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의 향기 ♣>/♧ 역사의 향기 ♧

[스크랩] 장희빈의 자식이 경종밖에 없나요?

화엄행 2009. 4. 7. 11:21
.

티비에서 보면 경종(세자)만 나오잖아요

그외에 자식이 또 없었나요?


우선 인터넷에는 숙종의 가계도가 전부 잘못 기록되어 있습니다.

숙종 선원계보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기록되어 있는 숙종의 가계도를 보면 숙종은 모두 3명의 왕후와 6명의 후궁을 두었으며, 자녀는 총 6남 2녀를 남겼습니다.

이 6남 2녀 중에서, 경종대왕과 영조대왕 그리고 연령군인 왕자 3명을 제외한 나머지 3남 2녀는 모두 태어나지 얼마 안된 후에 일찍 죽습니다.

따라서 조졸한 자녀들을 제외한 숙종의 공식적인 자녀수는 3남이고, 실제 자녀수는 6남 2녀가 정상입니다.

인터넷을 뒤져보면 숙종의 자녀에 대해 모두 3남 6녀로 언급되어 있는데, 그건 절대로 말이 안되는 자료입니다.

★왜냐하면, 숙종의 아들중에서 막내아들인 연령군 이헌에 관한 기록을 찾아보면, 숙종의 6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연령군의 묘에 있는 비석에 새겨진 내용을 보면, 숙종의 6째 아들이라고 명백히 기록되어 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3남 6녀라고 기록된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 자료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웃기는 것은, 숙종의 자녀에 대해 3남 6녀라고 기록된 자료에서 연령군을 소개할때에는 숙종의 6남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3남 6녀라는 것은 말이 안되는 자료입니다.

위의 답변을 주신 분들께서는 단순하게 인터넷에 있는 자료만 대충 퍼오신듯 합니다.

★★★ 이런 잘못된 자료가 퍼지게 된 원인은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 실록"이라는 도서 때문입니다.
이 도서는 출판될 당시에 무려 100만부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였고, 몇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잘 팔리고 있는 도서입니다.

이 도서에는 숙종의 자녀수가 3남 6녀로 잘못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도서를 출판한 출판사에서도 오류를 인정하였습니다.

따라서 3남 6녀라는 자녀수는 잘못된 자료이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숙종의 선원계보와 국립중앙도서관에 있는 숙종대왕의 가계도를 그대로 옮겨드립니다.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 ----------- 19대 숙종대왕의 선원계보(가계도) ----------------- ■


1. 인경왕후 김씨(仁敬王后,1661~1680) - 공주2명(모두 조졸)

2.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1667~1701) - 후사없음

3. 인원왕후 김씨(仁元王后, 1687~1757) - 후사없음

4. 희빈 장씨 (禧嬪 張氏 = 玉山府大嬪(옥산부대빈), 1659~1701)
① 서1남 : (景宗大王, 1688∼1724)
② 서2남 : 성수(盛壽) (1690년 9월 출생, 10일뒤 조졸)

5. 숙빈 최씨 (淑嬪 崔氏,1670~1718)
③ 서3남 : 영수(永壽 , 1693년 10월 출생, 2개월 뒤에 조졸)
④ 서4남 : (英祖大王, 1694∼1776)
⑤ 서5남 : 子(이름없음, 조졸)

6.명빈 박씨 (溟嬪 朴氏, ?~1703)
⑥ 서6남 : 연령군(延齡君, 이름 : 이 헌, 1699~1719),

7. 영빈 김씨 (寧嬪 金氏 1669~1735) - 우리가 알고 있는 귀인 김씨, 1702년에 빈의 첩지를 받음

8. 소의 유씨 (昭儀 劉氏) - 후사 없음

9. 귀인 김씨 (貴人 金氏) - 후사 없음


위의 가계도에서 영빈 김씨와 소의 유씨, 귀인 김씨의 3명의 후궁은 숙종의 선원록에는 빠져있습니다.

선원록이란, 숙종대왕의 가계도를 기록한 책인데, 이들이 기록이 안된 이유는 자식이 없거나 숙종으로부터 얼마나 총애를 받았는지의 여부로 결정됩니다.

영빈 김씨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귀인 김씨로, 1694년에 인현왕후가 함께 다시 삭탈관직 당했던 귀인의 첩지를 되찾아 복위가 되고, 8년뒤인 1702년에 정1품인 '빈'의 첩지를 받아 '영빈'이 됩니다.

그리고 소의 유씨와 귀인 김씨는 궁인 출신입니다. 숙종이 나중에 들인 후궁들인데, 이들에 관한자료는 기록된 것이 없습니다.


★★★★★ 자녀들에 관란 내용을 보면,

인경왕후는 1671년(현종 12) 세자빈에 책봉되고, 1674년 숙종의 즉위와 함께 왕비에 진봉되었습니다.

그녀는 모두 두명의 공주를 낳았으나, 모두 일찍 죽었고, 인경왕후 역시 천연두에 걸려 1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능은 익릉(翼陵)에 모셔졌습니다.

참고로 인경왕후의 자녀에 대해서 잘못된 기록에는 인경왕후가 공주 3명을 두었다고 하는데, 역사책 어디를 뒤져봐도 3째 공주에 대한 기록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인현왕후는 1667년 태어나, 14살이 되던해인 1681년 인경왕후에 이어 숙종의 두번째 부인이자 제1계비로 책봉되었습니다.

숙종이 칠거지악의 덕목인 투기죄와 자식을 낳지 못한 죄로 인현왕후 민씨의 중전의 자질을 문제삼아 1689년 사건으로 인하여 서인들과 같이 궁에서 쫓겨나 폐비가 되었습니다.

그 후 5년 뒤인 1694년 사건으로 인하여 서인들과 같이 기사회생하여 같이 궁궐로 돌아서 왕후로 복위 되었습니다.

그 후 7년후인 1701년 인현왕후 민씨는 병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리고 인현왕후 민씨는 석녀였기 때문에 아들은 커녕 자식하나 못 낳았습니다. 석녀란, 생식기관의 이상으로 인하여 아이를 못 낳는 여자를 말합니다.

역대 조선의 왕비중에서 석녀가 몇명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선조대왕의 정비이신 의인왕후가 있죠.

인현왕후가 죽은 뒤에 새로 들어온 제2계비인 인원왕후 김씨는 인현왕후가 죽은 뒤에 새로운 왕비로 책봉된 인물로 경은부원군 김주신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인원왕후 김씨는 연잉군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가 1718년에 죽자, 연잉군을 친자식처럼 끝까지 지켜주어 영조가 왕위에 오르게까지 큰 도움을 준 인물입니다.

그리고 숙빈최씨는 1670년(현종 11) 11월 최효원(崔孝元)의 딸로 태어나, 일찍히 부모를 여의고 가난한 고아로 자랐습니다. 지금의 KBS장희빈에서는 아버지가 살아있는 것으로 잘못되어 있습니다.

인현왕후의 아버지인 둔춘 민유중이 영광군수로 발령을 받고 이때당시 8살먹은 인현왕후를 업고 그의 부인과 같이 영관군수로 부임하러 가는 도중, 태인면 거산리에 있는 대각교에서 지금의 숙빈 최씨인 초라한 거지모습의 한 어린 소녀를 발견합니다.

인현왕후의 어머니는 어린 숙빈 최씨의 모습이 안고 있는 인현왕후와 닮은데가 많아 소녀를 멈추게 하고 자초지종을 물어본뒤, 그녀를 가엽게 여긴 인현왕후의 어머니는 이 소녀를 함께 데리고 가서 인현왕후와 같이 친자매처럼 길렀으니, 예의바르고 얼굴곱고 총명하기가 이를데 없었습니다.

2년 후인 1677년, 민유중이 내직으로 승진되어 한양으로 다시 올라갈때 어린 숙빈 최씨도 같이 데리고 갔고, 잠시 사가에 머물게 한뒤에 숙빈을 궁궐에 입궁시키니 그녀의 나이 7살이 되던 해였습니다.

4년 뒤인 1681년, 민유중은 자신의 딸인 인현왕후가 숙종의 제1계비로 뽑히자 숙빈최씨를 인현왕후 곁에 머물게 합니다.

8년 뒤, 인현왕후가 폐출당하자 숙빈 최씨는 그녀를 위한 기도를 올리다가 숙종에게 발견되어 성은을 입게 되고, 곧이어 숙원(淑媛)·숙의(淑儀)·귀인을 거쳐 숙빈이라는 정1품의 빈까지 오릅니다.

숙빈 최씨는 1693년에 첫아들을 낳았으나 바로 죽는 슬픔을 겪었고,
다음해인 1694년(숙종 20) 9월에는 후일 영조대왕이 되는 아들 금(후일 영조, 연잉군)을 낳습니다. 1696년에 다시 왕자를 출산하지만 이 왕자마저 바로 죽는 슬픔을 겪습니다.
숙빈최씨는 1718년 3월 9일 48세로 죽어 아들 영조에 의해 육상궁에 모셔졌습니다.

숙빈 최씨는 아들을 모두 3남을 두었습니다.
잘못된 기록에는 딸,아들(영조),딸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다른 기록에는 아들,아들(영조),딸로 잘못 기재되어 있습니다.

KBS 장희빈 홈페이지에 기록되어 있는 숙종 가계도에도 아들,아들,딸로 잘못 기재되어 있습니다.
어느 역사책을 뒤져봐도 숙빈최씨가 아들만 3명을 낳았다는 기록만 있지, 딸을 낳았다는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어느 분은 숙빈 최씨가 인경왕후가 세자빈으로 책봉되어 궁에 입궐할때 숙빈 최씨가 교전비로 같이 입궁을 하였다고 하는데, 그건 절대로 말이 될 수가 없습니다.
두 인물의 생몰년을 봐도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인경왕후는 1661년에 태어나 1671년에 세자빈이 되었고, 숙빈 최씨는 1670년 11월 출생입니다.
따라서 1671년에는 숙빈 최씨가 1살이 되던 해인데, 한살먹은 갓난아이가 교전비를 행하였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됩니다.

그리고 명빈 박씨는 상궁출신으로 통정대부인 박효건의 딸로서, 희빈 장씨 다음으로 숙종의 총애를 받은 후궁입니다.

희빈 장씨가 중전에 오른 해인 1689년에 숙종의 눈에 띄어 궁인에서 상궁으로 올라 숙종의 총애를 받다가, 10년 뒤인 1699년 연령군 이헌을 낳자, '숙원'의 첩지를 받아 공식적인 숙종의 후궁이 됩니다.

그리고 귀인까지 오르고, 그 후 3년 뒤인 1702년에는 궁궐로 돌아온 귀인 김씨와 함께 숙종으로부터 빈의 첩지를 받아 귀인 박씨는 '명빈', 귀인 김씨는 '영빈'의 시호를 받습니다.

그렇지만 명빈 박씨는 그 다음해인 1703년 7월(숙종 25년)에 세상을 떠납니다.

그리고 영빈 김씨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귀인 김씨입니다.

영빈 김씨는 문정공 김상헌의 현손녀이며, 영의정을 지낸 김수흥(또는 김수항)의 손녀이고 성천부사 김창국의 딸로서, 1669년(현종10)에 태어나 15살에 숙종의 후궁이 되어 형식적인 귀인의 첩지까지 받았으나, 장희빈의 모략으로 인현왕후와 함께 시호를 삭탈당하고 본가로 돌아왔으며, 인현왕후가 다시 복위되자 자신도 같이 복위가 되었습니다.

1701년에 인현왕후와 장희빈이 죽자, 그 다음해인 1702년 숙종대왕은 귀인 김씨를 그 당시의 후궁들인 귀인 박씨, 숙의 유씨와 함께 각각 명빈 박씨, 소의 유씨 그리고 귀인 김씨에게는 정1품인 '빈'의 첩지를 내려 영빈의 시호를 내렸습니다.
그뒤로 귀인 김씨는 외롭게 30여년을 더 살다가 1735년에 후사없이 세상을 떠납니다.

영빈 김씨는 빈의 첩지를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숙종의 총애를 제대로 받지 못하여, 숙종의 선원록에는 기록이 안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소의 유씨와 귀인 김씨는 궁인 출신으로 그들에 대한 기록은 자세히 안 나와있습니다.

그리고 숙종의 후궁 중에는 귀인 김씨라는 궁인 출신의 후궁이 있으므로, 영빈 김씨에게 귀인 김씨라고 불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물론 영빈 김씨가 귀인인 시절에는 귀인으로 불려져야 하겠지만, 지금은 영빈으로 불려져야 하겠죠.
참고하시길...


장희빈은 경종(세자)만 낳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 이후에 장희빈의 죄가 들어나

중종의 사랑을 받지 못했기때문이죠..


가계도를 살펴보니
경종과 딸을 한명 더 두었는데..
이름은 성수라고 표시만 되어있고 옹주의 작호가 없는 것으로 보아
일찍 죽은 듯 합니다.

숙종의 가계도 참조하세요








 





(부)현종 -
명성왕후(모)


장남 : 숙종(1661-1720)


재위기간 : 1674.8-1720.6(45년
10개월)


부인 : 6명 / 자녀 : 3남


출처 : 나 홀로 마시는 그리움 한 잔
글쓴이 : ZOTTO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