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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학의 실천행에 대한 논평 - 정순일(원광대).

화엄행 2009. 3. 27. 20:18

2006/02/24 오 전 12:31

 

[화엄학의 실천행]에 대한 논평]


정 순 일(원광대 원불교학과 교수)

 



깨달음과 자비의 실천이라는 두 가지 테마는 불교를 지탱해 온 軌轍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화엄도 이 두 가지의 길 위에 존재하는 것이라 할 때 화엄학의 실천행은 충분히 논의되어야 할 대상이라고 본다. 그러나 화엄 자체가 실천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바라볼 때 초점을 맞추기가 쉽지 않으며, 따라서 종래에 화엄학에 대한 철학적인 측면의 접근은 다양하게 이루어진 반면 실천행에 관한 연구가 거의 행해지지 않았던 점도 본 연구의 가치를 높여주는 일이라 하겠다.
이교수님께서는 '화엄학의 실천행'이라는 테마에 대하여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고 있는데 첫째는 {화엄경}에서 말하는 실천행과 화엄학자들이 말하는 실천행이 그것이다. 이는 어떤 면에서 살펴 본다면 인도적 사유와 중국적 사유로 대별할 수 있을 만큼 재미있는 차이를 찾을 수 있겠으나, 동시에 그 본질을 제대로 드러내는 것이 무척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겠다.
화엄학자들의 실천행에 대해서는 龍樹를 비롯하여 중국화엄의 初祖로 불리우는 杜順의 관법을 중심으로 실천행을 조명하고 있다. 이교수는 화엄학자들의 실천행을 소략하게 다루고 있는데 이는 화엄에서의 관법이 禪의 禪觀이나 天台의 止觀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실천행이 약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이어서 {화엄경}에 나타나 있는 실천행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주로 보살의 실천행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유심의 극치를 다루고 있는 {화엄경}에서의 부처는 비로자나불이며 이를 구상화시켜 보신불적인 해석을 하고 있는 점이 {화엄경}의 특징인데, 그 비로자나불이 보살행을 닦을 때에 세계해의 티끌수와 같은 행원을 닦은 것으로 인하여 비로자나불을 완성하였다고 본다. 그리하여 보살의 마음이 청정하매 국토가 청정하고 보살이 불도를 이루매 온 국토가 비로자나 영토로 화한다는 화려한 결말을 소개하고 있다.
또한 이교수는 {화엄경}의 실천행을 "원을 바탕으로 한 일상생활에서의 마음가짐과 [명법품]에서 말하고 있는 청정십바라밀행으로 요약하고 있다. 출세간보다 세간의 일상생활에서의 마음가짐이 중요하며, 보시를 중심으로 한 보살행이 중요함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이는 실로 오늘의 불교자들에게 경종이 되는 매우 중요한 가르침으로 생각되며 이를 끄집어낸 이교수의 탁견이 돋보인다. 다만 {화엄경}을 대표적인 자력교로 분류한 것은 다소 무리한 규정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이처럼 중요한 가르침으로 요약해 주신 이교수님의 안목에 감사드리면서 몇 가지 본인의 입장에서 생각되는 화엄의 실천행에 있어서의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화엄경}에서의 실천행은 크게 두 가지 점에서 접근할 수가 있다고 보인다. 첫째는 十地의 실행을 통한 단계적 실행이며, 둘째는 [입법계품]에 나타나고 있는 善財의 구도편력과 연관지어 드러나고 있는 普賢行이 그것이다. 또한 정토와의 관련성도 생각해 볼 수 있는 테마이다. 다음으로 화엄종의 사상을 통해본 실천행은 저 유명한 華嚴觀法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십지의 수행에 대해서 이교수는 논문의 비교적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다루고 있으며 단지 십지 뿐만이 아니라 十信·十行·十廻向까지 아우르는 광범위한 행의 차제를 고찰하고 있다. 그러나 그 결론부분에 있어 십지의 단계적인 실천과 연관되는 부분이 적고 끝을 '청정십바라밀'로 요약하고 있어 십지사상 자체의 체계적인 제시는 미흡한 느낌이 없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십지사상은 대승불교의 근간을 이루는 사상으로써 불교교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며 실천적 성격이 강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바라밀'과 연관은 깊되 이로써 요약되기는 어려운 성격을 지니고 있으므로, 십지사상 자체를 {화엄경}의 실천행의 중심으로 위치지울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보현행은 般若譯 {40화엄}의 맨 마지막에 나오는 [입불사의해탈경계보현행원품]에 나오는 것인데 이는 {60화엄}이나 {80화엄}의 [입법계품]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보현행원품]에서는 보현의 10대행원이 출현하고 있는 점으로 유명하다. 보현보살이 모든 보살들과 선재동자에게 말한다. "선남자여 여래의 공덕은 가령 시방에 계시는 일체 모든 부처님께서 불가설 불가설 불찰극미진수겁을 지내면서 계속 말씀하시더라도 다 말씀하지 못한다. 만약 이러한 공덕문을 성취하고자 하거든 마땅히 보현행원을 닦아야 한다." 그 열가지는 禮敬諸佛願·稱讚如來願·廣修供養願·懺悔業障願·隨喜功德願·請轉法輪願·諸佛住世願·常修佛學願·恒順衆生願·普皆廻向願 등이다. 
이상의 열가지 원의 면면을 살펴 보면 보살이 부처를 사모하고 부처되기 위한 간절한 실행을 다짐하는 내용으로 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한 예를 들어 예경제불원에서 보현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하면 나의 예배하고 공경함도 다하려니와 중생계 내지 중생의 번뇌가 다함이 없으므로 나의 예배하고 공경함도 다함이 없어 생각생각이 상속하여 끊임이 없되 몸과 말과 뜻으로 짓는 일에 지치거나 싫어하는 생각이 없다."
실상 이 사바세계에서 중생이 다할 날은 없을 것이므로 보현의 행원도 영원할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영원히 묵묵히 행함'이 보현의 원이라면 이는 화엄행의 중요한 면이라 할만하지 않은가?
보현행원은 {60화엄} 이후에는 [입법계품]으로 증광되는데 이 [입법계품]은 중각강당회의 마지막이며 {화엄경}의 結分이다. 이는 {화엄경} 전체의 4분의 1을 넘는 매우 방대한 분량으로, 보현의 행을 선재라는 구도자를 앞세워 구체화시킨 품이다. 이를 佛果에 대한 證의 부분으로 파악하는 것이 대체적인 중국 화엄종 학자들의 시각이나, 李通玄만은 이와 대비되는 華嚴經觀을 지니고 있다.  즉 그는 삼분과설에 있어서 제1 [세주묘엄품]을 서분에, 마지막 [입법계품]을 정종분에, 그리고 [여래출현품]을 유통분에 배당하는 독특한 분과설을 주장하여, 行을 화엄의 주제로 세우고 있는 특색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통현의 시각으로 본다면 화엄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는 바로 '행'인 것이다.
이 [입법계품]은 바로 보살도를 말한 것인데 현실을 떠난 열반이 아니라 세간에 있으면서도 세간을 초월한 보살도의 행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법계는 비로자나불의 경계를 말하며 여기에 들어가는 데에는 보현의 행과 문수의 지혜가 필요한데, 그 주객 양자의 사이에 실제로 활약하는 수행자의 대표로 선재동자를 구상화시켜 구법의 여정을 시작하는 것이다. 선재로 의인화 된 보살의 행원은 53인의 선지식을 역방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를 학자에 따라서는 52위의 계위에 배대하여 말하기도 한다. 이들 중에는 보살을 비롯하여 뱃사람·장자·의사·외도·비구니·여인 등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이는 모든 차별을 여읜 가운데 모든 차별에 대한 大悲의 行願을 상징하고 있다 하겠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대승의 이상이며 구도자의 구도의 역정이다.
이교수는 보현의 행원에 대하여 보살행이라 하여 간략히는 다루고 있으나 화엄의 행이라는 차원에서 본다면 이 부분은 보다 심도있게 다루어져야 할 테마라고 생각된다.



화엄에서 해결해야 할 다른 하나는 정토와의 관련이다. 정토는 실천불교의 대표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화엄과 정토의 관련은 화엄교학에 있어서 핵심이 되어 오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화엄의 실천행을 다루는 상황에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테마라 하겠다.
[보현행원품]에서는 보현의 원을 가지며 수지독송하면 일체 장애가 없어진다 하였고 극락세계에 왕생하게 된다고 말하는데 그에 대하여 보현은 다음과 같은 게송을 외우고 있다.

원하오니 이 목숨 다하려 할 때          願我臨欲命終時
모든 업장 모든 장애 다 없어져          盡諸一切諸障碍
찰나중에 아미타불 친견하옵고          面見彼佛阿彌陀
그 자리서 극락세계 얻어지이다.        卽得往生安樂刹

주지하는 바와 같이 화엄의 교주는 비로자나불이다. 그러나 경에서는 때로 보신인 노사나불로 나타나 역할을 하기도 하는데, 이 [보현행원품]에서는 아미타불과의 연관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부분이 嚴淨一致의 사유가 태동하게 된 근원이 되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화엄의 제 2대조사인 智儼은 문도들에게 "나의 이 幻軀는 緣을 좇아서 無性이 되고, 이제 마땅히 정토에 가서 다음에 연화장세계에 노닐지니, 너희들은 나를 따라 이 뜻을 함께 할 지어다."라고 말하고 있다.
義相이 撰한 [백화도량발원문]에 대하여 학자에 따라서는 진찬여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그의 정토사상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의 정토사상은 지엄의 맥을 이은 것이며, 그가 세운 부석사에 아미미타상을 본존을 하고 있는 점이라든지 화엄십찰이라 불리우는 사찰에서도 비로자나불 대신에 아미타불을 모셔놓은 곳이 적지 않은 것도 화엄과 정토의 관련성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화엄의 행이라는 테마에 정토관련 접근이 필요하다는 제안을 하고 싶다.
이교수는 발표문에서 용수의 견해를 빌어 {화엄경}과 염불의 관계를 제시하고 이는 하열인을 위한 방편이지 대승의 정도는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화엄의 조사들이 정토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점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것은 화엄의 행이라는 주제를 다룰 때에 정토의 문제는 어떻게든 해결되어야 할 테마라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화엄종의 觀法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실천'이란 대체로 '이론'에 대비되는 용어로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불교적 실천이란 단지 이론에 대비되는 의미만이 아닌, 이론을 산출해 내는 智(praj  )를 안에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실천은 智에 대립되는 것이 아니고 智 그 자체가 실천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불교적 이론을 敎義라 하고 불교적 실천을 止觀이라 한다면 '敎卽觀'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중국 화엄종의 초조라 일컬어지는 杜順의 {法界觀門}을 살펴보자. 법계관문은 眞空觀·理事無碍觀·周遍含容觀의 삼관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점차 고도의 추상성과 사변성을 더해가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에서 진공관만을 살펴보면 진공관은 4구로 나뉘고 이는 다시 10문을 형성하고 있다. 4구는 會色歸空觀·明空卽色觀·空色無碍觀·泯絶無寄觀으로 구성된다. '색을 회통하여 공으로 돌아감'은 색즉공의 공관적 체험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으로 볼 때 이들 관법은 中觀的인 베이스를 깔고 중국적인 관행으로 변화한 것으로 이해된다.
물론 화엄의 관법은 예를 들면 {三聖圓融觀}처럼 진리의 觀相으로 생각할 수 있는 관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 모두가 철저한 공관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점에서 본다면 화엄의 관법은 깨친 경지에서 나타나는 진리의 관상정도로 치부할 수는 없는 것이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