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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의 역사(歷史)

화엄행 2010. 10. 1. 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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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균관의 역사(歷史)

 

고려말과 조선시대의 최고 교육기관인 대학(大學)의 명칭. 학궁(學宮) 또는 반궁(泮宮)이라고도 하였다. 『주례 周禧』에 의하면 ‘성균’은 오제(五帝)의 학(學) 가운데 남쪽에 있었던 것으로 음악(音樂)으로 교육적 성과를 내기 위해 대사악(大司樂)이 그 성균지법(成均之法)을 맡았다고 한다. 여기에서 성균은 음악의 조율(調律)을 맞춘다는 말로서 즉 어그러짐을 바로 잡아 이루고, 과불급(過不及)을 고르게 한다는 뜻이다.

 

  【위치와 연혁】 고려의 국립대학인 국자감(國子監)이 충렬왕(忠烈王) 24년(1298)에 성균감(成均監)으로 되었다가 충선왕(忠宣王) 즉위년(1308)에 성균관이라 하였다. 공민왕(恭愍王) 5년(1356)에 국자감으로 환원하였다가 1362년 다시 성균관으로 고쳐서 조선시대에 계속 대학의 명칭으로 사용하였다. 고려시대 때의 위치는 개성(開城)에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서울[漢陽]의 숭교방(崇敎坊 明倫洞)에 있었는데 현재까지 존속되고 있다. 조선 태조 7년(1398) 7월에 교사(校含)가 창건되었는데 이 해를 근대 학제 개편 이후의 성균관대학교 창립 인도로 삼고 있다. 태조 당시에는 유학(儒學)을 강의하는 명륜당(明倫堂), 공자(孔子) 및 중국과 한국의 역대 성현들을 모신 문묘(文廟:大成殿, 東ㆍ西), 유생(懦生)들이 거처하는 동ㆍ서재(東ㆍ西齋) 등이 있었다. 성종 때에 향관청(享官廳)과 존경각(尊經閣:도서관)이 세워졌고 현종(顯宗) 때에 비천당(丕闡堂:부속과거장)이, 숙종(肅宗) 때에 계성사(啓聖祠:공자 및 五聖의 父를 奉安)가 증설되었다. 고종(高宗) 24년(1887)경학원(經學院)을 부설하였다.

 

  【학제의 변천】 성균관의 직제는 각 시대별로 많은 변천을 하여 일일이 적을 수는 없으나 『경국대전 經國大典』에 따르면 정2품 지사(知事) 1인과 종2품 동(同)지사 2인은 겸관(兼音)이었다. 정3품 대사성(大司成) 1인, 종3품 사성 2인, 정4품 사예(司藝) 3인, 정5품 직강(直講) 4인, 정6품 전적(典籍) 13인, 정7품 박사(博士) 3인, 정8품 학정(學正) 3인, 학유(學諭) 3인, 정9품 학록(學錄) 3인으로 교수직이 조선 초기의 22인에서 38인으로 증원되었다. 영조(英祖) 때의 『속대전 續大典』에 의하면 제주(祭酒)가 정3품관으로 설치되어 1ㆍ2품관이 겸직하도록 하였다. 정조(正祖)때의 『태학지 太學志』에는 지사(정2품에서 정1품까지)를 대제학(提學)이 겸직토록 하였고, 인원이 더욱 늘어났다. 입학 자격은 생원(生員)ㆍ진사(進士) 등 사마시(司馬試) 합격자에게만 한하여 부여되었다 이들은 본과생(本科生)이라 하였다. 정원은 초기에 200명이었는데 후기에 126명으로 조정하였고 말기 에 100명으로 축소하였다. 입학연령은 15세 이상이었으나 50세 장년도 있었으니 연령 제한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원에 미달될 경우에 한하여 생원ㆍ진사가 아니더라도 사학(四學)의 생도 가운데서 15세 이상으로 소학(小學)ㆍ사서(四書)를 배우고 오경(五經) 가운데서 1경에 통한 자, 공신과 3품 이상 관리의 적자(嫡子)로서 소학에 능통한 자, 문과 및 생원ㆍ진사의 초시(初試:漢城와 鄕試)에 합격한 자, 관리 중에서 입학을 원하는 자는 들어갈 수가 있었는데, 이들은 기재생(寄齋生)이라 하였다. 본과생(上齋生:上舍生)이나 기재생(下齋生:別科生)도 과거에 급제하면 동등한 입장에서 출세할 수 있었다.

 

  【교과과정 및 교수방법】 주요 교과 과정은 사서ㆍ오경을 구재(九齋)로 나누어 학생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 밖에 과문(科文:詩ㆍ賦ㆍ訟ㆍ策ㆍ義ㆍ疑 등)의 제술(製述)도 부과하였고, 제사(諸史)도 독서하였다. 그러나 노장(老莊)ㆍ불경(佛經)ㆍ잡류(雜流)ㆍ백가자집(百家子集)은 읽지 못하도록 하였다. 교수 방법은 먼저 구재 가운데서 대학재(大學齋)에 들어가 『대학 大學』을 배웠다. 그것을 마친 다음 예조(禮曹)에 보고하면 예조에서 관원 1명과 대간(臺諫:司憲府ㆍ司諫院)의 관원 각각 1명씩을 성균관에 파견하여 성균관의 교관과 함께 학생에게 강문(講問)하여 강설(講說)이 자세하고 정확하며 전체의 뜻을 잘 파악한 자는 논어재(論語齋)에 올리고, 통하지 못한 자는 통할 때까지 대학재에 머물게 하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논어재에서 맹자재(孟子齋)ㆍ중용재(中庸齋)ㆍ시재(詩齋)ㆍ서재(書齋)ㆍ역재(易齋)로 차례차례 진재(進齋)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사서 오경에 통한 자는 명부에 기재하고 성균관에 보관하였다가 식년(式年)에 예조에 보고하면, 예조에서는 왕에게 보고하여 문과초시(文科初試)를 보게 하였다. 이러한 분재제도는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는 제도였으나 조선시대에 와서는 시대에 따라서 원칙으로만 지켜지고 적당한 방법으로 교수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과거의 시험 과목과 방법이 시대에 따라 달라서 경서(經書)와 사장(詞章)의 학습 비중이 이에 맞추어 달라진 것이다. 또 『실록 實錄』의 기록에 나타난 교수의 한 방법은, 즉 태종 13년(1413) 대사성 권우(權遇)의 상서로 정부가 결의한 것인데, 성균관 학생은 1개월 가운데 20일은 경서를 읽고, 4일간은 배운 것을 고강(考講)하고, 6일간은 과거의 문장인 제술을 실시하여 월말에 그 달에 배운 경서의 다소(多少)와 고강 및 제술의 분수(分數:9등급의 점수)를 기록하여 예조에 보고하고 식년에 이르러 분수를 총계하여 상등 5명 내지 10명을 ‘대성(大成)’이라 하여 예조에 보고하면, 예조에서는 왕에게 전계(轉啓)하여 관시(館試:문과 초시)를 면제하고 바로 회시(會試:覆試)를 보게 하였다. 그 이하는 모두 관시를 보게 하였다. 그리나 사학에서 승보(升補)된 기재생은 소성(小成)ㆍ대성을 막론하고 모두 생원시를 보도록 하였다. 이 방법은 후에 부분적인 변동은 있었으나 조선시대에 성균관의 교수방법에 있어서 한 표준이 되었다. 또 교수와 학생사이에 질의응답식의 교수 방식과 개별 지도에 치중하고 교수 1인당 학생이 10인을 넘지 않았다.

 

  【유생의 일과와 자치활동】 『태학지』에는 유생들의 일과 및 지켜야 할 법도가 나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생들은 매월 초 1일 관대(冠帶)를 갖추고 문묘에 나아가 4배례(拜禮)를 행한다. 일과는 매일 새벽에 북소리가 한 번 나면 일어나고 날이 밝기 시작하여 북소리가 두 번 나면 의관을 갖추고 안정하게 밝아서 책을 읽는다. 북소리가 세 번 나면 식당에서 동 서로 마주앉아 식사를 마치고 퇴장한다. 식당에 참여하는 점수를 원점(圖點)이라 하는데 아침ㆍ저녁을 합하여 1점으로 계산하였다. 이것은 일종의 출석 점수로서 300점을 취득하여야만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 윈칙이었으나 잘 시행되지 않았다. 다음에 교수들이 명륜당에 정좌하고 북소리가 나면 입정(入庭)하여 읍례(揖禮)하고 그것이 끝나면 자기 재 앞으로 가서 서로 절하고 인사를 교환한다. 유생이 교수에게 나아가 일강(日講)을 청하면 상재와 하재에서 각각 1명씩 뽑아 읽는 책을 상대로 강을 행한다. 북소리가 두 번 나면 모든 유생은 읽는 책을 가지고 사장(師長) 앞에 나아가 배운 것을 논한(論難)하여 그것을 해결한 다음 새 것을 배운다. 이 때 많이 배우는 것을 힘쓰지 않고 정밀하게 연찬하는 데에 힘쓴다. 과목당 독서 기간을 정하고 있는데 『대학』은 1개월, 『중용』은 2개월, 『논어』ㆍ『맹자』는 각 4개월, 『시경』ㆍ『서경』ㆍ『춘추』는 각 5개월, 『주역』ㆍ『예기』는 각 7개월로 하였다. 독서할 때는 글 뜻을 명백히 이해하여 응용에 통달하도록 하였고 장구(章句)에 얽매여 글의 뜻을 해치지 않도록 하였는데 이러한 태도는 후기로 갈수록 지켜지지 않고 주자장구(朱子章句)에 얽매이는 태도로 경직화되었다. 글씨는 해서(楷書)를 원칙으로 하고, 성현을 숭상하지 않는 언동을 하거나 조정을 비방하면 처별 대상이 되었다. 상론(商論)ㆍ재뢰(財賂), 그리고 주색(酒色)을 말하면 안 되고, 시세에 따라 권세에 아부하여 벼슬길을 찾아도 안되었다. 또한 유생들은 오륜(五倫)을 범하여 이름을 더럽혀서도 안 되며, 윗사람을 능욕하거나 사치하여도 안 되고 교수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아도 처벌되었다 유생들의 일상 생활의 중심이 되는 곳은 재(齋)였다. 상재생은 하재생이 과실이 있으면 벌을 주기도 하였다. 벌의 종류는 식손(食損:식당에 참여하지 못하게 함. 輕重에 따라 날수를 달리함)과 출재(黜齋:재에서 퇴거하는 것으로 퇴학과 같음)가 있어서 엄한 편이었다. 자치 기구로 재회(齋會)가 있었다. 재회의 임원으로 장의(掌議)ㆍ색장(色掌)ㆍ조사(曹司)ㆍ당장(堂長) 등이 있었다. 당장은 회의 석상에서 선출되는 임시 의장의 구실을 하였고 조사는 좌중에서 최연소자로 뽑아 서기 구실을 하였다. 장의는 회장이고 동ㆍ서재 각 1명으로 2명, 색장은 4명으로 식당에서의 검찰(檢察)을 맡았다. 성균관의 대내적인 문제는 대개 재회를 통해서 자치적으로 해결하였다. 대외적인 문제 가운데서 특히 조정의 부당한 처사나 정치에 대해서는 유소(儒疏)나 권당(捲堂)으로 맞섰다. 유소는 왕에게 직접 상소를 하여 문제의 해결을 모색하는 방법이고 이것으로 주장이 관철되지 못하면 일종의 동맹 휴학이라 할 수 있는 권당으로 맞섰다. 권당은 유생들이 문묘의 신삼문(神三門) 밖으로 네 번 절을 하고 일제히 성균관을 떠나버리는 것이다. 조선시대 권당의 친수는 중종때 1, 명종 때 4, 광해군 때 2, 인조 때 2, 효종 때1, 현종 때 2, 숙종 때 16, 경종 때 2, 영조 때 18, 정조 때 16, 순조 때 14, 헌종 때 4, 철종 때 5번 있었다. 초기에는 유학의 근본 이념에 맞게 원칙론적인 입장에서 행하여졌지만 후기에 갈수록 우세한 당파(서인, 특히 노론)의 입장을 대변하는 관제 여론의 데모화로 그 성격이 변질되었다. 장의가 노른 1인, 소론 1인이 뽑혔던 데에서도 문제가 있었고 변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정책 결정이나 인사 문제, 문묘의 승무(陞)문제 등에 유소와 권당의 영향은 크게 작용하였고, 관리들보다는 비교적 순수하게 의견을 제시하였다.

 

  【문묘와 교육시설】 조선 초에 완비를 본 성균관의 시설은 임진왜란 때에 모두 불타버리고 선조 34년(1601)에 재건에 착수하여 6년이 지난 후대 체로 옛 모습을 되찾았다. 그 후 말기의 고종 때까지 새로운 시설과 개수 확장 사업을 계속하였다. 문묘는 공자를 위시한 중국과 한국의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던 곳으로 서울의 사학(四學)을 제외한 지방의 향교(鄕校)도 그 내용이 같았다. 건물의 규모는 104칸(間)이다. 문묘에서 향사(享祀)되는 인물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가 달랐고 조선시대에서도 전ㆍ후기가 다르다. 대성전(大成殿)에는 공자와 4성(四聖:顔子ㆍ曾子ㆍ子思ㆍ孟子)과 공분십철(孔門十哲), 그리고 송(宋)나라 6현(賢)을 모셨고, 동ㆍ서무(東ㆍ西)에는 주ㆍ한(漢)ㆍ진(晋)ㆍ당(唐)ㆍ원(元)ㆍ송나라 94위(位)와 우리나라 신라ㆍ고려ㆍ조선 18위를 봉안하였다. 해방뒤에 무의 94위는 출향(黜享)하고 우리나라 18위를 대성전에 옮겨서 춘추(春秋) 상정일(上丁日)에 석전(釋奠)을 행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임금이 문묘에 작헌례(酌獻禮)를 올린 뒤 명륜당에서 과거를 치루는 알성문과(謁聖文科)도 있었다. 명륜당은 대성전의 북쪽에 있고 좌우에 내실(來室)이 있는데 남향으로 18칸[間]이다. 동ㆍ서재는 각 18칸으로 기숙사이며, 육일각(六一閣)은 유학 교육에서 교양 과목이라 할 수 있는 육예(六藝:禮ㆍ樂ㆍ射ㆍ御ㆍ書ㆍ數) 가운데서 활쏘기[射]에 관한 기구를 보관한 곳이다. 이는 정신뿐만 아니라 육체의 건전한 단련도 중요시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외 존경각ㆍ비천당을 비롯하여 진사 식당(進士食堂)ㆍ정록청(正錄廳)ㆍ향관청ㆍ양현고(養賢庫) 등 169칸의 교육 시설이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었다. 특히 양현고는 성균관 학생의 식사와 등유(燈油)ㆍ돗자리(鋪席) 등 여러 가지 교육 기구와 석전의 비용을 조달하기 위하여 고려 예종 14년(1119)에 안향(安珦)의 건의로 창설한 일종의 장학 기관이다. 그 재원은 학전(學田)과 노비(奴婢)에 있었다. 그 규모는 태종 때 1,000결(結:1결은 약 3,000평. 토지의 등급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음)의 토지와 300구(口)의 노비가 있었는데 시대의 변천에 따라 가감이 있었다. 현재에도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에서는 양현재(養賢齋)를 그대로 두고 교육과 장학 사업을 계속하고 있다.

 

  【근대학제로의 변천】 고종 32년(1895) 성균관 관제(管制)를 칙령 제136호로 반포하여 성균관은 문묘를 받드는 기관으로 하고 교육은 경학과(經學科)에서 전담하게 하였다. 반상(班常)의 구별없이 인재를 육성하겠다는 교육의 기회 균등을 밝혔으며 시대적 요구와 추세로 인하여 ‘문명(文明)한 진보(進步)에 주의(注意)함을 요지(要旨)로 함’을 발표하였다. 1910년 한ㆍ일합병으로 인하여 성균관과 향교의 재산을 분리하고 교육을 일체 중지하여 국립대학과 민족 교육의 맥을 끊었고, 명칭도 경학원(經學院)으로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그대신 일제는 식민지 교육을 위하여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犬學)을 1924핀 설립하였다. 당시 전국의 유림(儒林)이 주권을 지키려는 운동으로 의병(義兵)과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 등을 일으키고, 통문(通文)을 돌려 성균관의 교육 기관으로서의 기능 회복을 선도하자 그 회유책의 일환으로 1930년 명륜학원(明倫學院)을 설립하게 되었다. 1939년에 명륜전문학원으로, 1942년 명륜전문학교로 명칭이 바뀌었지만 진실한 유학 교육과 문화 창달에 미치지 못하고 일본의 변질된 황도유학(黃道儒學)을 강요하게 되었다. 교과 과정에 있어서도 국민도덕ㆍ일어ㆍ일본사ㆍ교련 등을 넣어서 그들에 영합하는 교육으로 변모하였다. 그것마저 1943년 폐교 조치가 되고 청년연성소(靑年鍊成所)로 바뀌게 되었다. 일제에 의해 말살되었던 유일한 국립대학으로서 민족 교육을 이룩해내었던 전통을 되살리는 운동이 8ㆍ15광복과 더불어 일어났다. 1945년 명륜전문학교로 문을 열었다가 미군정시대에 명칭을 성균관으로 변경하였고 1946년 9월 25일 성균관대학이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1953년에는 성균관대학교로 종합대학이 되었다. 초대 학장 및 총장에는 전통 유림으로서 일제에 대항하였고 해방 후에는 반독재 투쟁에 앞장섰던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선생이 취임하였다.

현재 성균관은 성균관대학교와 분리되어 운영되고 있으며, 전국 234개의 향교와 더불어 유교사상과 전통문화 계승·발전의 산실로서 그 맥을 잇고 있다. 특히, 매년 전국적으로 실시되는 <청소년 인성교육>을 비롯한 각종 사회봉사 활동, 예절상담을 통한 생활의례 보급, 전통문화 계승을 위한 출판사업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