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의 향기 ♣>/♧ 고전의 향기 ♧

「 朝鮮朝女人의 삶과 생각 」

화엄행 2010. 11. 7. 17:21

http://apwinc.sookmyung.ac.kr/culture/arts/literature/literature1.html

 



한양 여인의 香趣展 資料集 「 朝鮮朝女人의 삶과 생각 」


 I. 조선조 시대의 여성교육
  1. 남녀교육의 불균등(不均等)
  2. 어깨너머로 배운 여류시인들
  3. 도덕교과서 규훈(閨訓)류

 II. 조선조 여성의 교양과 삶
  1. 궁체(宮體)연습과 문안편지
  2. 내인이 쓴 궁중 봉서
  3. 왕비가 직접 쓴 봉서
  4. 사족사회(士族社會)의 문안편지
  5. 8세 공주(公主)의 궁체솜씨

 III. 내방가사에 나타난 사녀(士女)들의 삶과 생각
  1. 은촌(隱村) 조애영(趙愛泳)
  2. 소고당 고단의 가사

 IV. 내간을 통해 본 여인들의 삶과 생각
  1. 남원 윤씨댁의 편지
  2. 해남 윤선도 후손의 마당과부

  V. 끝맺음 / 부록

1 / 2 / 3 / 4 / 5  



서울 정도 600년 기념으로 열린 '한영여인의 향취전' 자료집으로서 우리나라 여인들의 삶과 생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문학작품이다.  ( 김용숙 前 숙명여자대학교 교수) 

 

I. 조선조 시대의 여성교육

1. 남녀교육의 불균등 (不均等)

- 서민여성은 낫놓고 기역자도 몰라 -

19세기말, 이 땅에 개화(開化)의 물결을 타고 처음으로 학교가 세워질 때까지 봉건사회의 여성교육은 미미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극히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대부분의 서민여성들은 그야말로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문맹들이었다. 이 여파(餘波)가 대명천지(大明天地) 근래까지 국민의 대표를 뽑는 선거에 작대기 기호로 이어졌음은, 조선조때 남녀교육의 불균등의 악습이 얼마나 뿌리 깊었는가를 알려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것은 남존여비(男尊女卑)사상에 기초를 둔 현상임은 물론이지만 실리적(實利的)인 이유도 겸한다고 본다. 효도의 최상급이 부귀공명하여 조상의 이름을 빛내는 것인데, 딸은 가르치더라도 과거(科擧)를 보는 것도 아니고 남의 가문에 시집가기 때문에 써먹을 때가 없다는 생각이다. 또 여자의 미덕은 순종인데 너무 유식하면 암탉이 물어서 집안이 조용하지 않다는 기우이다. 그렇고 보면, 결국 봉건시절에 여자 교육에 인색했던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배워도 활용할 수 없는'사회 풍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는 조혼(早婚)풍토와 빈곤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여성에게 글(漢文)을 안 가르쳐도 교양을 쌓게 하였다. 그 교양이란 인간으로서, 또 봉건사회의 여자로서 알아야 하고, 행해야 되는 도(道)이다. 소위 여공(女功)이라고 하는 바느질, 수놓기, 농촌에서는 길쌈이 추가되었다. 바느질, 수놓기는 아무리 안 팟(안밖) 하인을 많이 거느린 상류계층의 딸이라도 이것만은 주인이 알아야 하는 기본이었기 때문에 여공의 첫째로 꼽혔다. 음식 만드는 법, 염색하는 법 등도 실무적인 필수요건이지만 바느질보다는 앞세우지 않았다. 물론, 어른을 모시는 효도의 기본으로 상류층에서는 최소한도 진지상은 며느리가 손수 차리는 것으로 되어있다. 밥짓기를 비롯한 그 밖의 허드렛일은 하인들을 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역사적으로도 문학적으로도 뛰어난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한중록의 작가 혜경궁 홍씨도, 아홉 살에 세자빈(世子嬪)간택에 뽑힐 때까지 집에서 받은 교육은 삼촌댁(둘째 아버지의 부인이라 '仲母'라 칭했음) 신씨(申氏)에게서 배운 언문교육 뿐이었다. 그밖에 마음가짐, 기거 동작 등 덕행의 교육은 대가족주의의 가정 분위기에서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면서 채득한 것이다.

혜경궁 홍씨는 삼간택(三揀擇)에 뽑히는 즉시, 별궁으로 들어가서, 50영리 동안, 비빈(妃嬪)으로서의 예비교육을 받았는데, 소학(小學)부터 배웠다고 했다. 그러면 '글공부'는 어떻게 되는가, 앞에서 말한 것도 그 뜻이지만, 이 경우 '글'이란 한시, 한문고전을 말한다. 한글은 글이 아니라, 언문(言文)이라 낮췄음은 다 아는 바와 같다. 이것을 가르치는 것은 까막눈이나 면하고, 문안 편지나 쓸 줄 알게 하는 목적이다. 이것은 조선조시대 아주 특출한 경우가 아니면 보통, 양반계급의 여성교육이었던 것이다.

'소학을 보낼 것이니, 아비에게 배우라'(한중만록)

시아버지인 영조는 그렇게 말했지만, 한 달하고도 20일이 넘는 기간동안, 세자빈 후보의 글공부를 맡은 사람은 친정 부숙(父叔)과 남형제들이었다. 한편, '훈서(訓書)'도 병행하여 배웠다고 하는데 이것은 규훈(閨訓)류로 어제(御製)라고 했으니, 영조가 군중전래의 「내훈」을 기초로 다시 엮은 것이다. 「한중록」의 유창한 문장력과 어려운 한자(漢字熟語)의 구사(驅使)는 작가의 넉넉한 학식과 교양을 엿보게 한다. 그가 글 가운데 인용한 중국역대 후비의 고사라든가, 우리 나라 국조사기(國朝史記)의 이야기는 혜경궁의 글공부가 다음해(열살) 입궁한 후에도 계속되어 경서(經書), 사기(史記)까지도 도달했음을 알려준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이런 특수한 신분의 여인도 7,8세때 한글공부가 전부였다는 실토는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공주의 육대손(6代孫)에 할아버지가 판서(지금의 장관)이었던 집 딸이 이 정도라면 일반 여성들은 어떤 상태였을까, 귀족을 포함하여, 소위 일반 양반 여성들이 고작 한글 정도 깨우쳤고, 그 아래 서민들은 앞에 '낫놓고 기역자'의 비유가 절대 과장이 아닌 것이다. 개화기 이후 , 어느 의식있는 여성은 남편에게 담뱃대로 얻어맞아 가며 한글을 깨우쳤다는 일화도 있었다.



2. 어깨너머로 배운 여류시인들

이와 같이 여성은 아무리 글재주가 뛰어나도 그것을 가꾸고 펴나갈 수 없는 사회풍토였지만 그 어려운 한문을 익혀, 주옥같은 작품을 남긴 여류시인 문인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개인 한 시집을 남긴 허난설헌(許蘭雪軒), 이매창(李梅窓)을 비롯한 6,7명이 있고, 남편의 문집에 많은 한시를 실은 삼의당(三宜堂), 영수각(令壽閣) 등 10명 내외도 유명하다. 이밖에 황진이는 시조가 본령(本領)이지만, 한시도 이에 못지 않게 만만치 않은 실력으로 평가되고 있다. 여기에 단지한시 두수가 전해질 뿐인 신사임당까지 넣어서 도합 20명 정도이다. 이들 가운데는 한 시뿐만이 아니라, 남의 행장문(行狀文), 묘지명(墓地銘), 시평(詩評)까지 쓴 사람들도 있다.

그밖에 국문으로 쓴 순수 우리 문학인 '한중만록(일명 한중록)', '계축일기', '의유당일기' 등의 산문과 시조작가까지 합하면 40명 남짓, 문맹여인(文盲女人)들이 대다수였던 봉건시대에서, 이 여성들은 최고수준의 지성여인일시 분명하다. 그런데 이들의 신분은 위는 비빈(妃嬪)까지 이르는 선민계급(양반)과 기생이라는 양극단으로 배분된다.

내외(內外法)이 심하던 시절, 점잖은 남성들의 모임에 끼어 들 수 있는 여인은 그들이 해어화(解語花)라고 반긴 기생뿐이다. 그녀들은 들은 풍월, 얻은 실력으로 시조작가에 기녀가 많은 것은 이 때문이고, 그 중에서 더욱 재주 있는 한 시에도 탁월한 실력을 보였다. 이매창은 전북 부안(扶安) 명기로 한 시집이 있다고 함은 앞에서 이미 거들었지만 훗날 당대의 유명한 시인묵객(詩人墨客)의 소실이 된 죽서(竹西), 운초(雲礎), 지재당(只在堂)등은 역시, 원래는 지방관청의 기생들이었다.

그 나머지, 한시작가 양반 여성들 중에는, 부마(駙馬)의 모친(영수각 서씨)도 있지만 지방에 사는 가난한 선비의 아내도 많다. 그래서 부친과 오라비 3형제가 모두 문과(文科)에 합격한 당대의 명문대가의 딸인 허난설헌같이 처음에는 딸이라고 제외했다가 그 천분을 인정하고 가르친 경우가 신사임당, 안동장씨등 몇몇이 있다. 이들은 대부분 오라비들의 어깨너머로 익힌 실력들이다.

사임당은 딸만 넷인 집안의 둘째로 태어나 가장 영특했으므로 진사(進士)시험에 합격한 아버지가 이 딸에게 기대를 걸고 글공부를 가르쳤다 하니(이은상 저 '사임당의 생애와 예술') 그의 한문실력은 출가전의 이미 성취한 것이다. 정일당 강씨(姜氏)는 출가한 후 가난한 생계를 위해 일만하는 남편을 보고 공부할 것을 권했다. 그래서 자기는 삯바느질을 하면서 남편의 글 읽는소리를 듣고 그야말로 어깨너머로 배운 실력이라 한다. 글자 그대로,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 총명함으로 공부하는 과정에서 남편을 앞 질렀고, 남편이 조금이라도 탐내는 기색을 보일 때면 '면학에 열심하라'는 충고의 글을 써 보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마침내 당대의 이름난 석학에게 남편을 보내서 사사(師事)시킴으로써 자신도 집에서 간접적으로 그 가르침을 남편을 통해 전달받았다고 본다.

처음서부터 부형(父兄)으로부터 교육을 받았건, 어깨너머로 했건, 이같은 여성들은 보통 여성이 아니라고 본다.

그런데 이같은 여류문인들이 50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40여명에 불과하다는 것은 남성들에 비해. 너무나 빈약하다. 어쩌면 인위적으로 도태(淘汰)시켰거나, 아예 문재(文才)가 있어도 시문을 안 지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본다. 허난설헌이 27세에 짧은 생애를 마감할 때, 그의 유언으로 한 칸 방에 가득했던 그의 유작(遺作)들을 태워 버리게 했다는 일화(그래서 지금 남은 그의 동생 허균이 자신이 보관해 두었던 누님의 작품을 중국 사신에게 보였더니 그가 가지고 가서 중국에서 출판한 것이 훗 날 역수입된 것이라 한다.)

또 신사암당의 일화도 그 한 증거이다. 그의 시는 현재 전하는 것이 두 수와 낙구(落句) 한 수 뿐이다. 현재 대관령고개 위에 세워진 그의 시비(詩碑)에 새겨진 '대관령을 넘으면서 친정을 바라봄(踰大關領望親庭)'을 보더라도 그 실력은 만만치 않다. 그렇지만 그의 유작이 이렇게 희소한 것은 안 지어서가 아니라 '안 남겨서'일 것이다. 그림의 경우, 이런 일화가 전한다.(이은상 저, 같은 책)부군 이원수(李元秀)공이 사랑에서 술좌석을 벌였을 때, 손님 중에 사암당의 그림솜씨를 사람이 있어 한 장 얻을 수 없느냐고 졸라댔다. 사임당은 부군의 성화에 몇 번 사양하다가 하는 수 없이 대접에 그려서 내갔다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대접에 그려서 내갔다는 것이다. 사기 그릇에 그린 그림이 그대로 부지할 리 없다. 여자는 글과 마찬가지로 그림도 함부로 문밖으로 내보내지 않는 것이 미덕이었기 때문이다.



3. 도덕교과서 규훈(閨訓)

  '규훈'이란 '여성에게 가르치는 교훈'이란 뜻으로 계녀서(戒女書)라고 한다. 오늘날 전하는 이 규훈류는 가문에 따라 규범(規範), 규감(閨鑑), 계녀서(戒女書), 여계(女戒), 규방의즉(閨 儀則), 규중요람(閨中要覽), 여사서(女四書) 등 다양한 명칭의 책이 있다. 원래 이 규훈류의 대종(大宗)은 내훈『內訓』으로 조선조 4대왕 세조(世祖)의 자부,소혜왕후(그 남편이 세자로 일찍 돌아갔으므로 후에 덕종으로 추승됨에 따라 왕비가 됨)가 비빈(妃嬪)들의 교육용으로 엮은 책이다. 소학, 논어, 여교(女敎), 여감(女鑑), 열녀전(烈女傳) 등으로 가려 뽑은 국한문체의 활자본이다. 15세기에 지어진 책이므로 각 양반가문에서는 이것을 참고로 해서 국문으로 쉽게 풀어써서 새로 들어온 며느리와 출가하는 딸에게 주는 여성용 가훈(家訓)이 되었다.

『내훈』은 15세기의 작인만큼, 국한문 혼용체라 하더라도 역시 고어가 많아 어렵고, 체재도 언행(言行),효친(孝親), 혼의(婚儀), 부부, 모의(母儀), 돈목(敦睦), 염검(廉儉) 등 모두 7장으로 나누었다. 언해본이라해도 국한문혼용체라 역시 어렵고, 딱딱한 느낌이 있다. 이에 비하면 순국문체로 된 규훈류는 문장도 부드럽고, 그 하나 하나의 구체적인 설명도 우리의 실정에 맞는 이야기들을 실례로 들어 훨씬 설득력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잘 된 것은 우암(尤庵) 송시열이 권씨댁으로 출가한 장녀에게 준 『여계서(女戒書)』이다. 일세에 이름을 떨친 근엄한 대석학(大碩學) 송시열이 아닌, 인자하고 자상한 아버지의 애정어린 음성이 글 줄 사이에 들리는 것 같다.

'제사받드는 법이라', '부모 섬기는 도리라', '지아비 섬기는 도리' 식으로, 결국 인륜의 도를 합친, 효도, 공경, 우애, 돈목, 자녀, 교육, 접대, 은애(恩愛-노비에게) 등의 마음가짐과 일반적인 교양으로서의 말조심, 질투하지 말 것, 절약, 근검, 의식(衣食)의 도(道), 병환모시는(시부모의) 도등 구체적인 행동거지 전반에 미치고 있다.

'자녀교육'의 방법에는 오늘날의 견지로 보아 '좀 지나치다' 싶은 대목도 있지만, 그 근본취지는 과보호를 말라는 뜻으로 만고의 진리이다.

·너무 덥게 입히지 말고,·너무 편한 자리에서 공부시키지 말고, 두가지 이상의 반찬을 먹이지 말고 외지(外地)에서 공부하다가 돌아온 아들을 안에 들이지 말고(음식을 탐하게 되므로), 사랑에 기거시킬 것 ·군것질을 시키지 말 것 등등이다. 또, '유곤의측'에 나오는 훈계지만, '노비 다스리는 도'에서 우리 선조들의 위엄과 휴머니즘을 겸비한 감동스런 대목이 보인다. · 남자종이 벙거지와 띠(즉, 종의 제복)를 매지 않으면 안마당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 노비는 이 세상에서 주인에게 의지하고 사는 인생들이니 의식(衣食)에 춥고 배고픔을 알아주고 · 종의 자식이 안에 들어왔을 때, 음식을 보고 그냥 나가면, 그 어미의 가슴이 아플 것이니 차별말고 나눠줄 것 등등인데 이밖에도 좋은 말이 많다. '팔고 사는 도리'라는 대목에서는 결국, 노무 상대방에게 야박하게 굴지 말라는 양반의 품격이 바닥에 깔려있다. · 내가 물건(곡식 같은 것)을 팔 때 사는 입장이 되어 '자기라하면 얼마쯤을 볼까 생각되는 값'을 부르도록. · 반대로 살 때도 팔 때의 입장이 되어서 흥정하면 억울하지 않느니라. 그런가 하면, 규훈류의 가르침 속에 오늘날의 시점에서 볼 때 당치도 않는 고루한 관념이 있다. 즉,『내훈』에도 있는 철저한 남존여비사상이지만 수백년 내려온 봉건시대의 고착관념이다.

· 아들을 낳으면 상(床,평상)위에 누이고 구슬을 줘서 놀게 하고, 딸을 낳으면 실패(瓦,기왓장이 아님)를 주어 놀게 한다.(아들을 낳은 경사를 '弄璋之慶', 딸을 얻은 경사를 '弄瓦之慶'이라 함은 여기서 비롯됨)는 대목이다. 남녀는 출생과 더불어 귀천이 갈린라진다는 논리이다. 구슬과 실패의 구분은 귀천도 있지만, 실패는 노동(여자의 일)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결혼을 해서 '남편을 섬기는 도(事夫之道)에 있어서

· 남편은 아내의 하늘(夫婦天)이니, 네가 도망친들 어디로 갈 것인가, 라고 하였다.

즉, 불경이부(不更二夫)에 이어지는 소위 소천(所天, 남편의 대명사)사상이다. 그리고 내훈에는 중국명현(名賢)들의 모친이나 부인의 얘기가 나온다. 송나라 석학 정자(程子)의 어머니 후부인(候夫人)은 항상 남편을 손님같이 받들었다고 하고, 여영공(呂榮公)부인은 60년을 남편과 살아오면서 한 번도 얼굴을 붉힌 일이 없으며, 심지어 침석(寢席)위에서도 장난끼 어린 말투를 쓴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 오늘날의 여권(女權)과 동떨어진 이야기는 이 역시 '남편은 하늘이라는 사상'의 관련 있는 칠거(七去:이혼의 조건에 해당하는 일곱 가지 악덕)의 하나로 질투하지 말라는 대목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같이 '우암여계서'에서 나온다.

'여자가 지아비를 섬기고 투기(妬忌)아니 함이 으뜸 행실이니 일백첩을 두어도 불만하지 말고 첩을 아무리 사랑하여도 노기(怒氣)두지 말고 더욱 공경하여라.'

했다. '그러나 네 지아비는 단정한 선비라 여색에 참혹함이 없을 것이요, 너도 투기할 인사가 아니지만 경계하니 너만은 아니라(훗날) 네 딸에게도 첫째로 가르칠 일이라'는 것이다. '규훈'류의 위와 같은 내용들이 봉건시대 여성들의 대법전(大法典)이며 이것을 잘 지켜 몸에 배인 인격체를 부덕(婦德)이라 일컫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