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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해설 법성게 신해 - 무관
월간 海印 1992년6월[124호]
이다라니 무진보 以陀羅尼 無盡寶
장엄법계 실보전 莊嚴法界 實寶殿
궁좌실제 중도상 窮坐實際 中道床
구래부동 명위불 舊來不動 名爲佛
이 다라니 무진법문 끝이 없는 보배로서
온 법계를 장엄하여 보배 궁전 이루고서
영원토록 참된 법의 중도상에 편히 앉아
억만겁에 부동하는 부처라고 이르니라.
주위에 눈이 내리면 가야산은 너무나도 고즈넉해져서 기척이라곤 조금도 느끼지 못할만큼 평화롭다. 밤새 내리던 눈이 개여 햇살에 온 천지가 흰색으로 반짝이고 안개가 나뭇잎을 거슬러 올라 눈을 어지럽게 할 때도 높은 산과 낮은 골짜기, 긴 숲과 좁은 계곡 그 어느 곳에서도 겨울은 영원할 듯이 보인다. 깊고깊은 산속 짐승과 새들, 모든 삼라만상이 새봄의 기다림으로 미동도 없이 고요하기만 하다. 모든 것이 깊은 고요속에 잠겨 있었지만 움직이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바람이다. 바람은 고요함 속에서 잔가지들을 흔들어 깨운다. 때로는 잎이푸르던 소나무는 그 가볍던 눈조차 이기지 못하여 적막을 휘젓는 북풍에 그 가지가 부러지곤 한다. 지난 겨울 고요한 적막속에서 때때로 어지럽게 불던 삭풍도 탈진하여 계곡을 따라 내려가더니 동쪽에서 가라앉는다. 녹아내리는 여울물 소리와 참선과 간경에 숨을 돌릴 양으로 불전을 향하는 스님들의 미끄러지듯이 발을 옮기는 모양이 어우러지면서 만나고 일어나는 일이 멈추지 않음을 알리고 있다. 이제 여울은 멈추지 않고 곤두박질쳐서 남쪽 낙동강을 바라보고 험준한 가야산의 위세를 녹이듯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하늘과 땅은 이지러짐이나 모남이 없이 합치고 어우러져 저마다 심성을 화해시키고 있다.
봄이 되어 가야에서부터 해인사에 이르는 이십리 솔숲길에는 노란 개나리며 벗꽃이며 진달래가 어우러지고 있다. 무릉교를 지나 홍류동천은 힘찬 물소리가 콸콸대고 웅덩이에 어린 붉은 꽃잎은 소용돌이 속에 현란한 군무를 계속하고 있다. 짙푸른 솔숲에 솟아올라 서로 어깨를 맞대고 있는 기봉들에 밝고 흰 햇살이 내려 비치면 홍류동에서 피어난 안개는 서로 흩어지고 모이면서 매화 산정을 향해 소용돌이를 틀어 간다.
가야산 깊은 계곡 수림 사이에서 피어나는 솜털 안개는 지난 겨울의 춥고 고통스러웠던 살풍경을 감싸고 어루만지면서 먼 허공으로 흩어져 날아 오른다. 해마다 참을성 있게 기다리며 수많은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을 번갈아 맞이했다가는 이내 보내버리는 가야산 해인사는 이런 계절과는 상관없이 본디 그 모습이 언제나 푸르르고 산뜻하다. 처음 창건할 때 화엄경의 사상을 바탕으로 원종의 가람이 되었고, 몽고의 말발굽이 매몰차게 유린하던 고려의 국운을 되살린 팔만대장경이 옮겨져 왔고, 다시금 선조의 창의와 창조의 문화를 계승한 서른 두해째의 불사가 치루어졌다.
이 보배를 간직한 곳간은 부처님 세계에 있는 것도 아니고 중생계에 있는 것도 아니며 정계淨界나 염계染界에 있는 것도 아니어서, 하나하나가 그대로 뚜렷이 밝고 서로 비추어서 다함이없다. 그것은 모든 것을 그 안에 포섭하면서도 포섭되어 있는 모든 것이 통일되지 않음이 없다. 그것을 법칙성이라고 해야 할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일반적인 존재세계며 실존이며 정신이며 진여며 원각이며 실상이며 초월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기에 자연과의 소리나 빛과의 인식이 아니고 바로 자기와의 만남일 뿐이다.
짧은 한 순간이라도 주춤거리는 일이 없다. 사냥꾼이 짐승을 향하여 화살을 겨눈 뒤 시위를 놓듯이 사방으로 달려가고 또 오는 시간과 공간에는 실로 비슷한 일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온 법계를 장엄하여 보배궁전을 이루었다고 하는데, 그 실보전實寶殿은 본디 뚜렷이 갖추어 이루었기에 실답다 하고 무슨 말로도 표현할 수 없으므로 실이라고 한다.
법계를 곧잘 그물 구멍에 비유하기도 한다. 이른 새벽 숲길에 들어서면 아침햇살이 그물 구멍같은 나뭇가지를 뚫고 쏟아지듯이 인다라망因陀羅網은 그림자와 행상이 서로서로 거듭해서 다함이 없이 장엄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인데, 이 법계의 보배궁전은 가꾸고 꾸미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다. 법계는 온 우주와 삼계를 그 안에 갈무리하므로 우주와 삼계는 사람과 맞서지 않는다. 천당과 지옥이 나를 유혹하지 못하고 밉고 고운 정이 나를 정복하지 못한다. 그래서 언제나 이 해인삼매는 일승법계 안에서 아늑하고 고요하며 평화로울 뿐이다.
이러한 궁극의 실제인 중도를 의지로 삼아서 그 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법성해法性海에 깊숙히 들어가서 더이상 다다를 곳이 없는 것이다. 고요하고 긴 나룻터를 끊어서 범부다 성인이다 하는 경지를 벗어나 진실하거나 허망한 것이 없으며 함이 있는대로 걸리지 않기에 실다운 것이다. 일체의 범부와 성인이 몸담을 곳이 없으므로 제際라고 하며 어떤 이름도 붙일 수 없으므로 중中이라하고 삼승과 오성이 끊임없이 실천하므로 도道라 하고 궁극에 평등하여 억지를 부리지 않으므로 상床이라 한다.
해인삼매의 깊은 뜻에는 옛부터 다음과 같은 아홉 가지 부류의 사람들은 알아 듣지 못하는 경계가 있다고 하였다.
첫째는 범부이다.
둘째는 세상의 지혜를 지닌 사람이다.
셋째는 법상法相을 분별하는 사람이다.
넷째는 성문 연각이다.
다섯째는 공견空見을 가진 행자들이다.
여섯째는 산란한 마음으로 많이 듣기만 한 사람들이다.
일곱째는 변견邊見을 가진 중생들이다.
여덟째는 단견斷見을 가진 중생들이다.
아홉째는 상견常見을 가진 중생들이다.
이러한 아홉 가지 부류의 사람들은 서로 시기 질투하면서 “내 지혜가 훌륭하고 네 지혜는 아직 멀었다, 나만이 불법을 남김없이 안다”고 주장한다.
변견이란 극단적인 견해를 말하며, 단견은 극단적인 부정론을 가리키고, 상견은 극단적인 긍정론을 두고 한 말이다. 단견은 허무주의에 빠진 것이며 상견은 물질적인 실재론에 떨어진 것이다.그러므로 단견과 공견은 무론無論이라 하고 상견은 유론有論을 일컫는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이러한 두가지 극단을 극복하지 못한 채 논리를 펴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화장세계華莊世界는 물듬을 여의어 청정하므로 생각으로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영가스님은 “대천사계大千沙界 해중구海中漚요, 일체성현一切聖賢 여전불如電拂이로다.” 곧 모든 세계가 바다 가운데 거품이며 일체 성현은 번개의 번쩍임과 같다고 하였다. 어떤 존재도 독자성이 없음을 긍정하는 것이 본질적인 깨달음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불사문중佛事門中에는 불사일법不捨一法이라 하여 있는 그대로의 현상 자체를 진리의 현현으로 긍정하는 교화의 입장에서는 어떤 존재도 의미를 갖지 않는 것이 없다.
옛부터 불이라 이름하나 움직인 일이 없다. 불佛이 있든 없든 성性과 상相이 상주常住하여 낮은 데서 깊은 데로 이르름을 수행이라고 보지만, 이 법성게에서는 마치 침상에서 잠이 들어 있던 사람이 꿈속에서 서른 개의 역을 돌아다니다가 꿈에서 깨어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움직이지 않은 채 침대에 있었음을 아는 것으로 비유하여 말했다. 본래의 법성法性에서부터 삼십구를 거쳐 다시 법성에 이르기까지 움직임이 없는 오직 하나만을 비유한 것이다. 옛부터 끝없이 가도 본자리에 있고 끝없이 와도 떠난 그 자리에 있어 움직임이 없는 것을 부처라고 했다.
마치 날카로운 칼로 허공에 아무리 상처를 내려고 해도 상처를 낼 수가 없고 어떤 독약으로도 큰 바다를 더럽힐 수 없는 것처럼, 삼독三毒을 연기로 하여 삼제三際에 걸쳐 있게 되었으나 바로 무분별無分別을 얻은 것이다.
긴 겨울 동안 때때로 어지럽던 바람소리를 잠재우고 고즈넉함 속에 움직임을 일으키는 봄바람은 만물을 소생시키는 연기가 된 봄과 겨울에 부는 바람은 저마다 다르지만, 만물이 고즈넉한 고요와 번다한 움직임을 통하여 높고 낮음과 밝고 어두움까지 모두 포섭한 큰 수레 곧 일승一乘의 법계法界에 오르는 것으로 공덕이 된다.
이것으로서 삼십구 이백열자의 다라니를 끝맺는다. 법성원융에서 시작하여 명위불에 이르러 끝나는 이 한 편의 다라니는 화엄의 세계에서 표현하려는 내용을 남김없이 표현했음을 일러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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