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의 향기 ♣>/♧ 역사의 향기 ♧

王 陵의 구조와 조선왕릉 위치

화엄행 2009. 4. 12. 21:17

 

 

왕 릉 (王 陵)


1. 왕릉과 고분

고분은 고대인의 무덤을 가리키는데, 무덤의 형태나 크기 또는 묻힌 사람의 신분에 따라 그 명칭을 달리한다. 무덤의 크기가 비교적 작으면서 무덤의 주인공이 왕이 아닐 경우 '○○○묘(墓)'라고 부른다.

비교적 크기가 큰 대형 묘로 주인을 밝힐 수 없는 무덤은 '총 (塚)'이라 하고, 묻힌 사람의 신분이 왕으로 밝혀진 무덤의 경우는 '능(陵)'이라 한다.


2. 왕실의 묘를 부르는 명칭 - 위계에 따라 정함.

1) 능(陵) : 왕과 왕비의 무덤

2) 원(園) : 왕의 사친(私親), 왕세자와 그 비(妃)의 무덤

3) 묘(墓) : 대군·공주·옹주·후궁·귀인 등의 무덤

3. 능의 형식

1) 단릉(單陵) : 왕이나 왕비 중 어느 한 사람만을 매장하여 봉분이 하나인 능.

2) 쌍릉(雙陵) : 왕과 왕비를 하나의 곡장 안에 매장하여 봉분이 나란히 2기로 조성된 능.

3) 삼연릉(三連陵) : 왕·왕비·계비 등 세 명의 봉분 3기를 나란히 조성한 능

4) 동원이강릉(同園異岡陵) : 왕과 왕비의 능을 정자각 좌우 두 언덕에 각기 한 기씩 조성한 능

5) 합장릉(合葬陵) : 왕과 왕비의 관을 함께 매장하여 한 개의 조성 한 능.


4. 왕릉의 조성 절차 - 자세한 내용은 후장에 상세 기재

왕실에서 국상을 당하면 곧 빈전(殯殿)·국장(國葬)·산릉(山陵) 의 도감(都監)을 설치하고 장례준비를 하게 된다.

빈전도감은 장례일까지 염습(죽은 이의 몸을 씻긴 후에 옷을 입히는 일)· 성빈(成殯 : 빈소를 만듬)·성복(成服 : 초상이 났을 때 상복을 처음 입는 일) 등 빈전에 관한 일을 맡고, 국장도감에서는 장의에 필요한 재궁(梓宮 : 무덤을 지키려고 그 옆에 지은 집)·거여(車輿)·책보(冊寶 : 玉冊과 金寶)·복완(服玩)·능지(陵誌)·명기(明器 : 장사 지낼 때에 무덤에 묻는 여러 기물)·길흉(吉凶)·의장(儀仗 : 의식에 쓰이는 무기나 물건)·포연(鋪筵)·제기(際器)· 제전(際箋 : 의식을 갖춘 제사와 의식을 갖추지 않은 제사의 총칭)  반우(返虞 : 장사 지낸 후 신주를 모셔 돌아오는 일) 등의 의식과 절차를 관장했다.  그리고 산릉도감에서는 현궁(玄宮 : 임금의 관을 묻은 무덤구덩이 속 壙中과 정자각(丁字閣)·비각(碑閣)·재실(齋室) 등 봉분조성과 부대시설에 관한 일을 맡았다. 택지(擇地)와 능역(陵役)은 대략 3개월에서 5개월 정도 걸렸으며, 능역에 동원된 인원은  6,000명 9,000명이라고 기록에 전한다.



5. 능의 구조

조선왕조의 왕릉은 기본적으로 태조의 건원릉의 배치 방식을 따랐다(그림 1). 이를 정형화시켜 놓은 것이 <경국대전>과 <국조오례의 (國朝五禮議)>이다. 이 전범에서 예외는 대한제국이 성립한 이후의 고종의 홍릉(洪陵 : 그림 2)과 순종의 유릉(裕陵)이다. 홍릉과 유릉은 명나라 태조 효릉의 양식을 따라 조성한 황제의 능이어서 왕릉들과는 다르게 정자각이 일자집 침전(寢殿)으로 변하고, 봉분 주위에 배치했던 문·무인석도 침전 앞으로 옮겼다. 석물도 신도 앙쪽에 금관 조복을 한 문인석과 투구에 흉갑을 두른 무인석을 위시하여 기린· 코끼리·사자·해태·낙타 석상을 배치하였다. 건원릉의 형식은 중국의 성왕(城王)의 무덤 형식이다. 무척 웅장하지만 황제의 능에는 못 미친다. 감히 중국대륙을 다스리는 황제의 능과 맞먹을 엄두는 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려 때 몽고의 지배 아래서는 이런 왕릉의 형식도 제대로 갖춰지지 못했으며 고려 말에 자주 국가를 선언한 공민왕 때에 이르러 비슷한 형태가 갖춰졌다.


 건원릉은 고려 공민왕의 현릉과 정릉의 양식을 그대로 따른 것이며, 고려 왕릉에 영향을 준 신라 왕릉의 병풍석 역시 능침을 보호하기 위하여 큼직한 자연석을 능침둘레 군데군데 박아 놓은 고구려 왕릉의 호석(護石)제도를 이어받은 제도이다. 자연석으로 된 보호석이 점차 네모지게 다듬은 입석(立石)으로 변하였을 뿐이다. 또 왕릉 양편에 문인석과 무인석을 위시하여 석마(石馬)·석양(石羊)·석호(石虎)를 분배하여 벌여놓고 병풍석에 12지 신상을 입체 조각한 형식은 신라시대에 당나라의 제도를 본받아 이룩한 고유한 제도가 그대로 고려조로 전승된 법식인 것이다.



1) 택지(擇地)

풍수지리설에 따라 배산임수(背山臨水)한 지형에 영험한 맥이 흐르다가 멈추는 곳인 명당을 잡았다.

즉, 북쪽의 놓은 산을 주산(主山)으로 하고 좌우에 청룡·백호의 산세, 남쪽에 안산(案山), 묘역 안에 천 (川)이 있어 물이 동쪽으로 흘러 모아지는 곳을 말한다. 묘역 안의 명당에 지맥이 닿아 생기가 집중되는 곳을 혈(穴)이라고 하는데, 이 혈에 관을 묻고 봉분을 조성했다. 능은 좌향(坐向)을 중요시한다. 좌란 혈의 중심이 되는 곳이고, 좌의 정면이 되는 방향이 향이다. 왕릉의 좌향을 보면 대부분 북에서 남으로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산세에 따라 서향 또는 북향을 취한 것도 있기도 하다.


2) 곡장(曲墻)

능의 뒤쪽에는 배산(背山)이 있고 송림(松林)을 배경으로 하여 경사지 밑 부분에 동·서·북 3면으로 곡장(曲墻)을 두르고 그 안에 봉분을 만들었다.


3) 봉분(封墳), 병풍석(屛風石)과 난간석(欄干石)

봉분 밑 부분은 12각의 병풍석을 둘러 보호했다. 병풍석의 중앙 면석에 12방위를 담당하는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방위에 맞게 양각했는데 이는 모든 방위의 외침으로부터 왕릉을 보호하기 위한 의미가 있다. 방위 표시를 위하여 병풍석 위에 꽃 봉우리 모양의 인석을 만들기도 한다. 난간석은 크게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망주석 모양의 제일 높은 기둥을 석주(石柱), 그 사이를 가로 질러 접근을 막는 횡석주를 죽석(竹石), 죽석의 중간에 받쳐준 작은 기둥을 동자석주(童子石柱)라 한다.


* 능묘 주위에 석조물을 배치하는 풍습은 중국 전한시대에 시작된 것으로 현존하는 최고의 작품은 전한 무제 때의 명장이었던 곽거병의 묘 앞의 조각들로 알려져 있다.


* 봉분의 호석과 그 호석에 부조된 무복(武服)의 십이지신상은 다른 나라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우리나라의 독창적인 산물.


4) 석호(石虎)와 석양(石羊)

석호는 능을 수호하는 수호신이며, 석양은 사악한 것을 피한다는 의미와 함께 명복을 비는 뜻을 담고 있다.

각각 4기가 밖을 향하여 봉분을 호위하는 형상을 하고 있는데, 추존릉의 경우 그 수를 반으로 줄여 일반 왕릉과 차등을 두었다.

 한편, 공민왕 이전의 고려왕릉은 봉분 아래를 흙으로 높이 쌓지 않고 대신 봉분까지 돌계단을 놓았으며 능을 지키는 짐승이 석양과 석호가 아니라 석구(石狗) 한 종류였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통일신라와 고려시기 석양과 석호 대신 석사자가 봉분 주위에 배치되었다)


5) 상석(床石)과 망주석(望柱石)·장명등(長明燈)

상석 아래에는 귀면(鬼面) 모양을 새긴 고석(鼓石)이 상석을 받치고 있다. 상석을 다른 말로 혼유석(魂遊石)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임금의 혼이 나와서 노는 돌이라는 뜻이다. 건원릉의 고석은 5개인데 세종의 영릉부터 4개만을 만들어 놓다가 휘릉에 와서 다시 5개를 설치하기도 했다. 왕릉의 상석과 일반묘의 상석은 형태는 같으나 그 기 능은 다르다.


일반인의 뫼는 봉분 바로 앞에서 상석에 음식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지만 왕릉은 봉분 앞이 아니라 봉분이 올라 잇는 구릉 저편 밑의 정자각 앞에서 제사를 올린다. 그러면 죽은 임금은 혼유석 위에 앉아 저 아래에서 치러지는 제사를 지켜보는 것이다. 상석 좌우에는 망주석 1쌍을 세웠다. 망주석은 가운데 구멍이 나있어 이곳에 줄을 걸고 차양을 씌워 혼유석을 가리게 되어 있다. 다람쥐나 이무기를 새겨 놓은 망주석도 있다.

장명등은 망주석과 망주석보다 한 단 아래에 있는데 최기에는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가 차츰 사각형 지붕으로 변화한다.


6) 문인석과 무인석·석마

봉분 앞 평지는 3층 계단 형태로 되어 있다. 맨 위층에는 혼유석과 망주석이 있으며, 중간층에는 장명등을 중심으로 문인석 한 쌍이 석마(石馬)를 대동한 채 시립하고 있다. 문인석은 자신의 품계를 나타내는 홀(笏)을 들고 있다. 맨 아래층에는 무인석 한 쌍이 석마를 대동한 채 서있다. 무인석은 장검을 빼어 두 손으로 짚고 있다.


왕릉답사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재미는 문인석, 무인석들은 왕의 일생을 드러내듯 저마다 다채로운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이다. 태조의 건원릉의 경우 자신감을 보여주는 듯 어깨를 쭉 펴고 목을 세운 채 서 있는 자세가 당당하고 표정도 의연하다.(위엄 있는 표정) 반면 강원도 영월에 있는 단종릉의 석상은 아예 엉엉 울고 있다. 선조의 목릉의 경우도 우는 듯한 모습이다. 표정이 모두 다르다 해도 왕릉이니 만큼 대체로 근엄함과 권위를 지니고 있는데 드물게 환히 웃고 있는 석상이 있다. 영조의 원릉의 문·무인석은 왕을 호위하고 있는 신하로서 '체신 머리 없이' 입아귀가 위로 쭉 올라갈 정도로 기분 좋게 웃고 있다. 체구도 아담해 실제 몸 크기와 동일하다.


* 통일신라시대에 서역인을 모델로 삼은 무석인은 당시 서역과의 밀접한 교류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 문석인과 석사자의 조각양식이 당나라의 양식을 반영.


7) 사초지(莎草地)·정자각(丁字閣)·석함(石函)·비각(碑閣)·수복청(守僕廳)

1> 사초지 - 무인석에서 정자각까지 심하게 경사가 진 언덕.

2> 정자각 - 丁자 모양을 한 제향을 하는 건물이다. 정자각에 오르는 층계는 동쪽과 서쪽에 있다. 이는 제례의식에서 동입서출(東入西出)의 격식을 지키기 위한 뜻이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이러한 격식은 잘 지켜지지 않고, 기단 정면에 계단이 설치되기도 한다.

3> 석함 - 정자각 서쪽에 있다. '예감'또는 소대(燒臺)라고 불리며 제향 후에 축문을 태워 묻는 네모난 돌상자이다.

4> 비각 - 비(碑)를 안치하기 위해 지은 건물.

5> 수복청 - 제사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하급관리를 비롯한 일꾼들이 제사를 준비하는 곳.



8) 참도(參道)와 홍살문(紅箭門)·판위(版位)·금교(禁橋)·재실

1> 참도 - 홍살문을 들어서면 정자각(丁字閣)까지 긴 돌길인 참도(參道)가 펼쳐져 있다. 참도는 주의 깊게 살펴보면 왼쪽 부분은 한 단을 높게 만들었고 , 오른쪽 부 분은 단을 낮게 만들었습니다. 이유는 신성한 정령(精靈)이 다니는 왼쪽 신로 (神路) 부분과 사람이 걸어가는 오른쪽 인로(人路) 부분을 분리해 놓은 것입니다

2> 홍살문 -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문.

3> 판위 - 배위(拜位)라고도 하며, 임금이 제사를 지내러 왔을 때 홍살문 앞에서 내려 배위에서 절을 하고 들어갔다.

4> 금교

5> 재실 - 능을 수호하는 능참봉이 상주하는 곳.


9) 원찰(願刹)

왕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명복을 비는 사찰을 일컫는다. 고려시대 성행하여 조선시대까지 계속되었으나 태종은 배불숭유정책에 따라 원찰을 세우지 않았으며 정조는 원찰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서 이를 금지했다.

건원릉의 개경사, 정릉의 흥천사, 광릉의 봉선사 등이 대표 적이다.

 

 

                                       - 조선 왕릉의 상설도(象設圖) -

                                 (능역에 설치한 건축공및 석물의 배치도)

 

  

 

 

 

조선왕조의 릉(陵)

왕대

   왕  명

  릉  명

            관  련  인  물

    릉  소 재 지

   비  고

1

태조

건원릉

이성계

경기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 

제릉

신의왕후 한씨

황해 판문군

 

정릉(貞陵)

신덕왕후 강씨(방석의 어머니)

서울 성북구 정릉

 

2

정종

후릉

정종과 비 정안왕후 김씨

황해 판문군

 

3

태종

헌릉

태종과 비 원경왕후 민씨

서울 강남구 내곡동

헌인릉 

4

세종

영릉(英陵)

세종과 비 소헌왕후 심씨

경기 여주군

 

5

문종

현릉

문종과 비 현덕왕후 권씨

경기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 

6

단종

장릉

단종

강원 영월

 

사릉

비 정순왕후 송씨

경기 남양주시 진건면

 

7

세조

광릉

세조와 비 정희왕후 윤씨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추존덕종

경릉

덕종과 비 소혜왕후 한씨

경기 고양시 용두동

서오릉 

8

예종

창릉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한씨

경기 고양시 용두동

서오릉 

공릉

비 장순왕후 한씨(한명회의 딸)

경기 파주시 조리면

공순영릉

9

성종

선릉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윤씨

서울 강남구 삼성동

선정릉

순릉

비 공혜왕후 한씨(한명회의 딸)

경기 파주시 조리면

공순영릉

10

연산군

연산군묘

연산군과 부인신씨

서울 도봉구 방학동

 

11

중종

정릉(靖陵)

중종

서울 강남구 삼성동

선정릉

온릉

비 단경왕후 愼씨

경기 장흥 일영

 

희릉

계비 장경왕후 윤씨

경기 고양시 원당

서삼릉

태릉

2계비 문정왕후 윤씨(명종어머니)

서울 노원구 공릉동

태강릉

12

인종

효릉

인종과 비 인성왕후 박씨

경기 고양시 원당

서삼릉

13

명종

강릉(康陵)

명종과 비 인순왕후 심씨

서울 노원구 공릉동

태강릉

14

선조

목릉

선조와 비 의인왕후박씨,계비 인목왕후 김씨

경기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

15

광해군

광해군묘

광해군과 부인 유씨

경기 남양주시 진건면(사릉부근)

 

 

추존원종

장릉(章陵)

원종과 비 인헌왕후 구씨

경기 김포시 김포읍

 

16

인조

장릉(長陵)

인조와 비 인열왕후 한씨

경기 파주 탄현면

 

휘릉

계비 장렬왕후 조씨

경기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

17

효종

영릉(寧陵)

효종과 비 인선왕후 장씨

경기 여주군 능서면(세종 영릉과 이웃)

 

18

현종

숭릉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

경기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

19

숙종

명릉

숙종,계비인현왕후 민씨,계비인원왕후 김씨

경기 고양시 용두동

서오릉

익릉

비 인경왕후 김씨

경기 고양시 용두동

서오릉

20

경종

의릉

경종(장희빈아들)과 계비 선의왕후 어씨

서울 성북구 석관동

 

혜릉

비 단의왕후 심씨

경기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

21

영조

원릉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 김씨

경기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

홍릉(弘陵)

비 정성왕후 서씨

경기 고양시 용두동

서오릉

 

추존진종

영릉

진종과 비 효순왕후 조씨

경기 파주시 조리면

공순영릉

 

추존장조

융릉

장조(사도세자)와 비 혜경궁 홍씨 헌경왕후

경기 화성군 태안면

융건릉

22

정조

건릉

정조와 비 효의왕후 김씨

경기 화성군 태안면

융건릉

23

순조

인릉 

순조와 비 순원왕후 김씨

서울 강남구 내곡동

헌인릉

 

추존익종

수릉

익종과 비 신정왕후 조씨

경기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

24

헌종

경릉

헌종과 비 효현왕후 김씨,계비 효정왕후 홍씨

경기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

25

철종

예릉

철종(강화도령,이원범)과 비 철인왕후 김씨

경기 고양시 원당동

서삼릉

26

고종

홍릉

고종과 명성황후 민씨

경기 남양주시 금곡동(홍릉은 처음 동구릉에서 청량리로 이장한후 고종이승하하자 현재의 금곡동에 안장)

홍유릉

27

순종

유릉

순종과 효현황후 민씨,계후 순정효황후 윤씨

경기 남양주시 금곡동

홍유릉

 

출처 :서울문화 원문보기 글쓴이 : 산다람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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