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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 형성에 있어서 불교의 역할에 관한 연구 - 정성희

화엄행 2009. 3. 27. 20:23

성리학 형성에 있어서 불교의 역할에 관한 연구 - 정성희

2006/02/24 오 전 1:14

 

성리학 형성에 있어서 불교의 역할에 관한 연구


작성자 : 정성희
작성일자 : 1995년
소속대학교 : 백련불교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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性理學 形成에 있어서

佛敎의 役割에 관한 硏究


鄭  聖  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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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 대학원 유학과 박사과정.
「周濂溪思想의 人性論的 硏究」(1994)



Ⅰ. 序 論

Ⅱ. 性理學 形成期 思想界의 狀況

   1. 唐·宋代 儒學界의 狀況

   2. 唐·宋代 佛敎界의 狀況

Ⅲ. 佛敎와 性理學 形成의 聯關性

   1. 性理學者들의 排佛論

     1) 韓愈와 李 의 排佛論

     2) 二程의 排佛論

   2. 初期 性理學 思想에 나타나는 佛敎의 影響

     1) 韓愈·李  思想에 나타나는 佛敎의 影響

     2) 周濂溪 思想과 佛敎

     3) 二程 思想에 나타나는 佛敎의 影響


Ⅳ. 結 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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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序 論


中國은 세계 4대 문명 발상지 중의 하나로서 매우 일찍부터 수준 높은 문화를 발달시켜 왔으며, 그에 따라 다양한 思想들이 꽃을 피워 왔다. 이러한 思想들은 政治的 혼란기인 春秋戰國시대를 거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儒家와 道家思想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 가운데 儒家思想은 禮와 仁을 강조하는 人文性이 강한 思想으로, 儒家의 체계를 세운 孔子를 비롯한 孟子·荀子 등은 모두 자신들의 理念을 政治라는 수단을 통해 실현하려고 노력하였고, 道家思想은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는 방법으로 모든 것을 自然에 맡기는 방법을 說하였다. 이 儒家와 道家思想을 비롯한 中國 傳統의 思想들은 모두 宗敎性이 희박하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한편 中國人들은 자신들의 文化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자부심은 '華夷觀'으로 표출되었고, 자신 이외의 모든 民族과 文化를 오랑캐, 오랑캐 문화로 치부하는 이러한 華夷觀은 다른 文化에 대하여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게 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外來文化의 수용에 적극적일 수가 없었고, 밖으로부터 中國에 들어온 다른 문화들은 중국에 뿌리를 내리기가 어려웠다. 그리하여 중국에 들어온 外來文化는 周邊文化로 머물거나, 中國 固有의 문화에 同化되어 본래의 모습과는 다른 형태로 자리잡거나 할 수밖에 없었다. 즉 본래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서는 중국에 성공적으로 뿌리내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前者의 대표적인 예가 이슬람교라면 後者의 대표적인 예는 佛敎라고 할 수가 있겠다. 이와같이 佛敎는 중국에 성공적으로 土着化한 대표적이고 거의 유일한 外來思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토착화 과정에서 佛敎는 중국의 전통 사상과 많은 교류를 주고받았다. 즉 초기에는 排他性 강한 토양에서 뿌리를 내리기 위해 중국 전통 사상과의 同質性을 강조하며 道家 등으로부터 滋養分을 흡수하였고, 어느 정도 뿌리를 내린 후에는 중국의 혼란한 정치 국면과 儒家의 사상적인 쇠퇴를 틈타 비약적으로 성장해 나갔다. 이 성장 과정에는 혼란하고 불안한 상황에서 기댈 곳이 없는 일반 백성들에게 정신적인 안식처를 제공할 수 있었던 宗敎性이 큰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중국의 토양에 굳게 뿌리를 내린 후에는 중국의 思想界를 주도하며 逆으로 중국 전통 사상에 자양분을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儒·佛·道 三家의 자연스러운 교류가 이루어졌는데, 이 지속적인 三家交流의 결과로 탄생한 것이 性理學이다. 즉 性理學은 儒學者들에 의해 성립되었고, 그 儒學者들은 예외 없이 佛敎로부터의 영향을 부인하였지만, 性理學이라는 新儒學은 佛敎思想으로부터의 영향이 아니었다면 성립될 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사실은 淸代 이후부터 일부 제기되기 시작하였고, 오늘날에 와서는 거의 모든 學界에서 공인되고 있는 사실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정에도 불구하고 性理學과 佛敎의 관련성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는 매우 드문 것이 사실이며, 특히 우리 나라의 儒學界 내에서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佛敎나 性理學 연구 모두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다. 왜냐하면 佛敎와 儒學과의 관계에 대한 연구가 없이는 佛敎가 중국에 도입되고 나서의 中國化 과정과 발달, 쇠퇴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할 수가 없으며, 儒學측에서는 儒學의 발달, 특히 性理學 形成의 원인과 근거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儒·佛·道 三家 교섭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는 性理學에 나타나는 佛敎의 영향에 대해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性理學 형성의 발판을 마련한 唐代의 韓愈와 李 에서 北宋의 周濂溪·程明道·程伊川의 排佛의 입장을 살펴보고, 이들의 佛敎와의 交流, 그리고 이들의 사상에 나타나는 佛敎의 영향을 분석해 내려고 한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어느 性理學者의 어느 글이 佛敎의 무슨 經典의 어느 구절과 흡사하다는 그러한 비교보다는, 儒學이 佛敎 사상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과, 性理學 사상 전반에 나타나는 영향을 개괄해 보는 데 중점을 둘 것이다. 이러한 연구 방향이 본고에서 의도하는 佛·儒 교섭의 결실로서의 性理學이라는 논점에 합당하리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Ⅱ. 性理學 形成期 思想界의 狀況

1. 唐·宋代 儒學界의 상황


儒學에 佛敎가 어떤 작용을 하여 性理學이 탄생했는지를 알아보려면 먼저 당시의 儒學과 佛敎界의 상황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本章에서는 性理學이 형성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된 시기인 唐代와, 性理學이 형성되고 완성된 시기인 宋代의 儒·佛界의 상황을 간단히 살펴보려고 한다.

儒學은 春秋시대 孔子에 의해서 학문으로서의 체계가 잡힌 이래 戰國시대의 孟子와 荀子에 의해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 인간의 性論을 중심으로 전개된 孟子와 荀子의 이론은 儒學이 발전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중국을 통일한 始皇帝는 法家思想으로 나라를 다스리며 다른 모든 사상을 禁하고 그 서적들을 불태웠는데, 儒學은 이 焚書坑儒로 인하여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다. 즉 占書로 분류된 {周易}을 제외한 거의 모든 經典이 불타 없어지고, 연구를 계속할 수가 없게 됨으로써 그 맥이 끊기게 된 것이다. 그 이후 漢나라가 들어서고 武帝가 儒學을 國敎로 정하고 儒家 이외의 다른 사상들은 배척하는 소위 '獨尊儒術 罷黜百家'의 命을 내림으로써 儒學은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러나 漢代의 儒學은 秦의 焚書坑儒를 당해 散滅된 經典을 복구하는 데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經學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게다가 經學에서도 今文學者와 古文學者의 다툼이 생기게 되면서 哲學的인 연구는 이루어질 틈이 없었고 經學만이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漢나라 말기까지 계속되었고, 魏晉 南北朝시대와 隋나라를 거쳐 唐나라에까지 이어졌다.

唐나라 때는 이러한 經學의 혼란상을 정리하기 위하여 孔穎達에게 명령을 내려 {五經正義}를 편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經에 대한 여러 가지의 해석이 하나로 통일되었고, 이것은 곧 科擧取士의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이것으로 일단 經學上의 혼란은 정리되었으나, 儒學者들은 더 이상 經에 대한 연구를 하지 않고 {五經正義}의 註釋을 암송하기만 하였으므로 經學은 점점 경직되어 갔다. 당시 儒學界의 이러한 哲學性의 결핍과 經學의 경직은 많은 儒學者들을 思想的으로나 宗敎的으로 당시 한창 번성하고 있던 佛敎와 道家 쪽으로 눈을 돌리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佛敎와 道家의 지나친 번성은 社會·經濟的으로 많은 문제들을 야기시켰고, 일부 儒學者들의 격렬한 비판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排佛은 극히 일부에만 한정된 것이었고, 대부분의 儒學者들은 佛敎의 사상, 특히 당시에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고 있었던 禪學에 傾倒되어 있었다. 한편 排佛의 선봉에 섰던 사람들은 佛敎에 맞설 수 있는 儒學의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의 佛敎측의 중국화 노력으로 인하여 佛敎는 이미 사회 곳곳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고, 이러한 현상은 儒學界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즉, 漢唐 이후 佛敎와의 교섭으로 사상적인 만족을 얻고 있던 많은 儒學者들은 이미 은연중에 佛敎의 영향을 깊이 받고 있었다. 이러한 사상적인 분위기에서 唐이 망하고 오랜 혼란이 계속된 이후 宋이 다시 중국을 통일하였다.

오랜 혼란 후의 통일 왕조인 宋은 王權의 강화와 中央集權 강화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는데, 이러한 政治的인 수요에 적합한 사상은 政治倫理的인 성격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儒學이었다. 송 왕조의 허약함을 느끼고 있던 당시의 儒學者들도 이전과는 달리 시대와 사회에 대해서 책임의식과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어 현실 참여에 대한 강한 욕구가 있었다. 이러한 外的인 조건 외에 學問的으로도 佛敎와 道家의 영향을 받아 儒學者들은 사상적으로도 성숙해 있었으므로, 儒學은 內的으로나 外的으로 다시 한번 부흥할 수 있는 호기를 맞은 셈이었다. 이러한 조건 아래서 儒學은 점점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즉 慶歷(1041∼1048) 이후 唐代부터 經典解釋의 표준이었던 {五經正義}에 대한 不信의 풍조뿐만 아니라, 經 자체에 대한 전반적인 불신의 풍조가 일어났으니, 즉 옛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추종의 경향이 사라지고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고 창조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된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학문적 바탕 위에서 생겨난 것이 中國史上 가장 완성된 思想的 성취이며, 오랜 儒·佛·道 三敎 교섭의 결과물인 性理學이다.



2. 唐·宋代 佛敎界의 상황


後漢 明帝 때(AD 67년)에 중국에 들어온 佛敎는, 전래 이후 약 150년 동안은 하나의 사상으로서 사회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儒學이 이미 官學으로서 자리잡고 있던 당시에 전래된 佛敎가 체계적인 것이 아니었고, 言語상의 소통 문제도 있었으며, 또 중국인 특유의 華夷觀으로 인한 냉대 등이 복합적 원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佛敎 전래 후의 약 150년간은 당시 方士 信仰과 결탁되어 하나의 祭祀儀式 역할만을 하였다. 이러한 佛敎가 중국에 뿌리를 내리는 데는 많은 노력과 오랜 세월이 필요하였다. 이 과정에서 중국의 佛敎는 魏晉 南北朝時代 이후 政治 指導者의 입장에 따라서 그 위상이 크게 달라졌는데, 南朝 梁나라 武帝의 奉佛과 北朝의 魏와 周나라 武帝의 廢佛이 좋은 예이다. 이후에도 정치 지도자의 奉佛과 廢佛은 여러 차례 일어났고, 그때마다 佛敎는 크게 부흥하거나 타격을 받거나 할 수밖에 없었다.
民族的·文化的 자긍심이 누구보다 강한 중국에서 佛敎는 여러 험난한 고비를 거쳐 隋唐代에 들어오면 어느 정도의 궤도에 오르게 된다. 즉 隋唐代에는 三論宗과 天台宗, 淨土宗과 華嚴宗, 律宗, 法相宗, 禪宗 등의 여러 종파가 성립되고, 密敎가 전래되기도 하였다. 이 가운데에서 儒學에 영향을 주어 性理學이 성립되는 데 공헌을 한 것은 華嚴宗과 禪宗이다.

이 중 특히 南朝의 梁나라 때(527년) 중국에 건너온 菩提達磨에 의하여 도입된 禪宗은 慧可·僧璨·道信·弘忍으로 이어지다가 이후 神秀의 北宗禪과 慧能의 南宗禪으로 나뉘었는데, 禪宗은 慧能에게서 비약적인 발전을 보게 되었고, 또 그의 門下에서 뛰어난 제자들이 많이 배출되면서 南宗禪이 禪宗을 대표하게 되었다. 唐 말엽에 이르러 禪宗은 曹洞宗·法眼宗·雲門宗· 仰宗·臨濟宗의 五家로 나누어지고, 宋初에 臨濟宗에서 楊岐派와 黃龍派가 갈라져 나옴으로써 七宗을 이루게 되었다. 中唐 이후 禪宗은 크게 발전하면서 佛敎를 대표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현상은 바로 불교의 土着化, 즉 中國的 佛敎의 형성과 완성으로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中國的 佛敎라고 할 수 있는 禪宗은 중국인의 취향에 잘 맞아 사회 전반의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퍼져 나갔으며, 특히 당시 경직화된 儒學에서 철학적인 만족을 얻을 수 없었던 지식인 계층에게 환영을 받아 널리 퍼져 나갔다. 당시 佛敎의 기세는 격렬한 排佛論者인 韓愈의 글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는 [原道]에서 당시 사상계의 상황을 말하기를

道家가 말하기를 '孔子는 우리 스승의 제자이다'라고 하고, 佛家의 사람들은 '孔子는 우리 스승의 제자이다'라고 한다.

孔子의 學問을 하는 사람들도 그 말을 익혀 듣고 그 허탄한 말을 즐겨 스스로를 작게 여겨 또한 말하기를 '우리 스승 또한 일찍이 老子와 釋迦의 제자였다'고 한다. 이러한 것을 말로만 하지 않고 글로 쓰기도 하였다.

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것은 당시 儒學者들의 佛敎에의 傾倒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글이다. 그러나 佛敎와 寺院의 비대화는 社會的·經濟的으로 여러 가지 문제를 낳아 일부 新興 地主階級에 속하는 儒學者들에게 맹렬한 비판을 받기도 하였는데, 韓愈와 李 가 대표적인 사람이다. 이들의 비판은 뒤에서 따로 논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도 하나의 社會潮流가 되어버린 佛敎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漢唐代의 儒學에서 논의되지 않던 性과 道를 말하기 시작하였고, 여기에서부터 性理學의 싹이 트기 시작하는 것이다.

佛敎는 唐末 五代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그 세력이 약화되었는데, 宋이 들어서면서 太祖 趙匡胤의 정책에 힘입어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唐代의 佛敎를 계승하고 유지하는 데 그친 것이지 더 이상의 발전은 없었다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宋代에 활약한 宗派들은 禪宗, 天台宗, 律宗, 華嚴宗, 淨土宗 등이었다. 이 가운데에서 가장 융성한 것은 唐代와 마찬가지로 禪宗이었다. 그러나 禪宗 五家 가운데에서도 雲門宗과 臨濟宗만이 法脈을 이어 활약하였는데, 宋初에는 이 중에서도 雲門宗의 활약이 특히 두드러져 雲門宗의 明敎大師 契嵩은 {原敎論}, {報敎編} 등을 지어 儒·佛·道 三敎의 調和說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雲門宗도 南宋代에 이르면 희미해지고 臨濟宗이 독보적인 존재가 된다. 禪宗에 이러한 여러 종파가 있었다고는 하나 禪宗의 입장에서는 禪宗 이외의 모든 종파는 敎宗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敎와 禪의 구별은 禪의 극성기인 中唐 이후 점차 敎禪一致라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佛敎는 전반적으로 점점 禪宗化되어 갔다. 禪宗은 이렇게 중국적인 불교로 자리잡아 나가면서 一世를 풍미하게 되고, 宋朝의 지배세력인 士大夫들도 禪宗에 깊이 傾倒되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정치적으로 불안한 상황에 놓여 있던 宋代의 士大夫들은 唐代의 貴族들과는 달리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과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佛敎를 대하는 데 있어서도 차이를 보였다. 이러한 入世的인 적극적 人生觀은 儒家 본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出世間的인 佛敎는 儒學者들의 思考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또한 排佛은 唐代 貴族勢力에 대항하기 위한 新興 士大夫들의 思想的 무기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대다수의 士大夫들이 개인적으로는 佛敎, 특히 禪에 대한 이해와 호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公的인 입장에서는 排佛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佛敎를 대신하여 사회지배의 이념이 될 수 있는 새로운 사상을 모색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시대적 분위기와 요구에 의하여 탄생한 것이 바로 新儒學이라고도 불리는 性理學인 것이다.





Ⅲ. 佛敎와 性理學 形成의 聯關性


性理學의 先驅者라고 할 수 있는 韓愈와 李 가 살았던 시대는 중국적 佛敎인 禪宗이 사상적인 체계를 이룩하고 그것이 사회 일반, 특히 지식인 계층에 널리 퍼져 하나의 사상적 조류를 형성했던 때이다. 그러나 이들이 旗幟로 내건 것은 排佛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몇 가지의 추측을 가능하게 해 준다. 그 하나는 이들도 당시의 사상적 조류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佛敎의 사상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수호하고자 했던 당시의 旣得權 세력과 대항해서 新興 세력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孟子 이후 끊어졌던 道의 맥을 다시 잇는 역할을 자임하고 나서면서 佛敎의 逆機能만을 강조하였다. 이들의 이러한 의도는 宋代에 이르러 性理學이라는 결실을 맺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이러한 排佛論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사상에는 佛敎의 영향이 곳곳에 짙게 배어 있으니 朱子系列의 性理學者들, 즉 周濂溪와 程明道·程伊川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의 性理學者들이 佛敎에 대항할 수 있는 사상을 만들면서 그 극복의 대상인 佛敎의 사상을 차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데, 그 이유는 본래의 儒學, 즉 先秦의 孔孟의 사상은 주로 倫理的인 면을 강조하여 당시 사상계의 주요 논쟁거리였던 性이나 道로 대표되는 本體論이나 人性論 문제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排佛論은 佛敎敎理에 관한 것보다는 社會·經濟的인 역할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고, 또 敎理에 대한 비판이 있다 하더라도 倫理的인 측면이 강한 儒學의 입장에서 宗敎인 佛敎를 비판하는 것이므로 관점이 어긋나는 경우가 많다.

본 장에서는 韓愈에서부터 시작하는 이들 초기 性理學者들의 사상적 전제였던 排佛思想에 대해서 살펴보고, 앞에서 말한 朱子계열 性理學者들의 사상에 나타나는 佛敎의 영향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나 周濂溪의 저술에는 佛敎를 비판하거나 배척하는 글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그의 저술 곳곳에는 佛敎的인 색채가 짙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周濂溪와 佛敎의 관계에 대해서는 周濂溪 사상에 나타나는 佛敎로부터의 영향에 대해서만 고찰하기로 하겠다.



1. 性理學者들의 排佛論

1) 韓愈와 李 의 排佛論


韓愈와 李 는 師弟관계로 儒學의 세력이 극히 미미했던 唐代에 儒學의 道를 부흥시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던 사람들이다. 韓愈와 李 를 性理學의 先驅者로 드는 이유는, 그들이 漢唐의 儒學을 배제하고 자신들을 孔孟에 직접 연결시켜 儒學의 道統을 잇는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性理學에서 중시하는 {大學}과 {中庸}의 사상을 천명하였고, 性理學의 중요한 개념인 性과 道 등을 논의의 중심으로 끌어들였다는 점 때문이다. 또한 宋代의 性理學者들도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이들을 性理學의 先驅者로 인정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韓愈와 李 로부터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韓愈는 佛敎가 극성하고, 王室과 貴族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있던 당시에 과감하게 佛敎와 道家, 그중에서도 佛敎를 사회의 害惡으로 보고 그것을 배척할 것을 극력 주장한 儒學者이자 文章家이다. 그는 佛·道를 배척하고 儒學을 부흥시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 戰國時代에 楊墨을 배척했던 孟子의 행적을 이어받으려 했으며, 뒷날의 性理學者들도 그를 孟子에 비교하여 추켜세우고 있다. 이에 대해 {新唐書}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여러 儒學者는 天下의 正義를 버려 두고 괴상한 神을 돕는다. 韓愈는 이러한 현상을 탄식하고 聖人을 이어받아서 四海의 미혹함과 다투었다. …… 옛날 孟子가 楊·墨을 배척한 것은 孔子와의 거리가 겨우 이백 년이었다. 韓愈가 老子와 佛敎를 배척한 것은 천여 년이나 떨어져 있다. 혼란을 제거하여 바른 데로 돌이키니 功은 孟子와 같지만 힘은 배로 들었다. 그러므로 楊雄보다 지나침이 적지 않다.

그는 이러한 사상을 [原道]와 [論佛骨表]에서 격렬한 어투로 피력하였다. [原道]는 당시 유행하던 佛敎와 道家의 사상을 비판하고 儒學의 우수성을 말하여 儒家의 道를 부훙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저술된 글이며, [論佛骨表]는 당시의 憲宗이 부처의 손가락 사리를 궁중에 들여와 모시다가 다시 다른 절로 그것을 돌려 가며 모시려 했을 때, 그것에 반대해서 그 사리를 태워 없애 백성들을 미혹되지 않도록 하자는 내용의 상소문이다. 韓愈는 이 상소문으로 인해서 潮州로 左遷되게 된다. 韓愈가 [原道]와 [論佛骨表]에서 佛敎를 배척한 논리는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중국 전통의 華夷觀에 입각한 排佛이다. 그는 [論佛骨表]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대저 부처는 본래 오랑캐 사람이다. 그러므로 중국말과 통하지 않고 의복도 다르며, 입으로는 先王의 말을 하지 않고 先王의 옷을 입지도 않는다.


둘째는 倫理的인 문제와 관련된 것으로, 佛敎의 가르침은 人倫을 度外視한다는 것인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지금 佛法에서 말하기를 '반드시 너의 君臣관계를 버리고, 너의 父子관계를 버리고, 너의 서로 살리고 서로 길러 주는 道를 버려야만 淸淨寂滅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이제 마음을 다스리려고 하면서 天下國家를 度外視하는 것은 天常을 멸하는 것이니, (그렇게 되면) 아들이 그 아버지를 아버지로 여기지 않고, 신하가 그 임금을 임금으로 여기지 않고, 백성이 자신의 일을 하지 않는다.

君臣의 義理와 父子의 情을 알지 못한다.


셋째는 經濟的인 문제인데, 佛敎와 道家의 經濟的인 폐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옛날에는 백성 되는 자가 넷(士·農·工·商)이었는데, 지금의 백성은 여섯(士·農·工·商·道士·僧侶)이다. …… 농사짓는 집은 하나인데 곡식을 먹는 집은 여섯이다. 工匠의 집은 하나인데, 器物을 쓰는 집은 여섯이다. 장사하는 집은 하나인데, 이 물자를 쓰는 집은 여섯이다. 어찌 백성들이 곤궁해져 도둑질하지 않겠는가?


넷째는 歷代 帝王의 행적을 살펴보면 佛敎를 믿은 임금은 오히려 壽命이 짧고 나라에 害가 되었다는 것인데, 그는 佛敎가 들어오기 이전의 왕들의 수명과 帝位 期間은 길었지만, 佛敎를 받아들인 後漢의 明帝는 제위에 겨우 18년밖에 있지 못했으며, 梁武帝는 지극히 부처를 섬겼지만 諸侯에게 쫓겨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말을 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처를 섬겨 福을 구했지만 오히려 禍를 얻었으니, 이를 미루어보면 부처는 섬길 만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韓愈의 排佛의 논리를 위에서 네 가지로 정리해 보았는데, 여기서 우리는 그의 佛敎에 대한 이해가 매우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佛敎가 오랑캐의 것이기 때문에 나쁘다는 논리는 文化의 相對性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무조건적인 배척에 지나지 않는다. 두번째의 人倫을 모른다는 비판은 宗敎의 특수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비판이다. 세번째의 經濟的인 이유로 인한 비판은 당시 승려의 수가 너무 많이 늘어나고, 그것이 각종 義務를 피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으며, 또 寺院經濟의 지나친 팽창으로 인한, 일면 타당성이 있는 비판이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의 현상적인 문제이지 佛敎 자체의 본질적인 문제점은 아니다. 다음으로 네번째의 壽命을 예로 든 비판은 객관성이 결여된 것으로, 梁武帝의 일은 梁武帝가 자신의 求福만을 바란 잘못된 奉佛 행위 때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비판이다. 결국 韓愈의 排佛論은 佛敎에 대한 敎理的인 이해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宗敎를 世俗의 논리와 같은 차원에서 비판하려 한 오류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佛敎의 현상적인 문제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韓愈는 이러한 문제점만을 보고 儒家의 道를 행해야 한다는 절박함과 책임의식으로 미숙한 排佛論을 내놓은 것이다. 


다음으로는 李 의 排佛論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李 의 排佛論은 기본적으로 韓愈와 같은 입장에 있지만 그 어투는 韓愈처럼 격렬하지는 않다. 李 의 排佛論의 논점은 주로 두 가지로 정리될 수가 있다. 첫째, 李 는 佛敎를 列子와 莊子의 말과 같으며 그 나머지는 모두 오랑캐의 가르침이라고 배척한다. 즉, 어떤 聖人이라도 바꾸지 못할 君臣·父子·夫婦·兄弟·朋友의 서로 길러 주고 죽음을 거두어 주는 聖人의 道는 天下에 行하게 하여도 아무런 폐단이 없으나, 佛敎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天下에 行하게 할 수 없고, 天下에 行하게 할 수 없는 道는 聖人의 道가 아니라는 논리이다.

두번째는 經濟的인 이유이다. 그는 직접 生産에 참여하지 않고, 納稅와 役의 의무를 지지 않는 승려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무리는 누에를 치지 않지만 의복이 갖추어지고, 밭을 갈지 않지만 음식이 충분하고, 편안히 살면서 일하지 않으니, 다른 사람을 부려서 자기를 기르는 자가 몇 천만 명에 이른다. 이를 미루어보면 추위에 떨고 굶주리는 자가 얼마나 될지 알 수 있다. …… 이것이 어찌 백성의 재화와 노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또, 당시 寺院의 지나친 佛事를 그치게 해달라는 상소문을 올려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 중에 佛敎의 이치로 마음을 證得한 자는 드물고, 오직 흙과 나무, 구리와 철로 된 절과 불상만이 사방에 널려 있어 산 사람을 해치고 늪과 호수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李 는 先進時代에 孟子가 배척하였던 楊朱와 墨翟의 말보다도 佛敎의 폐해가 심하다고 보아,
佛法이 사람들에게 주는 害는 楊朱와 墨翟보다도 심하며, 마음의 이치를 논하는 것은 비록 중국의 것과 다르지 않지만 가르침의 실천 행적을 살펴보면 生靈들을 어리석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다. 李 의 排佛論을 살펴보면, 그 어투가 韓愈에 비하여 상당히 부드러워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佛法으로 깨달음을 얻은 자가 적다고 했지 아주 없다고 하지는 않았으며, 마음의 이치를 論하는 것은 중국과 같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李 의 排佛은 당시 佛敎界에 나타나고 있는 현상적인 폐단이었지, 佛敎 자체에 대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李 는 佛敎의 本質과 現象을 나누어서 보고, 그 본질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李 의 思想은 韓愈에 비해 佛敎에서 훨씬 깊은 영향을 받아 이루어졌다. 李 의 사상에 나타나는 佛敎의 영향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다시 논할 것이다.



2) 二程의 排佛論

性理學의 기초를 완성한 程明道·程伊川 형제는 그 사상적 성격은 조금씩 달랐으나 佛敎를 대하는 데 있어서는 둘 다 배척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먼저 程明道의 排佛論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程明道는 道家와 佛敎 둘 다 배척하였으나 그중에서도 佛敎를 특히 배척하였다. 이는 당시 道家의 영향력은 미미하다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道家의 說은 그 해가 적다. 오직 佛學은 지금 사람마다 그것을 말하고 널리 퍼져 하늘에까지 가득 찼으니 그 해로움은 끝이 없다.

明道의 이러한 말은 당시 佛敎의 세력이 어느 정도이며, 당시의 儒學者들이 佛敎에 대해서 얼마만큼의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당시 이렇게 세력을 떨치고 있었던 佛敎에 대한 程明道의 비판은 대개 두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그 첫번째는 기본적인 世界觀의 차이에서 오는 비판이다. 즉 中國의 儒學的인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렇게 되는, 또는 그렇게 되어야 할 것으로 받아들이는 生死문제가 佛敎에서는 벗어나야 할 가장 큰 고통이라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는 佛敎가 生老病死를 끊임없이 말하는 것은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러한 현상은 私利에 얽매여 있기 때문인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佛學은 다만 生死의 두려움으로써 사람을 움직인다. …… 聖賢은 生死를 本分의 일로 삼기 때문에 두려워할 만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生死를 論하지 않는다. 佛學은 生死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단지 識見이 좁은 說을 쉬지 않는다.

釋迦는 본래 生死를 두렵게 여기는데, 이것은 私利에서 나온 것이니 어찌 公道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明道의 비판은 기본적으로 宗敎的인 색채가 부족한 중국인, 특히 儒學者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두번째는 道를 구하는 방식에서의 차이에서 오는 倫理的인 비판이다. 儒學에서의 道는 실생활에서 잠시라도 떠나 있는 것은 道가 아니라고 보고 있다. 즉 진정한 道란 사람이 살아가는 가운데 존재한다는 사고방식이다. 그리하여 明道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道를 떠난 物은 없고, 物을 떠난 道는 없다. 天地間에 있지 않은 것은 道가 아니다. …… 이 道는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人倫을 훼손시키고 肉身을 버리는 것은 道 밖에 멀리 있는 것이다. …… 釋迦의 가르침은 敬으로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은 있지만 義로써 바깥을 바르게 하는 것은 없다. …… 우리의 道(儒學)는 그렇지 않고 타고난 性을 따를 뿐이니 이 이치는 {易}에서 聖人이 다 말한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佛敎에서의 出家修行 방식을 儒家倫理에 비추어 비판한 것이며, 항상 자신의 학문을 實學이라고 자부한 儒學의 입장에서 이 세계(此岸)가 아닌 저 세계(彼岸)에서 道를 구하는 佛敎의 道는 결국 완전한 道가 아니라고 본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배우는 사람은 佛敎의 說을 음란한 소리나 아름다운 色과 같이 멀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금방 그 가운데 빠져 들어갈 것이다. …… 佛敎의 가르침을 항상 경계한다고만 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학문을 스스로 믿는 데 이르러야만 (佛敎에 의해서) 어지럽혀지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은 明道의 佛敎 비판은 唐代의 韓愈나 李 보다는 어느 정도 깊이를 갖추었으나 결국 종교로서의 佛敎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世間의 道德으로 宗敎를 재단하는 한계는 그들과 다를 바가 없다. 또한 佛敎에서의 方便만을 문제삼았을 뿐 大乘的인 사상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前시대와 같은 점이다.

다음으로는 程伊川의 排佛論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伊川은 먼저 佛敎에 빠져들기 쉬움을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釋迦의 說은 만약 그것을 궁리하여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려고 하면, 그것을 다 궁리하지도 못하고 同化되어 佛敎徒가 된다. …… 그 마음만을 취하고 그 행적을 버리기는 어렵다. 마음이 있으면 행적도 같이 따라오게 마련인 것이다. …… 그러므로 행적상에서 聖人과 합치하는가의 與否를 단정하는 것만 못하다. 釋迦의 말 가운데 聖人의 말과 합치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은 우리 儒學에 이미 있는 것이며, 다른 것은 취할 만한 것이 못된다. 이와같이 하면 오히려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警戒의 말은 한편으로는 程伊川이 佛敎敎理의 매력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처음부터 그 敎理에 다가가지 않는 것이 그것에 빠져들지 않는 길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佛敎의 뜻을 알려 하지 말고, 행적(迹), 즉 佛敎의 儀式行爲나 겉으로 드러나는 修行方式 등에서 佛敎를 보아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한다. 이와 같은 인식하에서 程伊川은 佛敎를 배척하는데, 그 배척의 이유는 程明道의 說과 흡사하다. 즉 그 하나는 倫理的인 이유인데, 세상을 否定하고 도피하여 道를 구하려는 佛敎의 修行方式에 대한 비판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제 행적상에서 佛敎를 살펴보면, 釋迦는 아버지를 피해 出家하여 곧 人倫을 끊어버리고 다만 자신만을 위하여 홀로 산간에 거처하였으니, 향리에서 어찌 이러한 것을 용납하겠는가? 이는 대개 輕視하고 賤視하는 것으로 사람을 대하니, 이는 다만 聖人의 마음이 아닐 뿐만 아니라 君子의 마음도 될 수 없다.

이러한 비판은 程明道와 그 說을 같이하고 있다.

두번째는 佛敎가 生死와 苦惱를 벗어나려는 것은 利己的인 데서 출발한다는 비판이다.

天地의 사이에 태어나는 것이 있으면 죽는 것이 있고, 즐거움이 있으면 곧 슬픔도 있는 것인데, 佛敎가 있는 곳에서는 곧 하나의 잘못된 것을 구하려고만 하여, 죽음과 삶을 면하려고 하고 煩惱를 없애려고 하는 것은 마침내 사사로운 것으로 돌아가고 만다.

이러한 이론은 '佛敎는 生死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것을 벗어나려고 하며, 그것은 결국 利己的인 데서부터 온다'는 明道의 비판과 같은 것이다. 程伊川이 보기에 이렇게 출발부터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佛者들의 求道를 위한 노력도 헛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佛敎가 세상을 보는 관점이 잘못되어 있음을 말하고, 佛敎의 求道를 위한 노력의 헛됨을 다음과 같은 조롱 섞인 말로 비판한다.

禪을 하는 자들은 항상 세상의 분주함은 市井의 사람들만한 것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市井의 사람들이 비록 날마다 利潤을 추구한다고 해도 쉬는 때는 있다. 그러므로 市井의 지극히 분주한 자도 禪客들만큼 분주하지는 않다. 왜 그러한가? 禪客은 行住坐臥에도 道가 있지 아니한 데가 없고, 道心이 없는 데가 없다. 그러므로 항상 바쁜 것이다.

위와 같은 程伊川의 排佛論은 기본적인 입장에서 兄인 明道의 排佛의 논리와 같은 맥락에 있다. 즉 자신들이 보기에 사실상 벗어날 수 없는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을 벗어나야 할 대상으로 삼는 데서 출발하는 佛敎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부터 程明道와 程伊川의 排佛論은 시작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세상을 보는 근본적인 차이점, 즉 現實을 받아들이고 주어진 한계내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儒學과, 현실을 不條理한 것으로 보아, 그 不條理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彼岸을 추구하는 佛敎와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위에서 性理學 先驅者와 초기 性理學者들의 排佛論을 간단하게 정리해 보았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唐代와 北宋初에 佛敎, 특히 禪宗이 유행하였고, 儒學者들도 佛敎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儒學者들의 佛敎 이해가 상당히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性理學者들의 佛敎 비판은 근본적인 敎理의 면보다는 주로 밖으로 나타나는 현상에 치중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의 排佛論에는 첫째, 經濟的인 측면에서의 비판, 둘째, 세계를 華와 夷로 나누는 民族主義的인 측면에서의 비판, 셋째, 현실의 책임을 회피하고 出家하여 求道하고자 하는 데 대한 倫理的인 측면에서의 비판 등이 공통적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러한 排佛論에는 宗敎를 世俗 道德의 관점에서 비판한 데서 오는 論理의 공백이 나타나는데, 이러한 현상은 그들이 宗敎로서의 佛敎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이것은 中國人, 특히 儒家 특유의 現實重視·人間重視의 價値觀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 이들의 이러한 佛敎에 대한 沒理解는 中國 이외의 것은 모두 오랑캐의 것으로 멸시하는 華夷觀의 작용도 간과할 수 없는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하나 이들의 排佛論은 道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特權을 가진 士大夫 階層의 입장만을 고려한 것이지, 權利라고는 하나도 없이 義務만을 지고 기댈 곳 없이 허덕이던 당시 民衆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理論이라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2. 初期 性理學 思想에 나타나는 佛敎의 影響

1) 韓愈·李  思想에 나타나는 佛敎의 影響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韓愈는 당시의 누구보다도 佛敎를 배척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도 당시 思潮의 영향권 안에 있었던 사람이므로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 없이 佛敎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그의 사상에서, 李 나 宋代의 性理學者들의 경우처럼 많지는 않지만 佛敎의 영향을 받은 흔적을 볼 수가 있다. 그의 사상에서 佛敎의 영향이 나타나는 것으로는 먼저 '道統說'을 들 수 있다. 道統이라는 것은 韓愈 이전의 儒家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던 개념이었다. 그러나 韓愈는 古代의 堯임금에서 시작하는 道의 授受를 말하여 儒家의 道統論을 제기하였다. 그는 [原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소위 道라고 하는 것은 老子와 佛敎에서 道라고 하는 것과는 다르다. 堯는 이것을 舜에게 전했고, 舜은 禹에게 전했으며, 禹는 이것을 湯에게, 湯은文·武·周公에게 전했고, 文·武·周公은 이것을 孔子에게 전했으며, 孔子는 이것을 孟子에게 전했다. 孟子가 죽고 나서는 이 道가 전해지지 못하였다.

韓愈가 이러한 道統說을 들고 나온 것은, 佛敎는 고도의 形而上學的인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반면, 道라든가 性이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던 당시의 儒學界의 상황을 自覺한 데서 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당시 法統을 중시하던 佛敎에만 道나 道의 授受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儒學에도 면면히 내려오는 固有의 道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道統說은 佛敎로부터의 자극과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또 하나 韓愈의 사상 가운데 佛敎의 영향이 나타나는 것은 그의 性論이다. 儒家에서는 孟子와 荀子 이후 인간의 性에 대한 관심이 매우 적었다. 그러나 佛敎측에서 性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졌던 것에 자극받아 韓愈는 性을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性을 논의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修養의 문제도 언급되는 것이다. 그가 儒學에서의 修養書로 내세운 것은 {大學}이었다.

韓愈의 사상에는 이렇게 곳곳에 佛敎의 영향이 보이는데, 이러한 佛敎의 영향은 그가 佛敎思想을 직접 수용한 것은 아니며, 佛敎의 자극을 받아 佛敎에 대응할 수 있는 사상을 이끌어 내기 위하여 佛敎의 論理와 비슷한 것을 儒學에서 찾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佛敎에 대한 이해는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매우 낮은 수준이었기 때문에 깊은 敎理的인 문제를 받아들이지는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러한 사상은 儒學에 새로운 문제를 던져 주어 性理學을 탄생시키는 기초가 되었다.

다음으로 韓愈의 제자인 李 가 받아들인 佛敎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李 도 韓愈와 마찬가지로 佛·老를 막고 儒學을 闡明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그러나 그의 佛敎에 대한 이해와 수용은 韓愈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었고, 승려들과의 교류 또한 매우 빈번하였다. 禪僧들과의 問答 내용을 보면 李 가 禪思想에 대하여 깊이 感服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外的인 交流나 佛敎 쪽의 기록 외에, 그의 대표적인 著書인 [復性書]에도 佛敎로부터의 영향이 짙게 나타나 있다. 李 는 [復性書]에서 표면적으로는 排佛의 입장을 취했지만 그와 같은 排佛은 주로 政治 經濟的인 입장이었고, 內面的으로는 佛敎의 사상을 수용하여 자신의 이론을 재구성하였다. 그는 情을, 性을 미혹시키는 삿된 것, 없애야 할 것으로 보고, 情이 일어나지 않으면 인간의 本性이 回復(復性)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이러한 復性論은 佛敎의 見性論을 연상시킨다. 다음에 [復性書] 중의 몇 구절을 인용해 보겠다.

사람의 性을 迷惑시키는 것은 情이다. …… 情이 혼탁해지면 性이 숨어서 드러나지 않는데 이는 性의 잘못이 아니다. …… 물이 혼탁하면 그 흐름이 맑지 않으며, 불이 연기를 내면 그 빛이 밝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물이 맑지 않거나 불이 밝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모래가 물을 흐리지 않으면 그 흐름은 맑아질 것이며, 연기가 끼지 않으면 불은 밝아질 것이다. 또한 情이 일어나지 않으면 性은 충만해질 것이다.

위의 구절은 [復性書] 첫머리에 나오는 말로, 여기서의 '情이 일어나지 않으면 性이 충만해진다'는, 性과 情을 대비시키는 것은 {圓覺經}의 '幻妄을 떠나는 것이 곧 깨달음(離幻卽覺)’이라는 구절과 그 논리가 흡사하고, 또한 {大乘起信論}에서 智性과 無明을 바다와 파도를 일으키는 바람에 비유한 것과도 같은 논리이다. [復性書]에서는 또

性과 情은 서로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性이 없으면 情이 생길 데가 없다. 情은 性으로 말미암아 생겨난다. 情은 스스로 情이 될 수 없고 性으로 인해 情이 된다. 性은 스스로 性이 될 수 없고, 情으로 말미암아 밝아진다. 性이란 하늘의 命이다. 聖人은 그것을 얻어 迷惑되지 않는 자이다. 情은 性의 움직임으로, 百姓은 그것에 빠져 그 본래의 性을 알지 못하는 자이다.

라고 하여 性과 情이 서로 의지하여야만 性과 情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말하였는데, 이는 {大乘起信論}에서 "깨달음〔覺〕에 의지해 있으므로 미혹됨이 있다. 만약 覺性을 떠나면 不覺도 없다"라고 하여 覺과 不覺이 서로 의지해 있음을 말한 것과 그 용어만 다를 뿐이다. 이 외에도 [復性書]의 많은 구절에서 佛敎思想의 영향이 보인다. 이러한 李 의 佛敎思想의 흡수는 {止觀統例}를 지은 梁敬之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梁敬之는 荊溪湛然 禪師에게서 {圓覺經}과 {大乘起信論}을 傳受받은 사람이다. 李 는 梁敬之가 죽었을 때 [感知己賦]를 써서 그를 哀悼하기도 했다. 이러한 점을 살펴보면 李 의 '復性' 사상의 연원을 알 수가 있다. 高觀如와 같은 사람은 李 의 사상을 '겉은 儒學이지만 속은 佛敎(儒表佛裏)'라고까지 평하고 있다.

韓愈와 李 의 사상은 佛敎의 자극과 영향 아래서 생겨날 수 있었다. 당시 極盛을 누리던 佛敎에 비해 매우 위축되어 있던 儒學에 滋養分을 제공한 것은 결국 儒學者들이 그토록 배척하고자 했던 佛敎였다. 이러한 현상은 現實과 人間의 倫理 문제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던 儒學은, 그 자체에서만은 佛敎의 敎理에 대항할 수 있는 本體論이나 人性論을 形成해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性理學의 先驅者라고 불리는 韓愈와 李 마저 佛敎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으므로, 宋代에 이르러서도 性理學은 많은 佛敎的인 요소를 내포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점은 새로운 사상 형성을 위한 儒·佛의 융합이라는 시각에서 보면 바람직한 현상이기도 하다.



2) 周濂溪 思想과 佛敎


宋代 性理學의 체계를 세운 사람으로 추앙받는 周濂溪는 다른 性理學者들과는 달리 佛敎를 배척하는 글을 남기지 않았다. 그의 著書는 性理學에서 매우 중요시되는 [太極圖]에 대한 해설인 [太極圖說]과 [易通]이라고도 불리는 [通書] 이외에 短文 몇 편과 詩들을 남겼는데, 여기에는 佛敎의 영향이 짙게 나타난다. 그는 또한 佛敎와 관련된 많은 행적을 남기고 있다. 즉 그는 壽涯나 常聰과 같은 승려들과 교류하였고, 그들의 가르침을 받기도 하였다는 佛敎측의 기록이 있다. 그의 [太極圖說]이 儒·佛·道 三家 思想의 融合이라는 것은 淸代의 毛奇齡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고 있는 사실이기도 하다. 毛奇齡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그림(太極圖)이 두 사람에게 근본을 두었음을 분명히 알았다. 그러나 근근이 希夷와 壽涯에 그것을 해당시켰을 뿐이다. 어제 黃山 中州和尙이 太極은 본래 禪宗에 근본을 두었다고 말한 說을 보았다. 그가 만든 太極圖는 즉 唐나라 승려인 圭峯의 十重圖인 것이다.

[太極圖]와 [太極圖說]의 이러한 佛·道 由來說은 현대의 學界에서도 인정하고 있는 학설이다. [太極圖說]이 佛敎의 영향을 담고 있다는 것은, 이러한 [太極圖]의 근원 말고도 그 圖說 속에 있는 '主靜'과 '無欲'이라는 단어를 보아도 알 수 있다. 濂溪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聖人이 中正仁義로써 定하고, 靜을 主로 하여(欲心이 없으므로 고요하다 : 自註) 人極을 세웠다.

여기서 周濂溪는 '靜을 主로 한다'는 佛敎的인 修養論을 제출하여, 뒤의 二程이나 晦庵에 와서는 修養方法으로 '靜坐'를 말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또 '欲心이 없어야 고요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 이를 이어받은 性理學이 禁慾主義的인 경향으로 나아가도록 한 사람이다. 濂溪는 또 다른 단문인 [養心亭說]에서도 無欲說을 주장하고 있다.

孟子는 "마음을 기르는 데는 寡慾보다 좋은 것이 없다. 그 사람됨이 慾心이 적으면 비록 있지 않은 것이 있더라도 적으며, 그 사람됨이 慾心이 많으면 비록 있는 것이라도 적다"({孟子} [盡心] 下)라고 말했다. 마음을 기르는 데는 慾心을 적게 하여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慾心이 적은 데서 없는 데 이르면 진실함이 서게 되고 밝게 통하게 된다.

濂溪의 이러한 無欲說은 본래 孔孟의 先秦儒學에는 없는 개념이다. 전통적으로 儒學에서는 節欲을 주장하였지 無欲을 말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다가 이때에 와서 無欲을 주장한 것은 佛敎의 영향이라고밖에 볼 수가 없다.

이밖에 周濂溪는 [愛蓮說]이라고 하는 短文을 지어 그의 佛敎 性向을 드러내고 있다. 이 글은 연꽃의 德에 기대어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理想的인 人間性을 표현하고 있다. 거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연꽃은 진흙 속에서 나왔으나 더럽혀지지 않고, 맑은 물에 맑게 씻겨 있으나 요염하지 않고, (줄기의) 가운데는 비어 있으나 겉모습은 곧고, 넝쿨이나 가지가 뻗어 있지 않고, 향기는 멀수록 맑으며, 아름답고 깨끗한 모습으로, 멀리서 볼 수는 있으나 가까이 두고 완상할 수는 없다.

이 글은 濂溪가 濂溪에 書堂을 지어 '愛蓮書堂'이라고 이름 붙인 후 지어 石壁에 새긴 것이다. 이 글을 보면 濂溪가 생각하고 있는 理想的인 人間性이 佛敎의 佛性과 상통함을 알 수 있다.

위에서 性理學의 開山祖라 불리는 周濂溪의 佛敎와의 관계를 간단하게 살펴보았다. 여기서 우리는 性理學의 '靜'을 중시하는 修養方法이나, 先秦儒家와는 다른 禁慾主義的인 성격이 周濂溪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 濂溪의 이러한 사상은 또 佛敎에 그 淵源을 두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3) 二程 思想에 나타나는 佛敎의 영향


앞 章에서도 말했듯이 宋代의 性理學者들 대부분이 佛敎와 관련을 가지고 승려들과 교류하고 있었고, 佛敎의 敎理를 연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것은 二程子도 예외가 아니다. {宋史} [道學傳]에는 明道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5, 6세 때부터 동생 程 와 함께 周敦 (濂溪)가 學問을 論하는 것을 들었는데, 科擧공부에 싫증을 내고 慨然히 求道의 뜻을 가지게 되었다. 諸家가 泛濫하는 가운데 道家와 佛敎에 出入한 것이 幾十年이었으나 돌아와서 六經에서 道를 구한 이후에 그것을 얻었다.

이러한 기록을 보면 당시의 性理學者들이 佛敎思想과 道家思想을 연구하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二程子가 어린 시절 수업한 周濂溪 또한 앞에서 살펴본 바와 마찬가지로 佛敎와 道家에 대하여 상당한 관심과 호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 영향을 받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性理學者들의 佛·道 出入이 단시일간의 현상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明道의 사상에 佛敎의 영향이 보이는 것으로는 [定性書]가 있다. 이 글의 핵심은 '定'에 있는데, 그는 '定'을 다음과 같이 풀어 말한다.

이른바 定이라는 것은 움직이는 것도 定이고, 고요한 것도 定이며, 맞이하고 보내는 것도 없고, 內外도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明道가 말하는 '定'이라는 것이 {大學}에서 말하는 '무엇을 확고히 한다'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즉 明道가 여기서 말하는 '定'이라는 것은 佛敎에서 말하는 '禪定'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중국 禪宗의 六祖인 慧能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明道의 '定性'이 禪宗의 禪定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마음에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일러 坐라 하고, 안으로 自性을 보고 움직이지 않는 것을 일러 禪이라 한다. …… 밖으로 相을 떠나는 것이 禪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은 것이 定이다. …… 밖으로 禪을 하고 안으로 定을 하는 것, 이것이 禪定이다.

明道는 또

天地間에 사람만이 홀로 지극히 神靈스러운 것은 아니다. 스스로의 마음은 곧 草木禽獸의 마음이기도 하다.
라고 하여 性의 普遍性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思想은 佛敎의 '萬物一切가 모두 佛性을 가지고 있다'는 사상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 외에 그의 修養方法상에서도 佛敎의 영향이 나타나는데, 그가 謝上蔡에게 한 다음과 같은 말은 그의 佛敎 性向을 잘 나타내 준다.

謝顯道(謝上蔡)가 明道先生을 따라 扶溝에서 배웠다. 明道先生이 어느날 그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이 나를 따르면서 나의 말만을 배웠기에 너희의 학문은 마음과 입이 서로 응하지 못하니 어찌 이를 시행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제자들이 이에 대하여 물으니 '먼저 靜坐를 하라'고 하였다.

이러한 靜坐의 방법 역시 본래 孔孟의 儒學에는 없던 것으로, 禪宗의 默照禪을 연상시키는 修養法이다. 이렇게 明道가 修養의 방법으로 중시하던 靜坐의 방법이 아무런 연유도 없이 갑자기 나왔다고 보기는 힘들다.
程明道는 排佛에 적극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周濂溪와 같이 드러내 놓고 佛敎的인 성향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또한 십수 년 간 佛敎에서 道를 구할 뜻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으로 佛敎 사상에서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을 수는 없었다. 다음으로는 程伊川의 사상에 나타나는 佛敎의 영향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伊川 또한 學問을 하는 과정에서 佛敎와 禪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佛敎를 완전히 부정하지 않고, '{華嚴經}의 말이 옳지 않다고만은 할 수 없다’고 하며 佛敎 敎理의 일부를 인정하기도 하였다. 그의 사상 가운데 佛敎의 영향은 修養論과 {周易}에 대한 해석에 잘 나타나 있다. 먼저 그가 學者의 마음을 닦는 데 가장 좋은 것으로 내세운 것이 바로 '坐禪入靜'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學者가 먼저 힘써야 할 것은 心志에 있다. 見聞과 知思를 버리고자 하면 絶聖棄智하고, 思慮를 버리고자 하는데 어지러운 마음이 근심된다면 모름지기 坐禪入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程明道의 靜坐와 같은 의미를 가진 것인데, 伊川은 더욱 직접적으로 佛敎 용어를 쓰고 있다. 그는 이어서 말한다.
만일 이것(交感과 생각)을 없애려고 한다면 이는 오직 사람에 主로 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敬이 있을 뿐이다. …… 이른바 敬이란 主一의 敬을 말하며, 이른바 一이란 가는 바가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 이를 가지고 오랫동안 涵養하면 자연히 天理가 밝아질 것이다.

여기에서 程伊川이 主敬을 坐禪入靜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伊川은 자신의 사상의 요점인 天理를 이 主敬, 즉 坐禪入靜을 통하여 알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기서 天理는 佛敎에서의 佛性으로, 天理를 깨닫는다는 것은 곧 佛敎의 見性, 또는 覺과도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는데, 伊川의 이러한 이론은 儒學의 見性論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 伊川이 '理'를 가지고 {周易}을 해석한 것은 {華嚴經} 事理說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伊川은 [伊川易傳序]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지극히 微微한 것은 理요, 지극히 드러나는 것은 象이다. 體用은 하나를 근원으로 하고 있으므로, 드러나는 것과 微微한 것은 사이가 없다.

여기서 伊川은 象이란 理가 드러난 것이고, 또 體用은 하나이므로 결국 理와 象은 사이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說은 伊川 자신이 '萬物은 하나의 理에서 나온다'라고 개괄했던 {華嚴經}의 要諦와 별 다름이 없는 것이다. 다만 {華嚴經}에서는 理까지도 障碍로 보고 있지만, 伊川은 그렇지 않고 모든 것을 理 하나에 귀결시킨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결국 伊川이 {伊川易傳}의 序文에서 천명한 이 理는 朱晦庵에 의해 再闡明되어, 性理學의 本體論이나 人性論에서도 가장 중요한 개념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性理學'이라는 이름으로까지 불리게 되는 것이다.

이상의 程明道와 程伊川 두 사람은 초기 性理學의 기틀을 완전히 다진 사람으로 평가되는 학자들이다. 이들은 韓愈에서부터 내려오는 排佛의 전통을 이어받아 佛敎를 적극 배척하면서도, 本體論에서부터 修養論에 이르기까지 佛敎의 사상에서 取捨選擇하여 儒學의 입장에서 재구성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들의 이러한 사상은 그대로 性理學의 集大成者인 朱晦庵에게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Ⅳ. 結 論


이상에서 性理學이 형성되는 데 있어서 佛敎가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性理學이 일어날 당시의 佛敎界와 儒學界의 상황을 살펴보고, 韓愈에서부터 二程子까지의 性理學의 先驅者와 初期 性理學者들의 排佛論과 그들의 사상에 나타나는 佛敎의 영향에 대해서 대략적으로 살펴 보았다.

性理學의 先驅者로 불리는 韓愈와 李 가 排佛과 함께 새로운 儒學의 자리를 잡아 나갈 당시의 思想界는, 儒學은 秦의 焚書坑儒로 인한 후유증을 치유하기 위해 經學에 치중한 결과로 思想的인 면에서는 오랫동안의 침체기에 있었고, 佛敎는 오랜 中國化의 과정을 거친 이후 성립된 禪宗이 세상을 풍미하고 있던 시기로서, 당시 대다수의 儒學者들이 佛敎에 심취해 있던 때였다. 한편 佛敎의 과도한 성장으로 인해 지나친 佛事나 寺院 經濟의 비대화, 현실 회피 등의 문제점들이 노출되기도 하였다. 당시를 政治·社會的으로 보면 佛敎를 배경으로 하는 舊貴族과 儒學을 부흥시키고자 하는 新興 士大夫들이 지배계급의 위치를 교체하는 시기였고, 그로 인해 新興 士大夫들은 자신들을 뒷받침하는 이론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이러한 內的·外的인 조건들은 당시의 일부 儒學者, 즉 新興 士大夫들에게 자극을 주어 새로운 사상의 탄생을 촉진하는 요소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士大夫들은 적극적인 排佛論을 내세우며, 儒學을 바탕으로 하여 새로운 사상을 형성시켜 나갔다. 이들이 佛敎를 배척한 思想外的인 이유는 세 가지로 개괄할 수 있다. 첫째는 華夷論을 앞세운 民族主義的인 입장이고, 둘째는 佛敎의 出家 등의 修養方法과 出世間的인 世界觀에 따른 倫理的인 이유, 셋째는 당시 佛敎 성장의 否定的 현상인 寺院 經濟의 비대화 등으로 인한 經濟的인 이유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는 객관적인 시각으로 볼 때 객관성을 상실한 것이었고, 또 世俗의 倫理로 宗敎를 재단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한 것이다. 경제적인 부작용에 대한 비판은 일면 타당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外的인 현상으로 佛敎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볼 때 이들의 排佛論은 자신들의 새로운 儒學의 타당성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노력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排佛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性理學者들이 새로운 儒學을 형성해 내는 데는 佛敎의 영향이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즉 秦의 焚書坑儒 이후 사상적인 축적이 거의 없었던 儒學에는 佛敎에 대항할 수 있는 새로운 사상을 형성해 낼 이론적인 근거가 부족하였던 것이다. 또한 佛敎측의 적극적인 中國化 노력으로 佛敎는 이미 사회 전반 전 계층에 걸쳐 깊숙이 침투해 있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상적인 축적이 이루어져 있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이들 性理學者들도 은연중 佛敎思想의 영향을 받고 있었고, 대부분이 한때는 불교사상에서 道를 구해 보고자 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사상에 佛敎의 사상이 融合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韓愈의 道統說에서 시작하여 李 의 復性論, 周濂溪의 無欲과 主靜論, 程明道의 主敬論, 程伊川의 性理論까지가 佛敎의 영향 아래 성립된 것이다. 그리하여 學界 일부에서는 性理學을 '儒表佛裏'라고까지 표현하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이므로 性理學은 佛敎의 자극과 영향이 아니었으면 형성될 수 없었던 사상이었다. 그렇지만 性理學者들은 항상 자신이 儒學者라는 의식을 가지고 儒學의 입장에서 佛敎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筆者는 性理學의 형성은 儒·佛 交涉의 결과물, 넓게는 儒·佛·道 三敎 交涉의 결과물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때, 사상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性理學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參 考 文 獻


原典類

{昌黎集}, {宋元學案}, {宋史}, {李文公集}, {周子全書}, {新唐書}, {二程全書}, {舊唐書}

{二程遺書}, {近思錄}, {景德傳燈錄}, {論語}, {六祖壇經}, {孟子}, {大乘起信論疏·別記},

{大學}, {華嚴經}, {中庸}, {弘明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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