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현묘한 뜻은 알지 못하고
공연히 생각만 고요히 하려 하도다.
불식현지 도로염정
不識玄旨하고 徒勞念靜이로다
"참으로 양변을 여읜 중도의 지극한 도를 모르고 애써 마음만 고요히 하고자 할뿐이라"는 것입니다. '대도를 성취하려면 누구든지 가만히 앉아서 고요히 생각해야지, 다른 방법이 없다'고 고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대도(大道)라는 것은 간택심(揀擇心) 증애심(憎愛心) 순역심(順逆心)을 버리면 상취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것이므로, 마음을 억지로 고요하게 해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분주하게 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고요히 하면 안된다고 하니 그러면 분주하게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혹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움직임과 고요함이 두 가지가 다 병으로서 움직임이 병이라면 고요함도 병이고 어긋남이 병이라면 맞음도 병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두가 상대적인 변견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대를 버려야 대도에 들어가게 됩니다.
7. 둥글기가 큰 허공과 같아서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거늘
원동태허 무흠무여
圓同太虛하야 無欠無餘어늘
"지극한 도는 참으로 원융하고 장애가 없어서, 둥글기가 큰 허공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즉 융통자재하여 아무런 걸림이 없음을 큰 허공에 비유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조금도 모자라거나 남음도 없습니다. 지극한 도란 누가 조금이라도 더 보탤 수 없고 덜어낼 수도 없어 모두가 원만히 갖추어 있기 때문에, 누구든지 바로 깨칠 뿐 증감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지극한 도가 눈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요?
8. 취하고 버림으로 말미암아
그까닭에 여여하지 못하도다.
양유취사 소이불여
良由取捨하야 所以不如라
"지극한 도는 취하려 하고, 변견은 버리려하는 마음이 큰 병이라"는 것입니다. 대중들이 변견을 버리도록 하기 위해서 나도 할수 없어서 중도를 많이 얘기하지만, 그 말을 듣고 중도를 취하려 하고 변견을 버리려 하면 이것이 큰 병이라는 뜻입니다. 혹 변견은 취하고 중도를 버리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겠지만, 그것도 병은 마찬가지로서 무엇이든지 취하고 버리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큰 병입니다.
대도에는 모든 것이 원만구족하여 조금도 모자라고 남는 것이없지만, 우리가 근본 진리를 깨치지못한 것은 취하고 버리는 마음, 즉 취사심(取捨心)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중생을 버리고 부처가 되려는 것도 취사심이며, 불법을 버리고 세숙법을 취하는 것도 취사심으로서 모든 취하고 버리는 것은 다 병입니다. 때문에 "취사심으로 말미암아 여여한 자성을 깨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여여한 자성'이란 무상대도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취사심을 버리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9. 세간의 인연도 따라가지 말고
출세간의 법에도 머물지 말라.
막축유연 물주공인
莫逐有緣하고 勿住空忍하라
'있음의 인연(有緣)'이란 세간법과 같은 말로서 인연으로 이루어진 세상 일이라는 뜻입니다. 공의 지혜(空忍)란 곧 출세간법 이라는 뜻입니다. 인연이 있는 세상 일도 좇아가지 말고 출세간 법에도 머물지 말라는 것이니 두 가지가 다 병이기 때문입니다.
있음(有)에 머물면 이것도 병이고, 반대로 공함에 머물면 이것도 역시 병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있음을 버리고 공함을 취하거나, 공함을 버리고 있음을 취한다면 이것이 취사심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때문에 우리가 무상대도를 성취하려면 세간의 인연도 버리고 출세간법도 버리고, 있음과 없음을 다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10. 한 가지를 바로 지니면
사라져 저절로 다하리라.
일종평회 민연자진
一種平懷하면 泯然自塵이라
'일종(一種)'이란 중도를 억지로 가리킨 말입니다. 있음과 없음을 다 버리고 양변을 떠나면 바로 중도(中道)가 아니냐 하는 말입니다. 일종이란 중도를 가리키므로 일체 만법이 여기에서 다해 버렸으며, 동시에 일체 만법이 원만구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절로 다한다'고 했다 해서, 무엇이 영영 없어 진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여기서 '다한다'는 것은 일체 변견이,일체 허망(妄)이 다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 항하사(恒河沙) 같은 진여묘용이 현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상 인연을 좇지도 않고 출세간의 법에도 머물지 않으면 중도가 현전하여 일체 변견이 다하고 항사묘용(恒沙妙用)이 원만구족하게 됩니다.
11. 움직임을 그쳐 그침에 돌아가면
그침이 다시 큰 옴직임이 되나니
지동귀지 지갱미동
止動歸止하면 止更彌動하나니
"움직임을 그쳐서 그침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바로 고요함(靜)으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움직이는 마음을 누르고 고요한 데로 둘아가려 하면, 고요하려는 마음이 점점 더 크게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화두를 열심히 참구하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망상이 일어 난다고 이 망상을 누르려고 하면 할수록 망상이 자꾸 일어나는 것과도 같으니, 이는 망상에 망상을 보태는 것이 되고 맙니다. 예를 들면 참선을 하는 데 있어서 '화두만 참구하고 일어나는 망상을 덜려고도 하지 말고 피하려고도 하지 말며, 오직 화두만 부지런히 참구하라'고 내가 누누이 일러주었는데도, 어떤 납자는 "자꾸만 일어나는 망상을 덜려고 하는 이것이 참선 공부에서 가장 힘들다"고 더러 나에게 말합니다.
이는 망상을 덜려고 망상을 일으킨 것으로서 망상에 망상 하나를 더 보텐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망상을 덜려는 생각도 덜려는 생각도 덜지 않으려는 생각도 버리도 화두만 참구하라'고 납자들에게 더러 일러줍니다만, 그것이 쉽게 안되는 모양입니다. 이것이 그침(止), 곧 고요함을 좋아하여 움직임(動)을 버리고 고요함으로 돌아가려고 하면, 점점 더 크게 움직이게 된다는 뜻입니다.
12. 오직 양변에 머물러 있거니
어찌 한 가지임을 알 건가.
유체양변 영지일종
唯滯兩邊이라 寧知一種가
"양변에 머물러 있으니, 어떻게 중도를 알겠는가"하였습니다. '그침(止), 곧 고요함은 버리고 움직이는(動) 대로 하면 되지 않겠느냐'하겠지만 이것도 양변이라는 것입니다. 움직임도 고요함도 버리고 자성을 바로 볼 뿐, 양변에 머물러 있으면 일종(一種)인 중도의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변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육조스님께서도 유언에서 '언제든지 양변을 버리고 중도에 입각해서 법을 쓰라'고 당부하셨습니다.
13. 한 가지에 통하지 못하면
양쪽 다 공덕을 잃으리니
일종불통 양처실공
一種不通하면 兩處失功이니
'일종(一種)', 즉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진여자성(眞如自性)에 통하지 못하면 양쪽의 공덕을 다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될까요?
14. 있음을 버리면 있음에 빠지고
공함을 따르면 공함을 등지느니라.
견유몰유 종공배공
遣有沒有요 從空背空이라
이 구절은 참으로 깊은 말씀입니다. 현상(有)이 싫다고 해서 현상을 버리려고 하면 버리려 하는 생각이 하나 더 붙어서 더욱 현상에 빠지고, 본체(空)가 좋다하여 공을 좇아가면 본체를 더욱 등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공이란 본래 좇아가거나 좇아가지 않음이 없는 것인데, 공을 따라갈 생각이 있으면 공과는 더욱 등지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현상을 버리고서 공을 따르려고도 하지 말며, 반대로 본체를 버리고서 현상을 따라 가려고도 말아야 합니다. 이 두 가지 모두가 양변이며 취사심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취사심을 버려야만 무상대도를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15. 말아 많고 생각이 많으면
더욱 더 상응치 못함이요
다언다려 전불상응
多言多慮하면 轉不相應이요
이 무상대도를 성취하려면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설명하고 거듭 설명을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본래 대도란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 갈 곳이 없어진 것(言語道斷 心行處滅)'입니다. 이는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마음으로도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말로 표현하거나 마음으로 생각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대도(大道)가 이와 같기 때문에 말로 표현하고 마음으로 생각하려 하다가는 대도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16.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
통하지 않는 곳 없느니라.
절언절려 무처불통
絶言絶慮하면 無處不通이라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 갈 곳이 없어진'곳에서는 자연히 대도를 모를래야 모를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말과 생각이 끊어진' 여기에 집착하면, '통하지 않는 곳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통하지 않아 아주 모르게 됩니다. 이 '말과 생각이 끊긴것'은 그 자취마저 없는 데서 하는 말임을 잘 알아야 합니다. 이 경지에서는 사통팔달(四通八達)하여 통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말과 생각이 끊어진 곳'에 집착하면 전체가 막히고 맙니다. 여기서도 근본은 취사심을 버려야 대도를 성취한다는 것입니다.
17. 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비춤을 따르면 종취를 잃나니
귀근득지 수조실종
歸根得旨요 隨照失宗이니
자기의 근본 자성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어 무상대도를 성취하고, '비춤을 따른다(隨照)'는 것은 자기 생각나는 대로 번뇌망상 업식망정을 자꾸 따라가면 근본 대도를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18. 잠깐 사이에 돌이켜 비춰보면
앞의 공함보다 뛰어남이라
수유반조 승각전공
須臾返照하면 勝却前空이라
잠깐 동안에 돌이켜 비춰보고 자성을 바로 깨치면 '공했느니 공하지 않느니'한 것이 다 소용없는 꿈같은 소리라는 뜻입니다.
19. 앞의 공함이 전변함은
모두 망견 때문이니
전공 전변 개유망견
前空이 轉變은 皆由妄見이니
앞에서의 공함이 이렇게도 변하고 저렇게도 변하는 것은 모두 망령된 견해(妄見)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18공(十八空) 20공(二十空) 등 여러가지를 말씀하셨지만, 그것은 중생이 못 알아듣기 때문에 이런저런 말씀을 하신 것이지, 실제로 뜻이 그곳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허공이 어떻게 옮겨 변할 수 있겠습니까? 공함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말하게 된 것은 중생의 망견(妄見)때문이며 진공(眞空)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20. 참됨을 구하려 하지 말고
오직 망령된 견해만 쉴지니라.
불용구진 유수식견
不用求眞이요 唯須息見이라.
누구든지 깨치려면 진여본성을 깨치려 하지말고 망령된 견해만 쉬어 버리라는 것입니다. 구름이 걷히면 태양이 빛나듯 태양을 따로 찾으려 하지 말고 망상의 구름만 걷어 버리면 된다는 것입니다. 일체 중생은 부처님과 같은 자성청정한 진여본성을 다 갖추고 있어서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여자성을 보지 못하는 까닭도 망견이 앞을 가려서 보지 못하는 것이니, 망견만 쉬어버리면 진여자성을 달리 구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망견이란 무엇일까?
21. 두 견해에 머물지 말고
삼가 좇아가 찾지 말라.
이견 부주 심막추심
二見에 不住하야 愼莫追尋하라
두 가지 견해는 즉 양변의 변견을 말합니다. 이 변견만 버리면 모든 견해도 따라서 쉬게 됩니다. 그러므로 양변에 머물러 선악 시비 증애 등 무엇이든지 변견을 따르면 진여자성은 영원히 모르게 됩니다
22. 잠깐이라도 시비를 일으키면
어지러이 본 마음을 잃으리라.
재유시비 분연실심
在有是非하면 紛然失心이니라
갓 시비가 생기면 자기 자성을 근본적으로 잃어버린다는 뜻입니다, 앞에서는 자기의 진여자성을 구하려고 하지 말고 망령된 견해만 쉬면 된다고 했는데, 그 망령된 견해란 곧 양변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그 양변을 대표하는 시비심(是非心), 즉 옳다 그르다 하는 마음을 들어 망견이라는 뜻을 보이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불법(佛法)이 옳고 세법(世法)이 그르다든지, 반대로 세법이 옳고 불법이 그르다든지 하는 시비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그것이 큰 병입니다.
우리가 실제의 진여자성을 바로 깨쳐 무상대도를 성취하려면 이 시비심부터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망견을 쉬고 양변에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비심은 두 가지 견해를 대표하는 예로 들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상대법(相對法)의 전체가 다 여기에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 신심명 강설(信心銘講說) ④ 로... ■
※ 출처 : 佛紀 2545. 8 .19일. 법보종찰 해인사
공연히 생각만 고요히 하려 하도다.
불식현지 도로염정
不識玄旨하고 徒勞念靜이로다
"참으로 양변을 여읜 중도의 지극한 도를 모르고 애써 마음만 고요히 하고자 할뿐이라"는 것입니다. '대도를 성취하려면 누구든지 가만히 앉아서 고요히 생각해야지, 다른 방법이 없다'고 고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대도(大道)라는 것은 간택심(揀擇心) 증애심(憎愛心) 순역심(順逆心)을 버리면 상취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것이므로, 마음을 억지로 고요하게 해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분주하게 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고요히 하면 안된다고 하니 그러면 분주하게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혹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움직임과 고요함이 두 가지가 다 병으로서 움직임이 병이라면 고요함도 병이고 어긋남이 병이라면 맞음도 병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두가 상대적인 변견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대를 버려야 대도에 들어가게 됩니다.
7. 둥글기가 큰 허공과 같아서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거늘
원동태허 무흠무여
圓同太虛하야 無欠無餘어늘
"지극한 도는 참으로 원융하고 장애가 없어서, 둥글기가 큰 허공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즉 융통자재하여 아무런 걸림이 없음을 큰 허공에 비유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조금도 모자라거나 남음도 없습니다. 지극한 도란 누가 조금이라도 더 보탤 수 없고 덜어낼 수도 없어 모두가 원만히 갖추어 있기 때문에, 누구든지 바로 깨칠 뿐 증감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지극한 도가 눈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요?
8. 취하고 버림으로 말미암아
그까닭에 여여하지 못하도다.
양유취사 소이불여
良由取捨하야 所以不如라
"지극한 도는 취하려 하고, 변견은 버리려하는 마음이 큰 병이라"는 것입니다. 대중들이 변견을 버리도록 하기 위해서 나도 할수 없어서 중도를 많이 얘기하지만, 그 말을 듣고 중도를 취하려 하고 변견을 버리려 하면 이것이 큰 병이라는 뜻입니다. 혹 변견은 취하고 중도를 버리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겠지만, 그것도 병은 마찬가지로서 무엇이든지 취하고 버리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큰 병입니다.
대도에는 모든 것이 원만구족하여 조금도 모자라고 남는 것이없지만, 우리가 근본 진리를 깨치지못한 것은 취하고 버리는 마음, 즉 취사심(取捨心)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중생을 버리고 부처가 되려는 것도 취사심이며, 불법을 버리고 세숙법을 취하는 것도 취사심으로서 모든 취하고 버리는 것은 다 병입니다. 때문에 "취사심으로 말미암아 여여한 자성을 깨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여여한 자성'이란 무상대도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취사심을 버리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9. 세간의 인연도 따라가지 말고
출세간의 법에도 머물지 말라.
막축유연 물주공인
莫逐有緣하고 勿住空忍하라
'있음의 인연(有緣)'이란 세간법과 같은 말로서 인연으로 이루어진 세상 일이라는 뜻입니다. 공의 지혜(空忍)란 곧 출세간법 이라는 뜻입니다. 인연이 있는 세상 일도 좇아가지 말고 출세간 법에도 머물지 말라는 것이니 두 가지가 다 병이기 때문입니다.
있음(有)에 머물면 이것도 병이고, 반대로 공함에 머물면 이것도 역시 병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있음을 버리고 공함을 취하거나, 공함을 버리고 있음을 취한다면 이것이 취사심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때문에 우리가 무상대도를 성취하려면 세간의 인연도 버리고 출세간법도 버리고, 있음과 없음을 다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10. 한 가지를 바로 지니면
사라져 저절로 다하리라.
일종평회 민연자진
一種平懷하면 泯然自塵이라
'일종(一種)'이란 중도를 억지로 가리킨 말입니다. 있음과 없음을 다 버리고 양변을 떠나면 바로 중도(中道)가 아니냐 하는 말입니다. 일종이란 중도를 가리키므로 일체 만법이 여기에서 다해 버렸으며, 동시에 일체 만법이 원만구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절로 다한다'고 했다 해서, 무엇이 영영 없어 진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여기서 '다한다'는 것은 일체 변견이,일체 허망(妄)이 다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 항하사(恒河沙) 같은 진여묘용이 현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상 인연을 좇지도 않고 출세간의 법에도 머물지 않으면 중도가 현전하여 일체 변견이 다하고 항사묘용(恒沙妙用)이 원만구족하게 됩니다.
11. 움직임을 그쳐 그침에 돌아가면
그침이 다시 큰 옴직임이 되나니
지동귀지 지갱미동
止動歸止하면 止更彌動하나니
"움직임을 그쳐서 그침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바로 고요함(靜)으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움직이는 마음을 누르고 고요한 데로 둘아가려 하면, 고요하려는 마음이 점점 더 크게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화두를 열심히 참구하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망상이 일어 난다고 이 망상을 누르려고 하면 할수록 망상이 자꾸 일어나는 것과도 같으니, 이는 망상에 망상을 보태는 것이 되고 맙니다. 예를 들면 참선을 하는 데 있어서 '화두만 참구하고 일어나는 망상을 덜려고도 하지 말고 피하려고도 하지 말며, 오직 화두만 부지런히 참구하라'고 내가 누누이 일러주었는데도, 어떤 납자는 "자꾸만 일어나는 망상을 덜려고 하는 이것이 참선 공부에서 가장 힘들다"고 더러 나에게 말합니다.
이는 망상을 덜려고 망상을 일으킨 것으로서 망상에 망상 하나를 더 보텐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망상을 덜려는 생각도 덜려는 생각도 덜지 않으려는 생각도 버리도 화두만 참구하라'고 납자들에게 더러 일러줍니다만, 그것이 쉽게 안되는 모양입니다. 이것이 그침(止), 곧 고요함을 좋아하여 움직임(動)을 버리고 고요함으로 돌아가려고 하면, 점점 더 크게 움직이게 된다는 뜻입니다.
12. 오직 양변에 머물러 있거니
어찌 한 가지임을 알 건가.
유체양변 영지일종
唯滯兩邊이라 寧知一種가
"양변에 머물러 있으니, 어떻게 중도를 알겠는가"하였습니다. '그침(止), 곧 고요함은 버리고 움직이는(動) 대로 하면 되지 않겠느냐'하겠지만 이것도 양변이라는 것입니다. 움직임도 고요함도 버리고 자성을 바로 볼 뿐, 양변에 머물러 있으면 일종(一種)인 중도의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변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육조스님께서도 유언에서 '언제든지 양변을 버리고 중도에 입각해서 법을 쓰라'고 당부하셨습니다.
13. 한 가지에 통하지 못하면
양쪽 다 공덕을 잃으리니
일종불통 양처실공
一種不通하면 兩處失功이니
'일종(一種)', 즉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진여자성(眞如自性)에 통하지 못하면 양쪽의 공덕을 다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될까요?
14. 있음을 버리면 있음에 빠지고
공함을 따르면 공함을 등지느니라.
견유몰유 종공배공
遣有沒有요 從空背空이라
이 구절은 참으로 깊은 말씀입니다. 현상(有)이 싫다고 해서 현상을 버리려고 하면 버리려 하는 생각이 하나 더 붙어서 더욱 현상에 빠지고, 본체(空)가 좋다하여 공을 좇아가면 본체를 더욱 등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공이란 본래 좇아가거나 좇아가지 않음이 없는 것인데, 공을 따라갈 생각이 있으면 공과는 더욱 등지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현상을 버리고서 공을 따르려고도 하지 말며, 반대로 본체를 버리고서 현상을 따라 가려고도 말아야 합니다. 이 두 가지 모두가 양변이며 취사심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취사심을 버려야만 무상대도를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15. 말아 많고 생각이 많으면
더욱 더 상응치 못함이요
다언다려 전불상응
多言多慮하면 轉不相應이요
이 무상대도를 성취하려면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설명하고 거듭 설명을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본래 대도란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 갈 곳이 없어진 것(言語道斷 心行處滅)'입니다. 이는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마음으로도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말로 표현하거나 마음으로 생각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대도(大道)가 이와 같기 때문에 말로 표현하고 마음으로 생각하려 하다가는 대도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16.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
통하지 않는 곳 없느니라.
절언절려 무처불통
絶言絶慮하면 無處不通이라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 갈 곳이 없어진'곳에서는 자연히 대도를 모를래야 모를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말과 생각이 끊어진' 여기에 집착하면, '통하지 않는 곳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통하지 않아 아주 모르게 됩니다. 이 '말과 생각이 끊긴것'은 그 자취마저 없는 데서 하는 말임을 잘 알아야 합니다. 이 경지에서는 사통팔달(四通八達)하여 통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말과 생각이 끊어진 곳'에 집착하면 전체가 막히고 맙니다. 여기서도 근본은 취사심을 버려야 대도를 성취한다는 것입니다.
17. 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비춤을 따르면 종취를 잃나니
귀근득지 수조실종
歸根得旨요 隨照失宗이니
자기의 근본 자성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어 무상대도를 성취하고, '비춤을 따른다(隨照)'는 것은 자기 생각나는 대로 번뇌망상 업식망정을 자꾸 따라가면 근본 대도를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18. 잠깐 사이에 돌이켜 비춰보면
앞의 공함보다 뛰어남이라
수유반조 승각전공
須臾返照하면 勝却前空이라
잠깐 동안에 돌이켜 비춰보고 자성을 바로 깨치면 '공했느니 공하지 않느니'한 것이 다 소용없는 꿈같은 소리라는 뜻입니다.
19. 앞의 공함이 전변함은
모두 망견 때문이니
전공 전변 개유망견
前空이 轉變은 皆由妄見이니
앞에서의 공함이 이렇게도 변하고 저렇게도 변하는 것은 모두 망령된 견해(妄見)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18공(十八空) 20공(二十空) 등 여러가지를 말씀하셨지만, 그것은 중생이 못 알아듣기 때문에 이런저런 말씀을 하신 것이지, 실제로 뜻이 그곳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허공이 어떻게 옮겨 변할 수 있겠습니까? 공함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말하게 된 것은 중생의 망견(妄見)때문이며 진공(眞空)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20. 참됨을 구하려 하지 말고
오직 망령된 견해만 쉴지니라.
불용구진 유수식견
不用求眞이요 唯須息見이라.
누구든지 깨치려면 진여본성을 깨치려 하지말고 망령된 견해만 쉬어 버리라는 것입니다. 구름이 걷히면 태양이 빛나듯 태양을 따로 찾으려 하지 말고 망상의 구름만 걷어 버리면 된다는 것입니다. 일체 중생은 부처님과 같은 자성청정한 진여본성을 다 갖추고 있어서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여자성을 보지 못하는 까닭도 망견이 앞을 가려서 보지 못하는 것이니, 망견만 쉬어버리면 진여자성을 달리 구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망견이란 무엇일까?
21. 두 견해에 머물지 말고
삼가 좇아가 찾지 말라.
이견 부주 심막추심
二見에 不住하야 愼莫追尋하라
두 가지 견해는 즉 양변의 변견을 말합니다. 이 변견만 버리면 모든 견해도 따라서 쉬게 됩니다. 그러므로 양변에 머물러 선악 시비 증애 등 무엇이든지 변견을 따르면 진여자성은 영원히 모르게 됩니다
22. 잠깐이라도 시비를 일으키면
어지러이 본 마음을 잃으리라.
재유시비 분연실심
在有是非하면 紛然失心이니라
갓 시비가 생기면 자기 자성을 근본적으로 잃어버린다는 뜻입니다, 앞에서는 자기의 진여자성을 구하려고 하지 말고 망령된 견해만 쉬면 된다고 했는데, 그 망령된 견해란 곧 양변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그 양변을 대표하는 시비심(是非心), 즉 옳다 그르다 하는 마음을 들어 망견이라는 뜻을 보이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불법(佛法)이 옳고 세법(世法)이 그르다든지, 반대로 세법이 옳고 불법이 그르다든지 하는 시비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그것이 큰 병입니다.
우리가 실제의 진여자성을 바로 깨쳐 무상대도를 성취하려면 이 시비심부터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망견을 쉬고 양변에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비심은 두 가지 견해를 대표하는 예로 들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상대법(相對法)의 전체가 다 여기에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 신심명 강설(信心銘講說) ④ 로... ■
※ 출처 : 佛紀 2545. 8 .19일. 법보종찰 해인사
출처 : 유리산 무량사
글쓴이 : 천상천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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