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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我에 대한 一考察(Ⅱ) -有無와 是非를 중심으로- / 崔 晶 圭

화엄행 2009. 3. 27. 20:31

無我에 대한 一考察(Ⅱ) -有無와 是非를 중심으로- / 崔 晶 圭

2006/03/01 오 전 1:23

 

<백련불교논집 제9집 수록>

無我에 대한 一考察(Ⅱ)

-有無와 是非를 중심으로-


崔  晶  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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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박사, 고려대 강사.

「無着(Asa ga)唯識哲學의 硏究」,「無我에 대한 一考察」,

「우빠니샤드의 쁘라아나(Praana)와 아아뜨만(Aatman)」





       차 례

    1. 緖 論


    2. 緣起의 의미


    3. 緣起와 有·無 그리고 是·非

      1) 緣起와 有·無

      2) 緣起와 是·非


    4. 緣起와 無我

      1) 有無의 無

      2) 緣起的 無

      3) 無我와 實踐


    5. 結 論






1. 緖 論


불교철학의 여러 문제 가운데 無我(an tma)의 문제만큼 미묘한 것도 드물 것이다. 無我는 우빠니샤드(upani ad)의 아아뜨만론( tma-v da)과 두드러지게 대비되므로 주목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때문에 인도철학에서 불교의 불교다움 또한 無我 개념이 대변하고 있다고 보아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그만큼 불교철학에서 無我 개념이 가지고 있는 비중은 크다고 할 수 있다.

불교라고 하는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불교(buddh nu  sana)는 깨달음( budh)을 추구한다. 여기에서 깨달음의 내용, 즉 깨달음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는데, 이 문제와 관련하여 불교가 표방하는 無我論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우빠니샤드는 아아뜨만과의 合一을 성취함으로써 궁극적인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이에 반하여 불교는 無我를 주장하므로 외견상 우빠니샤드와는 확연하게 구별된다.

本稿는 우빠니샤드의 아아뜨만론과 불교의 無我論의 대비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불교의 無我論이 가지고 있는 의미구조를 파악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無我 개념을 이해하고자 한다. 無我의 의미를 천착함에 論者는 無我라고 하는 용어 가운데 특히 '無'字의 의미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無와 짝을 이루는 有, 그리고 有無의 문제와 별개로 볼 수 없는 是와 非를 중점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無我의 '無'자는 漢譯 과정에서 종종 '非'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이것은 無我의 '無'字에 매우 독특한 의미구조가 함축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전주곡의 성격을 갖는 것이라 할 수 있다.

無我의 의미를 살펴볼 때, 간과할 수 없는 것이 '緣起(pa icca-samupp da)'이다. 불교철학의 이론적 기반을 이룰 뿐만 아니라 불교의 특색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 緣起 개념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無我의 '無'字가 가지고 있는 의미 또한 緣起의 의미와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보여진다. 다시 말하자면 無我의 '無'字는 緣起의 맥락 속에서 나름의 독특한 의미구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본고의 論究는 緣起의 의미를 재음미하고 이를 바탕으로 無我의 '無'字가 가지고 있는 의미내용을 천착해 보고자 한다.



2. 緣起의 의미

불교철학의 중심에는 '緣起'가 자리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좀더 단순화시켜서 보자면, 緣起 개념에 대한 이해의 맥락이 불교철학의 흐름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수많은 緣起의 형식 가운데 어느 것이 緣起의 근본 취지에 잘 부합하고 그 의미를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인지 단언할 수는 없지만, 論者가 주목하여 論議의 자료로 삼고자 하는 것은 緣起의 公式 혹은 緣起의 定義라고 알려져 있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生起하므로 저것이 生起한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生하므로 저것이 生하며,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滅하므로 저것이 滅한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혹은 '이것이 生起하므로 저것이 生起한다'라고 하는 문장을 분석해 본다면, '이것이 있다'와 '저것이 있다'는 유형의 문장과 '……하므로'라는 연결사로 나누어진다. 좀더 간략하게 표현하자면 'A이므로 B'로 公式化할 수 있다. 'A이므로 B'라는 형식에서 緣起의 '緣'에 대응하는 것은 '……이므로'라고 하는 연결사이다. 즉 'A이므로 B'라고 하는 緣起形式 가운데 독립적이고 자립적인 의미를 갖는 것처럼 보이는 'A'나 'B'가 아니라 兩者를 연결시켜 주는 연결사인 '……이므로'가 緣起의 '緣'에 해당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緣起의 초점이 'A'나 'B'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의미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독립적으로는 쓰일 수 없는 연결사에 놓여 있다는 것은 고정적이고 독립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임의의 어떤 개념에 주목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이것과 저것에 의미를 두는 것이 아니라 이것과 저것의 連結關係에 비중을 두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思考의 방향전환이 필요함을 지적하는 것이다. 'A'나 'B'가 선행하고 다음에 연결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연결관계가 선행하거나 최소한 연결관계와 동시에 'A'나 'B'가 성립한다고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것은 연결관계에 의해서 'A'나 'B'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으로 'A'나 'B'는 連結關係에 의해서 그 의미가 부여되고 조작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말은 實體視되는 A나 B가 조작되어진 것이고 보조적인 것임을 지적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이러한 맥락에서 아아뜨만의 의미가 조작적이라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제시되는 形而上學的 實體는 모두 조작되어진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이 연결사 중심의 緣起的인 관점에서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연결사 중심의 緣起的인 思考에는 存在論과 認識論의 교섭이 있다.

문제는 緣起의 定義를 '……이므로'라고 하는 의미로 한정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적어도 우리말에서 '……이므로'라고 하는 연결사는 원인과 결과 즉 因果關係의 설정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緣起가 단순히 인과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굳이 緣起라는 용어를 사용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의문에 하나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南傳의 經典에 보인다.

위에 인용한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의 原文은 'imasmi  sati ida  hoti'인데 이 말은 狀況, 原因, 條件, 疑問 등의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따라서 緣起가 단순히 因果關係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緣起의 '緣'이 가지고 있는 의미내용은 이와같이 매우 미묘한 관계를 포함하고 있음을 빨리(pali)原文을 통해서 볼 수 있는데, 이것은 緣起를 同時的인 의미로 파악할 것인가 혹은 異時的인 의미로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야기시킨다. 그러나 그 표현의 포괄성에 의하건대 緣起는 同時性과 異時性을 모두 아우르는 것으로 보지 않으면 안된다. 異時性이라고 하는 것은 時間的인 관점을 보여주는 것이고, 同時性이라고 하는 것은 論理的 혹은 空間的인 시각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緣起는 이 양자의 관점을 모두 포섭하고 있으므로 매우 복잡 미묘한 의미구조를 나타낸다.

부연하자면, 緣起의 의미는 時空의 複合關係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그 속에는 因果關係뿐 아니라 狀況과 條件 등의 내용도 함축하고 있다. 이와 같은 복잡 다기함 때문에 緣起의 의미내용을 용이하게 포착하기는 어렵지만 '緣'이 연결사 중심의 사고를 보여준다고 하는 점과 時空의 복합구조를 지향한다고 하는 점에서 無我 개념의 이해를 위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오늘날 緣起를 대변하는 것처럼 되어버린 12支緣起 또한 위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12支緣起에서 눈여겨 두어야 하는 것은 順觀과 逆觀의 내용이다. 緣起의 定義 혹은 公式 속에서도 逆觀과 順觀의 방향성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12支緣起 가운데 그런 내용이 잘 표현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의미에서 보건대, 불교의 緣起說은 그 핵심적인 내용이 緣起의 '起'에 있는 것이 아니라 '緣'에 있다고 할 수 있으므로 '緣說'이라 略해도 무방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현실적인 '起'의 근원에 자리하고 있는 '緣'을 보고 그것을 바탕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것이다.



3. 緣起와 有·無 그리고 是·非

1) 緣起와 有·無


우선 有와 無라고 하는 말의 의미를 명백히 할 필요가 있다. 일상적인 의미에서 有는 '있다', 無는 '없다'는 뜻이므로, 그것은 어떤 것의 存在에 관한 言明이다. 특히 아아뜨만 같은 實體 개념과 함께 사용될 경우 有와 無는 일상적인 의미에서 어떤 것이 있다거나 없다는 뜻이 아니라 궁극적인 것의 有無를 말하는 存在論 즉 形而上學에 관련된다. 불교에서는 형이상학적인 論議를 戱論(pra-pa ca)이라 하여 무의미한 것으로 취급하고 있으며, 나아가 붓다의 無記 혹은 沈默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형이상학적인 논의 자체를 지극히 위험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이런 맥락에도 불구하고 불교가 형이상학적인 論議에 발을 담그지 않고 無我를 주장할 수 있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표면상 우빠니샤드는 有我論이고 불교는 無我論이므로 兩者는 형이상학적인 논의를 전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아뜨만이라고 하는 實體의 有無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므로 분명히 형이상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형이상학적인 논의를 배제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無我를 주장하는 자기 모순적인 불교철학의 입장은 어디에 근거하는 것일까?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緣起의 공식을 다시 한번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生起하므로 저것이 生起한다.

'이것이 있다'는 것과 '저것이 있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즉 '이것이 있다'는 말을 '이것이 없다'라는 말로 바꾸어도 된다. 2章에서 살펴본 것처럼 緣起의 공식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 있다거나 이것이 없다거나 하는 말이 아니라 이것과 저것의 連結詞이다. 그러므로 위에 인용한 南傳에서처럼 이것이 있다는 구절은 임의의 어떤 말로도 대치될 수 있다.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말은 동일한 차원에 속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있다'라는 말과 대비되는 '(生)起'라는 용어이다. 있다 혹은 없다는 표현은 空間的인 차원의 언급이다. 이에 반해 生起한다고 하는 말은 時間的인 의미를 보여준다. 여기에서 우리는 緣起가 함축하고 있는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어떤 것의 공간적인 포착은 고정되고 정지된 것이지만 시간적인 파악은 유동적인 움직임이다. 유동적인 時間과 정지된 空間은 서로 兩立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의의 어떤 것은 반드시 時空의 交點 속에 있다. 여기에서 있다거나 없다는 말은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時空의 交點을 바꾸어 말하자면 그것은 有無生死의 交點이다. 有無生死의 交點은 '삶'이다. '삶'은 左右上下로 펼쳐진 時空의 交點이기 때문에 있다거나 없다고 표현할 수 없고 生死로도 포착할 수 없다. 그런데 有無라고 하는 표현은 고정불변의 空間的 樣態이므로 時間的인 流動性이 배제되어 있는 편견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편견에 대한 지적이 바로 '無常'의 개념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모든 것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변화한다는 것은 시간 개념에 입각한 것이며 현실적인 입각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공간적 변화에 대한 파악이 없다면 시간 개념은 성립할 수 없으므로 시간 개념은 공간 개념과 관계없이 성립할 수 없다.

결국 불교가 주장하는 無我가 緣起的인 맥락에서 성립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有我에 대비되는 無我가 아닐 것이고, 그 경우에 無我의 '無'字는 필연적으로 독특한 의미구조와 내용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2) 緣起와 是·非


是와 非는 우리말로 각각 '이다'와 '아니다'에 해당한다. 是非는 有無와 달리 認識分別의 문제이다. 그러면 是非라고 하는 認識分別과 有無는 어떤 관계인가? 다음과 같은 언급 속에서 그 단서를 엿볼 수 있다.

世間의 사람들은 有나 無와 같은 二邊에 의해 顚倒되어 諸境界를 취하므로 마음이 計着된다.

一切의 諸法은 欲이 根本이다. …… 思想이 有가 된다.

有法은 무엇을 緣으로 하는가? 取法이 緣이 된다. …… 取法은 무엇을 緣으로 하는가? 愛法이 緣이 된다. …… 貪이 緣이 되므로 我見이 생겨난다. 我見이 생겨나면 取著이 있게 되고, 取著이 緣이 되어 마음은 散亂해진다. (마음이) 散亂해지므로 망령된 말을 하고 다투게 된다. …… 散亂은 무엇을 緣으로 하는가? 取著을 緣으로 한다. …… 取著은 무엇을 緣으로 하는가? 我見을 緣으로 하여 取著이 생겨난다.

위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有無는 愛取에 오염된 有無이다. 다시 말하자면, 愛取라고 하는 情緖에 오염된 有 혹은 無인 것이다. 그 정서는 認識으로부터 말미암으며, 그 인식의 근저에는 自我意識이 있다. 이와 같은 것은 12緣起의 順觀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是와 非가 가지고 있는 內的인 聯關性이다. 그 內的인 聯關性이라고 하는 것은 '緣'의 의미를 그대로 드러내 준다. 즉 'a이다'고 하는 것은 'a가 아니다'라고 하는 개념이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 표면상 전혀 무관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a는 a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非a까지도 의미한다. 왜냐하면 임의의 a가 a이기 위해서는 非a의 도움이 반드시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a는 a일 뿐만 아니라 非a이므로 a와 非a를 구분하여 각각에 독립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헛수고에 불과하다. 그 헛수고가 바로 是非라고 하는 認識分別이다. 환언하자면, '이다'와 '아니다'는 인식의 자기 모순적인 作爲 樣態에 지나지 않는다. 이 말은 有無라고 하는 존재의 근저에 분열된 인식이 자리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결국 有無와 是非의 문제 가운데 좀더 근원적인 것은 是非라고 하는 分別認識이다. 분별인식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有와 無는 거론될 수 없다. 이것은 無我를 존재의 문제로 볼 것이 아니라 인식의 문제로 환원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며, 緣起의 의미 또한 是非에 대한 고찰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 有我와 無我가 동일한 차원에 속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도 이와 같은 인식의 문제로 환원해 보면 저절로 드러난다. 즉 有我는 '我가 있다'는 것이고 無我는 '我가 없다'는 말이다. '있다'와 '없다'는 모두 어떤 것의 존재에 관한 분별인식이다.



4. 緣起와 無我

2章과 3章에서는 문제제기의 차원에서 有無와 是非의 문제를 緣起의 緣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재조망함으로써 정리해 보았다. 이를 바탕으로 無我의 '無'字가 자지고 있는 의미구조를 살펴보고자 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無我의 '無'字가 有我의 '有'字와 대립되는 개념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 내용상 동일한 차원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되므로 우빠니샤드의 아아뜨만론과 별다를 바가 없게 된다. 그러나 붓다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해서는 沈默으로 답하였다.
그 까닭은 同一한 地平에서의 대화는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오해까지도 불러일으킬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論者는 이런 맥락에서 불교의 無我論을 이해하고자 한다. 즉, 無我의 無는 有我의 有와 동일한 차원의 對句가 아니라 緣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또 다른 의미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1) 有無의 無


형식상 有와 無는 동시에 성립할 수 없으므로 有는 無가 아니고 無는 有가 아니다. 이 말을 정리해 보면 非有而非無, 有는 非無, 無는 非有가 된다. 有라고 하건 非無라고 하건 다를 바가 없으며, 無라 하든 非有라 하든 다름이 없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주 미묘한 내용이 숨겨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有 ---------- 非無
(2) 無 ---------- 非有
(3) 有而無 ---- 非有而非無 혹은 無而有 ---- 非無而非有

論者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3)의 경우이다. (1)과 (2)에 비추어 보건대 (3)의 非有而非無는 無而有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이 有而無를 굳이 非有而非無라고 하는 형식을 빌어 말하고 있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色은 無常하다. 無常은 苦이다. 苦는 非我이다. 非我라고 하는 것은 일체의 모든 것이 我가 아니고 異我가 아니고 我와 異我가 함께하는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은 것을) 如實하게 아는 것을 正觀이라 한다. 受想行識도 이와 같다.

有無와 같은 긍정적인 표현 속에는 부정의 의미가 나타나 있지 않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緣'의 의미 속에는 부정과 긍정이 함께하고 있다. 그런데 언어 속에 부정과 긍정이 함께 나타나는 경우는 '아니다'와 같은 언어형식을 구사하는 경우 이외에는 없다. 즉 '있다' '없다'와 같이 '……이다'라는 형식을 갖는 경우에는 초점이 하나밖에 없다. 그러나, '있지 않다' '없지 않다'와 같은 형식 속에는 '있다'와 '않다' 그리고 '없다'와 '않다'라고 하는 긍정과 부정의 양면이 동시에 드러난다. 바로 여기에 '緣'의 의미가 녹아 있는 것이다. '있다'와 '없다'라는 편견을 동시에 틀어막을 수 있는 방법은 둘을 동시에 부정하는 '雙非'밖에는 없다. 다시 말하자면 임의의 어떤 것 혹은 생각에 대한 肯定 즉 執着을 떨쳐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一次的인 淨化作用을 '非'가 하고 있는 것이다.

有我論인 우빠니샤드에 대하여 無我論을 내세운 것은 有無의 對峙局面에서 자연스레 '無'字가 含意하게 되는 '非有'의 부정적인 표현과 부정적 표현이 드러내는 '緣'의 의미를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無我論을 우빠니샤드의 아아뜨만론과 평면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무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즉, 有無라고 할 경우의 無는 有와 대비되는 동일 차원의 용어이지만 無我의 '無'字는 有無라 하여 有와 짝하여 사용되는 '無'와 다른 '非'字의 의미가 녹아 들어가 있는 복합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2) 緣起的 無


緣起的인 無가 有無의 無와 다른 含意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우선 고려해야 될 것은 有無와 緣起의 相異點이다. 有無는 相對的인 관점을 대변한다. 그러나 有無를 緣起的인 관점에서 보면 '相對的'인 것이 아니라 '相待的'인 것이다. 緣起의 '相待性'이 바로 有無의 각각에 함의되어 있는 非無와 非有이고 이러한 맥락에서 언급되는 것이 無我이다. 즉 緣起的인 의미에서 無我의 '無'字는 有無의 '無'와는 다른 것이다. 無我의 '無'字는 緣의 의미를 대변하는 것이므로 엄밀하게 말하자면 우빠니샤드의 아아뜨만론을 염두에 둘 경우에는 '非有'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겠지만, 우빠니샤드와는 다른 차원에서 有我와 짝을 이루는 無我論까지도 고려에 넣지 않을 수 없으므로 非有而非無我論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불교철학의 無我論은 단순한 有無 개념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非'의 개념에 의해서 여과된 無我論이다. '非'의 개념에 의해서 여과된 無我는 표현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無我라 하든 有我라 하든 다를 바가 없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有我 혹은 無我

(2) 非有我 혹은 非無我

(3) 有我 혹은 無我

(1)은 세간의 相對的인 관점을 보여주는 평면적인 有 혹은 無이고,
(2)는 세간의 相對的인 관점의 오류를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緣'의 개념에 의한 淨化過程이며 (3)은 '緣'의 개념에 의해서 여과된 후의 精製槪念이다. 따라서 (1)과 (2)의 相異點은 '非'에 의해서 확보될 뿐임을 알 수 있고, 그것이 다름아닌 '緣'이다.
좀더 부연하자면, 우빠니샤드의 아아뜨만론을 (1)의 有我論이라고 한다면, 불교의 無我論은 엄밀한 의미에서 (2)의 非有我의 의미에 의해서 뒷받침되고 있는 (3)의 無我論이다. 그러므로 (1)의 無我論과는 다른 의미내용을 갖는다. 일반적으로는 (1)의 有我와 無我를 모두 가정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3)의 有我나 無我는 非有我와 非無我의 의미를 모두 갖추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이상과 같이 불교의 無我論은 有無의 평면적인 구조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有無와 非有·非無의 입체적인 의미구조를 갖는 것이다.


3) 無我와 實踐


緣起的 無我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과연 무엇인가? 달리 말하자면 有無의 관점에서 성립하는 無我와 緣起的인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無我라고 하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만약에 有無槪念에 기반을 둔 無我와 緣起的인 無我 사이에 아무런 차이점도 없다면 緣起的인 無我를 주장하는 것은 그 의미가 반감될 뿐 아니라 의미가 없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우선 有無의 관점에서 보는 無我는 有我를 제외한 無我이다. 거기에는 진정한 의미의 평등관이 없다. 예를 들면 우빠니샤드의 아아뜨만론은 無我論을 배격한다. 특히 물질적인 외형을 일차적으로 배격하고 있다. 이에 반해 유물론자들(c rv ka학파와 같은 경우)은 물질적인 요소를 가장 궁극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이와 같은 思考類型에는 다음과 같은 공통적인 편견이 있다.

첫째, 有 혹은 無에 대한 궁극적인 肯定이 바탕이 되고 있다. 有의 경우에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無를 긍정이라 하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無이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無를 긍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否定에 대한 편견'이다.

둘째, 궁극적인 有 혹은 無를 주장하기 위하여 有나 無의 의미에 부합되지 않는 것은 제외시킨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의미한 것처럼 보이는 것에 대한 편견'이다.

그러면 이러한 편견이 緣起에서는 어떻게 수정되고 있는 것일까?
상대적인 각각의 有無 개념이 성립하기 위한 '緣'을 지적함으로써 有와 無의 독립성이 가지고 있는 결함을 나타낸다. 有는 非有의 도움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 어떤 것의 도움 없이 성립할 수 없다면 그것의 독립성은 허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즉, 有는 非有의 도움이 필요하고, 無는 非無가 없다면 성립할 수 없다. 有건 無건 그에 대한 긍정적 주장은 '非'라고 하는 부정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다. 이것이 긍정적 주장이 가지고 있는 결함이다.

다음으로 무의미한 것처럼 보이는 것에 대한 편견을 보면, 그것은 언어 영역에서 어미나 조사와 같은 것이 가지고 있는 역할을 도외시함으로써 생겨난다. 어미나 조사는 구체적인 상황에 적용될 때 나타나는 것이다. 辭典 속에 죽어 있는 낱말이 독특한 의미구조 속에서 변화됨으로써 살아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緣'이라고 하는 상황이나 조건 등이 죽어 있는 의미를 살아 있는 의미로 탈바꿈시키고 있는 것이다. 바로 삶의 구체성과 현실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편견은 不平等이다. 편견의 修正은 平等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므로 '緣'은 평등을 주장하는 것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緣生法은 즉 諸佛의 根本法이며 제부처의 눈이며 諸佛의 귀의처이다. 이때 아난 존자가 다음과 같이 찬탄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이 法을 말씀하시어 저와 여러 비구들로 하여금 모두 利樂을 얻도록 하시었습니다. …… 無受法은 즉 諸佛의 根本法이며 제부처의 눈이며 諸佛의 귀의처이다. …… 나는 너희들을 위하여 無我法을 말하겠다. …… 我見을 여의었으므로 平等見에 머물게 되며, 平等見에 머무는 자는 相에 평등한 (입장을 갖게 되며), 平等하므로 세간에 생겨나지 않으며, 생겨나지 않으므로 我生이 다하고, 梵行을 하였으며 해야 할 바를 다 마쳤으므로 後生을 받지 않는다.

平等觀은 梵行의 바탕이다. 위 글을 보면 我見에서 平等見으로, 平等見에서 梵行으로의 추이를 읽을 수 있다. 緣生法과 無受法 그리고 無我法은 모두 平等見으로 나아가게 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平等見이란 無我의 '無'字가 가지고 있는 '非'의 의미에 의해서 확보되는 것이다. 平等見과 관련하여 우리는 '空'이라는 용어를 거론할 수 있다.

空性은 處所가 없고 色相이 없고 想이 없고 본래 생기는 것도 없고 知見이 미칠 수 없는 것이고 取著을 여읜 것이다. 取著을 떠난 것이므로 一切法을 포섭하고 平等見에 머문다. 이것이 眞實見이다.

위 글을 통하여 緣生法이나 無我法의 다른 표현이 空性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空性이 取著을 떠난 것이므로 平等見에 머문다고 하는 것이나 我見을 여의었으므로 平等見에 머문다고 하는 것은 동일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空性이 緣生法, 無我法 등과 같은 의미를 갖는 것으로 平等見과 직결된다고 하는 것은 空性이 緣이나 無我에 함의되어 있는 '非'의 의미체계와도 연관성을 갖는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대목이다.

문제는 梵行과 해야 할 바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梵行이란 일반적으로 淫慾을 단절한 청정한 행위를 일컫는다. 그러면 해야 할 바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여기에서 다시 한번 '緣'의 의미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이 緣으로 말미암아 저 중생들은 서로서로 因緣이 되어 生起할 수 있다. …… 이 生法은 허망한 것으로 궁극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은 저것의 因緣이 되고, 저것은 이것의 인연이 된다. 그러므로 이것이나 저것은 허무하고 허망한 것이다. 그렇다면 청정한 행위가 무슨 의미가 있으며, 해야 할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 이러한 해석은 無我가 有無의 관점에서는 이루어질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緣起의 관점에서 본다면 再考의 여지가 있다. 이것의 성립은 저것과 연계되어 있고, 저것은 이것과 연계되어 성립한다. 다시 말하자면 이것이나 저것은 저것 혹은 이것이 없다면 허망한 것이 되어버린다. 저것이나 이것은 홀로 성립할 수 없다. 반드시 도움을 필요로 한다. 좀더 적극적으로 풀이하자면, 이것의 성립 기반은 저것이고, 저것의 성립 기반은 이것이므로 이것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저것을 적극적으로 세워야 하고, 저것이 온전하기 위해서는 이것이 확고해야 한다. 이러한 맥락을 우리는 앞에 인용한 다음과 같은 구절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法을 말씀하시어 저와 여러 비구들로 하여금 모두 利樂을 얻도록 하시었습니다.

여러 비구들이 利樂을 얻는 것은 바로 부처의 利樂이 되는 것이다. 利他行의 당위성을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梵行과는 다른 '해야 할 바'라고 할 수 있다. 無我의 '無'字가 함축하고 있는 '緣'의 의미가 실천의 당위성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緣起的인 의미의 無我가 이렇게 梵行과 모두의 利樂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은 '非'를 바탕으로 한 '無'字의 독특한 의미구조 속에서 찾아진다.




5. 結 論

本稿는 無我의 의미를 緣起의 '緣'이 가지고 있는 '非'자의 독특한 구조를 통하여 고찰한 것이다. 無我는 緣起를 바탕으로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緣起의 의미내용이 無我 개념 속에 녹아 있다고 볼 수 있다. 緣起의 '緣'자에는 '非'의 독특한 의미체계가 스며들어 있으며 그러한 의미구조는 우빠니샤드의 아아뜨만론과 대비되는 불교의 無我 개념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불교의 無我 개념은 有無 차원의 단순한 구조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有無를 폭넓게 아우르는 '非'의 체계에 의해서 승화된 無我 개념이며, 梵行과 모두의 利樂을 위하는 利他行의 이론적 기반이 된다. 따라서 불교의 無我論을 우빠니샤드의 아아뜨만론과 대비시켜 이해하고자 할 때에는 조심스런 접근을 해야 할 것이다.
無我 개념의 의미를 이론과 실천의 양면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理論的인 면에서 불교철학이 표방하는 無我의 '無'자는 有無의 '緣'이 가지고 있는 의미내용을 그대로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非有而非無라고 하는 '雙非' 즉 中道를 뜻한다. 사전적으로 표현하자면 '無'字는 有無와 같이 '有'에 대비되는 의미뿐만 아니라 緣起의 '無'와 같이 中道的인 의미의 '無'라고 하는 두 종류가 있다.

無我는 이론적으로는 중도적인 '空'의 의미를 나타내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면 宗敎的 實踐의 밑거름이 됨을 알 수 있다. '非'의 체계를 통하여 我見의 근거를 뽑아버리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利他를 향한 원만한 삶의 인격체를 새롭게 발견하고 있다. 이러한 인격체는 無我에 대한 이론적 성찰에 바탕을 둔 확고한 신념에 따르게 되는 종교적인 인격이라 할 수 있다.

결국 '非'의 체계에 의해서 뒷받침되지 않는 불교철학의 '無我'는 무의미한 것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고, 같은 맥락에서 有無 등의 取著을 제거하기 위한 '沈默'의 방법 또한 헛된 해프닝에 그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參 考 文 獻


『佛說大生義經』, 大正藏 제1권.

『佛說法印經』, 大正藏 제2권.

『雜阿含經』, 大正藏 제2권.

『中阿含經』, 大正藏 제2권.

崔晶圭,「無我에 대한 一考察」,『白蓮佛敎論集』제2집.

A. K. WARDER, Introduction to PALI, London : PTS, 1974.

『Samyutta-Nik ya』, P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