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의 향기 ♣>/♧ 고전의 향기 ♧

조선시대 과거시험

화엄행 2009. 10. 20. 20:40

함께 떠나는 역사산책 - 조선시대 과거시험


                                                       
산술적으로는 수험생만의 일이어야 할 입시가 전국민적 행사처럼 된 이유는 입시가 인생관문의 역할을 하기 때문인데, 그 뿌리는 조선시대 '과거'에서 찾아볼수 있다. 지금은 매년 입시를 치르지만 조선에서는 3년마다 돌아오는 식년(式年 : 子, 卯, 午, 酉)에 과거를 치렀다. 물론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 치르는 부정기 시험도 있었다. 그러나 그 경쟁은 지금의 대학입시보다 훨씬 치열했다.

조선조 과거의 종류는 소과, 문과, 무과, 잡과의 네 종류가 있었는데, 뭐니뭐니해도 과거의 꽃은 문과였다. 문과 을시를 위해서는 우선 생원시와 진사가 되는 것도 초시 복시 두단계를 통과해야 했다. 훗날 생원은 가벼운 칭호가 되었지만 조선 생원시의 고시과목은 '사서의(四書疑)' 1편과 '오경의(五經疑)' 1편으로서 사서와 오경을 모두 알아야 붙을 수 있었다. 진사는 이보다 한 차원 높아서 부(賦), 고시(古詩), 명(銘), 잠(箴)을 알아야 했다.

'경국대전'에 따른 생원, 진사, 초시 합격자 정원은 서울의 각각 200명과 경상도 100면등 생원 진사 모두 700명이었다. 생원, 진사, 초시에 급제한 유생들은 식년 2월이나 3월 서울에서 복시를 치러야 했다. 복시의 합격정원은 생원, 진사 100명씩으로서 7대 1이지만 전에 떨어진 사람들도 응시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경쟁률이 치열했다. 생원 진사시도 1등 5인, 2등 25이, 3등 70인의 등급이 있었는데, 국가에서는 길일(吉日)을 택해 궁궐뜰에서 합격자들을 모아놓고 합격증인 백패(白牌)와 주과(酒果)를하사하는 잔치를 베풀었다. 이 잔치가 끝나면 급제한 듯 시내를 유가(遊街)하며 한껏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이는 기껏해야 문과(대과) 급제를 위한 첫 관문을 통과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경쟁은 이제부터였다. 생원, 진사시 합격자들은 성균관에 들어가 대과공부를 했는데, 성균관에서는 출석점수를 중시했다. 성균관 출석은 식사 참석 여부로 알 수 있었는데, 성균관 식당에 비치된 도기(到記)라는 출석부에 점을 찍는 것이었다. 아침, 저녁 두 끼를 참석해야 1점을 주었다. 관생들은 원칙적으로 300점의 원점(圓點)을 맞아야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는데, 300점 이상자가 시취 정원인 50명에 미달할 경우 50점 이상자에게도 응시 저격을 주었다.
성균관 생활은 시험의 연속이었다. 성균관 유생들과 지방 유생들은 절일제(節李製)라는 시험을 치렀는데 공식적인 시험만 1년에 최소 네 번있었다. 음력 정월(正月) 초7일에 치르는 인일제(人日製), 삼월 초사흘날에 치르는 삼일제(三日製), 음력 7월 칠석에 치르는 칠석제(七夕製), 9월 9일에 치르는 구일제(九日製) 도는 중양제(重陽製)가 그것이다. 황감 사제(黃減賜製)라는 것도 있었는데 제주도에서 황감, 즉 감귤이 진상되면 이를 성균관과 사학(四學)의 유생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 기념으로 치르던 시험이었다.
절일제에서 수석할 경우 직부 전시(直赴殿試)의 특혜를 주었다. 이는 임금이 친림하여 치르는 전시(殿試)에 나갈 수 있는 자격을 주는 것을 뜻하는데, 이 전시에서 급제해야 비로소 과거는 끝나는 것이었다.

22세 때인 1783년 성균관에 들어간 정약용은 여러 차례 절일제에 급제해 정조로부터 책과 벼루 등을 하사받았으나 그가 직부전시에 나갈 수 있었던 때는 28세 때인 1789년이었다. 정약용 같은 수재도 성균관 입학에서 급제까지 만 6년이 걸렸으니 나머지 사람들은 말할 것이 없었다.
이처럼 급제가 어렵다뵈 많은 부정행위가 많았다. 시험장에 서책을 갖고 들어가는 것을 협서(狹書)라고 하는데 발각되면 2식년(6년) 동안 응시자격이 박탈되었다. 서책을 지닌 수종인(隨從人)을 입장시킬 경우 데리고 온 유생과 수종인은 수군(水軍)에 편입시켰다. 대리시험을 쳐주는 차술(借述)도 있었는데 이 경우 장(杖) 1백에 도(徒) 3년의 중형이 내려졌다. 응시자는 자신과 4대조까지 조상을 기록한 피봉과 답안지를 제출해야 했는데 피봉과 답안지는 부정을 방지하기 위해 나누어 채점했다. 채점을 마치면 피봉을 붙이는 것이 절과로서 글자 그대로 남의 급제를 도둑질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여러차례 과옥(科獄)이 발생하기도 했다.

과거시험이 이처럼 어렵다보니 오늘날의 수능이나 논술예상문제집처럼 과거의 출제유형을 분석해 예상문제를 뽑아놓은 과거 예상문제집까지 만들어졌다. 이를 '초집(抄集)'이라고 했는데, 여기에는 기출제된 시를 모아놓은 '과시(科詩)', '표전(表箋)' 문제 유형에 대한 '과표(科表)', 우수한 급제 답안지를 모아놓은 '선려(選儷)' 등이 그것이다.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