상화에 대한 조예가 있었다.48)「숙종실록」 숙종 21년 7월 27일 김진규는 영자 초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하고 좋은 초상을 얻을 수 있는 방도를 내놓았다.

 

총괄적으로 논하자면 제3본이 조금 나은 것 같으나 이 또한 초본에 미치지 못하는 부분이 있으니 모두 七分貌라 할 수는 없을 것 같고 그저 5~6分 정도는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장녕전에 봉안된 본을 본 적이 없어 어느 것이 나은 지 알 수 없으나 前本이 미진하여 새로 고쳐 그리는 것이라면 사체가 중요하므로 마땅히 조용히 오래 준비하여 가장 좋은 것이 나오도록 힘써야지 이전처럼 급하게 끝내려 하다가 온전치 못하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대부의 화상으로 말하더라도 화공이 오랫동안 보고 자세하게 살펴서 그리더라도 두세번의 草本 만으로 전신을 얻을 수 있는 자가 없습니다. 하물며 하늘과 같은 위엄을 가진 분을 평소에 전혀 뵌 일이 없던 화공이 어찌 수일 내에 방불함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봉심한 여러 신하들도 여러 번 筵席에 입시하였다고는 하지만 俯伏한 채로 아뢰느라 天顔을 제대로 뵙지 못하였습니다. 지금도 影子의 초본이 御座의 옆에 있지 않은데 어찌 어느 곳이 아주 닮고 어느 곳은 닮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그에 대해 논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화공에게 조용히 생각하여 여러 벌의 초본을 그려내게 하고, 入侍한 신하들에게는 연석에서의 예절을 조금 간소하게 하고서, 혹 중국 조정에서 서서 입시하는 것[立侍]처럼 하고, 天顔을 자세히 살피게 한 후 어좌의 옆에 초본을 건 후 봉심하여 그 득실을 살펴 고칠 것은 고쳐 正本으로 삼는다면 좋을 것입니다.49)「御容圖寫都監儀軌」 癸巳四月初九日 

 

金鎭圭는 草本들이 모두 초상화에서 전신을 얻었다고 할 수 있는 최소의 기준인 七分貌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더 좋은 화본을 얻기 위해서는 화원과 대신들이 임금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하고 그 후에 다시 초본을 여러 벌 그리고 奉審하여 수정하는 절차를 거친 후 正本으로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신들의 의견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므로 화원에게 초본을 더 그려내도록 하고 다시 봉심하기로 했다. 

대신들의 봉심을 거치면서 국왕의 어진을 그리는 일은 이미 공식화되었다. 사체의 중요성을 따져볼 때 도감을 설치해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 都監도 설치되었다. 현 국왕의 초상을 그리는 일을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거행하면서 도감을 설치한 것은 전례가 없었기에 백관이 어진을 봉심하는 의식이나 도성 밖의 영전에 봉안하는 의식의 구체적인 절차는 모두 새롭게 의논하여 마련해야 했다. 「御容圖寫都監儀軌」의 내용 가운데 상당 부분은 이를 위한 논의에 할당되어 있다. 

특히 가장 심각하게 논의된 부분은 御眞 正本을 그릴 때 기본이 되었던 御眞 草本을 五臺山史庫에 보관하는 문제와 어진을 백관이 봉심할 때 절을 하도록 한 瞻拜儀註에 대한 것이었다. 이 두가지의 사안에 대해 사간원·사헌부의 상소가 올라오자 도감의 당상들이 모두 사직소를 올리며 민감하게 대응했다. 가장 먼저 상소를 올려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사헌부 장령 魚有龜였다. 상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하께서는 몸소 큰 德을 이룩하시고 마지못해 아름다운 칭호를 받으셨으니, 이는 진실로 정신을 분발하여 善治를 도모할 하나의 출발점입니다. 그런데 하루 이틀 세월만 보내는 것이 종전과 같습니다. 御容을 沁都[강화도]에 봉안하는 일은 애초에 聖世의 아름다운 일이 아닌데, 이제 또 都監을 설치하여 그 일을 떠벌려서 어진이를 引對하는 것은 圖本을 살펴보는 일에 지나지 않고, 大臣에게 자문하는 바는 정치의 방법을 강론하는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중략) 聖上께서는 허위와 假飾을 숭상하지 마시고 더욱 겸양하는 마음을 가지시어 聖學으로 나아가시고 心神을 提綴해서 純粹精一하고 表裏瑩徹케 하여 마치 放勳의 欽明과 大舜의 穆穆緝熙와 같게 하신다면, 천하 후세에 治君·明主로 우러르며 大聖人의 氣像을 상상하여 반드시 欽歎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어찌 채색으로 그림을 그려 빛나는 影幀에 전하는 것과 같겠습니까. 

 

그림 그리는 일을 끝마친 이후에는 2품 이상의 관원과 三司의 여러 신하들에게 瞻拜하라는 분부가 있으셨는데, 이것은 비록 事體를 소중히 여기는 의미에서 나온 것이긴 하지만, 大小의 臣僚들이 떠들썩하니 혼잡하게 나아가 마치 觀光이나 하는 것처럼 한다는 것은 이미 誇示하는 결과가 됨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더구나 法座에 친히 나오시고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나온 자리에서 이에 도리어 초상화에 瞻拜한다는 것은 더욱 미안한 바가 있습니다. 간단히 入侍하여 한결같이 奉審할 때의 준례에 따르도록 하고, 첨배하는 절차는 제거케 하소서. 그리고 또 들으니, 草本을 五臺山에 藏置하는 일로 해서 定奪한 바가 있었다 합니다. 御眞을 秘藏하여 오래 전하는 것이 진실로 德業이 후세에 빛나는 데에 무슨 이익이 있기에 반드시 金櫃·石室에 보관하여 영구의 계획으로 삼으려 하는 것입니까. 宋나라 신하 歐陽脩가 말한 ‘스스로 그 명예를 좋아함이 지나치면 나중에는 무궁한 우려가 된다.’고 한 것에 가깝다 하겠습니다.50)「숙종실록」 숙종 39년 5월 11일(정해) 

 

그는 都監을 설치해 초상화를 그리는 일을 벌인 것 자체를 비판하고 이어 상소에서 2品以上의 관원과 三司의 신하들에게 초상화에 瞻拜하도록 한 것과 초본을 五臺山에 보관하도록 한 점이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먼저 百官 瞻拜의 예와 관련된 문제를 살펴보자. 어진을 완성한 후 봉안을 하기 전 백관이 봉심하는 예를 마련하면서 봉심하기 전에 殿庭에서 어진을 향해 四拜禮를 올린 후 들어가 보도록 하였는데 이를 문제삼은 것이었다.51) 앞책, 계사질, 癸巳五月初五日. 도감 제조 김진규가 여러 신하들이 첨배할 때 당연히 예절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먼저 꺼냈고 민진원이 전정에서 사배를 올린 후 들어가 뵙자고 했다. 조태구가 정본이 원유관에 강사포 즉 법복 차림이므로 신하들이 상복으로 입시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했고 이이명이 흑단령으로 입시하자고 청하여 첨배할 때의 예절이 이상의 내용으로 확정되었다. 

眞殿에 봉안된 선대왕의 影幀을 뵐 일이 있을 때 신하들이 그 앞에서 절을 하는 것이 상례이다. 외방 진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의 예를 취하며 長寧殿 숙종 어진 앞에서도 마찬가지의 예를 올려 왔었다. 어유구의 질문은 사실 장녕전에 봉안된 현왕의 어진의 위상까지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돌아가신 선왕의 영정은 神主와 같이 생각하므로 그 앞에서 절을 하는 것이 하등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엄연히 살아있는 국왕의 초상의 경우는 선왕의 영정과는 전혀 다르며 따라서 국왕을 뵙듯이 절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어유구의 생각이었다. 

숙종은 5월 15일 晝講에 나아가 經筵官들과 이 문제를 논의했다. 同知事 李晩成의 경우 절을 하되 평상시 입시할 때 국왕에게 曲拜만52) 어전에 입시하였을 때 임금에게 취하는 약식 인사로 임금은 남면하고 앉고 신하는 동서를 향해 선 후 절한다. 국왕 앞에서 네 번 절하는 肅拜와 대비되는 말이다. 하듯 어진 앞에서도 곡배만 하자고 절충적 의견을 냈고, 特進官 尹德駿은 遠遊冠을 쓴 임금 앞에 黑團領을 입은 신하는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 “御眞 앞에서 절을 할 것인가?”하는 문제의 본질은 모두 비켜나갔다.53) 윗책, 〈啓辭秩〉, 癸巳五月十五日 그리고 공은 다시 都監에 넘겨졌다. 

5월 16일 제시된 都監의 의견은 “원래 매일 常參(아침 조회)이 있을 때에는 이미 肅拜를 했기 때문에 평상시 입시할 때 曲拜만 하도록 한 것이다. 근래 상참을 하지 않는데도54) 常參은 요즘 식으로 아침조회에 해당된다. 朝參은 매년 정초에 궁궐의 법전(勤政殿/仁政殿/崇政殿 등)에서 여는 큰 조회이다. 숙종대에는 ‘근래에 상참이 폐지되었고 단지 조참만을 행한다’(「숙종실록」, 숙종 33년 1월 5일)고 할 정도로 상참을 거의 열지 않았다. 평소 입시할 때 사배를 하지 않고 곡배만 하는 것이 잘못되었다. 또한 虛座에도 숙배의 예를 취하므로 御眞에 절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 상참시에 흑단령을 입는 예가 있으므로 원유관에 흑단령도 그르지 않다”55) 윗책, 〈啓辭秩〉, 癸巳五月十六日 는 것이었다. 도감의 제조들이 어진을 국왕 대하듯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분명하다. 도감 제조 李頤命 같은 경우는 어유구의 상소 직후 올린 사직소에서 “古禮에는 임금이 타는 말에도 경의를 표했으며 오늘날 殿試에서 임금의 빈자리에도 절을 한다”고 하여 국왕의 권위가 다른 상징물 속에도 계속 이어질 수 있다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 따라서 절을 하는 것이 옳고 그냥 절이 아니라 임금에게 하는 원래의 예를 다하여 肅拜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도감에서는 조금 더 신중을 기하기 위해 예조에 다시 물어 전례에 밝은 사람의 말을 들어본 후에 처리하자고 했다. 

그런데 禮曹에서는 “常參時에 단지 곡배만을 하지 四拜의 예가 없으며 어진을 외방에 봉안하는 것이 아니므로 상참입시의 예를 좇아 時服56) 평상시 공무를 볼 때 입는 옷으로 숙종대에는 흉배를 단 紅團領에 紗帽를 쓴 차림을 말한다. 을 입고 곡배만을 하고서 나아가 瞻望해야 한다”고 하여 당초 都監 儀註보다 상당히 후퇴된 예를 주장했다. 더구나 예조에서 “상참시에 四拜의 예가 없고 時服(常服)을 입는다”고 주장한 것은 무엇을 근거로 하였는지도 알 수 없다. 「국조오례의」 상참의주에는 신하들은 常服을 입고 四拜를 하며 국왕이 익선관에 곤룡포를 입는다고 명기되어 있다.57)「國朝五禮儀」, 嘉禮, 朝儀, 「常參朝啓儀」 

논의가 여기에 이르자 숙종은 분명한 이유를 대지 않은 채 단지 “時服을 입고 曲拜만을 하는 것은 끝내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終有所不然]”면서 원래대로 흑단령을 입고 四拜를 하라고 명했다. 백관의 奉審儀註도 이에 준하여 만들어졌다. 결국 숙종은 “과연 현왕의 어진 앞에서 백관이 절을 해야 하는가?”라는 어유구의 문제제기에 대해 ‘국왕의 어진 앞에서 국왕을 대하는 예를 취해야 하며 그 중에서도 더욱 격식을 갖춘 예를 취하라’고 신하들에게 요구하여 국왕의 어진이 갖는 위상에 관한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58) 이때에 정해진 御眞奉審儀節은 후대에 그대로 준용되었다. 1791년 書香閣에서 어진을 그린 후 표제를 쓰고 펼쳐 봉안한 후 監董諸臣 및 應參入瞻諸臣들은 정해진 자리로 나아가 사배례를 행한 후에 어진을 살펴보았다.(「日省錄」, 1791년 10월 7일) 다만 大臣은 기둥 안에서 봉심하고 동·서반 각 4원씩은 기둥 밖에서 봉심하여 玉堂 長官 외의 堂下諸臣들은 모두 마당에서 仰瞻하도록 하여 차등을 두었다. 

어유구는 어진 봉안장소도 문제삼았다. 숙종은 어진 두본을 각각 장녕전과 궐안에 보관하도록 한 데 이어 혹 있을지도 모르는 어진의 손상에 대비하여 초본 하나를 오대산 사고에 봉안하도록 했다. 魚有龜는 “御眞을 秘藏하여 오래 전하는 것이 진실로 德業이 후세에 빛나는 데에 무슨 이익이 있기에 반드시 金櫃·石室에 보관하여 永久한 계획으로 삼으려 하는 것입니까?”라고 한 후, 歐陽修의 말을 인용하여 “스스로 그 名譽를 좋아함이 지나치면 나중에는 무궁한 우려가 된다”고 하여 御眞을 秘藏하는 것이 폐단을 낳을까 염려했다. 그런데 어유구가 오대산사고에 어진을 보관하는 일을 지적한 것은 長寧殿에 어진을 봉안한 前事에 대한 비판의 의미도 함께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상소의 앞부분에서 “애초에 어진을 沁都[강화부]에 봉안한 것은 盛世의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숙종의 진전정책 특히 현왕의 어진을 봉안하는 진전을 건립한 것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에 서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오대산에 또 하나의 어진을 보관함으로써 새로운 외방 진전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의심한 것이다. 

조선시대에 초상화의 정본이 완성되고나면 초본은 세초해 버리는 것이 상례였다. 그런데 도감 제조 李頤命은 이번 초본이 세초해 버리기 아까우므로 족자로 꾸며 궤에 넣어 선록각에 보관하자고 건의했다.59) 앞책, 〈啓辭秩〉, 癸巳五月初六日 趙泰耈 역시 궤에 넣어 장녕전에 보관하자고 했다. 金鎭圭도 여러 신하들에게 보였을 때 숙종의 모습과 매우 닮았다고 했고 이를 기준으로 정본을 모사하였으므로 璿錄閣에 보관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며 일단 초본을 없애지 말자는 이이명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었다. 다만 도감의 제조들도 이 일이 새로운 진전을 건립하자는 것으로 비춰질까 염려했던 듯 “後代에 事體가 중하다고 여겨 전각을 별도로 만들어 보관하려 하면 오늘날 名山에 깊숙이 보관하는 의미를 잃게 되므로 특별히 친히 소본 위에 識를 써서 이 뜻이 영구히 전해지도록 하자”고 했고 다음날 숙종은 다음과 같은 小識를 써서 도감에 내려주었다.


영자정본을 도사하는 일이 끝났으니 초본을 세초해야 하지만 도감의 제거대신들의 말을 좇아 선원각에 보관하는 것은 오랜 염려를 염두에 둔 것일 뿐이다. 다른 날 별도로 하나의 전각을 만드는 의논을 한다면 이는 나의 본의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60) 윗책, 〈계사질〉, 癸巳五月初七日 “影子正本圖寫訖工初本在所當洗而今從都監提擧大臣之言 藏于璿源閣 盖存心長慮耳 他日若有別構一殿之意則非予本意 不可不知也” 

 

다음은 이틀 뒤에 다시 써서 내린 小識이다.

  

이 비단에 그린 것은 처음에 그린 영자의 소본이다. 여러 신하들에게 보이니 모두 ‘아주 닮았다’고 하였고 드디어 이를 정본으로 模畵하였다. 정본이 이미 이루어졌으므로 이 본은 洗草해야하지만 지금 도사도감 提擧大臣의 말을 좇아 작은 족자로 만들어 선원각에 보관하려 하니 이는 深長한 생각을 둔 것이다. 훗날 별도로 하나의 전각을 엮어 봉안할 생각을 가진다면 이는 나의 본의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61) 윗책, 〈계사질〉, 癸巳五月初九日 “此綃所畵乃影子初出小本 而出示群臣 皆曰肖似 故遂以此模上正本者也 正本旣成此本宜洗草 而今從圖寫都監提擧大臣之言 粧成小簇藏之璿源閣中者 盖存深長慮耳 他日若有別構一殿奉安之意則非予本意不可不知也.” 

 

이렇듯 당연히 나올 반대까지 염두에 두면서 璿源閣 보관을 추진하였던 터라 魚有龜의 상소에 대한 숙종의 입장은 단호했다. 어유구의 상소로 도감의 당상과 낭청들이 잇달아 사직소를 올리자 이에 대해 비답을 내리면서 “어유구가 事體를 잘 모른다”는 비난조의 말을 하였다.62)「숙종실록」, 숙종 39년 5월 12일 이 비답의 내용이 심하다 하여 뒤에 지우도록 했지만 오대산 사고에 초본을 보관하도록 한 조치는 끝까지 철회하지 않았다. 

장녕전에 어진을 봉안하기 위한 의식은 1713년 9월 15일 경덕궁의 숭정전 앞에서부터 시작되었다.63) 장녕전 봉안은 본 의궤가 작성된 후인 1713년 9월 15일에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봉안의식의 절차와 내용은 〈禮關秩〉에 수록되어 있다. 1695년 외정에 알리지도 않고 내시들에게 봉안하게 했던 것과는 달리 정식 시위와 의장을 갖추고 왕세자와 조정의 백관들이 지송하는 가운데 봉안하였다.64) 숭정전의 계단 앞에 어진을 실을 연이 대기하고 있는 가운데 승지, 사관, 배왕대장, 예조의 당상·낭청 등 및 종친과 문무백관이 흑단령을 입고 殿庭에 도열하여 섰다. 王世子가 익선관에 곤룡포 차림으로 경덕궁의 정문인 興化門 밖에까지 나와서 어진궤를 실은 輦을 祗送하고 종친과 문무백관 역시 흥화문 밖까지 따라나와 鞠躬하며 지송했다. 中使, 承旨, 史官, 長寧殿參奉, 大臣, 禮官 등이 연 뒤에서 배종했다. 행렬 앞뒤에는 2초로 구성된 사대가 섰고 연 앞에는 司禁 20員과 別監 20인이 흑단령을 입고 시위했다. 어진을 봉안하는 행렬은 孔岩津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넜다. 궁궐에서부터 행렬을 구성했던 의장군과 시위군이 여기서부터 교체되거나 나루에 남았다. 五衛將이나 宣傳官처럼 공암진에 남고 다른 인원으로 교체되지 않는 경우도 있고 儀仗軍士 등과 같이 경기역졸이나 경기도 근처 읍의 忠順衛로 교체되기도 했다. 중간에는 晝停所를 두어 쉬어갔고 강화도에는 갑곶진을 통해 들어갔다. 의장, 시위 등의 모든 절차를 1688년 태조 어진을 慶基殿에 환봉할 때에 준하게 한 것은 숙종의 御眞에도 같은 위상을 부여하였다는 반증이다.



二. 英祖代 御眞奉安處의 확대

 1. 1748년(영조 24) 肅宗影幀摸寫와 永禧殿 확장


肅宗은 太祖의 영정을 모사하여 도성 내 眞殿에 봉안함으로써 태조에 대한 기억을 더욱 강화시켰고 자신의 어진을 외방과 궐 안에 봉안하면서 국왕의 권위가 머무르는 장소를 확장시켰다. 영조대 眞殿에 대한 정책은 이를 繼述하면서 그 의미를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즉 기왕에 건립되었던 도성 내의 永禧殿과 창덕궁의 璿源殿, 강화도의 長寧殿이라는 3대 진전을 기본으로 하되 그곳에 추가로 영정을 모사하여 봉안하였고, 한편으로는 영조 자신의 어진을 봉안하는 새로운 장소를 마련하였다. 

먼저 숙종대 건립되었던 永禧殿, 璿源殿, 長寧殿 등 진전이 영조대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었는지 살펴보자. 이들 세 진전은 그 위상에 있어서 약간 차이가 있는데 영희전이 국가적인 제사의 대상이 되는 공식적인 진전이라면 선원전과 장녕전은 숙종대 당시까지는 국왕 어진의 奉安閣으로 정기적인 봉심을 하기는 했지만 제사의 대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숙종이 세상을 떠나자 곧바로 흑장궤에 담겨져 봉안되었던 어진을 꺼내 長寧殿벽에 펼쳐서 봉안하고 享祀하는 절차도 영희전에 준하도록 했다.65)「경종실록」, 즉위년 6월 21일(병진) 선원전의 경우에는 숙종의 遺敎에 따라 바깥 조정에 관리를 맡기지 않고 전적으로 內府에서 관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정기적인 奉審과 享祀에 국왕이 親臨하였고 특히 영조가 중요한 정책 결정을 해야 할 때면 우선적으로 선원전 齋室에 거둥하곤 했다. 

1740년(영조 16) 5월 경종년간 왕세제 책봉과 관련된 무고를 방조했다며 당시 대신이었던 柳鳳輝, 趙泰耈 등의 관작을 추탈하는 일과 김용택의 죄를 反案하는 문제로 조정이 시끄러웠다. 영조는 국왕의 무함을 벗기는 일보다 老論 黨人의 죄를 반안하는 문제를 먼저 거론한 일이 국왕보다 黨論을 앞세운 것이라며 소를 올린 이들에 대한 엄중한 처분을 명했다. 이어 왕위에서 물러나겠다며 숙종의 眞殿 앞에서 聽命하는 일까지 벌였다.66)「영조실록」, 16년 5월 25일(갑자) 또한 영조는 선원전 재실에서 권농교서를 반포하여 자신의 정치가 숙종의 遺敎를 잇고 있음을 천명했고67)「영조실록」, 30년 12월 30일(갑술) “列祖와 우리 聖考께서 부덕한 나에게 백성을 맡기셨는데, 돌보지 않는다면 참으로 오르내리시는 신명을 저버리는 것이니, 이제 만년에 어찌 차마 그럴 수 있겠는가? 특별히 眞殿[선원전]의 재실에 앉아 諸道에 勸農하니, 아! 도신·유수·수령들은 나의 뜻을 본받아 堤堰의 政事와 곡식을 저축할 방도에 각각 惕念하라. 아! 元良도 공경히 따라야 마땅하다.” ‘하늘을 공경함[敬天]’, ‘백성을 사랑함[愛民]’, ‘신하를 예(禮)로 대우함[禮臣]’을 細目으로 삼은 「訓書」를 이곳에서 짓기도 했다. 집권의 정치적 정당성과 관련된 辛壬義理를 밝힌 「闡義昭鑑」의 편차인을 불러 일의 진행을 물은 장소도 역시 선원전의 齋室이었다.68)「영조실록」, 31년 6월 7일(계묘); 동년 6월 29일(을축) 영조가 이 곳을 특별하게 여겼음은 1763년(영조 39)에 “영원히 이 재실에 의지하리라”라는 뜻으로 ‘永依舍’라는 편액을 재실에 달도록 한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69)「영조실록」, 39년 6월 9일(을미)

그러나 선원전은 여전히 궐 안에 있는 眞殿일 뿐이었고 그 상징적인 지위가 도성 안의 진전인 永禧殿과 같을 수는 없었다. 이에 英祖는 1748년(영조 24) 3실로 되어 있던 영희전을 중건하여 5실로 만들도록 하고70)「영조실록」, 24년 1월 17일(임인) 昌德宮 璿源殿에 봉안되어 있던 肅宗의 御眞을 가져다가 새로 2본 모사하여 그 중의 하나를 영희전 제 4실에 모셨다.71) 이 일의 상세한 과정은 김지영, 2003 〈英祖代 眞殿政策과 「影幀摸寫都監儀軌」〉「규장각소장의궤해제집2」 참조. 최초에 문제제기는 선원전의 숙종 어진에 흠이 생겼다는 이유에서였지만 단순히 새로 모사한 어진을 선원전에 재봉안하지 않고 영희전 중건 사업을 함께 벌인 것은 직접 드러내지 않은 큰 뜻이 있었다. 특히 영희전에 숙종의 어진을 봉안할 실 하나만을 더한 것이 아니라 5실로 중건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영조는 眞殿을 확장하여 건립하는 일을 벌이면서 ‘후손들에게 주는 글[垂後文]’이라는 글을 써 이 처분이 長大하게 하고 임금의 권위를 높이려 한 일이 아니라고 변명하였다.


대저 화상을 그리는 것은 「說命」에서 시작된 것인데, 말세에 점점 치성하여졌다. 我朝에서는 永禧殿 3室에다 御容을 보관하고 있는데, 列朝에서는 眞幀이 있지 않은 경우가 많으니, 아! 그 聖意를 우러러 본받아야 한다. 옛날 무진년[1688년, 숙종 14] 우리 太祖의 影幀을 模寫하였고, 7년 뒤 그 성대한 일로 인하여 그 때의 화사를 써서 御容을 그렸으니 聖意의 소재가 있다. 내가 嗣位한 지 9년 만에 그림을 그리게 한 것은 張大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내가 潛邸에 있을 적인 갑오년[1714년]에 恩賜받은 圖本이 있었는데, 지난날 은사받은 것을 없앨 수 없고 이미 그린 후에는 다른 날의 복색이라 다시 그릴 수 밖에 없었으니 이 또한 근본한 바가 있는 것이다. 근래 도상을 그리는 것이 성습이 되었는데 선조로부터 나에 이르기까지 계속 기대는 바가 있었지만 뒷날 자손된 사람이 그 근본하는 바가 있음을 알지 못하고 이를 계술하여 대대로 그린다면 그리기는 쉽지만 그 폐단은 이루 말할 수 없게 된다. 사대부가의 도상은 많더라도 문제가 될 것이 없고 보관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없지만 나라의 것은 그렇지 않다. 도상이 있으면 봉안해야 하니 眞殿의 室數가 장차 太廟와 같게 된 후에야 그칠 것이다. 이와 같으면 文昭殿을 다시 설치해야 하고 陵祭에도 肉饍을 회복해야 할 것이니 이 어찌 국가의 먼 장래를 도모하는 도리라고 할 수 있겠는가. 말세에 文具가 풍습을 이루고 長大하게 하려는 마음이 날로 치성해지면 다른 날의 嗣王이 어찌 안으로 長大하고자하면서 밖으로는 繼述한다 칭탁하여 반드시 도상을 그리고, 신하된 자가 안으로는 임금의 마음에 아첨하고자 하면서 밖으로는 임금의 권위를 높인다[尊體]고 칭탁하여 도상을 권하는 폐단을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이제 진전을 重建하는 일로 인하여 나의 깊은 뜻을 보인다.72)「영조실록」 24년 1월 17일(임인); 「(숙종)影幀模寫都監儀軌」 〈收議〉


영조는 이 글에서 眞殿 重建의 의미를 이미 존재하는 자신의 圖像과 연결시켰다. 일단 영조는 숙종대의 어용도사를 태조의 영정을 모사하였던 일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라 변호하였다. 또한 자신이 어진을 그린 것도 왕위에 오르기 전에 숙종으로부터 恩賜받은 圖本이 있었기에 이를 없앨 수 없었으며 왕 위에 오른 후에는 국왕으로서의 服色을 갖추어야 하기에 다시 그린 것일 뿐이라고 변명하였다. 그러면서 이미 도상이 있으면 봉안할 장소가 있어야 하기에 진전을 중건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니, 이미 존재하는 자신의 도상까지 봉안할 것을 염두에 두고 永禧殿을 5실로 만든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璿源殿이 이미 궐내의 진전으로서 기능하고 있었고 외방에도 長寧殿이 있었으니 숙종의 어진을 영희전에 봉안한 것은 영희전에 봉안된 太祖나 世祖와 같은 위상을 肅宗에게 부여하려는 뜻이 담긴 것이었다. 특히 영조는 어진을 그리고 이를 眞殿에 봉안하는 일이 “임금의 권위를 높이고자[尊體] 하는 일”임을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영조는 숙종을 국가의 공식 진전인 영희전에 봉안하여 숙종을 높이고 그를 계승한 영조 자신의 권위를 확장시켰다. 앞으로 자기 어진이 봉안될 것까지 계산해서 미리 진전을 5室로 구축하여 그 권위가 후대에까지 이어지도록 하였으니 국왕의 권위를 높이고자 하는 뚜렷한 의도를 엿볼 수 있다. 결국 영조는 숙종대 어진도사와 진전정책의 정치적 의미를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는 완성된 숙종 어진을 영희전에 봉안하는 행차를 통해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영정모사도감」에 수록된 班次圖에는 숙종의 영정축을 실은 神輦과 이를 따르는 영조의 大駕가 주축이 되고 신연과 대가의 위의를 드러내는 儀仗과 호위군사, 행렬 전후의 侍衛軍, 조정 百官의 반차 등을 그려넣었다.73) 영정을 봉안할 때 국왕이 수가하는 것은 영조의 전교에 의해 정해졌다. “傳曰 影幀奉安永禧殿時 予則當隨駕 先廂在影幀先射隊之後 先行神輦之前 次神輦儀仗 次神輦侍衛 次神輦 次二都監堂郞 次小駕儀仗 次侍衛 次正輦 次承史百官 次後廂 次神輦後廂擧行 副輦 隨駕時勿爲擧行 回駕時擧行事 分付 禮曹兵曹.”(「영정모사도감의궤」 전교질 戊辰 正月 28일.) 따라서 반차도 18면은 크게 神輦 중심의 행렬과 大駕 중심의 행렬로 구분될 수 있다. 특징적인 점은 반차도 전체 중에서 대가의 행렬이 차지하는 부분이 더욱 많다는 점이다. 대가행렬은 6면(大駕儀仗이 시작되는 부분부터 標旗까지)에 걸쳐 그려진 반면에 신연 행렬은 5면에 불과하다. 그림 속에서는 주인공인 영정보다 이를 모시고 가는 英祖가 더 주목받고 있는 셈이다. 

의장의 수에 있어서도 숙종 영정에는 31개의 細儀仗이 따르는 반면 영조의 행렬에는 48개의 小駕의장을74) 조선시대 국왕과 왕비, 세자 등이 거둥을 할 때에는 거둥의 주인공과 목적에 따라 衛儀를 달리하였는데 이에 대한 규정이 「국조오례의」 등의 ‘鹵簿’ 조에 수록되어 있다. 국왕의 행차인 경우에는 크게 대가노부, 법가노부, 소가노부로 나뉘어져 있었다. 대가노부는 조칙을 맞이할 때와 사직 및 종묘에 친향할 때에 사용하며 법가노부는 선농에 친향할 때, 視學할 때, 射壇에서 활쏘는 의식, 武科殿試, 射壇에서 활쏘기를 보는 의식 등에 사용되었다. 소가노부는 배릉 및 교외 행행시에 사용되었다.(「세종실록」 〈오례의>「국조오례의」 가례 鹵簿 등 참조) 갖추었을 뿐 아니라 前後射隊 군사의 수도 神輦보다 국왕의 군사가 배가 되도록 하여 시각적으로 더욱 돋보이는 면모를 보이고 있다. 결국 이 班次圖는 숙종의 영정을 봉안하는 의식에 국왕의 威儀가 더욱 돋보이도록 행렬을 구성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2. 御眞圖寫의 定例化와 奉安閣의 첩설


한편 영조는 생전에 모두 13본에 이르는 어진을 그렸다. “恩賜받은 도본이 있었기에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고 변명하기에는 너무 많은 수이다. 왜 영조는 이렇게 많은 어진을 그렸던 것일까. 1781년(정조 5) 정조는 10년에 한차례 어진을 그렸던 영조대의 예를 좇기로 결정하면서 영조대 13본의 영정모사 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삼가 先朝 때를 상고하여 보건대, 매양 10년마다 1본씩 모사하였는데, 이것이 곧 우리 朝家의 성헌이 되어 있다. 지금 나의 이 거조는 실로 선조께서 이미 행한 規例를 본받아 오늘날 紹述하는 뜻을 붙이는 데에서 나온 것이다. 선조께서는 21세 되던 갑오년[1714년]에 1본을 모사하여 彰義宮에 봉안하고 작은 것 1본은 선원전에 봉안하였으며, 31세 되던 갑진년[1724년, 영조즉위]에 1본을 모사하였는데, 이는 草本이었다. 40세 되던 계축년[1733년, 영조 9]에 2본을 모사하여 선원전에 봉안하고 작은 것 1본은 毓祥宮에 봉안하였으며, 51세 되던 갑자년[1744년, 영조 20]에 2본을 모사하여 1본은 永禧殿에 봉안하고 1본을 萬寧殿에 봉안하였으며, 61세 되던 갑술년[1754년, 영조 30]에 1본을 모사하였는데, 정축년[1757년, 영조 33]에 비로소 粧䌙하여 육상궁에 봉안하고 작은 것 1본은 창의궁에 봉안하였다. 70세 되던 계미년[1763년, 영조 39]에 1본을 모사하여 선원전에 봉안하였고, 계사년에 보령이 80세[1773년, 영조 49]가 되자 또 1본을 모사하여 선원전에 봉안하고 작은 것 1본은 육상궁에 봉안하였다. 이렇게 반드시 10년을 기간으로 하였다는 것을 역력히 상고할 수 있다.76)「정조실록」, 5년 8월 26일(병신)


이를 최초 봉안처를 고려하여 표로서 정리해보면 〈표 1〉과 같다.

〈표 1〉

·

·

·

영조대 봉안처

정조대 봉안처

비 고

1714년 

숙종 40

21세, 갑오

彰義宮 

彰義宮 

·

泰寧殿 

璿源殿 

소본 

1724년 

영조즉위 

31세, 갑진

태녕전 

·

초본 

1733년 

영조 9

40세, 계축

태녕전 

선원전 

·

태녕전 

선원전 

·

毓祥宮 

육상궁 

소본 

1744년 

영조 20

51세, 갑자

태녕전 

영희전 

·

萬寧殿 

만녕전 

·

1754년 

영조 30

61세, 갑술

육상궁 

육상궁 

정축년(1757) 장황

창의궁 

창의궁 

소본, 정축년(1757) 장황

1763년 

영조 39

70세, 계미

태녕전 

선원전 

·

1773년 

영조 49

80세, 계사

태녕전 

선원전 

·

육상궁 

육상궁 

소본75)

1781년 9월 육상궁 어진 봉안각에 있던 소본을 이모하여 2본의 대본으로 완성한 후 하나는 선원전에 다른 하나는 영희전에 봉안하도록 했다. 이는 1713년 숙종이 대내에 있던 어진을 이모하여 장녕전과 선원전에 각각 봉안하였던 예를 따른 것으로 2품 이상 대신들의 첨배례 등을 모두 이에 준해서 거행했다.


<표 1〉을 살펴보면 英祖의 御眞이 봉안된 장소가 무척 다양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영조의 어진 13본은 궁궐 내의 泰寧殿과 강화도 萬寧殿 및 연잉군 시절의 舊邸인 彰義宮, 생모의 사당인 毓祥宮 등에 있다가 정조대에는 궁궐 내의 진전인 璿源殿, 도성 내의 진전인 永禧殿, 강화도의 진전인 長寧殿, 창의궁 藏寶閣, 毓祥宮 등에 모셔지게 되었다. 즉 영조대 당시에 이미 4곳에 나누어 봉안하였다는 것인데 왜 이들 장소에 영정을 봉안하였던 것일까 

慶熙宮의 태녕전은 숙종에게서 恩賜받은 도본 가운데 하나를 봉안하는 장소로서 출발하였다. 1724년(영조 즉위) 「璿源寶略」에 어진의 봉안처를 기록해야 한다는 의견에 대해 영조는 그냥 ‘大內 別殿’이라고만 기재하도록 했다.77)「승정원일기」 즉위년 10월 30일(경자) 1733년 어진도사 후 완성된 정본을 태녕전에 봉안하였으므로 그 이전에 전각의 명칭이 정해졌던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 확실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영조는 潛邸에 있을 때를 제외하더라도 이미 4본의 어진을 그렸었는데 이는 모두 慶熙宮 내의 泰寧殿에 봉안하였다. 

1744년(영조 20)에 영조는 우의정 趙顯命과 李宗成을 引見한 자리에서 御眞 두폭을 보여준 후 ‘어진의 봉안처소로는 眞殿만한 것이 없다’고 하면서 그 중 하나를 장녕전의 숙종 어진 곁에 모시도록 했다. 이때의 어진은 영조 49세상이다. 

이듬해인 1745년(영조 21) 영조의 어진은 江都의 萬寧殿에도 봉안되었다.78)「영조실록」, 21년 2월 20일(임술) 숙종대와 마찬가지로 어진의 강화도 봉안은 전격적인 것이었다. 조선시대 강화도는 국가방위체제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요충지로 17세기에 들어와 청의 위협이 증대하면서 保障之地로 중시되어왔고 17세기 후반 都城守備論이 강화되는 단계에서도 수도를 방어하는 요충지로서 주목되어오던 곳이다. 특히 숙종대에는 孝宗代의 강화도 수비체계 강화정책을 이어 해안을 방어하기 위해 鎭堡와 墩臺의 설치를 완료하고 군사적 요충지인 문수산에 山城을 쌓는 등 정성을 기울여 왔었다.79) 이 시기 강화도 수비체제의 강화에 대해서는 이민웅, 〈18세기 江華島 守備體制의 강화〉「한국사론」 34 참조. 이러한 장소에 1795년 전격적으로 影殿을 세운 것은 강화도의 중요성을 內外에 천명하고 그 중심에 國王이 있음을 과시한 매우 상징적인 조처였다. 영조는 자신의 어진도 강화도에 봉안하게 하여 숙종대의 정책을 繼述하는 한편 숙종의 정통성을 잇는 계승자임을 과시하려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萬寧殿은 1713년 長寧殿에 어진을 봉안하기 위해 만들었던 가마 등을 보관하기 위해 장녕전의 동편에 만들었던 건물인데 영조가 자신의 어진을 여기에 봉안하도록 한 후 ‘萬寧’이라 이름하였던 것이다. 영조가 82세에 지은 御製詩에서는 ‘於慶熙 有泰寧 於沁都 有萬寧’80)「御製泰寧殿」(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K4-5072) 라 하여 도성의 태녕전에 대비되는 외방의 진전으로 만녕전이 자리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나머지 한폭의 어진은 생모의 사당인 毓祥廟 冷泉亭에 봉안하였다. 영조의 생모인 崔氏에게 시호를 올리고 사당을 毓祥廟에서 毓祥宮으로 봉한 것이 1753년(영조 29)년의 일81)「영조실록」, 29년 6월 25일(기유). 이때 ‘和敬’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毓祥廟’를 ‘毓祥宮’으로 ‘昭寧墓’를 ‘昭寧園’으로 하였다. 이 존숭의식은 「[淑嬪]上諡奉園都監儀軌」(上)〈규14925〉·(下)〈규14926〉에 자세하다. 이므로 추숭의 예를 취하기 훨씬 이전에 이러한 봉안조처를 취한 것이다. 영조는 ‘국왕이 직접 私廟를 배알하는 것이 사묘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던 만큼 국왕의 영정을 봉안하는 것이 사묘의 위상을 강화시킬 수 있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82) 이는 영조가 毓祥廟를 배알하면서 했던 말이다.(「영조실록」 20년 9월 9일(계미).) 萬寧殿과 毓祥宮에 어진을 봉안한 것은 생전과 같이 숙종과 생모의 곁에서 모신다는 뜻으로 자신이 肅宗과 淑嬪 崔氏의 자식임을 대외적으로 천명한 것이다. 

영조는 자신이 왕위에 오르기 전의 舊邸인 彰義宮에도 어진을 봉안하였다. 이는 1714년 延礽君 시절에 그린 冠帶本이었다. 영조는 자신이 어진을 반복해서 그리게 된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숙종으로부터 恩賜받은 초상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강조하곤 했다. 이 초상화는 舊邸인 彰義宮에 봉안되어 있었는데 영조가 즉위 후 숙종의 은사 사실을 御製에서 밝힘에 따라 조정에 알려졌고 璿源譜에까지 기재되었다.83)「승정원일기」, 즉위년 10월 30일(경자) 그리고 40년 후인 1754년(영조 30)년에 새로 그린 영정을 다시 彰義宮에 두도록 한 것이다. 

이처럼 영조대에는 국왕의 권위가 그대로 담겨져 있는 초상을 궐 안에 쌓아두지 않고 자신의 개인적인 추억의 장소에 나누어 奉安함으로써 그 장소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실제 영조 어진이 봉안된 장소는 숙종대에 그랬던 것처럼 세심하게 관리되었고 영조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영조를 기억하는 장소로서 더욱 위상이 강화되었다. 

1777년(정조 1) 社稷壇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가던 정조가 彰義宮 앞 길을 지나게 되었다. 이에 앞서 예조에서 올린 시행 절목에 창의궁 앞에서 가마에서 내리지 않고 그냥 지나치도록 했었다. 정조는 창의궁이 懿昭廟를84) 思悼世子의 長子이며 정조에게는 형이 되는 懿昭世孫의 사당이다. 영조가 매우 사랑하던 손자였는데 3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彰義宮의 境內에 사당을 정하게 했다. 모신 장소이기도 하지만 선대왕의 御眞을 봉안한 장소인데 그냥 지나치도록 한 것은 잘못이라며 이를 잘 살피지 못한 예조 당상을 추고하도록 했다.85)「일성록」, 1년 5월 8일 1786년(정조 10)에는 강화부의 萬寧殿이 영희전, 선원전 등과 事體가 다를 바가 없는데 江華留守가 직접 감독하지 않았다 하여 유수 朴祐源을 推考하였다.86)「정조실록」, 10년 윤7월 12일(계미)

정조는 즉위 후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는 선원전의 영조 어진을 배알하였고 영조의 탄일 등에는 그 예를 더욱 성대하게 했다. 1784년(정조 8)은 영조가 즉위한 지 60년이 되는 해였다. 8월 29일 선원전에 종친, 문무백관과 함께 展拜禮를 올린 후 인정전에서 朝參을 행하였는데 이 자리에서 先大王의 心法을 계승하는 정치를 천명하고 辛丑·壬寅年 영조를 대신하여 죽은 4대신에 치제하고 자손을 서용하라는 명을 내렸다.87)「정조실록」, 8년 8월 29일(임자) 1793년(정조 17)에도 영조의 탄신 100년을 기념하여 大臣·卿宰·侍從 반열의 신하들을 모두 선원전 전배에 참여하게 하였다.88)「正祖實錄」, 행장 또 영조의 탄일이면 彰義宮의 藏寶閣과 毓祥宮의 奉安閣[冷泉亭]에 가서 직접 展拜禮를 거행했고89)「日省錄」, 3년 9월 11일; 「정조실록」, 18년 9월 13일(정유) 늘상 육상궁에 거둥하게 되면 반드시 어진을 봉안한 장소에 들러 전배례를 행하고 직접 봉심하는 등90)「日省錄」, 12년 11월 6일 어진 봉안처에 대한 극진한 예를 다했다. 

이렇게 약간의 자리 변동은 있었지만 궁궐 안, 도성 내의 진전, 江都 및 私家인 彰義宮, 생모의 사당 毓祥宮에 모셔졌던 영조의 어진은 계속 그 자리에서 展拜의 대상이 되었다. 영조가 여러 곳에 만들었던 영정 봉안각이 곳곳에 자재하는 國王權을 상징하였다면 정조는 여기에 정기적으로 거둥하며 展拜, 奉審, 享祀의 의식을 확고히 하여 영조와 영조의 정치를 기억하는 장소로 만들었고 그 권위를 시간적으로 영속화하며 더욱 강화시켰다. 

정조도 영조 어진을 영희전과 昌德宮 璿源殿에 봉안하는 한편 10년에 한번씩 어진 그렸던 영조대의 전례를 이어 1781년(정조 5)와 1791년(정조 15)에 어진을 그렸다. 개혁정치의 산실인 奎章閣을 새로운 어진 봉안각으로 삼고 景慕宮과 華城 顯隆園 齋室에 자신의 어진을 봉안하여 그 장소의 권위를 더욱 특별하게 만들었다. 1791년(정조 15) 9월에도 어진을 그릴 때에는 주관화사로는 이명기가 임명되었고 김홍도가 동참하였으며 隨從畵師는 許礛, 韓宗一, 金得臣, 李宗賢, 申漢枰, 卞光復 등이었다. 완성된 絳紗袍 대본 하나는 창덕궁 奎章閣 宙合樓에 봉안하였고 소본 하나는 景慕宮 望廟樓에 펼쳐서 봉안하였으며 나머지 소본 하나는 이듬해 1월 顯隆園 齋殿에 봉안하였다. 봉안처는 재전의 어목헌이었다. 영조대 만녕전을 설치한 예에 따라서 새로 이름을 지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으나 정조가 공사문적에 단지 ‘御眞奉安閣’이라고 쓰도록 했다. 

肅宗代에서 正祖代에 이르는 시기 도성 내에 영희전을 궁궐 내에 선원전을 두고, 수도 방어의 주요 거점인 江華에는 長寧殿(또는 萬寧殿)을 둔 것은 국왕이 自在하는 장소를 공간적으로 확장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외방의 太祖眞殿 두 곳(慶基殿, 濬源殿)을 충실히 운영하고 肇慶廟를 건립하는 일 등을 통해 국가적으로 기억해야 할 왕실의 선대를 먼 과거와 연결지음으로써 현 국왕과 왕실에 시간 또는 역사의 권위를 부여하였다. 육상궁, 경모궁 등에 어진을 봉안한 것도 私親에 대한 효심에서 출발한 것이었지만 그 이상의 정치적인 효과를 기대한 조치였다. 


 

三. 19세기 眞殿 運營의 실제 

1. 純祖~哲宗代 眞殿 운영과 御眞圖寫


19세기에 들어와서도 이러한 眞殿 운영 방식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純祖는 즉위한 후 璿源殿을 3실로 하여 肅宗, 英祖에 이어 正祖의 어진을 봉안하였고 화성에 華寧殿을 건립91) 華寧殿은 화성 講武堂에서 남쪽으로 77보, 洛南軒에서 북쪽으로 79보가 되는 곳 酉坐卯向에 세워졌다.(「순조실록」 순조 1년 1월 29일(병오)) 하여 顯隆園 재실의 어진을 옮겨 모셨다. 1801년(순조 1) 화령전이 완성되자92)「순조실록」, 순조 1년 4월 29일(을해) 현륭원 재실에 있던 정조의 어진 2본을 옮겨 봉안한 후93)「순조실록」, 순조 1년 5월 2일(정축) 어진은 대본 하나와 소본 하나가 있었는데 대본은 펼쳐서 봉안하고 소본은 궤에 담아 보관하였다. 水原府 留守가 提調를, 判官이 殿令을 겸하게 하고 長樂宮의 衛將·部將 가운데 2원을 入直官으로 삼고, 守僕·員役도 수원부의 吏隷를 차출하도록 했다.94)「순조실록」, 순조 1년 1월 10일(정해) 

1802년(순조 2)에는 璿源殿을 개수하고 肅宗, 英祖, 正祖의 어진을 봉안하였다.95)「순조실록」, 순조 2년 8월 15일(계축) 이미 선원전에는 숙종의 어진과 영조의 70세상이 봉안되어 있었는데 이를 일체 養志堂으로 옮긴 후96)「순조실록」, 순조 2년 8월 2일(경자) 선원전 수리를 마치고 나서 다시 봉안하였다. 선원전에 있던 숙종의 어진 3본 가운데 1713년에 그린 두본은 궤에 담고 1748년(영조 24)에 모사한 본을 펼쳐서 봉안하였다. 영조의 어진 가운데 1721년 潛邸時에 그린 소본과 1733년(영조 9)에 그린 大本 하나와 小本 하나, 1763년(영조 39)에 그린 대본하나와 소본하나는 궤 속에 보관하고 1773년(영조 49)에 그린 八旬大本을 펼쳐서 봉안하였다. 이는 대왕대비로 수렴청정을 하고 있던 貞純王后의 뜻을 따른 것이었다. 정순왕후는 팔순대본이 더 의미가 있는데 정조대에 이를 봉안하지 못했던 것은 標題를 역적 鄭厚謙이 썼기 때문이라고 하고 표제를 새로 써 붙인 후 펼쳐서 봉안하도록 했다.97)「순조실록」, 순조 2년 7월 22일(경인) 규장각 宙合樓에 있던 정조의 어진은 1781년(정조 5, 辛丑年本, 30세상)에 그린 大本이 하나 小本이 하나와 1791년(정조 15, 辛亥年本, 40세상)에 그린 대본 하나, 1796년(정조 20, 45세상)에 그린 소본하나 모두 네 본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辛亥年 大本을 펼쳐 봉안하고 나머지는 궤에 담아 봉안하였다. 

당시 璿源殿은 3室의 구조를 취하여 가운데가 넓은 御間이고 동서로 좁은 夾室이 있었다. 肅宗의 어진이 중앙의 御間에 英祖의 어진이 夾室에 있었는데 새로이 正祖의 어진을 모시게 됨에 따라 모시는 장소를 어디로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결국은 古例에 따라 昭穆의 제도를 써서 숙종의 어진을 가운데 어간에 모시고 영조와 정조의 어진을 양쪽 협실에 봉안하여 생전에 侍坐한 것을 본뜨도록 했다.98) 이때 영희전의 제도를 따라 서쪽을 상위로 하자는 의견과 소목의 제도를 쓰자는 의견이 나뉘었으나 중앙의 어간이 가장 넓은 선원전의 제도를 감안하여 소목의 제도를 따르는 것으로 결정했다.(「순조실록」, 순조 2년 7월 22일(경인)) 1803년(순조 3) 昌德宮 宣政殿의 서쪽 행각에서 불이 나 인정전까지 전소되는 화재가 발생하여 선원전의 어진을 일시 書香閣으로 이안하였다가 화재가 진압된 뒤 다시 선원전에 봉안하는 일이 있었다. 다행히도 어진은 화재로 인한 피해를 입지 않았다. 

純祖는 1830년(순조 30)에 어진 대소본을 새로이 그려 書香閣에 있던 舊本과 함께 규장각으로 옮겨 봉안하였다. 또한 영조의 毓祥宮 고사와 정조의 景慕宮 고사를 이어 生母 綏嬪 朴氏99) 수빈 박씨는 朴準源의 3녀로 1770년(영조 46) 5월 8일 출생하였다. 1787년(정조 11) 후궁 간택에 수위로 뽑혀 그 해 2월 입궁하여 수빈에 봉하여지고 嘉順宮이란 宮號를 받았다. 이어서 1790년(정조 14) 6월 창경궁 집복헌에서 탄생한 원자가 1800년(정조 24)) 1월에 세자로 책봉되고 이해 임금으로 즉위하면서 ‘慈宮’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1822년(순조 22) 창덕궁 보경당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에 顯穆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묘소의 이름을 徽慶이라 정한 후 相地員들을 시켜 산지를 구하여 양주군 배봉산하를 묘역으로 정하고 1823년(순조 23) 2월 27일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이듬해에는 북부 관광방 계동 옛 龍虎營 자리(구 휘문고 자리)에 박씨의 사당을 짓고 신위를 모셔 경우궁이라 하였다. 현재는 七宮에 合祀되었다. 1901년(광무 5)에 수비(綏妃)로 추존되었다. 1855년(철종 6) 仁陵의 遷葬地를 구하면서 휘경원도 천장하기로 하여 그 해 10월 6일 수빈 박씨의 묘소를 양주 順康園 [선조 후궁 仁嬪 김씨의 묘소] 右岡으로 옮겼다. 그러나 1864년(철종 14)에는 천장한 곳이 풍수상 부적당하다 하여 그 해 5월 8일 다시 양주 달마동(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으로 천장하여 壬坐丙向에 예장하였다. 의 사당인 景祐宮 誠一軒에도 자신의 어진을 봉안하였다. 2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孝明世子[후에 翼宗으로 추존]도 1826년에 대본 2과 소본 1, 1827년에 대본 1과 소본 2를 도사했고 1830년에도 2본을 도사하여 모두 8본을 제작하였다.100) 현재 1826년에 도사한 冕旒冠을 쓰고 九章服을 입은 全身交椅坐像이 전한다.(조선미, 「한국초상화연구」 180쪽) 

憲宗 초 宙合樓와 演慶堂에 있던 純祖와 翼宗의 어진을 봉안할 장소를 논의하였는데 수렴청정을 하고 있던 대왕대비[純祖妃 純元王后]의 하교에 따라 선원전을 증건하지 않고 景祐宮 誠一軒의 재실에 봉안하였다.101)「헌종실록」, 헌종 2년 11월 4일(계사) 선원전을 계속 증건한다면 진전의 室數가 宗廟와 같아질 것이라는 염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국 憲宗은 1846년(헌종 12) 순조와 익종의 어진을 자주 뵙기 어렵다며 大內 眞殿 즉 선원전의 증수 절차를 마련하도록 지시했다. 이에 따라 선원전은 5실로 증건되었다. 

哲宗은 永禧殿에 제 6실을 마련하여 순조의 어진을 봉안하였다. 국가의 공식 진전이었던 영희전은 영조의 어진을 봉안한 이후 5실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철종대 安東 金氏의 勢道 속에서 세도의 구심이었던 純元王后를 높이려는 뜻에서 순조의 어진을 이곳에 봉안하게 된 것이다. 당시 純祖의 廟號를 純宗에서 純祖로 바꾸어 창업의 공이 있는 임금으로 재평가한 조치가 함께 이루어졌음을 볼 때 哲宗代의 영희전 중건과 순조어진의 봉안이 근본적으로는 세도가의 세력을 부식하려는 뜻에서 나오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창덕궁 내의 璿源殿 또한 憲宗까지 6代의 어진을 봉안하는 장소가 되었다. 

결국 19세기 전반기 眞殿 운영은 18세기의 것을 답습하는 형태였다. 순조대 정조가 공들여 키워왔던 화성에 華寧殿을 지어 江華府의 長寧殿에 짝하는 외방 진전으로 성립시킨 것을 제외하고는 진전정책의 새로운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순조의 생모의 사당인 景祐宮이 어진 봉안의 새로운 장소가 된 것도 영조대 육상궁과 정조대 경모궁의 고사를 따른 것이었다. 또한 眞殿의 室數가 종묘와 같이 되어 국가의 공식 제사가 늘어나는 것을 염려하였던 순원왕후의 조처도 효력이 오래가지 못하고 선원전은 계속 실수를 늘려나가고 국가의 가장 공식적인 진전인 영희전도 철종대 안동 김씨의 세도 속에서 규모가 확장되고 있었다.


  

2. 高宗代 眞殿 운영의 변화


1872년 1월 종묘에 太祖와 太宗에 尊號를 추상하는 책보를 올린 후 永禧殿의 제 1실의 御眞을 새로 모사하여 봉안할 것을 지시하고 이 일을 종친부에서 주관하게 했다. 1872년 조선이 開國한 지 여덟 번째 회갑이 되는 해였으므로 이와 같은 기념행사가 있게 된 것이었다.102) 1872년의 영희전 어진 移摸 작업에 대해서는 규장각 소장 「御眞移摸都監廳儀軌」(규13998/1 3999)가 참조된다. 이 해에는 고종의 어진 도사도 함께 이루어졌다. 이 때의 어진 圖寫의 정치적 의미에 대해서는 김세은, 2003 「고종초기 국왕권의 회복과 왕실행사」(서울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4장 3절 참조. 1872년의 영정이모, 어진도사 이후에 국왕의 초상을 그리는 작업은 한동안 거행되지 않았다. 다시 국왕과 선대 국왕의 어진에 대한 논의가 보이는 것은 광무년간에 들어가서이다. 

光武年間 전래의 어진 봉안 장소에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이는 1899년 先代 국왕들에 대한 대대적인 尊奉과 사친에 대한 追崇 사업과 관계되어 있다. 1899년 8월 18일 고종은 장헌세자를 莊宗으로 추숭하기로 결정하고, 都監을 설치하여 일을 담당하게 했다.103)「고종실록」, 고종 36년 8월 18일. 부묘의식은 1899년(고종 36) 11월 25일(양력)에 거행되었다.(「高宗實錄」, 고종 36년 11월 25일) 이로써 사당인 景慕宮은 景慕殿으로 승격되었고 새 경모전 자리는 창덕궁의 璿源殿으로 정해졌다.104)「고종실록」, 고종 36년 9월 1일 景慕宮의 추숭과 함께 장헌세자의 생모인 暎嬪 李氏에게도 시호를 올리기로 결정했다. 경모궁의 望廟樓에 있던 正宗[正祖], 純祖, 翼宗, 憲宗, 哲宗 등 5대의 어진은 宣禧宮으로 옮겼다.105)「高宗實錄」, 고종 36년 8월 23일. 宣禧宮은 장헌세자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의 사당으로 北部 順化坊 현재 종로구 신교동 1번지에 위치하고 있었다. 선희궁에 옮긴 후 어진의 봉안장소는 ‘平樂亭’으로 칭하도록 했고106)「高宗實錄」, 고종 36년 9월 1일 1899년 10월 31일 어진을 이안했다. 

한편 永禧殿은 옛 景慕宮 터로 이전되었다. 본래 영희전이 자리하고 있던 지역에는 1885년 漢城條約 이후로 일본인들의 거주지와 상권이 확대일로에 있었다. 1898년에는 명동성당이 영희전을 내려다 보는 위치에 건립되면서 왕실의 위엄있는 제향의 장소로서 위상에 타격을 받게 되었다. 이에 따라 영희전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문제가 심각하게 고려되었고 그 장소는 사당으로서 기능이 없어진 옛 景慕宮으로 결정되었다.107) 이 시기 舊 永禧殿 일대의 변화와 新 永禧殿으로의 移建에 대해서는 장필구, 2003 〈복원연구를 통한 영희전의 고찰〉 (서울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14~16쪽 참조. 1899년 11월에 새 영희전의 공사를 위한 도감을 설치하였고,108)「高宗實錄」, 고종 36년 11월 4일 이듬해 영희전이 완공된 후 1900년 5월 28일 各室의 어진을 봉안했다109)「高宗實錄」, 고종 37년 5월 28일

이렇게 先代 어진 봉안장소가 일대 변화를 겪는 와중에 太祖 御眞의 璿源殿 봉안이 제기되었다. 1899년 12월 19일(양력) 고종은 太祖와 莊宗, 正宗, 純祖, 翼宗을 皇帝로 추봉하는 의식을 거행하였다.110)「高宗實錄」, 고종 36년 12월 19일 또 12월 22일(양력)에는 太祖 高皇帝를 하늘에 配享하는 의식을 圜丘壇에서 거행했다.111)「高宗實錄」, 고종 36년 12월 22일

太祖를 추봉하는 일련의 의식들이 거행되는 가운데 1899년 11월 29일(음력, 양력 12월 31일) 홍문관 학사 李根命이 소를 올려 비워져있던 영희전 제1실에 태조의 어진을 추봉한 전례를 본받아 空室인 선원전 제1실에 태조의 어진을 모실 것을 청했다.112)「影幀摸寫都監儀軌」, 〈詔勅〉 己亥十一月二十九日. 영희전 1실에 태조 어진을 추봉한 전례란 1688년(숙종 14) 慶基殿의 태조 어진을 모사하여 영희전 제1실에 모신 일을 말한다. 고종은 이를 받아들여 태조 어진을 이모하여 선원전에 봉안하도록 하고 이 일을 담당하는 도감에서 翼宗과 純祖 어진을 修補하는 작업도 함께하게 했다.113) 순조 어진과 익종 어진을 수리하는 일은 「影幀摸寫都監補完儀軌」 (규13984)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1900년(光武 4) 純祖와 文祖 御眞의 補修 작업의 전 과정을 수록하였다. 같은 해에 있었던 태조 영정모사 작업과 병행되어 都監座目이나 조칙 등이《影幀模寫都監儀軌》〈奎13982〉와 동일하거나 중복되어 있다. 純祖御眞의 경우 粧潢에 浮解處가 있어서 보수하였고, 文祖御眞의 경우에도 上軸에 흠이 있었기 때문에 수리한 것이다. 모두 御眞 자체에는 손을 내지 않고 각각 粧潢補修와 標題改正에 그쳤으며 기록 또한 매우 소략하므로 내용을 따로 자세하게 다루지 않았다. 완성된 어진을 慶運宮의 璿源殿에 봉안한 후에는 景福宮과 昌德宮의 璿源殿에도 제 1실을 증건하도록 하여 時御 宮闕이 바뀔 때를 대비하게 했다.114)「고종실록」, 고종 37년 5월 22일 이 때 영정모사의 작업은 다음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1899년 11월 29일

都監堂郎 啓下

1899년 12월 13일

宗正院에 도감설치.

1900년 3월 19일

興德殿 西行閣으로 도감 移設.

1900년 3월 21일

준원전 영정을 흥덕전에 봉안하고 親臨 展奉(펼쳐 봉안함) 후 酌獻禮.

1900년 3월 23일

영정 油紙本 모사 시작

1900년 3월 26일

영정 유지본 墨摸寫가 끝남.

1900년 3월 27일

影幀舊本과 유지모사본 親臨 展奉한 후 奉審.

1900년 3월 28일

영정 구본과 유지 모사본을 친림 전봉한 후 봉심

1900년 3월 29일

영정 油紙 新本 다시 모사 시작.

1900년 4월 1일

영정구본과 追摸 油紙 2본 친림 전봉한 후 焚香.

1900년 4월 2일

追摸寫 油紙本 施彩

1900년 4월 3일

유지본 시채 완성

1900년 4월 4일

영정 구본과 유지 신본 친림 전봉한 후 봉심

1900년 4월 6일

영정 정본 上綃(비단에 옮겨 그림) 시작. 친림 전봉한 후 봉심

1900년 4월 7일

영정 상초 정본 시채(채색을 칠함). 御容 玉色(얼굴 부분 시채) 시역

1900년 4월 8일

영정 구본 친림 전봉 및 별다례

1900년 4월 11일

친림 展拜한 후 봉심

1900년 4월 13일

영정 정본 시채 완성. 정본 後褙 시작.

1900년 4월 14일

影幀 後褙가 끝난 후 친림 봉심

1900년 4월 15일

粧䌙 시작. 標題를 고종이 직접 씀. 고종이 작헌례를 친행함. 粧軸 시작. 선원전 각실 영정을 移安廳으로 옮김.

1900년 4월 16일

친림봉심. 장축 완성.

1900년 4월 17일

影幀新本 親臨 展奉한 후 살펴 봄. 影幀 初·本 세초한 후 불태움. 영정 新本 興德殿 봉안.

1900년 4월 18일

親行酌獻禮. 영정 구본[濬源殿 本] 還奉 親行 告動駕祭.

1900년 4월 19일

濬源殿 影幀 서울에서 출발.

1900년 4월 24일(5월 22일)

영정 신본을 선원전에 봉안함.

1900년 4월 24일

친행 작헌례(百官入參). 각실 영정을 선원전으로 환안함.

1900년 4월 28일

영정 구본을 영흥 준원전에 환안함.115)

「影幀摸寫都監儀軌」(奎13982) 〈時日〉


태조 어진 이모는 趙錫晋이 담당하였다. 옮겨온 준원전의 영정은 헌종 당시 李漢喆과 趙重晦가 그린 것이었다. 두 사람에 대해 “당시에는 名畵라고 할 수 없었다고 하는데 세대가 내려오고 재주가 옛날에 미치지 못하기에 지금 보기에는 정말로 재주가 좋은 것 같습니다.”116)「影幀摸寫都監儀軌」(奎13982) 〈詔勅〉 경자 2월 11일 라고 언급하고 있어 같은 화가에 대한 각 시대의 평가가 엇갈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영정모사를 맡길 화원은 功臣畵像과 耆老臣의 畵像 1본을 도감에서 가져와 取才하였다. 화원을 일시에 모아서 취재하는 방식이 아니라 매일 한사람씩 불러 그림을 그리게 하여 다른 화원들이 보지 못하게 하고, 그려낸 것은 都監에 보관해 두었다가 준원전 영정을 가져온 후 도감당상들이 함께 상의하여 결정하기로 했다.117)「影幀摸寫都監儀軌」(奎13982) 〈詔勅〉 庚子二月十五日 

준원전 영정을 봉안해 올 때 숙소는 各處의 行宮이나 客舍 가운데 편리한 곳을 이용하였다. 중간에 연락을 하는 것도 이전에는 晝停所에서 擺撥馬를 보내는 방식을 썼었지만, 갑오경장 이후의 제도에 따라 우편으로 대신하기로 했다. 이에 고종은 특별히 電話主事가 器械를 가지고 함께 따라가 전화로 미리 아뢰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새로 제작한 태조의 어진을 봉안한 지 다섯 달도 채 되지 않았을 때 慶運宮 璿源殿에 화재가 발생하여 7실에 봉안된 어진이 모두 불에 타버렸다.118)「고종실록」, 고종 37년 10월 14일 고종은 즉시 影幀摸寫都監과 眞殿重建都監을 合設하고 도감 당상과 낭청을 宮內府에서 선출하여 작업을 시작하도록 했다. 7실의 소실된 어진은 永禧殿과 平樂亭(원래 경모궁 망묘루 본), 毓祥宮 冷泉亭의 어진 등을 각각 옮겨 이모하게 했다.119)「고종실록」, 고종 37년 10월 14일 그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 1실 太祖어진 濬源殿 1838년(戊戌) 이모본 익선관본

제 2실 肅宗어진 永禧殿 1748년(戊辰) 이모본 익선관본

제 3실 英祖어진 冷泉亭 1744년(甲子) 도사본 익선관본

제 4실 正祖어진 平樂亭 1791년(辛亥) 도사본 원유관본

제 5실 純祖어진 永禧殿 1830년(庚寅) 도사본 원유관본

제 6실 翼宗어진 平樂亭 1826년(丙戌) 도사본 면복본

제 7실 憲宗어진 平樂亭 1846년(丙午) 도사본 익선관본120)

  「影幀摸寫都監儀軌」(奎13992) 〈詔勅〉


또한 어진을 이모하고 眞殿을 중수하는 일을 위해 내탕전 5만원을 특별히 하사하였다. 음력 9월 28일에 모든 어진을 慶運宮의 興德殿으로 모신 후 작헌례를 지냈다. 濬源殿 어진 및 永禧殿, 冷泉亭(육상궁), 平樂亭(선희궁, 舊 景慕宮 望廟樓)의 御眞을 모셔올 때에는 고종이 직접 新橋까지 나가 맞이하였다.121)「고종실록」, 고종 37년 11월 19일 태조의 어진을 興德殿에 봉안한 상태에서 開城府의 穆淸殿 또한 복구하기로 결정하고 이곳에도 준원전의 영정을 이모·봉안하도록 지시했다.122)「고종실록」, 고종 37년 12월 1일(음력 10월 10일). 목청전은 개성부 숭인문 안쪽에 세워졌다.(「고종실록」, 고종 38년 1월 9일)


새로운 璿源殿의 자리는 永成門 내의 西邊 申坐之地로 결정되었다.123) 옛 경기여고 자리. 선원전이 건립되기 전까지는 太祖의 영정은 靜觀軒에 모시고 나머지 어진들을 中和殿에 봉안하였다.124)「고종실록」, 고종 38년 2월 5일 2월 13일에는 목청전에 봉안될 새 영정을 新橋까지 나가 祗送하였다.125) 목청전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개성부 행궁에 모셔두도록 했다.(「고종실록」, 고종 38년 1월 21일) 2월 24일에는 寶文閣의 어진을 文華閣으로 옮겨 모시게 했다. 4월 29일에는 경운당에 임시로 봉안하였던 濬源殿의 태조영정을 환봉했다.126)「고종실록」, 고종 38년 4월 29일 새로운 璿源殿은 6월에 가서야 완공되어 6월 13일에 새 영정들을 각 실에 봉안했다.127)「고종실록」, 고종 38년 6월 13일 새 永禧殿도 이달에 완공되어 6월 26일 봉안의식을 거행했다.128)「고종실록」, 고종 38년 6월 26일 

이런 과정을 거쳐 경운궁 내의 새 선원전에는 다시 7대의 어진이 봉안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봉안된 어진들 또한 오래 한자리를 보전하지 못하였다. 1907년 황제의 자리에 오른 순종은 “永禧殿·穆淸殿·華寧殿·冷泉亭·平樂亭·誠一軒에 奉安 睟容을 璿源殿에 移安고 舊殿閣은 冷泉亭을 除 外에 竝히 國有에 移屬홈. 睟容移安의 節次 宮內府에셔 別로히 此를 定홈.”이라는 享祀釐正에 관한 칙령을 내렸다.129)「순종실록」, 순종 1년 7월 23일 이 칙령으로 도성 내외 여러 진전에 봉안되었던 선대의 어진들은 모두 창덕궁의 璿源殿에 봉안되게 되었다. 나머지 제 眞殿이 있던 자리는 모두 國有로 속하게 되었다. 이로써 궁궐 밖에서 국왕의 自在를 상징하는 장소는 모두 사라지게 되었으며 국권이 상실되기 이전에 이미 조선의 국왕은 궁궐 안의 존재로 위상이 축소되어가고 있었다. 

 


맺음말

  

이상에서 肅宗代에서 英祖代에 이르는 동안의 影幀摸寫, 御眞圖寫儀式과 진전운영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았다. 숙종이 도성 내에 남별전을 증축하고 태조의 어진을 모사하여 봉안한 것은 國祖인 ‘太祖’에 대한 새로운 기억의 방식과 관련되어 있었다. 조선건국의 정당성을 ‘春秋大一統’의 의리에서 찾은 士論을 수용하면서 태조에게 시호를 올리는 의식 거행했던 숙종으로서는 이를 자신의 위상 강화로 연결지우는 새로운 의식을 필요로 했다. 外方에 있던 태조의 영정을 서울로 모셔와 새로 모사한 후 都城 안 眞殿에 봉안하는 의식은 되살아난 國祖에 대한 기억을 표상하는 장소를 도성 안에 구축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국왕이 직접 나루에 나가 영정을 모시고 궁궐로 돌아오는 엄숙한 의식과 百官의 奉審의식, 먼 지방에서까지 화원들을 불러올려 재주를 시험한 것 등을 통해 영정모사와 진전 봉안의 정치적 효과를 극대화했다. 

한편 肅宗은 바깥에 알리지 않고 자신의 어진을 그려 江都 長寧殿에 두었다가 수년 후 어진의 존재를 공식화하며 御眞 圖寫의식을 크게 벌였다. 신하들에게 어진에 대한 瞻拜禮를 강요하고 江華 長寧殿, 闕內 璿源殿, 五臺山 璿錄閣 등에 봉안하게 한 것은 국왕 권위의 표상으로서 어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하였음을 보여준다. 英祖代 이후 도성 내에 영희전을 궁궐 내에 선원전을 두고, 수도 방어의 주요 거점인 江華에는 長寧殿(또는 萬寧殿)을 둔 것은 숙종대의 진전 정책을 계술하며 국왕이 自在하는 장소를 공간적으로 확장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毓祥宮, 景慕宮 등에 어진을 봉안한 것도 私親에 대한 효심에서 출발한 것이었지만 그 이상의 정치적인 효과를 기대한 조치였다. 

19세기에 들어와서도 이러한 眞殿 政策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純祖代 正祖가 공들여 키워왔던 화성에 華寧殿을 지어 江華府의 長寧殿에 짝하는 외방 진전으로 성립시킨 것을 제외하고는 진전정책의 새로운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순조의 생모의 사당인 景祐宮이 어진 봉안의 새로운 장소가 된 것도 英祖代 毓祥宮과 正祖代 景慕宮의 고사를 따른 것이었다. 또한 眞殿의 室數가 종묘와 같이 되어 국가의 공식 제사가 늘어나는 것을 염려하였던 영조의 염려는 현실화 되어 璿源殿과 永禧殿의 室數는 계속 늘어나기만 했다. 19세기 중반 이후 先代에 대한 엄격한 평가가 수반되지 않은 채 단지 先王이라는 이유만으로 眞殿에 어진이 봉안되면서 眞殿이 가지는 위상은 이전에 비해 오히려 약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高宗이 光武年間 선대 국왕들을 皇帝로 추숭하는 작업과 함께 태조의 어진을 선원전에도 봉안함으로써 原廟로서 기능하고 있었던 궁궐 내 진전인 璿源殿에 永禧殿과 같은 위상을 부여하려 했지만 기울어가는 國運을 되돌릴 수 없는 상황에서 그 眞殿이 제대로 기능할 수 없었다. 결국 1907년 궁궐 밖 모든 진전이 철폐됨으로써 2세기 동안 국왕 권위를 상징해왔던 眞殿의 기능 또한 끝나게 되었다. 

奎章閣에 소장된 10종의 影幀·御眞 관계 의궤는 조선시대 국왕의 초상을 어떠한 과정을 거쳐 그렸는지 상세한 정보를 주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각 시기 國王의 초상이 어디에 어떠한 방식으로 奉安되고 享祀되었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 국왕의 초상화에 각별한 의미를 두게 되었는지를 염두에 두고 고찰하게 되면 국왕의 권위가 표상되는 방식에 대한 풍부한 문화사 연구로 나아갈 수 있다. 

 

(김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