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술자료 ♣>/기타 관련자료 모음

한국의 石 塔

화엄행 2009. 4. 2. 22:57

한국의 석탑.pdf

홈페이지(INDEX.HTML)의 사진설명.

 

  1. 불국사 다보탑(多寶塔)

- 이  탑은 경주 불국사 대웅전 앞뜰에 서쪽의  석가탑과 상대하여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바( 경북 경주시 진현동 불국사경내) 높이 10.4m로   통일신라시대(8세기 중엽)에 세워졌으며 국보 제 20호로 지정된 것이다.
 
    이 동서 쌍탑은 곧 월성군 동해안에 자리잡고 있는 "감은사"에 다음가는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의 배치를 보이고 있다.  <다보여래 상주증명 (多寶如來常住證明)>의 뜻으로 건립된 이 다보탑은 보는 바와 같이 일반형과는 달리  특이한 형태로 건조된 이형석탑(異形石塔) 중에서도 가장 기발한 의장(意匠)으로 건립된 최고의 우수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법화경(法華經) 제11장  <見寶塔品)에 의하면 석가불(釋迦佛)이 <法華經>을 설법하고 있을 때에 과거불인 다보여래(多寶如來)의 칠보(七寶)의 큰 탑이 대지(大地)에서 솟아나고,   다보여래가 탑속에서 큰 음성으로 釋迦佛이 說하고 있는 <法華經>의 진실함을 증명한다는 뜻을 상징한 것이다.

  다보여래의 탑이 땅속에서 용출(湧出)한 것은 이 부처가 <法華經>이 說해지는 장소이면 반드시 탑이 솟아나 공중에 머물면서 <法華經>의 진실함을 증명하리라는  서원(誓願)을 세운 까닭이며,  지금 이곳에서도 나타난 것이라고  한다.  더욱 그곳에는 시방의 제불(諸佛)과 무량한 석가의 분신(分身)이 뫃여 불탑을 둘러쌓고,  한량 없는 제불(諸佛)이  변만(遍滿)하고 있는 가운데서,  이 塔속에 는 多寶如來의 전신사리(全身舍利)가 있으나,   釋迦佛도 이 속에 들어가서 多寶如來와 함께 동시에 나란히 앉으므로써  과거무량세(過去無量世)의 부처인 多寶如來와 현재의 부처인 釋迦佛이 <法華經>의 진실됨을 함께 증명한 것이 된다. 즉 [法의 眞實]이 불탑(佛塔)을 기반으로 하여 증명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多寶塔에는 부처님의 모습은 없다,  오직 빈 공간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의 눈을 열어 그 공간에는 형상없는 다보(多寶), 석가(釋迦) 두 부처님의 앉아계신 모습을 보아야 하는 것이다.

  多寶塔의 그 다양한 구성은 어느 하나도 깊은 우주의 진리,  인간의 진리를 표명하지 않음이 없다.  기단(基壇)의 정四각형은 불교의 있어서의  고집멸도(苦集滅道)라는  사제(四諦)의 도리(道理)를 천명하고 있는 것이며, 그 기단위에 겹겹이 쌓여가는 층(層)들마다 그 道理를  따라 실천해 가서 성취한 훌륭한 덕성(德性)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제 1층을 향하여 올라가는 동서남북의 십층의 게단은 오직 구도자(求道者)에게만 허락된 십지(十地)의 계단이다.  최초의 계단 역시 사각형을 이루고 있는데, 이것은 사섭법(四攝法)의 道理가 밝혀지고 있다.  즉 인간들 사이의 평화는 베품(布施)과 애어(愛語- 진실로 상대에게 유익한 말), 이행(利行-참 사람됨에 도움되는 행위), 동사(同事-상대의 입장을 이해한 협동적인 작업)의 네가지 없이는 이뤄질 수 없다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는 것이며,  그 윗층부터는 돌기둥이 팔각형을 이루며, 갖가지 우아한 기교를 다한 아기자기한  형태의 세게를 전개하고 있다.  

  팔각형은  팔정도(八正道)를 표현한 것이라 하고, 혹은 팔만 사천의 모든 법문의 탁월함을 표명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다보탑은 1925년 일제 침략기에 수리되었던 바, 당시 탑내에서 발견된 사리장치(舍利裝置) 일체는 그 행방을 알 수가 없으며 기단부 (基壇部)의 석사자(石獅子)도 도둑 맞아 현재는 일좌(一座)뿐이다.

 

    2.  고선사지 삼층석탑 (高仙寺址三層石塔)  

    
지정구분 국보 (國寶) 제 38 호. 통일신라  (統一新羅)시대 /7세기.  
    재질 : 석 (石) /화강암 (花崗岩)  
    크기 높이 : 10,2 미터  
    출토지 : 경북 경주시 암곡동 高仙寺址  
     
    고선사의 삼층석탑은 감은사 탑과 쌍벽을 이룬다고 할 만큼  한국 탑파(塔婆)의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는 탑이다. 시라의 통일이전에는 대개 금당을 중심으로 一塔을 배치하는 가람배치양식이 유행되었으나,  통일이후에는 일탑식에서 쌍탑식으로 변모하면서 탑이 오히려 사찰의 중요한 구성부분으로  변모한다.   이 고선사탑은 단탑가람양식에 속하는 것이나,  그 규모와 기교는 매우 놀랄 만한 발전이 엿보인다. 고선사탑과 감은사탑은 기단의 둘레높이, 탑신전체 높이 등이 거의 동일하여 두 탑이 동시대에 만들어졌음을 시사해 준다.  이탑의 제一층 탑신 4면에는 감실(龕室)의 윤곽이 새겨저 있다. 경주 덕동댐 건설로 인하여 수몰지역이 되어 지금은 경주박물관 뒷뜰에 옮겨저 있다.

    감은사터[感恩寺址]의 동·서 삼층석탑과 비교해 보면, 이 탑에는 1층 탑신 4 면에 문비형(門扉形)이 있으나 감은사 석탑에는 없는 점이 다를 뿐 거의 같은 시기· 크기·양식의 것으로서 감은사 탑과 함게 통일신라 초기의 대표적인 석탑이다.  
                 

   3. 화엄사 4사자 삼층석탑 (華嚴寺四獅子三層石塔)
   
  
   국보35호. 높이 5.5미터, 통일신라시대(8세기 중엽), 전남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이형(異型) 석탑으로 경주 불국사의  다보탑과 비교될 만큼 우수한 걸작품으로 손꼽을 수 있는 탑이다.   이 탑의 기본 조형은 2층 기단위에 3층 탑신(塔身)을 얹고,  그 정상에 상륜부(上輪部)를 놓아 신라석탑의 기본적인 형태를 따르고 있으나, 위층기단에서 특이한 의장을 보이고 있다. 상층기단은 우주(隅柱)를 대신하여 연화대위에 무릅을 끓고 앉은 자웅 2쌍의 사자를 한 마리씩 지주(支柱)삼아 네 귀에 배치하고, 사자의 머리위에도 하대와 대칭되게 연화대를 얹어 넓직한 갑석(甲石)을 받고 있다. 그 중앙에는 연화대위에 합장한  대덕(大德) 화상(和尙=緣起祖師 혹은 연기조사의 모친이라는 전설이 있음=孝塔)의 입상을 안치하였다.

  네 마리의 사자는 희노애락을 상징했다고 하며, 각각 그 표정을 새겨놓았다. 하층기단 면석에는 천인상(天人像)을 양각하였는데, 모두 보관과 영락으로 장식하고 천의(天衣)를 휘날리는 모습이다.  탑신부에는 4면에 문비형(門扉形)을 모각하고, 그 좌우로 정면에는 仁王像을  양측면에는 사천왕상을 양각하여 잘 어울린 조형을 이뤄놓았다. *

 

   4. 감은사지 삼층석탑(感恩寺址 三層石塔)

   감은사지의 삼층석탑은 제일 윗부분 찰주(擦柱)의 높이까지 합하면 13 미터로 현존하는 한국의 탑파중에서 가장 높은 것이다. 이 탑은 고선사의 삼층석탑, 경주 라원리의 5층석탑 등과 함께 신라통일기의 전형적인 탑파양식을 따르고 있다. 국보 제 112호로 지정된 것이다.
 이 탑은 한국석탑사상 전형적 양식의 가장 시원(始源)이 된다는 점에서 중요시 되고 있다.

 1959년에 서탑의 전면 해체작업으로 3층 옥신 위 사리공에서 창건 당시의 희귀한 사리 장엄구를 얻게 되어 일괄유물은 현재 봄물 제366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경주 토함산 넘어 대종천 어구, 감은사지에 동서로 3층석탑이 서 있다. 특히 감은사는 삼국통일의 영주인 문무대와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경영된 큰 사찰로 그 창건에 대하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 절은 문무대왕의 화룡(化龍)전설과 결부되어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저 있다.   

   

  5.  불국사 석가탑
  
 
이 탑은 경주 불국사 경내에 있다.  8세기 중엽에 세워진 탑으로 알려저 있으며 석가여래의 상주설법(常住說法)의 탑이라는 데서 "석가탑"이라 한다. 탑을 세우는과정에서 생긴 전설적인 사연으로 일명 "무영탑(無影塔)이라 불리기도 한다.
 석탑의 구조는 2층기단위에 3층 탑신을 건조하고, 정상에 상륜부를 형성했다.

  이 석탑 주위에는 방형의 구곽(區廓)이 지어져 있고. 그 네 귀퉁이와 각변의 중앙에 8개의 원형 연화대가 있어 이것을 팔방 금강좌라고 한다. 탑의 장엄을 더해 주는 특별한 착상이라 할 만하고, 팔부신중의 위치를 표현한 것이라 한다.

 이 탑은 초기의 석탑들과는 달리 통일신라시대의 조탑활동이 전성기를 이뤘을 때의 대표적 양식을 취한 석탑이라 수 있다. 즉 이 탑에서는 완전한 신라식 석탑의 전형이 정립되었던 것이다.

 

  6.  미륵사지 석탑.

    이 탑은 한국 최고(最古) 최대의 석탑이다. 높이 14.24m로 백제시대(7세기 초반)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저 있다. 원래의 위치에 서 있으며, 거의 전면이 도괴되어 6층까지만 남아 있으나, 7층 이상의 탑신을 형성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석탑을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석탑으로 보고 그 시원(始源)을 여기에서 찾고 있는 것은 이 탑을 하나의 석조건조물로 보는 동시에 그 양식이 목탑(木塔)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탑은 이전에 성행하였던 목탑의 각부 양식을 나무 대신 돌로써 충실하게  구현하였기 때문에 석탑 발생 계열에서 그 선두에 두게 된다.

  이 석탑의 건립연대는 미륵사의 창건시대와 연관하여 고찰하게 된다.  삼국유사의 무왕조(武王條)에 보이는 내용을 주목해야 할 것이며, 또한 석탑 자체의 양식이나 그 수법을 종합하여 볼 때,  학자들은 백제 말기인 무왕대(600~641)로 추정하고 있다.

 

  7.  분황사 모전석탑(模塼石塔)

  이 석탑은 분황사의 창건연대와 동시기로 본다.  신라 선덕여왕 3년(서기634년)에 분황사가 창건되었다는 기록에 의하여 7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 탑은 안산암(安山岩)의 작은 석재를 벽돌모양으로 다듬어 축조한 전탑 양식을 모방한 석탑이다.

  자연석으로 고르게 쌓은 기단 위 중앙부에 탑신부를 지탱할 화강석의 장대석(長大石)을 결구하여 1단의 괴임대를 마련하고 있다. 탑신부(塔身部)는 길이 30~40cm, 두께 5~9cm의 희흑생 안산암을 절단하여 각층의 옥신(屋身)과 옥개부(屋蓋部)를 축조하였으므로 외형으로는 전탑과 같이 보인다.

  각면에는 감실(龕室)을 만들어 양측에 각각 화강암으로 인왕상(仁王像)을 조각하였으며, 그 수법에서 삼국시대의 특징을 볼 수 있다.
 네 귀퉁이에는 석사자상(2구는 海狗像?)을 배치하였는데, 이것이 초창기부터 있었던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 탑은 상층부가 파괴되었던 것을 1915년에 수리하여 현재의 모습과 같이 되었다.  

 

   8. 정림사지 五층석탑

    백제시대의 석탑으로 추정된 것은 마륵사지 석탑(위 해설 6번)과 정림사지 5층석탑 뿐이므로 이 탑은 한국석탑연구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석탑은 낮고 좁은 기단위에 건립된 방형의 5층석탑으로 초층 옥신은 각 2장씩 8장의 판석과 방형 석주 4개로 구성되었다. 초층 옥신 윗면에는 목조건축의 두공양식을 변형시킨 옥개석 받침이 옥개석을 받치고 있는데, 옥개석은 비교적 얇고 넓다.

  전체적으로 체감율이 많아 균형 잡힌 형태를 보여주고 있으며. 이 탑은 목조의 탑형식과 매우 비슷하여 백제의 석탑이 목조건축으로 부터 석조로 바꿔졌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현재 초층옥신 사면에 당나라 장수 소정방의 백제 평제에 대한 기공문이 새겨저 있음으로 흔히 "평제탑"이라 불려저 왔으며, 그 건립연대도 오해되어 왔었다.  그러나 이러한 각자된 비명이 다른 곳에서도 발견됨으로써 학자들은 이 탑의 건립연대를 백제말기로 추정하고 있다.  

 

 1. 불국사 다보탑. 10.4m
 통일신라시대. 국보20호.  

 

  2. 고선사지의 삼층석탑
  높이 9m. 통일신라시대.
  국보 제 38호.

 

 3. 화엄사 4사자 3층석탑
 높이 5.5m, 통일신라시대.
  국보 제 35호. 전남 구례.

 

4. 감은사의 삼층석탑
  높이 13.4m. 통일신라
  경북 월성군. 국보112호.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

     

불국사 석가탑
  국보 제21호. 높이 8.2m
  통일신라시대 조성.

 

 

미륵사址 석탑 백제시대
  (600~641)높이 14.2 m
  국보 제 11호. 전북익산.

   

     분황사 모전석탑
  경주시내 구황리소재
  국보 30호, 높이 9.3m
  신라 선덕여왕 3년
  (634년)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
  높이 8.33m 국보 제9호
  조성연대: 백제시대(7세  기 전반). 충남 부여군.

 

u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