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의 향기 ♣>/♧ 역사의 향기 ♧

연령군(延齡君) / 명빈 박씨 (榠嬪朴氏)

화엄행 2009. 4. 7. 11:30

명빈 박씨 (榠嬪朴氏)

본관은 밀성(密城). 숙종의 후궁, 연령군(延齡君)의 모.
묘는 덕산면 옥계리에 있다.

 

 

연령군(延齡君)

http://www.shinjongwoo.co.kr/name/ah/azh/wjswn/wjs354.htm

 

성명(姓名)

 연령군(延齡君)

본관(本貫)

 전주(全州)

시대(時代)

1699(숙종 25)∼1719(숙종 45)

자(字)

문숙(文叔)

호(號)

 

이력(履歷)

1699(숙종 25)∼1719(숙종 45). 조선 후기의 종실. 전주이씨(全州李氏). 자는 문숙(文叔). 숙종의 여섯째아들이며, 어머니는 명빈박씨(榠嬪朴氏)이다.

1703년(숙종 29) 5세에 연령군으로 봉하여졌다. 예법에서는 6세 이후에 봉작하는 것이 관례이나 5세 당시 생모인 명빈박씨가 죽음으로써 주상자(主喪者)가 되었기 때문에 서둘러 봉해졌다.

이때에 대간들의 논란이 많았으나, 왕은 허락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대간들을 파직시키기도 하였다.

1705년 연령군의 숙배(肅拜) 때에 교지를 전달할 임무를 맡은 이조정랑 조도빈(趙道彬)이 당일에 늦자 그 자리에서 그를 파직시킨 경우도 있다.

1707년 혼인하였으며, 1711년 천연두를 앓은 바 있다.

1719년에는 형인 연잉군(延#잉03君:뒤의 영조)과 함께 왕의 기로소 입소를 적극 권유하는 소를 올렸다. 성품이 효성스럽고 근면하여 왕의 간병에 조금도 게으름이 없었으며, 또한 사제(私第)에 거처하였으나 민간에는 폐를 끼치지 않았다고 한다.

숙종이 특별히 사랑하여 제문과 묘지문을 직접 지었다. 도승지 김연(金演)이 초상(初喪)을 주관하였는데, 연령군의 부인이 그의 종손녀였기 때문이다.

아들이 없어서 숙종이 밀풍군 탄(密豊君坦)의 둘째아들인 상대 (尙大)를 그 후사로 삼도록 하고 유(幼)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연잉군과 우애가 두터워 연잉군이 즉위한 뒤에는 왕으로서 연령군의 묘에 자주 치제하였으며, 은신군 진(恩信君#진26:思悼世子의 4남)으로 다시 후사를 삼아주었다. 시호는 효헌(孝憲)이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英祖實錄, 璿源系譜. 〈李舜九〉

 

 

연령군(延齡君) 본관은 全州이씨

延齡君墓表

          古 軸 4655-89

          趙泰耉 書, 연기미상

          1축, 탁본, 206 X 73cm

     숙종의 아들 延齡君(1699-1719)의  墓表이다.  "有明朝鮮國王子延齡君兼五衛都摠府都摠管贈諡孝憲公之墓"라는 묘표만이 있다. 연령군은 숙종의 여섯째 아들로 이름은  明이고 자는 文叔이다. 어머니는 명(示+冥)嬪 朴氏이다. 1719년(숙종  45)  2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孝憲이다. 규장각에  ≪王子延齡君贈諡孝憲公神道碑銘≫(古  軸4655-90)이 전하는데 함께 찬술되어 표구된 것으로 보인다.(김지영)

묘(墓)

 

부(父)

 

모(母)

 

배(配)

 

자(子)

 

녀(女)

 

형제(兄弟)

 

문헌(文獻)

 

기타(其他)

 

 

 

http://koreandb.nate.com/history/people/detail?sn=4057

 

  • 생몰년 : 1699-1719
  • 시대 : 조선
  • 분야 : 왕실 > 왕족 > 종실
  • 연령군(延齡君)에 대하여

    연령군(延齡君)
    1699(숙종 25)∼1719(숙종 45). 조선 후기의 종실. 전주이씨(全州李氏). 자는 문숙(文叔). 숙종의 여섯째아들이며, 어머니는 명빈박씨榠嬪朴氏이다.
    1703년(숙종 29) 5세에 연령군으로 봉하여졌다. 예법에서는 6세 이후에 봉작하는 것이 관례이나 5세 당시 생모인 명빈박씨가 죽음으로써 주상자(主喪者)가 되었기 때문에 서둘러 봉해졌다.
    이때에 대간들의 논란이 많았으나, 왕은 허락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대간들을 파직시키기도 하였다.
    1705년 연령군의 숙배(肅拜) 때에 교지를 전달할 임무를 맡은 이조정랑 조도빈(趙道彬)이 당일에 늦자 그 자리에서 그를 파직시킨 경우도 있다.
    1707년 혼인하였으며, 1711년 천연두를 앓은 바 있다.
    1719년에는 형인 연잉군(延礽君:뒤의 영조)과 함께 왕의 기로소 입소를 적극 권유하는 소를 올렸다. 성품이 효성스럽고 근면하여 왕의 간병에 조금도 게으름이 없었으며, 또한 사제(私第)에 거처하였으나 민간에는 폐를 끼치지 않았다고 한다.
    숙종이 특별히 사랑하여 제문과 묘지문을 직접 지었다. 도승지 김연(金演)이 초상(初喪)을 주관하였는데, 연령군의 부인이 그의 종손녀였기 때문이다.
    아들이 없어서 숙종이 밀풍군 탄(密豊君坦)의 둘째아들인 상대 (尙大)를 그 후사로 삼도록 하고 유(幼)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연잉군과 우애가 두터워 연잉군이 즉위한 뒤에는 왕으로서 연령군의 묘에 자주 치제하였으며, 은신군 진(恩信君禛:思悼世子의 4남)으로 다시 후사를 삼아주었다. 시호는 효헌(孝憲)이다.

     

    참고문헌

    • 肅宗實錄, 英祖實錄, 璿源系譜. 〈李舜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