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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신심명 강설(信心銘 講說) 4 - 三祖 僧璨大師

화엄행 2009. 12. 29. 15:35

23. 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있음이니
    하나마저도 지키지 말라.

    아유일유   일역막수
    二由一有니 一亦莫守하라

흔히들 둘은 버리고 하나를 취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기 쉽지만, 두가지 변견은 하나 때문에 나며 둘은 하나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 하나마저도 버려버리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양변을 떠나서 중도를 알았다 해도 중도가 따로 하나로 하나 때문에 둘이 있으니, 하나마저도 지키지 말고 버려라, 곧 중도마저도 버리라 하였습니다. 중도는 무슨 물건이 따로 존재하듯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양변을 떠나서 융통자재한 경지를 억지로 표현해서 하는 말입니다.
  

24. 한 마음이 나지 않으면
    만법이 허물 없느니라.

    일심불생     만법무구
    一心不生하면 萬法無咎니라

한 생각도 나지 않으면 만법이 원융무애하여, 아무 허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허물이 없다'는 것은 융통자재를 말한 것으로서 사사무애(事事無碍) 이사무애(理事無碍)의 무장애법계가 바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는 어디서 성립되느냐 하면 바로 양변을 여읜 중도에서 성립됩니다. 즉 시비심의 두 견해를 버리고, 저도 버림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한생각도 나지 않고 일체 만법에 통달무애한 무장애법계가 벌어져 일체에 원융자재하게 됩니다. 이것을 이른바 '허물이 없다'고 합니다.


25. 허물이 없으면 법도 없고
    나지 않으며 마음이랄 것도 없음이라

    무구무법     불생불심
    無咎無法이요 不生不心이라

한 생각도 나지 않으면 허물도 없고 법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있어서 원융무애한 줄 알면 큰 잘못입니다. 이 경지는 허물도 법도 없으며, 나지도 않고 마음이랄 것도 없습니다. 허물도 변(邊)이며, 법도 변이고, 나는것도 변이며, 마음이라 해도 변입니다. 이 모두가 없으면 중도가 안 될래야 안될 수 없습니다.


26. 주관은 객관을 따라 소멸하고
    객관은 주관을 따라 잠겨서

    능수경멸      경축능침
    能隋境滅하고 境逐能沈하야

능(能)은 주관을, 경(境)은 객관을 말합니다. 주관은 객관을 따라 없어져 버리고 객관은 주관을 좇아 흔적이 없어져 버린다는 것이니, 주관이니 객관이니 하는 것이 남아 있으면 모두가 병통이라는 말입니다.


27. 객관은 주관으로 말미암아 객관이요
    주관은 객관으로 말미암아 주관이니

    경유능경     능유경능
    境由能境이요 能由境能이니

객관은 주관 때문에, 주관은 객관 때문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관이 없으면 개관이 성립하지 못하고 객관이 없으면 주관이 성립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 모두가 병이므로 주관 객관을 다 버리라는 것입니다.        


28. 양단을 알고자 할진댄
    원래 하나의 공이니라.

    욕지양단     원시일공
    欲知兩段인댄 元是一空이라

주관이니 객관이니 하는 두가지의 뜻을 알고자 한다면 원래 전체가 한 가지로 공(空)하였음을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주관도 객관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근본 대도인데. 주관 객관을 따라간다면 모두가 생멸법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두를 버려야만 대도에 들어가게 되는데, 양단(兩段)이 모두 병이고 허물이므로 이것을 바로 알면 전체가 다 공했더라는 것입니다. '공했다'는 것은 양변을 여읜 동시에 진여가 현전한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공했다고 한 그 하나의 공은 말뚝처럼 서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어떻게 된 것일까요?            


30. 세밀하고 거칠음을 보지 못하거니
    어찌 치우침이 있겠는가.

    불견정추     영유편당
    不見精 어니 寧有偏黨가

앞 구절에서 '하나의 공'이란 공공적적(空空寂寂)하여, 일체의 명상(名相)이 떨어져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공이 양단과 같으므로 일체 삼라만상 그대로가 중도 아님이 하나도 없습니다. 돌 하나 풀 한 포기까지도 중도 아님이 없으므로, 사사무애(事事無碍)한 법계연기(法界緣起)의 차별이 벌어지게 되어서 삼라만상을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차멸이 벌어진다고 하니 어떤 실제의 차별이 있다고 생각하면 큰일납니다. 삼라만상의 모든 차별이 벌어져 드러났다 하여도 거기에 세밀함과 거칠음이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공이 곧 공이 아니며 공 아님이 곧 공이므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지만, 여전히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닙니다. 조금이라도 산이라느니 물이라는 생각과, 산은 높고 물은 푸르다는 등 이러한 견해가 있으면, '한 가지 공이 양단과 같아서 삼라만상을 다 포함한다'는 뜻을 확실히 알지 못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쌍차쌍조(雙遮雙照)하여 차조동시(遮照同時)한 무장애법계에 있어서는 세밀함과 거칠음을 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한쪽으로 치우치고 편벽된 것을 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모든 상이 다 떨어져 원융무애하고 대자재한 것을 말한 것이지, 세밀함과 거칠음이나 편당(偏黨)을 가지고 하는 말은 절대로 아닙니다. 누구든지 세밀함과 거칠음에 기우는 편당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하나의 공이 양단과 같아서 삼라만상을 다 포함한다'는 도리는 절대로 볼 수 없게 됩니다.


31. 대도는 본체가 넓어서
    쉬움도 없고 어려움도 없거늘

    대조체관     무이무난
    大道體寬하야 無易無難이어늘

무상대도는 그 본바탕이 넓기로는 진시방무진허공(盡十方無盡虛空)을 여러 억천만개를 합쳐 놓아도 그 속을 다 채우지 못합니다. 이같은 무변허공(無邊虛空)이라 해도 실제로는 이 자성에다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대도의 본체는 바탕이 넓다'고 한 것으로서 무궁무진하고 무한무변한 것을 의미한 것입니다. '대도의 본체는 넓어서 어려움도 없고 쉬움도 없다'한 것은 본래 스스로 원만히 구족되어 있으므로 조금도 어렵다거나 쉽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본래 스스로 원만히 구족되어 있기 때문에 대법이든 무엇이든지간에 우리가 공부해서 성춰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라고 할는지 모르겠으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대도를 성취하려면 참으로 무한한 노력이 필요하므로 쉬운 것도 역시 아니라는 밀입니다. 곧 쉽다, 어렵다 하는 것은 모두 중생이 변견으로 하는 말일 뿐입니다. 이는 본래 스스로 원만히 갖추어져 있는 대도를 모르고 하는 말이므로 이러한 쓸데없는 지견(知見)은 모두 버려라 하는 것입니다.


32. 좁은 견해로 여우같은 의심을 내어
    서둘수록 더욱 더디어지도다.

    소견   호의     전급전지
    小見이 狐疑하야 轉急轉遲로다

조그만한 견해로 여우처럼 자꾸 의심하고 급하게 서둘면 반대로 더욱 더디어진다고 하였습니다. 대도는 본래 스스로 원만히 갖추어져 있는데, 이를 자꾸 가깝게 하려 하면 더욱 멀어지는 것이 사실이므로, 누구든지 대도를 성취하려면 쉽다는 생각도 내지 말고 어렵다는 생각도 내지 말며, 급한 생각도 더디다는 생각도 내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쉽다 어렵다 급하다 더디다 하는 등이 모두가 변견으로서 취사심(取捨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취사심을 버려야만 대도를 성취한다는 의미입니다.                


33. 집착하면 법도를 잃음이라
    반드시 삿된 길로 들어가고

    집지   실도   필입사로
    執之면 失度라 必入邪路요

대도나 중도나 또는 다른 뭐라고 하든지, 이를 집착하면 병이 됩니다. 누구든지 중도를 성취하고 부처를 이루려면 집착하는 병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집착이 없는 사람은 대도를 성취한 사람이며, 집착이 있는 사람은 대도를 성취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조금이라도 집착하는 병이 있으면 법도를 잃고, 근본 대도와는 어긋나서 반드시 삿된 길, 즉 변견에 떨어지게 됩니다.  


34. 놓아 버리면 자연히 본래로 되어
    본체는 가거나 머무름이 없도다.

    방지   자연     체무법위
    放之면 自然이니 體無去住라

홀연히 집착을 놓아 버리면 모두가 자연히 현전하며, 본체는 본래 가는 것도 머무는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머무름이 있으면 가는 것이 있고, 가는 것이 있으면 머무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도는 본래 원만구족하여 머무름과 가는 것이 떨어졌기 때문에 집착하는 생각만 완전히 놓아버리면 자연히 대도를 성취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변견인 취사심을 버려야만 대도를 성취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35. 자성에 맡기면 도에 합하여
    소요하여 번뇌가 끊기고

    임성합도     소요절뇌
    任性合道하야 逍遙絶惱하고

모든 집착심을 놓아 버리면 자기의 자성을 따라서 그대로 도에 합합니다. 이는 마치 구슬이 쟁반에서 구르듯이 힘 안들이고 마음대로 활동하여 아무런 장애도 없습니다. 소요(逍遙)란 한가롭고 자제한 기상을 말하는데, 일체 번뇌망상이 다 떨어졌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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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佛紀 2545. 8 .19일. 법보종찰 해인사

출처 : 유리산 무량사
글쓴이 : 천상천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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