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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신심명 강설(信心銘 講說) 6 - 三祖 僧璨大師

화엄행 2009. 12. 29. 15:36
46. 얻고 잃음과 옳고 그름을
    일시에 놓아 버려라.

    득실시비   일시방각
    得失是非를 一時放却하라

잘잘못과 옳고 그름 모두가 변견이니, 이러한 양변을 완전히 버리면 중도가 현전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47. 눈에 만약 졸음이 없으면
    모든 꿈 저절로 없어지고

    안약불수  제몽자제
    眼若不睡면 諸夢自除요

누구든지 잠을 자지 아니하면 꿈은 없는 것입니다. 꿈은 누구든지 잠을 자기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48. 마음이 다르지 않으면
    만법이 한결같느니라.

   심약불이   만법일여
   心若不異면 萬法一如니라

마음에 다른 생각인 차별심 분별심을 내지 않으면 만법이 여여(如如)한 그대로라는 것입니다. 만법이 본래 여여한데 우리가 여여하지 않다고 인식하는 것은 바로 마음에 분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법이 본래 여여한 것을 우리가 억지로 여여치 않게 할 수도 없는 것이면, 여여치 않은 것을 여여하게 할 수도 없습니다. 만법이 본래 한결 같아서 여여부동(如如不動)한데도 그것을 보지 못함은 중생의 마음 속에 분별심이 있기 때문이므로, 마음 가운데서 분별심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전혀 분별심이 없으면 '만법이 한결같다'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49. 한결같음은 본체가 현모하여
    올연히 인연을 잊어서

    일여체현     올이망연
    一如體玄하야 兀爾忘緣하야  

'일체 만법이 여여한다'는 것은 그 본체가 현묘하기 때문입니다. 현모한 본체는 석가가 아무리 알았다 해도 실제로 알 수는 없으며, 달마가 전했다 해도 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 사람이 '석가도 알지 못하거니 가섭이 어찌 전할 수 있을건가(釋迦猶未會어니 迦葉豈能傳가)'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정말 알 수도 없고 전할 수도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입니까? 그럼 석가가 깨치고 가섭에게 전했다고 하는 것도 거짓말인가?
  
그러나 참으로 알 수 없는 가운데서 분명히 알고, 전할 수 없는 가운데서 분명히 전하는 것이 불교의 묘법이니, 이것이 참으로 현묘한 이치라는 것입니다.
'올연히 일체 인연을 다 잊었다'고 하는 그 인연이란 생멸인연을 말합니다. 더 나아가서 생멸인연이든 불생멸인연이든, 세간법이든 출세간법이든 모든 인연을 다 잊어 버렸다는 뜻입니다.


50. 만법이 다 현전함에
    돌아감이 자연스럽도다.
    
    만법   제관   귀복자연
    萬法이 齊觀에 歸復自然이니라

'만법제관(萬法齊觀)'이란 일체만법을 환히 다 본다는 뜻으로 흔히 해석하지만, 일체만법이 모두 다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돌아감이 자연스럽다'고 해서 그냥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아니니, 그렇게 되면 천연외도(天然外道)가 되고 맙니다. 귀복(歸復)이란 반본환원(返本還源)의 뜻으로서 자성청정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제 분별심만 다 버린다면 이 자성청정심에 돌아가는데, 그 돌아감이 아무런 조작이 없으며 힘들지 아니하여 자연스럽다는 것입니다.


51. 그 까닭을 없이 하여
    견주어 비할 바가 없음이라

    민가소이     불가방비
    泯其所以하야 不可方比라

그러면 그렇게 되는 이유가 무엇이냐? 그러나 그 이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부사의해탈경계(不思議解脫境界)이기 때문에 말로써도 표현할 수 없고 마음으로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비교해서 이렇다 저렇다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52. 그치면서 움직이니 움직임이 없고
    움직이면서 그치니 그침이 없나니

    지동무동     동지무지
    止動無動이요 動止無止니

움직임과 그침은 상대법으로서 여기서는 먼저 이 두 상대법을 서로 긍정한 다음에 두 법을 부정하였습니다(照而遮). 그치면서 움직인다(止而動) 함은 그침과 움직임이 서로 긍정하면서 두법이 융통자재하게 살아나는 동시에 움직임이 없음(無動)을 말하였고, 움직이면서 그친다(動而止) 함은 움직임과 그침이 서로 긍정하면서 두 법이 상통(相通)하는 동시에 그침이 없음(無止)  을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움직임과 그침의 양변을 완전히 부정하면서 다시 두 법을 긍정하여 서로 융통자재하게 쓸 수 있는 중도정의(中道正義)를 여기서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치면서 움직임(止動)과 움직이면서 그침(動止)은 두 법이 서로 비춰서(雙照) 살아남(常照)을 말하고, 움직임이 없고(無動)  그침이 없다(無止)함은 두 법을 함께 막아(雙照) 없애 버림으로써(常寂) 비치면서 항상 고요하고(照而常寂) 고요하면 항상 비치는(寂而常照) 중도 법계의 이치를 그대로 나타낸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는 먼저 비춰서 막고(照而遮) 뒤에 막아서 비춘다(遮而照)는 순서만 달리하였을 뿐, 막음과 비춤을 함께 한(遮照同時) 중도 정의는 다름이 없습니다. 결국 움직임은 그침에 즉(卽)한 움직임이므로 움직임이 없는 것이며, 그침은 움직임에 즉(卽)한 그침이므로 그침이 없어서, 움직임과 그침이 함께 융토자재하면서 동시에 두 상대법이  없어짐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움직임은 그침 가운데 움직임이며(靜中動), 그침은 움직임 가운데 그침이어서(動中靜) 움직임과 그침의 두 상대법이 함께 없어지면서 함께 서로 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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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佛紀 2545. 8 .19일. 법보종찰 해인사

출처 : 유리산 무량사
글쓴이 : 천상천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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