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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통불법의 요체 (01) - 제1장, 수증의 제문제

화엄행 2011. 10. 9. 05:18

 

 

원통불법의 요체 (01)

제1장 수증의 제문제

안심법문(安心法門)

제1절 1. 돈수와 점수의 유래

제1절 2. 습마물 임마래

제1절 3. 육조의 돈오돈수

제1절 4. 보조의 돈오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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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심법문(安心法門) 

 오늘 우리 여러 출가사문(出家沙門)들을 만나게 되어서 대단히 반갑고 의의 깊게 생각합니다. 이번 법회는 우리들의 만남의 장()으로서 가장 큰 의의를 삼겠습니다.

   

부처님 법문(法門)의 대요(大要)는 안심법문(安心法門)입니다.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법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안락법문(安樂法門)이 되겠습니다.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자체가 인생고해(人生苦海)입니다. 인간 자체가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모두가 다 우주의 도리에 잘 맞지 않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인생고가 따르게 됩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아닌 다른 가르침은 우주의 도리에 100% 합리적인 가르침이 될 수가 없습니다. 설사 다른 종교나 철학도 지향점은 부처님 가르침과 유사(類似)하다 하더라도 완벽하게 우주 자체의 실상(實相)을 드러내지는 못했습니다. 따라서 부처님 가르침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인생고해를 벗어날 도리가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불법(佛法)은 안심법문이라 공부를 편안하게 해야 할 것인데 더러는 공부를 옹색하게 합니다. 그러한 것은 자기 존재에 대한 확실한 정견(正見)이 부족하고 또는 존재의 실상(實相)을 파악하는 지혜가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이해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우리 공부인에 있어서 특히 불법의 대요인 참선(參禪)에 있어서 여러 가지 병폐가 많이 있지마는 중요한 병폐를 들면은 암증선(暗證禪)이라, 공부 경계에 대한 불조의 가르침을 모르고 어두운 가운데서 암중모색(暗中摸索)하는 참선을 말합니다.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할 것인가? 내 본래면목(本來面目)은 대체로 어떤 것인가? 또는 수행 방편은 여러 가지로 많은데 어떤 방편을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 내 개인은 어떤 방편으로 공부를 해야 할 것인가? 이런 문제에 관해서 확실한 신조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안심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다, 현대 사회가 오죽 복잡합니까. 한 걸음만 밖에 나가면 불법(佛法)과는 정반대의 현상이 전개되어 있습니다. 또한 같은 불교권 내에서도 불법의 해석을 가지각색으로 합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근본불교(根本佛敎)를 공부한 사람들은 중국이나 한국이나 일본에서 전개된 이른바 대승불교(大乘佛敎) 또는 조사선(祖師禪) 등에 대하여 이해를 잘 못합니다. “근본불교만이 정통불교인 것이지, 중국이나 한국이나 이쪽은 정통불교가 못된다”고 생각들 합니다.

그런가 하면, 순 대승권인 중국이나 한국, 일본 등의 불교인들은 “스리랑카나 태국이나 버어마, 라오스 등의 불교들은 아주 소승법이기 때문에 참다운 부처님의 본래면목을 밝히지 못했다”고 폄하(貶下)를 합니다.


또는, 대승권내에서도 각 종파가 있지 않습니까. 화엄경(華嚴經)을 주로 한 사람들은 화엄종을 세우고, 법화경(法華經)을 위주로 한 사람들은 법화종을 세우고, 하지 않습니까, 또는 참선을 위주한 사람들은 다 몰라서 “참선만이 다이고 다른 교종(敎宗)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 삼장(三藏) 12부경(十二部經)이 모두가 휴지에 불과한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는 이도 있습니다. 살불살조(殺佛殺祖)라,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이고, “조사법이 훨씬 위고 여래법(如來法)은 아래다” 이렇게 빗나간 극언도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혼란 무궤도한 때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개인적으로도 바른 이해, 바른 반야지혜가 있지 못하면 우선 내 개인의 바른 공부도 할 수가 없고 남한테 바른 불법을 제시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올바른 공헌을 할 수가 없습니다. 세지변총(世智辯聰)이라, 많이 배워서 이것 저것 알기는 많이 알지마는 올바른 정견이 아니면 바로 못 나가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좀 안다 하더라도 세지변총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번 법회는 이런 문제에 관해서 제가 감히 명확한 해답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만, 여러 젊은 스님네들이 참선이나 기도에 정진하다가 여러 경계에 부딪칠 때는 답답하기 그지없는데 오랜 동안 참선정진한 스님께서 다만 며칠이라도 법문을 해주면 좋겠다고 요청을 하였고, 또 한 가지는 여러분들에게 드린 금강심론(金剛心論)에 대해서도 중요한 몇 대문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금강심론은 금타(金陀 1898-1948)스님께서 원래 원고를 남겨 놓으신 것 인데 제가 간추려서 편집을 했습니다만, 제가 생각할 때에는 현대 과학만능 시대에 있어서 꼭 참고해야 할 중요한 문헌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는 별것도 아니면서 정도 이상의 대접을 받는 것도 있고 또는 귀중한 보배이면서도 대접을 받지 못하는 가르침도 있지 않겠습니까, 인물이나 또는 교리나 마찬가지입니다만, 제가 생각할 때는 지금에 와서 금타 스님같이 위대한 선지식(善知識)이면서도 제대로 대접을 못받는 분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에 꼭 필요한 것이 불교의 이른바 회통불교(會通佛敎)로서 불교의 경직된 분파적인 것을 지양하고, 세계 종교의 비교 종교학적 연구와, 교섭과 화해를 통한 융합의 문제입니다. 다종교(多宗敎)는 대체로 어떻게 교섭해야 할 것인가? 다른 종교의 가르침을 어떻게 수용해야 할 것인가? 그런 문제들을 지금은 피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지구촌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런 가운데서 다른 종교, 다른 교리, 다른 주의 주장과 서로 화해를 못할 때에는 인류 문화적으로나 개인적인 생활에나 공헌을 할 수가 없습니다.

또 물질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는 이데올로기(Ideologie)적으로 말하면 관능적(官能的) 유물주의(唯物主義)입니다. 별다른 규제가 없이 인간 생활의 풍요와 편리를 위해서 자유방만하게 사는 생활이 간단히 말하면 자본주의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공산주의는 어떤 사회인가? 이것도 역시 이데올로기적으로 말하면 과학적 유물주의입니다. 그 과학이란 부처님 가르침같은 진리에 입각한 합리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이른바 유물사관(唯物史觀), 유물정신으로 이루어진 과학적 사회주의입니다. 인간의 심리 작용도 물질의 반사 현상이고, 역사의 추진력도 물질이고, 생산력과 생산 관계, 이런 저런 모두를 물질이 규정하고 물질이 지배한다는 것이 이른바 공산주의 사회주의의 이론체계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그런 편견들이 그대로 지속되어 간다면 얼마만큼 우리 인간을 괴롭히게 될 것인가? 도리에 입각하지 않고 우주의 참다운 진리에 따르지 않는 것은 결국은 파멸되고 맙니다.


부처님의 법문은 우주의 실상 그대로 말씀하신 법문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진실된 가르침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절대로 진리와 다른 말씀이 없습니다. 또 부처님 가르침은 우리 중생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즉, 중생을 속이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금강경(金剛經)에도 불설(佛說)은 여법(如法)한 말인 여어(如語)요, 조금도 오류가 없는 진실된 말(眞實語)이요, 진리와 다르게 말씀하지 않는 불이어(不異語)요, 우리 중생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거나 속이지 않는 불광어(不광語)라 하셨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오직 진리이기 때문에 천지 우주는 이렇게 되나 저렇게 되나 필경에는 모두가 다 우주 본연의 도리인 불법(佛法)에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형체가 이루어지는 성겁(成劫)이나 또는 중생이 사는 주겁(住劫)이나, 파괴가 되는 괴겁(壞劫)이나 또는 파괴가 다 되어 버려서 허공무일물(虛空無一物)이라 아무것도 없는 공겁(空劫)이나, 이런 것도 그냥 그렁저렁 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우주의 도리에 따라서 움직입니다. 아무리 힘이 세다 하더라도 우주가 파괴되어 가는 괴겁의 길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도 못막습니다. 부처님은 바로 우주의 도리 자체이기 때문에 막을 필요가 없겠지요.

따라서 어떤 법이든지 간에 불법을 떠난 것은 모두가 다 종말(終末)이 바르게 좋은 쪽으로 끝날 수가 없습니다. 필연적으로 파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과(因果)의 도리입니다.

   

그런 증좌(證左)로 1917년 10월 혁명으로 러시아 볼세비키(Bolsheviki)가 나왔지마는 겨우 70여년 만에 무너졌습니다. 그렇게 무시무시하게 정적(政敵)을 숙청하고 탄압하고 우리 인간정신의 존엄을 말살시키려 했어도 결국지속을 못합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 참상을 여실하게 보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자본주의 사회는 어떠한가? 그저 부자는 마음대로 더욱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빈익빈(貧益貧)이라, 더욱 더 가난해지는, 이런 무차별 불평등의 사회는 그대로 지속할 것인가? 이것도 아무리 꿰매고 수정을 가한다 하더라도 오랫동안 지속할 수는 없습니다. 우주의 도리 바로, 불법(佛法)에 따라야만이 진정한 사회주의 참다운 민주주의가 이룩되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 승가(僧伽)생활,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는 인간의 진정한 생활 표본입니다. 승가 생활의 근본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무아(無我) 무소유(無所有) 생활 아니겠습니까. 무아라 하면 불교를 믿는 분도 “아, 본래는 무아가 아닌데 우리가 서로 충돌하고 갈등을 일으키고 투쟁을 하니까 부처님께서 방편으로 무아라는 말씀을 하셨겠지!” 이렇게 천박히 생각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래로 무아입니다.

본래로 무아일 때는 또 필연적으로 무소유가 안될 수가 없습니다. 사실대로 말씀하신 부처님 법문의 요체(要諦)입니다. 무아가 안되고 무소유가 안되면은 허두에서 말씀드린 이른바 안심법문, 공부를 편안하게 하고 수행을 편안하게 하고 우리 생활도 편안하게 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반야바라밀을 통하지 않고서는 참다운 안심법문이 될 수가 없습니다.

   

달마(菩提達磨 Bodhi dharma ?-528) 스님 때부터서 6조 혜능(慧能 638-713)스님 때까지를 순수한 선시대 이른바 순선시대(純禪時代)라고 합니다.

우리 공부하는 분들은 6조 이후의 선지식들 법문도 물론 참고로 많이 하여야 합니다마는 우리가 가장 권위있는 전거(典據)로 의지할 것은 뭐라해도 삽삼조사(삽三祖師)인 부처님부터서 6조 혜능 스님까지 이루어진 선()사상은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안심법문입니다. 안심법문은 꼭 명심해 두어야 “내가 지금 하는 공부가 정말로 내 마음도 편안한 안심법문인가” 이렇게 자기 스스로 점검하고 제 말씀을 들어 주시길 바랍니다.

   

조사어록(祖師語錄)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안심법문의 시초법문은 혜가(慧可 487-593) 스님과 달마 스님이 거량(擧揚)한 법문이 아니겠습니까.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본래 무아라고 생각할 때에 달마와 나와 둘이면은 무아라고 할 수가 없고 석가와 나와 둘이면은 무아라 할 수가 없습니다. 또는 2조 혜가와 나와 둘이면은 역시 무아라고 할 수가 없겠지요. 따라서 혜가 스님과 달마 스님의 거량도 역시 자기 문제로 우리가 수용을 해야 합니다. 분명히 자기 문제입니다.

   

진리라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를 떠나 있습니다. 내가 없다고 생각할 때는 이것인가 저것인가 하는, 법이라는 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른바 실아실법(實我實法)이라 하여 내가 있고 법이 있다는 것은 범부소견입니다.

‘나’라는 실다운 것도 없고, 이것이다 저것이다 좋다 궂다하는 시비분별의 법도 원래는 없습니다. 성자와 범부의 차이는 무엇인고 하면, 성자는 무아, 무법입니다. 곧 아공(我空) 법공(法空)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어떠한 문제나 자기 문제와 차이가 없습니다. 지금 어느 누가 강도를 하고 잔인무도한 살상을 했다 하더라도 그 사람 문제와 내 문제가 관련성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저 미국에서 태어나는 어린애나 서독에서 태어나는 어린애나 중국에서 죽어가는 노인네도 역시 우리하고 무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혜가 스님이 달마 스님을 폭설 중에 찾아가서 법문을 청했지마는 달마 스님이 돌아보지도 않자 자기 팔을 베어 바치고서 신표(信標)로 내세우지 않았습니까. 달마 스님이 신표를 받은 다음에야 돌아보았습니다. 왜 달마 스님같은 자비스런 분이 혜가 스님이 눈 속에서 꼬박 밤을 새우는 데도 거들떠보지 않았던가? 우리는 이런 문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잘못 생각하면 달마 스님이 굉장히 잔인하고 인정이 없다고 생각이 됩니다만 우리는 그렇게 볼 수는 없는 문제 아닙니까, 불법(佛法)은 그런 소소한 인정으로는 얻을 수가 없는 가르침 아니겠습니까, 약득획보(若得獲寶)인댄 방하피낭(放下皮囊)이라, 만약 마니보주같은 보배를 얻을려고 할진댄 가죽 주머니 같은 이 몸뚱이를 버리라는 말입니다. 전식득지(轉識得智)라, 우리 분별식(分別識)을 굴려 뒤집어 버려야 참다운 반야 지혜, 본래면목 자리를 얻는다는 말입니다. 이렇듯, 그냥 상대적인 여느 생각으로 해서 얻을 수가 없습니다. 먹을 것 다 먹고 할 짓 다하고 세속적인 이른바 속체(俗體)의 범주 내에서 속물근성으로 생활하다가는 무상 대도를 얻을 수가 없는 것 입니다.

달마 스님 같은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 한 분이 “아 저 혜가는 그대로 가만히 두면 자기 팔을 자르겠구나” 이런 것을 예상을 못했겠습니까, 공부 분상에서는 팔 하나 그것이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팔 하나를 자르는 그 마음 태도가 자기 몸뚱이를 몽땅 바치는 것을 상징합니다.

   

정말로 우리들은 어떠했는가? 우선 저도, “제 평생 어떻게 살아왔는가” 생각할 때는 참괴무참(慙愧無慙)합니다. 무던히 애는 쓴다고 했지마는 그래도 역시 부끄러운 마음, 한탄하는 마음뿐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과연 내가 공부할 때에 하찮은 이 몽뚱이를 몽땅 버리는 각오가 있었던가” 하고 생각할 때는 그랬다고 장담을 할 수가 없습니다. 초범증성(超凡證聖)이 목격비요(目擊非遙)라, 범부를 넘어서 성자가 되는 그 길이 눈 깜짝할 동안 있는 것이고 절대로 멀지가 않는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오재수유(悟在須臾)어니 하번호수(何煩皓首)리오, 잠깐 동안에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니 어찌 센머리 날 때까지 수고롭게 할 것인가?

   

혜가 스님이 달마스님한테 “제 마음이 괴롭습니다. 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십시요.” 했습니다. 이것은 이른바 안심법문의 기연(機緣) 아니겠습니까. 선()의 기본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따라서, 안심법문이 확실히 자기 것이 못되면은 참선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근본불교 또는 대승불교 또는 조사선 도리, 이런 말 때문에 구속 받을 필요가 절대로 없습니다. 그런 말들은 과거 선지식들께서 그때그때 중생의 근기 따라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어느 경우에는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버리지 못한 곳이 지금 우리 한국 불교 상황입니다.

다행이 우리 젊은 분들은 논리학도 공부하고 또는 철학이나 물리학도 다 공부한 분들이기 때문에 시대적인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이루어진 문제에 있어서 진리의 근본 도리, 근간(根幹)은 절대로 버릴 수가 없다고 하더라도 지엽(枝葉)적인 문제는 꼭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참선이 됩니다.

   

혜가 스님이 “제 불안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소서.” 하니, 달마 스님께서 “그대 마음을 가지고 오너라 그러면은 내가 편안하게 해주리라” 하였습니다.

혜가 스님도 40대가 넘도록까지 부처님 공부를 많이 하였기 때문에 그런 저런 도리는 이론적으로는 대부분 다 알았겠지요. 그러나 우리 중생들의 근기를 위해서 새삼스럽게 한 뜻도 분명히 곁들여 있습니다.

“제 마음을 아무리 찾아봐도 마음 간 곳이 없습니다. 마음의 자취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은 어떠한가? 우리는 법의(法衣)를 입고 있으면서도 남을 미워도 하고 좋아도 하지 않습니까, 클래식 음악이 좋다 또는 재즈 음악이 좋다 하지만 이런 것은 하나의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소리 아니겠습니까, 얼굴이 잘나고 못나고 이것은 하나의 물질적인 색이 아니겠습니까. 색과 소리에 얽매이면 참다운 도리가 아니라는 것이 금강경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우리 생활은 어떻게 하고 있는 것인가? 옷을 좀 잘 입으면 어떻고 못 입으면 어떻습니까. 너무 많이 먹고 너무 잘 먹고 너무 잘 입고 너무 많이 놀려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큰 병폐 아니겠습니까. 이런 것은 우리 몸에도 마음에도 아무런 도움이 안됩니다.

   

장차 설명을 좀 드리겠습니다만 겁초(劫初)의 인간은 맨 처음에 성겁(成劫)이 이루어지고 주겁(住劫)이 되어서 광음천(光音天)으로부터 중생이 내려온다고 합니다. 광음천은 욕계처럼 물질적인, 오염된 세계가 아닌 광명세계(光明世界)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광음천 중생들은 몸이 광명신(光明身)이기 때문에 무엇을 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천안통(天眼通)을 해서 우주를 다 비춰보고 천이통(天耳通)을 해서 우주의 모든 소리를 다 듣고 또는 신여의통(身如意通)을 해서 삼천대천 세계를 마음대로 내왕하게 됩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외도의 신통에 얽매여 있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신통묘지(神通妙智)는 바로 부처님 말씀입니다. 저는 부처님 말씀을 옮길 뿐입니다.

 만약 우리 인간의 능력이 한계가 있다고 하면 불법(佛法)이 아닙니다. 모두를 다 알 수가 있고 모두를 다 할 수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본래면목은 그런 무한의 공덕장(功德藏)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성은 존엄스러운 것입니다. 본래면목 자리가 무엇을 알다말고 몸으로 하는 짓이 한계가 있다면 불법이 일체종지(一切種智)라는 부사의한 공덕은 여법한 말씀이 못될 수밖에 없습니다.

   

너무나 허두 말씀이 길어지면 시간이 제한되기 때문에 우선 안심법문, 그저 마음 편안히 하는 법문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마음을 편안히 하는 것은, 우주의 도리대로 본래 내가 없는 무아이기 때문에 내가 없다고 분명히 생각해야 하고 내 집이나 내 소유물이나 내 절이나 내 종단이나 이런 것도 본래가 없다고 생각해 버리면 참 편합니다. 자기 문중이나 절 때문에 애쓰고 싸울 필요도 없는 것이니 말입니다.

일체 만유가 평등 무차별의 진여법계(眞如法界)인데 우리 중생들의 망정(妄情)으로 잘못 보고 그릇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1장 수증(修證)의 제문제(諸問題)

 제1절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 

1. 돈수(頓修)와 점수(漸修)의 유래(由來)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여러 가지 문제 의식 가운데 특히 우리 젊은 불자(佛子)들께서 궁금히 생각할 뿐만 아니라 불교학계(佛敎學界)에서도 논쟁거리가 되어 있고 또 다른 나라에서까지도 불교나 동양 철학을 공부한다는 사람들은 으레 깨달음과 닦음의 문제는 가장 중요한 관심사인데 그래서 우선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에 대해서 말씀하고자 합니다. 그건 왜 그런고 하면, 어떻게 닦아야 할 것인가? 또는 깨달음이란 어떤 것인가? 하는 깨달음과 닦음의 문제라는 것은 우리 불자들로서는 일대사(一大事) 인연으로서 우리가 꼭 해결하고 넘어가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너무나 문제가 커서 감히 제가 감당할 수 있는 힘은 없습니다만, 그런대로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에 관한 문제는 근래에 조계종 종정을 오랫동안 지내시고 선지식으로 추앙받는 성철(性徹) 스님께서 저서인 선문정로(禪門正路)에서 보조(普照) 스님의 돈오점수설을 비판하므로써 세상의 관심사로 등장을 한 것 같습니다.

보조(普照知訥 1158-1210) 스님은 약 800년 전에 계셨던 분입니다. 한국 불교가 선교 일치(禪敎一致)의 회통 불교(會通佛敎) 분위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직까지 돈오점수에 대하여 이의(異議)를 제기한 분은 없었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전문학자가 아닌 참선 수자(修者)이기 때문에 교학적(敎學的)인 분석에도 능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런 복잡 미묘한 논쟁에 끼어 들고 싶지도 않습니다만, 공부하는 여러분에게 혹시 참고가 될까 하여 소견을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잘못 생각하면 돈오점수는 보조 국사가 처음으로 말씀하였고 돈오돈수는 성철 스님께서 말씀하였다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그 연원(淵源)부터 밝혀보면, 돈오돈수도 역사적으로 분명히 권위있는 말씀이고 돈오점수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보조 스님께서는 비단 한국 불교역사상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대선각자(大先覺者)로 추앙을 받아온 분이며 성철 스님께서도 우리 종단의 상징인 종정 스님으로서 깊은 존경을 받는 분 아닙니까? 그분들의 위상에 다소라도 누를 끼쳐서는 안된다는 염려스러운 마음 입니다. 따라서, 우선 이렇게 생각할 때에 보조 스님이 그르다 또는 성철 스님이 잘못 해석했다고 함부로 말할 수가 없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문제에 있어서 권위있는 인용을 하기 위해서 조사어록(祖師語錄)에 의거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1장 수증(修證)의 제문제(諸問題)

 제1절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

2. 습마물(什麽物) 임마래(恁麽來)


   

습마물 임마래라, 십()을 송나라 속음(俗音)으로 하면 습이라 합니다. 습마물은 무엇이란 뜻이고 임마는 어떻게, 어찌해서란 뜻으로 습마물 임마래란 곧 “무엇이 어떻게 이렇게 왔는가”라는 말입니다.

   

나는 대체로 무엇인가? 또는 너는 대체로 무엇인가? ‘이 무엇’ 이란 문제는 사실은 따지고보면 우리 불교 전부를 들어서 얘기하는 말씀이나 같습니다.

조그만 티끌 하나도 잘 보면은 반야지혜(般若智慧)고, 바로 부처님의 청정법신(淸淨法身)인 것이고 잘못 보면 하나의 티끌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티끌에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중생이 잘못 보는가, 잘 보는가에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깨닫는가 깨닫지 못하는가에 차이가 있을 뿐이지 본래 물() 자체에는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따라서, 나란 대체로 무엇인가? 이것만 해답을 바로 내려버리면 모든 문제의 풀이가 다 된다는 말입니다.

습마물 임마래는 어디에 그 연원이 있는가 하면,


南岳懷讓 六祖慧能 初相見時, 六祖問 什麽處來 曰嵩山來 祖曰 什麽物 恁麽來


남악 회양(南岳懷讓 677-744) 선사는 6조 혜능 대사로부터 법을 받은 정통 조사 중 한 분이십니다. 남악 회양이 6조 혜능 스님에게 맨 처음에 뵐 때 6조가 묻기를 “그대는 대체 어디서 왔는고?” 그러니까 남악 회양 선사가 “숭산에서 왔습니다.” 숭산은 그 당시에 노안(老安 또는 慧安 582-709? 五祖 弘忍法嗣)대사가 중생을 제도하였던 곳입니다. 그러니까 6조 혜능 대사가 말씀하시기를  “습마물 임마래요?”

그때의 말씀이 제가 표제로 낸 습마물 임마래입니다. 무엇이 어떻게 왔는고? ‘이뭣고’ 선()의 화두(話頭)도, 원래는 여기가 연원이 있습니다. ‘그 무엇인가? 내가 무엇인가?’ 에는 나() 자체가 천지 우주와 같이 연기법으로 중중무진(重重無盡)으로 관계가 있기 때문에 ‘그 무엇인가?’ 에, 그 가운데는 일체 존재가 다 들어갑니다.

따라서 ‘이뭣고’ 선()할 때에 이른바 ‘시삼마’(是甚?俗音)할 때는 ‘이뭣고’ 이것이, 바로 내가 무엇인가? 내 본래면목(本來面目)은 무엇인가? 이렇게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금강경오가해서(金剛經五家解序)에 6조 스님의 해석이 있지 않습니까. “나한테 한 물건이 있으되 하늘을 바치고 땅을 괴고, 밝기는 해와 달보다 밝고 검기는 칠보다 검고, 이러한 것이 나와 더불어 있지만 미처 거두어 얻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가?” (有一物 無頭無尾 無名無字 上柱天下柱地 明如日黑似漆 常在動用中 動用中 收不得者 是甚麽)

이와 같이, 본래면목이 무엇인가? 해야지, 그냥 상대 유한적인 것 가지고서 이것인가 저것인가 하면은 그때는 화두가 못되고 참선이 못됩니다. 분명히 습마물 임마래가 되어야 화두가 됩니다.

   

원래, 원문대로 하면 그 대답을 남악 회양 선사가 못했습니다. 그냥 “숭산에서 왔습니다. 어느 스님을 섬기다가 왔습니다” 이렇게 해서는 참다운 본래적인 문답이 안되겠지요. 그런 대답을 감히 6조 혜능 선사 선지식 앞에서 할 수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남악 회양 선사는 8년 간이나 6조 혜능 대사를 시봉하면서 부단히 수련을 거친 뒤, 자기 본 성품을 깨닫고 나서 혜능 대사께 다시 나아가 “이제는 제가 얻은 바가 있습니다.” 하고 말씀을 드리니까 “그럼 한번 말해보지”

6조 혜능 대사의 말씀 따라서 남악 회양 선사가 대답을 한 말씀이


曰 說似一物卽不中 六祖問 還可修證否 讓云 修證不無 染汚卽不得 六祖曰 只是不染汚 諸佛之所護念 汝亦如是 吾亦如是

-傳燈錄南嶽章- 


“설사일물 즉부중(說似一物卽不中)이니다” 설사 하나라고 말씀드리더라도 맞지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어떻게 말로는 능히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의 뜻입니다. 진리란 바로 시공(時空)을 초월하는 것이고 인과율(因果律)을 넘어선 것인데 어떻게 제한된 인간의 말로서 표현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6조 혜능 스님께서 다시 묻기를 “환가수증부(還可修證否)아?” 그러면은 도리어 앞으로 더 닦고() 증()할 것이 있는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 깨달아 버렸으니까 다시 닦을 것이 없으면 없다고 해야 하겠지요. 이렇게 6조가 물을 때는 벌써 마음으로 인가(印可)를 한 것입니다.

회양 선사가 대답해 드리기를 “수증불무(修證不無)나” 닦고 증하는 것이, 증명하는 것이 없지는 않습니다마는 “염오즉부득(染汚卽不得)이니다” (거꾸로 오염이라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오염즉부득이라) 이것이 오염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오염이란 본래 평등무차별(平等無差別)의 자리, 일여(一如) 평등의 진리를 차별심을 두고서 자타(自他), 시비(是非), 고하(高下), 계급(階級)을 논한다는 말입니다. 원래 내가 없는 것을 있다고 하고, 본래 성품에는 차서(次序)가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 분상에서 중생견(衆生見)으로 자타, 시비, 계급, 차서가 있는 것이지 무명(無明)을 떠난 자리에서는 그것이 없습니다. 높낮이도 없고 계급적인 차별도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깨달은 분상에서는 마땅히 이것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높낮이가 있고 나와 남이 있고 또는 계단을 밟아가는 차서가 있다고 생각하면 옳지가 않습니다. 이 “염오부득(染汚不得)”이라는 말을 깊이 명심해 두시길 바랍니다. 조사어록을 보면 이런 대목이 많이 나옵니다.

   

“염오즉 부득이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니까 6조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다만 바로 불염오(不染汚) 이것이 제불지소호념(諸佛之所護念)이라” 모든 부처님이 지키고 억념(憶念)하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즉 진리에 합당하니까 모든 부처님이 이것을 옳다고 긍정하고서 지키신다는 말입니다.

“깨달음을 얻은 뒤에 닦음도 있고 증()함도 있지마는 다만 오염을 시키지 않고 곧 고하, 시비, 계급을 논하지 않고서 닦는 것이 제불이 호념하는 바라, 그대도 역시 그렇고 나도 역시 그러하도다”  전등록(傳燈錄) 남악장(南岳章)에 있습니다.

   

남악 회양 선사가 깨닫지 못했으면 이런 말씀을 할 수 없습니다. 비록 깨달았다 하더라도 습기(習氣)까지 몽땅 떼어버리는 완벽한 깨달음이 아직은 못됐기 때문에, 닦음은 또다시 있어야 하고 또한 수증(修證)에 깊고 옅은 심천(深淺)이 있기 때문에 마땅히 닦음이 있긴 있지마는, 그것을 높다 낮다 또는 보살 몇 지()라든가 하는 것을 관념에 두어서는 참다운 무염오수행(無染汚修行)이 못됩니다. 우리는 이런 자리를 분명히 느껴야 합니다.

무염오수행이란 것은 분명히 느끼지 못하면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돈오돈수라든가 돈오점수에 관해서 판단의 착오를 일으킵니다. 이것은 굉장히 미묘한 문제로서 논쟁거리가 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신중하고 허심 탄회한 마음에서 깊이 통찰해야 합니다. 

 

     제1장 수증(修證)의 제문제(諸問題)

 제1절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  

3. 육조(六祖)의 돈오돈수(頓悟頓修)


   

돈오돈수(頓悟頓修)는 우리가 흔히 상식으로 알 듯이 성철 스님이 맨 처음에 말씀한 것이 아니라 이미 육조단경(六祖壇經) 제7 남돈북점장(南頓北漸章)에 나와 있습니다.

단경(壇經) 자체도 문제는 분명히 있습니다. 돈황본(敦煌本)이라든가 혜흔본(惠昕本)이나 종보본(宗寶本)이나 덕이본(德異本)이 다 각기 차이가 있는 것을 보더라도 문제가 있다는 증좌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래도 역시 우리가 선()하면 육조단경을 권위있는 전거(典據)로 안할 수가 없습니다.

단경 제7 남돈북점장에는 주로 하택신회(荷澤神會 685-760)대사가 북종(北宗)을 비판하고 남종(南宗)을 세우는 남종정시비론(南宗定是非論)의 논쟁같은 말씀이 보입니다. 이른바 남쪽인 6조 대사는 문득 깨닫는 법인 돈교(頓敎)라고 찬양하고 북쪽 신수(神秀 ?-706) 대사는 점차로 닦아나가는 점교(漸敎)로서 본질적인 가르침이 미처 못된다고 비판하는 내용입니다.


壇經第七 南頓北漸章, 師曰 無非 無痴 無亂 念念般若觀照 常離法相 自由自在 縱橫盡得 有何可立 自性自悟 頓悟頓修 亦無漸次 所以不立 一切法 諸法寂滅 有何次第

  

단경 제7 남돈북점장에 6조 혜능 스님의 말씀이 무비(無非) 무치(無痴) 무란(無亂)이라, 그릇됨이 없고 어리석음이 없고 어지러움이 없다는 것은 내나 계(), 정(), 혜() 삼학(三學)을 말한 것으로, 그릇됨이 없는 것은 바로 계율로 말하고 어리석음이 없으니까 지혜를 말하고 어지러움이 없으니까 선정을 말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계, 정, 혜 삼학을 닦아서 염념반야관조(念念般若觀照)라, 생각생각에 반야의 지혜를 관조한다는 말입니다. 반야의 지혜는 제법공(諸法空) 지혜입니다. 무아, 무소유의 지혜입니다.

생각생각에 제법공 지혜를 닦아나가면서 상리법상(常離法相)이라, 항상 모든 법이 실제로 있다는 상을 여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할 때는 자유자재 종횡진득(自由自在 縱橫盡得)이라, 아무런 막힘이 없이 자유자재하고 종횡으로 모두를 다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반야로 비추어 보아 모든 법이 있다는 실아ㆍ실법(實我實法)을 떠나서 즉 아공, 법공(我空法空)이 되어서 볼 때에는 자유자재하고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두를 다 얻는 것이기 때문에, 유하가립(有何可立)이리오, 무엇을 새삼스럽게 세울 것인가?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좋다 궂다 하면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겠지만, 평등무차별의 자리에서 볼 때는 무엇을 어떻게 세울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일진법계(一眞法界)라, 천지 우주가 바로 부처님 몸인데 어떻게 어디에다가 무엇을 세우겠습니까?

   

자성자오(自性自悟)면 돈오돈수(頓悟頓修)라, 본래 내 성품을 내가 스스로 깨달아 버렸다는 말입니다. 나라고 생각할 때 이 몸뚱이가 참 나가 아니지 않겠습니까, 스스로 자기 성품을 깨달으면은 돈오돈수라.

여기에 돈오돈수의 말씀이 있습니다. 제가 널리 못봐서 그 이전에는 잘 모르겠으나 이것이 처음이라 생각합니다. 6조 혜능 스님 말씀으로 분명히 돈오돈수가 있습니다.

돈오돈수하니 역무점차(亦無漸次)라, 돈오돈수가 되었으니 역시 점차가 없다. 순서가 없고 높고 낮고 또는 어떠한 계급적인 차별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소이불립 일체법(所以不立 一切法)이라, 어느 한 가지 법도 세울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제법적멸(諸法寂滅)하니 유하차제(有何次第)리오, 제법이 본래 적멸해서 하나의 번뇌도 없거니 어떻게 차제를 세울 것인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제1장 수증(修證)의 제문제(諸問題)

 제1절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  

4. 보조(普照)의 돈오점수(頓悟漸修)


   

그러면 요새 돈오점수(頓悟漸修)파라고 비판하는 보조 스님은 어떻게 말씀했는가? 보조어록(普照語錄)에 있는 보조 스님의 돈오에 대한 해석입니다.

 

頓 悟

凡夫迷時 四大爲身 妄想爲心 不知自己靈知是眞佛也..............一念廻光 見自本性 而此性地 元無煩惱 無漏智性 本自具足 卽與諸佛 分毫不殊 故云頓悟也

-普照語錄- 


“범부가 미혹(迷惑)할 때는 지, 수, 화, 풍 사대(四大)를 몸으로 하고 망상을 마음으로 한다.” 우리 중생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대(四大) 원소로 합해진 이것을 자기 몸이라고 하고 자기 망상을 자기 마음이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차별을 떠나서 신령스럽게 깨달은 자기 마음이 바로 참다운 부처임을 미처 모르다가 밖으로 향하는 대상적인 생각을 돌이켜서 자기 본성을 볼 때에, 견성한 자리에서 볼 때는 원래 번뇌가 없고, 번뇌에 때묻지 않은 지성(智性)이 본래 스스로 원만히 갖추어져 있다. 그리고 이 자리는 바로 부처와 더불어서 눈꼽 만큽도 차이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자리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하고 무량공덕을 갖춘 자리나 삼세제불의 성품공덕이나 조금도 차이가 없다, 깨달아서 얻은 그런 자리란 것은 본래에 있어서는 조금도 차이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아는 것이 바로 돈오(頓悟)라 한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보조 국사도 단경(壇經)에서 말하는 돈오의 도리를 분명히 밝힌 분이라고 볼 수가 있겠지요. 보조 국사는 6조 대사 훨씬 뒤에 나신 분이기 때문에, 단경도 숙독해서 많이 보셨고 또 단경을 대혜어록(大慧語錄)과 더불어서 가장 중요한 전거로 삼았습니다. 그러니 돈오의 뜻 정도를 모를 리가 만무하겠지요.

그렇다면 보조가 주장하는 점수(漸修)는 무엇인가? 돈오를 알았으면 어째서 또 점수를 말했던가? 보조가 점수를 말한 대목입니다.


漸 修

頓悟本性 與佛無殊 無始習氣 難卒頓除 故依悟而修 漸熏功成 長養聖胎 久久成聖 故云漸修也

- 普照 -

 

돈오본성(頓悟本性)이면 여불무수(與佛無殊)나, 문득 자기 본성을 깨달으면 부처와 더불어서 조금도 차이가 없지마는, 무시습기(無始習氣)라, 과거 숙세 무시(無始) 이래로 우리가 익혀 내려온 번뇌의 습기가 있다는 말입니다. 부처와 나와 둘이 아니고 천지와 더불어서 둘이 아니라는 그런, 때묻지 않은 진리를 분명히 느끼고 깨달았지마는 가사, 우리가 풀을 뽑지 못하고서 우듬지만 베어버리면은 그냥 다시 또 뿌리가 나오듯이, 이것이 구생기(俱生起)번뇌 아닙니까, 우리가 금생에 나와서 보고 듣고 생각하고 배우고 이런 것은 분별기(分別起)번뇌로서, 분별기번뇌는 물론 단박에 끊어졌다 하더라도 구생기번뇌는, 전생과 더불어 지어온 본능적인 번뇌는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큰스님들도 역시 법은 분명히 아는데 행위로 볼 때에는 문제가 있는 분도 있습니다. 그것은 습기를 미처 못 녹인 때문입니다. 깊은 선정(禪定)을 미처 얻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해탈에 있어서 꼭 지혜해탈(智慧解脫), 선정해탈(禪定解脫)을 분명히 구분하여 생각해야 앞으로 공부하는데 방황하지를 않습니다. 지혜해탈과 선정해탈을 분명히 모르면 암증선이라, 암중모색을 합니다.


저는 그런 것을 여러 군데서 봤습니다. 일본 선서(禪書)에서 보면, 중흥조라고 할 수 있는 그런 분도 역시 암중모색하는 대목이 있다는 말입니다. 일본 임제종의 중흥조라고 하는 백은(白隱 1685-1786)선사는 선관책진(禪關策進)을 아주 굉장히 위대한 책이라고 찬양하였지만 이 분도 자기가 증오(證俉)한 것에 관해서 “대오십팔번(大悟十八番)하니 소오부지수(小悟不知數)라” 큰 깨달음은 18번이나 있고 작은 깨달음은 수없이 많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것이 진짜 깨달음인가? 우리가 회의를 갖겠지요.

따라서, 공부하는 우리 출가사문들은 특히 수증(修證)문제, 어떻게 닦고 증()할 것인가에 있어서, 문득 부처와 더불어서 둘이 아닌 자리를 깨달았다 하더라도 무시습기(無始習氣)라, 과거 숙세 무시 이래로, 무시 무명으로부터 오염된 우리 본능을 꼭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이렇게 나이가 벌써 황혼입니다마는 그 무시(無始) 번뇌가 얼마나 깊은가를 그야말로 참 뼈저리게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인간의 욕심 뿌리는 얼마나 깊고 진심(嗔心) 뿌리는 얼마나 지독한 것인가 말입니다. 남들이 저 같은 사람을 칭찬을 할 때는 속으로 굉장히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과연 저한테 욕심 뿌리가 다 가셨는가? 또는 진심(嗔心)의 뿌리는 다 뽑혔는가? 이렇게 반성할 때는 분명히 다 못 여읜 줄을 통감하게 됩니다.

욕심 뿌리가 다 나가고 진심(嗔心)뿌리가 다하고 치심(痴心)뿌리가 다했을 때는 그냥 즉시에 바로 무량공덕을 갖추어서 분명히 삼명육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불경을 보면 다 그렇습니다.

   

무시습기가 난졸돈제(難卒頓除)라, 졸지에 문득 제거하기가 쉽지가 않다는 말입니다.

어록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견도여파석(見道如破石)이요” 우리가 진리의 이치를 깨닫는 것은 돌을 깨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마치 돌을 깰 때는 순간에 파싹 깨지듯이 견도할 때는 문득 활연대오(豁然大悟)해서 훤히 깨달아 버리지만 “수도여우사(修道如藕絲)라” 우리가 연뿌리를 딱 분지르면 연뿌리라는 것이 실이 있어서 그냥 안 분질러집니다. 끈끈하니 실이 나옵니다. 그와 똑같이 수도(修道)할 때는 쉽지가 않습니다. 수도도 돌 깨듯이 되는 것이 아니라 습기를 녹일 때는 오랫동안 두고두고 녹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더구나, 선방에서 오래 공부 정진한 구참 스님들은 제가 느끼고 있는 그 사무친 것을 분명히 느낄 것입니다. 이놈의 욕심이 뿌리가 얼마나 긴가 말입니다. 공부를 좀 했다 하더라도 기분이 사나울 때는 그냥 또 진심(瞋心)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삐죽이 나오게 됩니다.

   

습기, 이것은 졸지에 바로 제거할 수 없기 때문에 의오이수(依悟而修)라, 깨달음에 의지해서 닦는다는 말입니다. 깨달은 그 자리에서 분별 시비를 떠나서 닦는 무념수(無念修)입니다. 본래는 석가와 나와 둘이 있는 것도 아닌 것이고, 달마와 나와 다른 것도 아닌 것이고, 석가가 높고 내가 낮은 것도 아닌 것이고, 본래 분상에서는 둘이 없는 자리를 느끼고 닦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무염오(無染汚)수행이라 합니다. 무념수와 무염오수행은 같은 뜻입니다.

깨달음에 의지해서 닦으면 점훈공성(漸熏功成)이라, 점차로 훈수(熏修)해서 공덕이 성취가 된다는 말입니다.

   

훈습(熏習)은 번뇌가 우리 잠재의식에 가라앉는 것이고 훈수(勳修)는 우리가 부처님의 지혜로 해서 닦아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구분이 있습니다.

이렇게 훈수하면, 깨달은 그 자리를 안 놓치고서 닦아 나갈 때는 공덕이 성취가 되어서 장양성태(長養聖胎)라, 성자의 태를 오랫동안 길러 나간다는 말입니다. 성인 자리에서는 자타, 시비, 구분이 다 없는 자리라고 우리가 분명히 느껴버리는 그런 성태(聖胎)를 두고두고 오랫동안 닦아 나가는 것 입니다. 장양성태는 우리가 공부하는 분상에서 지킬 중요한 성구(聖句)입니다. 사량(思量) 분별로 닦는 것이 아니라 무념수(無念修)로 닦는 수행을 성태장양이라 합니다.

이렇게 닦아나갈 때는 구구성성(久久成聖)이라, 두고두고 일구월심(日久月深)으로 닦아 나가서 비로소 참다운 구경지(究竟地)인 성인(聖人)의 지위가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성자(聖者)와 범부의 한계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문득 깨닫는 그 자리부터서 성자라고 합니다. 왜 그런고 하면 진여불성 자리를 현관(現觀)이라, 바로 현전에 증명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그때는 벌써 성자입니다. 그러나 불지(佛地)를 성취한 성자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습기 때문에 두고두고 일구월심으로 닦아야 참다운 구경각(究竟覺)을 성취하기 때문에 고운점수(故云漸修)라, 고로 점차로 닦는다고 한다는 보조 국사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 도리는 화엄경에서 말씀한 도리하고도 똑같고 또는 달마 때부터서 6조 혜능까지의 말씀하고도 틀림이 없습니다.

다만 돈오돈수란 말도 단경에 있기 때문에 “돈오돈수하고 돈오점수는 근본적인 차이다” 이렇게 생각할는지 모르겠지만 무염오수행(無染汚修行) 도리를 분명히 느낀다면 하등의 논쟁거리가 될만한 차별은 없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뒤에 또 들겠습니다.