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이방원의 마지막 후궁>
"燕山君墓" 부인 "居昌愼氏墓"
태종대왕의 마지막후궁"義貞宮主趙氏墓"
연산군사위 "陵盛具氏墓" 따님 휘순공주 "全州李氏墓"
그리고 비석에는 "연산군묘"에는 "正德" 그리고 나머지 네개의 비석에는 "家政"이라는 明나라의 年號가 새겨져 있어 墓가 형성된 날짜를 기록하고 있읍니다. 연산군묘를 관리하는 저는 "燕山君崇慕會"와 "居昌愼氏大宗會"에서 공동으로 편찬한 "燕山君"이라는 책자를 참조하여 다섯개의 봉분내역을 방문객들에게 설명을 해드렸읍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의정궁주조씨"의 무덤형태에 많은 질문을 해주 셨는데 저는 연산군 숭모회에서 발간한 책의 내용대로 『"義貞宮主漢陽趙氏"는 "漢陽趙氏"이며 소실의 자식으로 제대로 출가를 못하고 연산10년 16세의 나이로 宮에 나인으로 들어가 연산군을 흠모 하다가 연산군이 폐위가 되어 강화도로 유배를 가게되자 자청하여 따라가서 연산군의 시중을 들고 또한 임종까지 봐주고 연산군이 죽어 교동에 묘를 쓰자 천장 하기전 7년동안 시묘생활까지 하였으며 연산군의 부인신씨의 간청으로 연산군의 묘를 현재의 방학동으로 천장하고 궁주조씨가 죽음을 맞이하여 유언으로 신씨에게 “왕의 발밑에 묻어 달라“ 하여 뜻이 갸륵하다 하여 신씨가 연산군의 바로 밑에 안장을 하고는 “의롭고 정숙하다“ 는 "의정공주조씨(義貞宮主趙氏)"의 묘석을 세워주고는 후궁대우를 해주었다』(이 기사는 잘못된 내용이므로 수정하여야 할 부분이다)고 설명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금년 4월 6일 오후에 한방문객에게 이 義貞宮主漢陽趙氏를 설명하다가 우연히 다 닳아서 보이지 않던 묘표석의 뒷 비문을 보게 되었는데 오후 햇빛에 평소에 보이지 않던 글씨가 (가정) 이라는 연호가 아니고 (경태) 라는 글자라는 것이 확안 되었습니다.
(경태 5년 갑술 3월 초 9일 경신장) 이라는 글자 입니다.
그래서 관련서적을 찾아보니 경태오년 갑술은 1454년이 됩니다. "경태"라는 연호는 명나라의 경제(1449-1456)의 시대에 사용하던 연호이니, 가정을 연호로 사용하여 명나라 세종때인(1521-1566)년과는 거의 70년의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을 살피니 태조, 정조, 태종, 세종, 문종 시절에는 안나오다가 단종2년 2월에 언급이 돼있습니다.
義貞宮主漢陽趙氏는 태종 이방원의 마지막 후궁이며, 무슨일 인지 궁에서 거주를 하지않고 사가에 있다가 태종 승하 3개월전에 입궁을 하여 태종의 상중에는 상복을 입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근처에 의정 공주조씨묘와 매우 흡사한 묘가 있엇다는 말을 듣고 방학동 인근의 산을 뒤져 (성빈원씨)의 묘를 찾았습니다.
물론 다른분들은 알고 계신분들도 많았겠지만 저는 처음 보았습니다.
(성빈원씨) : 태조 이성계의 마지막 후궁인데 후사가 없어서 세종의 네째 아들인(임영대군)에게 제사를 맡기게 되어., 임영대군의 장자인(오산군) 종친묘에 안장되어 있는데 묘의 형태와 비석 지대석, 그리고 문인석까지 매우 똑같습니다.
그런데 또 의문이 생깁니다. 의정궁주의 출생일이 안나타납니다.
태종은 1367년에 탄생하여 1422년에 승하했고 義貞宮主漢陽趙氏의 묘표석에는 경태5년, 즉 1454년(단종2년)에 장례를 치웠다고 기록이 되있는데. 1454년이면 단종 2년시절입니다. 그러나 궁금증은 곧 풀렸읍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편과 "단종"편을 훓어 보다가 조씨가 "한양조씨" 인 것에 착안을 하여 그쪽으로 접근을 하였더니 나옵니다.
"義貞宮主漢陽趙氏"는 한양조씨로 부친은 절효공 "조뢰"입니다. (조씨(趙氏)는 언제 태종의 후궁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세종4년[1422 임인/명 영락(永樂) 20년) 9월 25일]에 의정궁주(義貞宮主)를 삼았다.)......
라고 나오는 부분이 있는데 이것은 틀린것 같습니다.
"태종"이 총애하던 경녕군의 생모인 "화빈김씨"가 친정아비의 탐학으로 인하여 사가로 내쳐지고 상왕에게 문후를 올리던 "세종"부부가 홀로 문안을 받는 태종이 안스러워 세종의 비인 심씨가 후궁간택을 하여 조뢰의 딸인 조씨를 후궁으로 간택을 하였는데 어찌된 일인지 禮를 올리지못하고 친정에서 기거하게 된것입니다. 처음에 세종은 조씨를 예에 따라 빈으로 봉하고자 하였읍니다. 왜냐하면 조씨는 가례색(嘉禮色/왕 또는 왕세자의 가례를 준비하던 벼슬아치)이 뽑았기 때문이었읍니다. 이를 김익정(金益精)과 이원(李原)에게 의논하였더니, 이원이 아뢰기를 "조씨는 예를 올리지 못하였기 때문에 빈으로 안된다"고 하여 빈으로 봉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세종28년(1446 병인년 3월 27일)에 세종의 정비 소현왕후 심씨의 국상을 당하자 "상왕 태종"의 후궁들에 대한 상제에 대해 예조에서 아뢰기를 "수강궁(壽康宮)의 명빈(明嬪)· 의빈(懿嬪)과 소혜궁주(昭惠宮主)· 의정궁주(義貞宮主)· 신소궁주(愼昭宮主)·옹주(翁主)는 모두 기년(期年)복을 입었다고 실록에 짧게 나와 있읍니다.
의정궁주(義貞宮主)...그녀는 단종2년(1454 갑술월 8일)에 졸(卒)하니 상장(喪葬)에 대한 모든 일은 인수부(仁壽府)로 하여금 조판(措辦)하게 하였다...........라고 나옵니다.
그런대 무덤은 왜 이곳 연산군묘역에 있는것일까?
그 의문은 "세종"의 네째아들인 "임영대군"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연산군묘역 동쪽에 "임영대군"의 후손들인 "전주이씨.오산군派"의 선산이 있는데 원래 세종이 자신의 자식들에게(22남매)는 엄청 후해서 시집이나 장가를 가게 되며는 적게는 수천에서 많게는 2만여명의 노비와 수만평에서 수백만평의 토지를 하사 했었는데 이곳이 "임영대군"의 소유지였었고 후사가 없었던 후궁 두분의 제사봉사를 떠 맡았는데 한분은 "태조 이성계"의 마지막 후궁인 "誠嬪 元氏"이고, 다른 한분이 "義貞宮主漢陽趙氏"입니다.
또한 연산군의 장인이 되는 "신승선"이 "임영대군"의 딸. "중모현주"와 혼인을 하였는데 이 토지가 "능성구씨" 일가에게 넘어간 것은 "연산군"시절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연산군묘역 입구에 "정의공주묘"가 있는데 아시다시피 정의공주는 "세종"의 정실 자식중 막내딸 입니다.
정의공주의 부군인 "안맹담"이 "세조8년.(1463년)"에 죽자 정의공주는 수십명의 풍수가들을 전국에 풀어 명당자리를 찿다가 "高麗"때의 "上將" 이었던 "강택"의 묘지였던 이곳. 즉 임영대군의 땅이 명당이라는 말을 듣고는 오라비인 "세조"에게 졸라서 "임영대군"에게 압력을 넣어 "강택"부부의 묘를 이장시키고 "안 맹담"을 안장했다는 기록이 있읍니다.
이런 사정으로 보아 "義貞宮主漢陽趙氏"의 묘가 먼저 이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고, 후일 연산군은 자신이 사위에게 하사한 땅에 자신이 묻히게 된 것입니다.
그래도 君으로 강등은 되었다 하나 한때 王으로 재위 하였던지라 "의정궁주조씨묘" 위에 안장을 하였고, 조씨묘 밑에 딸과 사위가 묻히게 된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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