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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동양 문명의 반격 - 송희식

화엄행 2012. 6. 19. 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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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동양 문명의 반격 - 송희식

월간 海印  1992년6월[124호]

 

공산주의는 한 때 전세계를 구원하겠다는 목표를 가진 커다란 세력이었다. 공산주의 나라는 반대자에게는 악의 제국이었지만 그들의 주관적 의도는 인간과 사회의 구원이었다. 아무튼 공산주의는 실로 한순간에 붕괴하였다. 그러나 공산주의가 붕괴한 의미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공산주의가 이렇게 붕괴한 것은 인간과 사회의 구원에 대한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가 환상적이었음이 드러난 것이다. 그러면 인류는 그밖에 어떤 사회 구원의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는가?


이제까지 인류 역사상 나타난 사회 구원의 프로그램은 세 가지로 나눌 수있다.

첫째가 종교적 프로그램이며, 둘째가 자본주의적 프로그램이며, 셋째가 공산주의적 프로그램이다.


첫째, 사회 구원에 대한 종교적 프로그램의 전제는 모든 인간이 깨달음에 이르거나 또는 하느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의 물질적인 면이나 사회의 체제적인 면보다는 인간 개인의 집합표상-인간의 의식, 곧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 사고 방식 따위-의 전환을 중요시하는데, 이러한 종교적 사회 구원의 관점은 근대 이전의 모든 사회에서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기독교가 인간의 집합표상을 지배한 서구 중세 시대는 이러한 종교의 사회 구원관이 지배한 전형적인 시대이다. 그러나 사실 중세에서 종교적 구원관념은 현실의 계급적 착취와 억압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하였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둘째, 자본주의적 사회 구원의 프로그램의 전제는 물질의 발전이 인간과 사회를 선과 도덕이 지배하는 사회로 이끈다는 것이다. 산업혁명에 따른 공업의 발전은 인간의 물질적 고통을 현실적으로 감소시켰으며, 사회의 신분과 계급의 대립을 청산시켰다. 그리고 자본주의적 구원관과는 달리 종교적 구원관은 구원을 향하여 끊임없이 진보하는 것으로 역사를 파악함으로써, 과거에 종교적 구원관이 제공할 수 없었던 사회 구원의 전망을 제공하였다. 다만 자본주의적 구원관에 따르자면 물질이 풍부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할 뿐더러 그러한 풍요는 인간의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행동으로 창출해야 한다. 따라서 케인즈가 말한대로 구원의 그날이 올 때까지, 곧 물질이 풍부해 질때까지 탐욕을 우리의 신으로 모시지 않으면 안 된다.


셋째, 공산주의적 사회 구원 프로그램의 전제는 사회 체제를 변혁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산주의는 의식이 존재에 의하여 구속된다는 철학 원리에 따라서 종교적 구원관을 배척한다. 한편 자본주의에서는 경제 관계에서의 모순이 생산력의 발전에 질곡으로 작용하며, 따라서 자본주의는 구원에 이르기 전에 붕괴한다고 본다. 그래서 오직 사회 체제를 변혁해서 생산력을 해방해야만 물질적으로 크게 발전시킬 수있다고 한다. 그러면 마침내 인간은 물질을 두고 경쟁하지 않고 사회의 모순 때문에 대립하지 않는 그런 사회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경쟁과 대립이 없는 사회란 바로 사랑과 연대가 넘치는 사회인 것이다.


공산주의의 붕괴는 앞에서 말한 공산주의적 사회 구원 프로그램이 환상이었음을 역사가 심판한 것이다. 공산주의를 지향한 소비에트 체제는 생산력을 해방시킨 사회 체제나 사랑이 넘치는 사회 체제가 아니었다. 또한 공산주의자들은 공산주의 사회체제가 어떠한 모습인지도 제시하지 못했다. 그러면 자본주의적 사회 구원의 프로그램은 유효한가. 어떤 사람들은 자본주의에 신념을 가지고 역사의 종말을 외치거나 역사를 정상 상태로복귀시키자고 한다. 그러나 필자는 자본주의적 사회 구원 프로그램도 역시 환상이라고 규정한다.


자본주의에서 물질의 발전에 이르는 매카니즘은 인간의 이기심과 경쟁의 원리이다. 자본주의에서는 사회를 발전시키려고 인간이 선한 행동을 할 필요가 없다. 선이나 공공의 이익을 위하는 사람보다 오히려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경쟁과 시장 원리에 따라서 사회 발전에 더욱 기여한다는 것이다. 아담 스미스에 의하여 정립된 이러한 자유 경쟁 원리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의 교리가 되어 있다. 케인즈까지도 이러한 자유 경쟁에 국가가 투자 수준을 보정補正하면 가까운 장래에 자본의 희소성이 사라지고, 그리하여 생산은 충분히 풍부해져 인간은 선과 도덕을 찾게 될 것이라고하였다. 실제로 자본주의는 물질의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물질 문명은 석가나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완전히 다르다.-이 점은 종교인들조차 강조하지 않고 있다.-석가는 중생에 대한 자비심을,예수는 이웃 사랑을 말하였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앞에서 말한대로 이기주의가 사회 체제를 형성하는 원리이다. 불교에서는 욕망과 집착에서 떠나라고 말한다. 예수는 빵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 것을 말했다. 그러나 현재의 물질 문명에서 사람들은 더 많은 물질적 욕망을 메우려 하고 나아가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는 욕망까지도 계속해서 만들어 내고 있다. 사랑과 이기 주의, 욕망으로부터의 해방과 욕망의 충족과 창조, 이렇게 종교적 진리와 뚜렷이 대립하는 문명이 바로 자본주의적 물질 문명이다. 진리에 반하는 이런 자본주의 체제와 문명은 사회 구원의 프로그램이 될 수 없을 뿐더러 공산주의적 환상보다 더욱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환상이 될 수도 있다.


자본주의 물질 문명이 인간과 사회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은 현실에서도 점점 명백해지고 있다. 환경오염은 지구 전체의 생태계를 위협하고 있으며, 전쟁은 극도로 잔인해지고, 국내적 국제적 불평등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자본주의는 인류 역사의 그 어느 시대보다 전쟁 기술을 급속히 발전시켰을뿐만 아니라 더 많은 전쟁을 일으켰으며, 심각한 사회적 국가적 대립을 일으켰고, 환경 오염으로 지구 전체의 생태계를 위협함으로써 인간과 자연의대립을 극단화하였으며, 인간성을 가장 심각하게 타락시켰다. 도대체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을 노골적으로 정당화하고 그것을 체제와 문명의 기조로 한 시대가 인류의 어느 시대에 있었다는 말인가. 불평등과 부정의는 자본주의의 모국인 미국에서 이번에 흑인 폭동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우리나라 광주에서는 공권력이 배제된 상황에서도 강도나 약탈은 전혀 없었지만, 미국 뉴욕시에서는 정전이 되었어도 약탈이 자행되었다. 이것이 물질적으로 발전한 자본주의의 모습니다. 이러한 체제와 문명에서 어떻게 사회 구원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자본주의 물질 문명은 이제 인류에게 구원의 전망이라기보다는 모든 문제와 병리의 근원인 것이다.


그러면 종교적 구원의 전망은 어떠한가? 가장 먼저 말해야 할 것은, 종교인이 중생을 깨달음에 이르게 하거나 하느님에 대한 신앙에 귀의하게 하여 사회를 구원할 수 있다는 생각은 이미 역사에 의하여 심판이 끝난 사고방식이라는 것이다. 물질적 상황이나 체제 문명의 논리와 다른 집합표상, 가령 사랑이나 자비의 마음 따위는 체제와 문명의 논리에 압도당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적 물질 문명 속에서 사랑을 설교하는 것은 정신적 위안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적 물질문명이 종교를 자본주의화한다. 자본주의적 이윤의 논리는 종교 단체라고 하여 예외가 될 수 없다. 종교인 자신의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수입이 있어야 하는 종교 집단은 결국 기업화하고 사업화하는 경향을 드러내게 된다. 그래서 종교 집단이 번창한다는 뜻은 더 많은 수입, 곧 더 많은 이윤을 올린다는 것과 같은 뜻이 된다. 따라서 인간의 집합표상을 변화시킴으로써 사회를 구원한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그렇다고 자본주의가 말하는 풍요나 공산주의가 말하는 체제가 사회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결론으로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가장 평범한 말이 가장 진리에 가까운 것이다. 사회 구원은 인간 의식의 진보, 사회 체제와 문명의 논리 전환, 그리고 인간 집단의 의식적 노력이 서로 정합整合으로 결합되지 않으면 안 된다. -동양에서는 이러한 세 가지 차원의 연대적 결합을 천지인天地人 삼재사상三才思想이라고 규정해왔다.


이러한 면에서 종교의 중요성이 다시금 커지고 있다. 종교는 인간의 집합표상에 직접 커뮤니케이션할 뿐만 아니라 그와 더불어 새로운 체제나 문명의 산파 역할을 할 수 있으며, 또한 사회를 이끄는 중대한 사회 세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종교의 이러한 역할이 현대, 특히 공산주의가 붕괴한 지금에서는 더욱 중요해졌다. 소련과 동구 제국이 붕괴하는 데 큰 힘을 미친 것이 카톨릭 세력이었다. 폴란드의 상황에서도 보았거니와,
고르바쵸프 스스로가 밝히고 있듯이, 카톨릭 교황은 우리 시대 역사의 가장 중요한 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종교의 역할이 중요한 것은 역사 변화의 패턴이 과거와는 달라졌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역사를 변화시키는 것은 경제력  과 군사력이었다. 그러나 현대에는 그것보다 집합표상과 커뮤니케이션이 더욱 중요해졌다. 소련과 동구의 붕괴, 특히 소련 쿠데타의 실패 과정은 집합표상과 커뮤니케이션의 변화가 군사력을 어떻게 무력화하는가를 보여 주었다. 옐친이 탱크 위에서 메시지를 전하고 팩시밀리가 폭넓게 정보를 유통시키는 상황에서 군사력은 스스로 무너져갔던 것이다. 이처럼 역사변화에서 집합표상과 커뮤니케이션이야말로 종교의 영향력을 증대시키는 것이다. 종교가 집합표상과 커뮤니케이션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미 카톨릭은 역사적 역할을 시작하였지만, 이제는 불교가 사회권을 위하여 나서야 할 때이다. 불교가 해야 할 일은 거대한 제국을 붕괴시키는 일이 아니다. 불교는 서구의 문명-서구 근대에 시작한 자본주의적 물질 문명-을 전환시켜야 한다. 카톨릭은 공산주의를 붕괴시켰지만, 불교는 자본주의 물질 문명을 뒤바꾸어야 한다. 이것이 역사가 불교에 부과하는 인류사적인 사명이다. 불교는 현대의 자본주의 물질 문명을 전환시킬 수 있는 하나뿐인 인류의 자산이다. 불교가 하지 못한다면 인류는 어디에도 구원의 전망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불교는 근대 서구의 자본주의적 물질 문명을 지양할 수 있는 철학적, 사회과학적, 실천적 대안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다. 화두를 통한 진리에의 접근 방식이나 인간의 지식에 대한 불교적 관점은 철학적 인식론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 그리고 서구 근대의 편협한 이성이나 합리성의 영역을 넓혀줄 뿐더러 합리적이지만 비인간적인 현대문명의 성격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불교의 연기법적 세계관은 관념론과 유물론으로 분리된 편협한 서구의 존재론적 세계관을 지양할 수 있다. 경제나 정치의 사회 과학적 영역에서도 불교적 세계관, 인간관, 사회관은 기존의 모든 사고 방식을 초월하고 지양할 수 있다.-그러나 불행하게도 불교의 경제학에 대하여 서구인인 슈마하 이상으로 발전시킨 사람은 없다.-이기주의가 아니라 사랑이, 물질적 욕망이 아니라 욕망으로부터 해방이 체제와 문명의 기본원리로 현실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것이 역사의 경향이기도 하다. 그것은 동양문명이 재해석되고 부활하는 형태가 될 것이다. 일찍이 토인비는 서구문명이 동양을 점령한 것은 새로운 시대의 서막에 불과하며, 더욱 중요한 역사의 내용은 ‘동양 문명의 반격’이 될 것이라고 통찰한 바 있듯이, 이제 그때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이제 진정으로 새로운 시대는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대의 소명을 다하려면 이제까지의 방식으로는 부족하다. 곧 현실을 떠나 평생을 산속에 은거하거나, 대중들에게 선과 깨달음과 하느님을 설교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체제와 문명의 논리를 전환시키고 재형성하는 문제에 직접 부딪혀야 한다. 그것은 종교적 메시지의 커뮤니케이션에 더하여, 위와 같이 철학과 사회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영역에 이르는 넓은 영역에까지 메시지를 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아가 직접적으로 현실에 참여하고, 종교 교단은 조직으로서 체제에 영향을 미치치 않으면 안 된다. 카톨릭이 공산주의 세계에 했던 역할이 이제 자본주의 세계와 그 문명에서 요구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저항이나 혁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 이미 혁명의 시대는 지나갔으며, 그것은 근대적 역사의 독특한 현상이다.- 새로운 시대는 다양한 조직이 참여하고 창조적인 지식과 정보의 커뮤니케이션에 의하여 변화하고 있다. 여기에 불교가 참여하고 주도적인 역할을 할 것이 기대되고 있는 것이다. 불교는 현대 인류의 집합표상에 충격을 가하고, 새로운 체제와 문명을 구현하고,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추진하는 중심적인 세력으로서 행동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말로 높은 수준의 창조적인 방편이 개발되어야한다.


고양이를 두고 싸우는 스님들을 앞에 두고 노스님이 칼을 들고 호통쳤다. 고양이에게 불성이 있는가? 대답하지 못하면 이 고양이를 잘라 버리겠다. 스님들은 대답을 못했고 고양이는 죽었다. 저녁 늦게 돌아와 이 질문을 받은 조주趙州 선사는 집세기를 머리에 이고 나갔다. 노스님은, 네가 일찍 돌아 왔다면 고양이는 죽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라며 한탄했다.


미륵불은 강림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 나 스스로가 미륵불이 되어야 함을 일러주는 이 이야기에서 불교의 시대적인 역할을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